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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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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세 번째 터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제목은 제가 출연했던 EBS 세계테마기행의 제목에서 빌려와 [터키, 숨겨진 옛 도시를 걷다]로 잡았습니다. 2월과 3월에 걸쳐서 다녀온 이번 여행은 길고도 깊었습니다. 단순히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현지인 속으로 들어가 같이 웃고 떠들고 어울리는 여행객으로서 귀한 시간을보냈습니다. 연재하는 동안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고도가 조금씩 낮아진다. 열두 시간의 긴 비행 끝에 덤으로 얹은 두 시간의 추가비행.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창을 가렸던 블라인드를 올리자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이 앞다퉈 쏟아져 들어온다. 가라앉아있던 기내 공기가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언뜻 넘겨다본 창밖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먼 곳까지 왔는지 실감나기 시작한다. 이곳은 터키 동부의 고원지대. 산도 들도, 아직은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까지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단색(單色)으로도 이렇게 장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구나. 동부 아나톨리아의 특징답게 산들이 끝없이 달려 나간다. 해발 5,000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산들이 저마다 우쭐거리며 키를 재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부터 동승한 옆자리 청년들의 눈동자에 불안과 흥분이 짙게 채색된다. 이들은 무슨 일로 이 궁벽한 곳까지 왔을까. 오랜 비행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잠시 등받이에 기댄다.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큰소리치는 나도,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면 여전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늙의 개의 혓바닥'처럼 늘어진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워 담배도 안 피우면서 흡연실을 들락거리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세 번째 터키여행 역시 당혹스러울 만큼 느닷없이 단초를 열었다. 2월 하순 목요일 오후, 나의 터키 여행기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와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를 낸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다. EBS 다큐멘터리 ‘세계테마기행’ 제작팀에서 내 전화번를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자마다 터키관광청 한국홍보대행사에서도 전화가 왔다. EBS에서 터키 쪽을 잘 아는 여행작가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나를 추천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로서의 이호준이 아닌 여행작가로서의 이호준을 동시에 찾은 것이었다. 이게 웬 느닷없는 사태람.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곧 이어 제작사의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음 주 목요일 출발하는 세계테마기행 촬영에 맞출 수 있겠느냐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다. 일주일도 안 남은 기간 동안 대체 뭘 준비할 수 있다는 건지. 아무리 여행작가의 자격으로 떠난다지만 난 여전히 현역 기자이고 직장인인데. 휴가를 내는 것도 한도가 있고….

 

대답을 미루고 고민에 빠졌다. 그즈음 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날마다 풍랑 거센 강을 건너 듯 위태로웠다. 밤이면 깊은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가나 이 땅에서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다가온 탈출 제안이라니. 이것 역시 누군가가 준비한 것일까? 격렬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OK”였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리라는 또 다른 나의 반발을 꾹꾹 씹어 삼키며 터키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올 내내 나눠 써야할 휴가를 희생하고라도 살고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사실 세계테마기행이 욕심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여행작가들에게는 꿈이라고 할 수 있는 로드다큐 . 나 역시 영상카메라와 함께 길을 떠나는 소망을 품어 온지가 오래였으니. 또 하나, 어느 정도는 내 입맛대로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조건도 선택을 부추겼다. 아나톨리아 동부, 그리고 흑해. 쿠르드인들이 사는 그곳은 늘 가보고 싶은 여행지의 앞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미끼로 입천장을 파고들어간 미늘을 도저히 빼낼 방법이 없었다. 대답의 대가는 혹독했다. 여행 준비는 뒷전이고 내가 없는 동안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하고 때워놓는데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국을 떠났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반. 설산의 연속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계속 빗소리를 들었다. 종내는 수첩을 꺼내 이렇게 메모했다.

 

열두 시간 넘게 갇혀 있어야 하는 비행기 안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이코노미 석 ‘경제적인’ 자리에서, 가끔은 스튜어디스와 다리를 스치며 두 번의 식사를 하고 100번쯤 잠이 들고 101번쯤 잠에서 깨는 동안 내내 빗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 비행기는 종이처럼 얇은 특수금속으로 동체를 만들었을지도 몰라. 터무니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어릴 적 함석집 지붕 아래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기분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몸이 굳어갈수록 잠은 아련하고 얕았다. 해남 미황사던가, 아니면 강진 무위사나 별내의 흥국사일지도 몰라. 하필 그곳을 찾아간 날 비가 내렸고, 쪽마루에 엉덩이를 걸친 채 아주 오랫동안 비를 그었다. 얼마나 쓸쓸하고 얼마나 행복했던 날이었는지. 남은 생애에 그런 날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 비는 계속 동체를 때렸고, 94번째쯤 잠 속에서 쓸데없는 계산이 잠깐 끼어들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에게 무슨 비가 내리지? 영하 60~7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서 비가 내린다고? 이런 종류의 이성은 얼마나 쓸모없고 잔인한 것인지. 하는 수 없이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비행기가 별들의 무덤 근처를 지나갔는지도 몰라. 병들었거나 혹은 버림받아 목을 맨, 그렇게 세상을 버린 별들의 주검이 우수수 쏟아져 비처럼 내렸을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비행기가 승객 몰래 은하수를 건넜겠지. 작은 나룻배가 강을 건널 때처럼 비행기가 자꾸 흔들린 게 그 증거일 거야. 나는 내 생각이 신통해서 으쓱해졌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늙은 개의 혓바닥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다시 두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 문풍지처럼 흔들렸다. 깊은 상처는 도망친다고 치유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시간의 위대한 손으로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공항 라운지에서 짐을 기다리는 동안 꼬마들과 사진찍기 놀이를 했다.

