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11. 6. 13. 08:31 이야기가 있는 사진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건 제가 큰 아이를 낳았을 무렵이었습니다.
왔던 곳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듯, 당신은 조금씩 퇴행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어느 땐 마치 아이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늘 자장가처럼 들리던,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도 듣기 어려워졌지요.
그런데, 잠깐이나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 아이, 당신의 둘 째 손자가 낳은, 증손자를 볼 때만큼은 반짝이는 눈동자와 한없이 포근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입가에는 아카시아 꽃처럼 환한 웃음이 걸렸습니다.
치매까지도 뒷걸음질 치게 하는 위대한 존재가, 아이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제 아이들이 성장한 뒤
아이라는 존재는 제게 늘 멀리 있었습니다.
집안에 아이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또 제가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습니다.
친척집 아이들이 오면 머리나 한번 쓰다듬어 주는 걸로 인사치레를 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눈 안으로 아이들이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이 광화문에 있는 덕분에 가끔 청계천을 걷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병아리 같은 아이들은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짝꿍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걷는 아이,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한 눈 파는 아이, 저 혼자 마냥 달음질치는 아이.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합니다.
하나하나를 가슴에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예쁩니다.
!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맙니다.
청계천 뿐 아니라, 길을 걷다 마주치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자꾸 눈에 밟혀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 일쑤입니다.
손자의 손을 잡고 가는 초로의 사내에게는 은근히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걸까요?
혹시 제게만 나타나는 이상현상 일까요?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치매 속에서도,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할머니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세상 한 살이 마치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면, 새로 이 세상에 온 존재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지는 게 아닐까요.
순정(純正)의 날들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일지도 모르고요.
무언가 준비해야 할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삶을 좀 더 소중하게 가꾸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선물한 때를 벗기고, 언젠가 잃어버렸던 순수를 찾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써봐야겠습니다.
소풍 끝나는 날, 아이처럼 맑은 미소 한 가닥 남기고 떠날 수 있도록.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