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23. 18:29
길섶에서
연말이 되면서 각종 모임이 잦아진다. 그 중 가장 반가운 건 역시 초등학교 동기모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흰머리와 처진 어깨에 이고 지고 모이지만, 마음은 냇가에서 물장구를 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갈수록 줄어 이젠 많이 모여야 스무명 안팎이다. 여름에는 고향으로 가고, 겨울에는 시골 친구들이 서울로 온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소풍가듯 모여 기차를 타고 온다. 그들에게는 고향 뒷산의 솔바람과 흙냄새와 새소리가 묻어서 온다. 마디마다 옹이가 박힌 손을 잡으면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가슴속에서 걸어나온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농사로 시작된다. 올 수확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옆자리의 친구는 씁쓸한 웃음부터 베어문다.“배추 농사는 망했어. 한포기에 100원씩이라는데, 그나마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갈아엎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배추를 갈아엎을 때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친구는 의연하다.“걱정 마라. 굶어죽기야 하겠냐. 내년에 제대로 하면 되지.” 그 와중에도 ‘내년의 희망’을 얘기하는 친구의 잔에 술이나 채울 뿐이다.
200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