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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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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5. 19:47 사라져가는 것들

 

할머니는 뒷산을 넘어온 땅거미가 마당을 서성거릴 무렵이면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밥을 지으려 불을 피우는 걸 뭐랄 사람은 없겠지만, 땟거리가 떨어져 빈 속에 물이나 채우고 잠들어야 하는 날에도 건너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솥에 부은 물이 와글거리며 끓어오를 때까지, 아궁이에 땔감을 밀어 넣는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 당신의 표정은 처자식을 베고 황산벌로 떠나는 계백처럼 경건했습니다.
겨울에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따로 온기가 필요 없는 계절에도 불을 지피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선산마저 넘어간 뒤라, 남의 산에 가서 도둑나무를 해 와야 하는 어린 손자에게는 속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으면 허리가 아파서라거나 방이 눅눅해서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는 했지만, 진실과 먼 대답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눅눅한 계절도 아니었거니와 방구들이 뜨겁다고 함부로 눕는 법이 없는 할머니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을 지피는 걸로 그날의 의식이 끝나는 건 아니었습니다.
바깥마당 감나무 아래 앉아 굴뚝마다 연기를 내뿜는 양지뜸, 아니 그 보다 먼 길 거북재에 시선을 얹는 게 부엌에서 나온 당신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몸피가 어둠속으로 조금씩 녹아 들어가 결국 어둠과 하나가 될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그
이상행동을 이해하게 된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소년 적에 집을 떠난 아들, 즉 제 삼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들이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고갯마루에 섰을 때, 자신의 집 굴뚝에서 연기라도 나야 한 달음에 달려올 거라 믿었던 거지요.
그래서 하루라도 불 지피는 일을 거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디를 떠돌지 모르는 아들을 부르기 위해 굴뚝의 연기로 신호를 보냈던 겁니다.
굴뚝은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놀던 아이들도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논둑길을 달렸습니다.
굴뚝을 통해 올라오는 연기는 아이들의 가슴에 깊은 화인(火印)으로 찍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새겨진 굴뚝의 추억은 아이들이 자라 객지로 나간 뒤에도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로 펄럭이게 됩니다.
어느 저녁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어귀에 섰을 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에 들어오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느닷없는 안도감에 휩싸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궁이에 묻어둔 감자 익는 냄새라도 맡은 듯, 괜히 목이 메고 눈물마저 찔끔거리던 그 기억은 죽음이나 맞아야 지울 수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굴뚝은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집 외곽에 설치하는 구조물입니다.
보통은 뒤란의 추녀 근처에 내기 마련이었습니다.
아궁이, 방고래, 구들장 등과 함께, 온돌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전통가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요.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연기와 화기(火氣)가 방고래를 타고 가면서 구들장을 데운 뒤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는 구조입니다.
굴뚝의 모양이 가지각색이었듯이 재료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둥근 토관(土管)을 그대로 세우거나 흙과 돌을 섞어, 혹은 벽돌을 층층이 쌓아올렸습니다.
나무나 양철, PVC관이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굴뚝은 난방이나 밥을 짓는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연기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면 불을 제대로 피울 수가 없고, 그렇다고 너무 잘 빨아들이면 온기까지 한꺼번에 내보내게 돼 적절한 수준으로 필요했습니다.
굴뚝의 모양이나 높이도 기후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함경도나 강원도 북부지역 같은 추운 곳에서는 굴뚝을 비교적 높이 쌓았는데, 연기를 천천히 배출시켜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비교적 낮게 세웠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보면 연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거나 역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구들장이 무너지거나 그을음으로 굴뚝이 막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기압과 바람 탓이었습니다.
굴뚝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심술을 부리면 불은 자꾸 꺼지고 연기가 들이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는 했지요.
굴뚝에 바람 들었나하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왜 우느냐는 뜻인데, 굴뚝에 바람이 들면 연기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는 걸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서글펐던 삶이 투영된 속담도 있습니다.
바로 굴뚝 보고 절한다는 말인데,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인사는 할 수 없고 하는 수 없이 굴뚝을 보고 절을 한 뒤 떠난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그 집의 먹고 사는 상태를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은 그 집이 그 날의 끼니를 해결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떠돌이나 거지들은 남의 집 굴뚝의 온기에 기대어 잠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닥친 추위에 저승길로 떠나는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것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죽음과 가까이 있었던 게 바로 굴뚝이기도 했던 셈이지요.

도시에도 아파트가 점령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굴뚝이 있었습니다.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뚫어~”를 외치던 굴뚝청소부란 직업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굴뚝과 종말을 함께 했지요.
소외되고 억눌린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난장이와 대비되는 거대한 굴뚝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에 올라가 고단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굴뚝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시대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현대화라는 이름의 식성 좋은 괴물은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굴뚝들을 삼켜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 집집마다 내뿜던 연기도 사라졌습니다.
굴뚝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은 굴뚝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을 통해서 오고간다는 얘기도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됐습니다.
놀던 아이들이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어머니에게 달려가던, 그 정감 넘치는 풍경은 박제된 지 오랩니다.
감나무 아래 앉아 저 멀리 거북재로 시선을 던지던 할머니 역시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으로만 남았습니다.

삼촌은 어찌 됐냐고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