비행기 트랩 위에서 내려다본 반 공항은 작고 초라하다. 하긴 화물 심사 시설이 없어서 이스탄불에서 심사 받은 뒤 다시 부쳐야했을 정도니. 그래도 명색이 주도(州都)인데, 변두리의 설움이 활주로에도 까맣게 깔려 있다. 청년들 사이에 묻혀 대합실로 들어선다. 예상했던 만큼 춥지는 않다. 이런 경우에 ‘비교적’이란 단어가 적절한 역할을 한다. 서울이 엄청 추웠기 때문에 얻는 부수적 효과인 셈이다. 매스컴마다 체감온도가 영하 21도라며 하늘이라도 얼어붙을 듯 떠드는 걸 보고 출발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이 터키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대체 옷을 어떻게 준비해야 한담. 명색이 TV에 나오는 몰골인데 추워서 덜덜 떨거나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계속 땀이나 흘리며 다닐 수는 없는 법. 터키의 겨울은, 그리고 동부지역 여행은 처음이기 때문에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이스탄불에 사는 지인에게 SOS를 쳐봤지만 “한국 날씨와 비슷해요”가 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비슷하다니. 그 정도 가지고 어떻게 판단하라는 거야. 그 친구 역시 동부는 안 가본 게 틀림없었다. 터키 날씨가 얼마나 들쭉날쭉 하느냐 하면 지중해 쪽은 겨울에도 어지간해서 영상 10도 이하로 안 내려간다. 하지만 동부 산악지역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게 예사다. 옷 보따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여자 아이가 떠나니 이번엔 남자 아이가 카메라 앞에 섰다.

공항 라운지는 우리네 시골 장날 버스정류장의 풍경을 빼다 박았다. 사람과 소음이 마구 뒤섞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처음 서울역에 내렸던 날처럼 두리번거리다 낯선 동양인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장빌립 선생. 인파 속에서도 단번에 사람을 찾아내는 혜안이라니. 하긴 동양인은 PD와 카메라 감독, 그리고 내가 전부였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장 선생은 몇 안 되는 반 교민 중 하나다. 이번 촬영 내내 동행하며 코디(coordination, 현지 촬영을 위해 가이드, 통역, 조사 등을 맡은 사람) 역할을 해줄 분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코디의 역할은 지대하다. 장 선생과 인사를 하자마자 일단 한 수 접어드리고 만다. 이번 제작팀 중에 내가 나이로 좌장인 줄 알았더니 이분이야말로 나보다 한참 연배다. 동방예의지국에서는 나이가 벼슬 아니던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배회하고 있다.

세상에 갓 나온 병아리들처럼 장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 라운지를 벗어난다. PD나 촬영감독은 터키가 처음이다. 자기 분야에서는 베테랑이라지만 초행길은 누구나 어리바리하기 마련. 공항을 나서자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들이 도로까지 가득 메웠다.

“대체 이 친구들 정체가 뭡니까? 저를 환영한다고 나온 건 아닐 테고….”

장 선생에 대한 첫 질문이 청년들의 정체를 묻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까 비행기에서부터 입을 맴돌았던 질문이기도 하다.

“군대 가는 친구들입니다. 오늘이 입영하는 날이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 근처에 훈련소가 있다는 것이고, 이 친구들은 입영을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거구나. 느닷없이 마음이 짠해진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약간의 흥분…. 입영을 앞둔 청년들 특유의 기운이 그들 주변에 흐른다.

 

입영장정들.

반은 이라크, 이란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즉, 잠재적 적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최전방인 셈이다. 그뿐이랴. 주로 쿠르드족이 살고 있으며 특히 과격단체인 PKK(쿠르드 노동자당)가 활동하는 지역이라 터키 정부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입영장병으로도 달가운 이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스탄불이나 이즈미르, 앙카라 같은 대도시를 두고 멀고 먼 최전방으로 입영해야 하니.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라, 이곳 청년들도 입영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환호하거나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한다. 터키군제에 대해서는 터키기행 두 번째 시리즈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에서 상세히 밝힌 적이 있는데 좀 묘한 데가 있다. 일반 병사들은 복무기간은 15개월이다. 헌데 대학졸업자는 6개월이면 땡! 이다. 못 배운 것도 서러운데….

 

민둥산과 그 위를 덮은 눈.

이들을 보고 제작팀이 그냥 지나갈 턱이 없다. 졸지에 첫 촬영 대상이 입영장정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카메라는 내 전신을 훑고 나는 쫓기듯 입영장정 틈으로 섞여 들어간다.

“오늘 입영하는 심정이 어때요?”(뭐가 어떻겠어. 물어보는 내가 한심한 거지.)

이 동네에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나와 있나보다.

“다른 나라에서는 돈을 위해 군대를 가지만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대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어이구! 장하다. 하지만 너무 국민교육헌장 같잖아. 나도 그렇지.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한 것일까. 잠시 뒤 차 한 대가 일행 앞에 선다. 촬영기간 내내 타고 다녀야 할 차다. 유럽에서 만든 차이긴 하지만 우리로 치면 경차를 간신히 벗어난 수준. 운전석이 열리더니 약간 까무잡잡한 청년이 내린다. 잘 생겼다. 이름은 베이셀(Veysel).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친구다. 이제 출발이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