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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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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12. 19:05 길섶에서
같은 은행나무인데 왜 저건 파랗고 그 옆의 것은 노랗지?” 창밖을 내다보던 동료의 말을 듣다 보니 평소 무심하게 넘기던 풍경이 새삼 낯설다. 이즈음 도심 속 은행나무 잎들은 저마다 다르다. 어느 것은 샛노랗게 물들었고, 어느 것은 여전히 푸르다.

단풍은 가을에 물과 영양분의 공급이 둔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층’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이 떨켜층이 영양분의 이동을 막아 엽록소의 생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잎에 남아 있던 엽록소는 햇볕에 파괴되고, 대신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던 카로틴 같은 색소가 드러나면서 붉거나 노란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네 상식으로 보면 물이나 기온, 햇볕, 공해 등 환경이 같은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풍도 같은 색깔로 드는 게 맞을 듯하다. 그런데도 제각각인 건 무엇 때문일까. 같은 색깔이면 훨씬 보기 좋을 텐데.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런 생각 자체가 괜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뭐든지 같아야 보기 좋다는 잣대야말로 인간의 억지가 아닐지. 진정한 평등과 조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 않았나.  하물며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이야….                                                                            
2004년 11월8일

posted by sagang
2007. 4. 9. 18:58 사라져가는 것들

한 가족이 세워놓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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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난 뒤, 뒤란 우물 곁 장독대에 놓여진 독들은 더욱 빛이 났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장독대에 가서 살았다. 이른 아침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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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을 머리에 쓰고 밭으로 나가기 전에도, 하루종일 뙤약볕에 시달리고 해거름에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장독대를 먼저 찾았다. 그리고는 티베트 사람들이 마니차(法輪-불경이 새겨진 불구. 안에 경문이 들어 있는데 마니차가 한 번 돌아갈 때마다 경을 한 번 읽은 것이라고 한다)를 돌리듯 독들을 정성스레 닦았다.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 경건해 보여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징징거리며 달려들기 힘들었다. 독들은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한숨이 깊고 길어질수록 반짝거리며 빛났다. 지금도 시골마을을 지나다 장독대를 보면 거기 어머니가 서 있는 듯하여, 눈을 자꾸 비비고는 한다.

#2 그런 노래가 있었다.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이 노래가 나오기 전이지만, 태자리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날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질구레한 세간을 실은 손바닥만한 트럭에 어머니가 타고 먼저 떠난 뒤 할머니와 나, 동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도 그 날은 아무 말 없이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따라 내쳐 걷기만 했다. 우리 가족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명원네 대모가 항아리를 하나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도 대모의 머리에도 선택받지 못한 독과 항아리들은 버림을 받았다. 대모가 머리에 인 항아리는 할머니, 어머니가 아끼던 것들 중 하나였다. 쏟아진 햇살은 항아리 위에서 연신 자반뒤집기를 했다. 나는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다. 우리 가족이 남기고 떠난 장독 뒤에 옆집 아이 순이가 숨어서 보고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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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아리가 닳도록 닦던 어머니나, 항아리를 이고 먼길을 걸어간 어른들 심정의 한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내가 깨달은 장독의 의미는, 한 집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그 구성원들이 세워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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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었다. 비록 경제적 곤궁과 뺨을 할퀴어대는 세월의 삭풍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지라도, 유리왕자의 '부러진 단검'처럼, 품고 가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장독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회색 빛 도시에서 장독대를 가진 집도 별로 없거니와, 길 떠난 가장의 안전을 기원하며 장독대를 닦는 아낙 역시 없다. 요즘의 며느리들에게 장독대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이다. 김치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다.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된장과 고추장은 세월이 가도 그 환한 빛을 잃지 않는다. 양조간장은 언제 먹어도 입에 붙을 듯 달다. 그럴 뿐이다. 새삼 슬퍼할 일은 아니다. 세월에 쫓기어 꼬리를 말고 사라진 게 어디 장독대뿐이랴. 하지만 난 매일 궁금하다. 우리가 아울러 잃어버린 정과 사랑은 지금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까.

posted by sagang
2007. 4. 9. 18:57 길섶에서
며칠 만에 전화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개어 놓은 이불을 펴듯 호소부터 풀어 놓는다. “갈수록 갑갑해 죽겠다. 어디 바람 한번 쐴 수 있나.전에 살던 집이 새록새록 그리워….”모시고 사는 형이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어머니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아파트 생활이 처음이다.아파트란 게 젊은 사람들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지만,노인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다.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역시 입을 쩍 벌린 짐승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만큼 내키지 않을 것이다.

“남세스러우니 너만 알고 있어라.엊그제는 하도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겠다고 나갔다가 들어오려고 보니까 문이 열려야지….” 요즘 짓는 아파트는 대부분 1층 입구부터 원천봉쇄돼 있다.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콧방귀도 안 뀐다.첨단 문화에는 코흘리개에조차도 못 따라가는 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셈이다.

“비밀번호인가 뭔가 아무리 눌러도 꼼짝 안 하니.날은 추운데 둘러봐도 사람은 없지,왜 뜬금없이 먼저 간 네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나는지….”  이 시대에 진정한 효도는 무엇일까. 마음이 무거워지는 아침이다.
2004년 2월9일

posted by sagang
2007. 4. 5. 19:12 사라져가는 것들

햇살마저 사랑에 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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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의 첫 구절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읊조리다보면, 눈물 한방을 찔끔 솟고 육신을 벗어난 마음은 어느새 둥실 떠올라 고향으로 내닫는다. 어쩌면 이 비정한 회색도시에서 오늘도 견디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나마 가슴에 지닌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괜히 간지럽고 기쁘고 슬프고 조금은 어지럽고… 조금은 은밀함까지 내포한…. 돌담은 그런 복합적 서정을 품고 있다.

마을마다 어지간하면 앞자락에 내 하나씩을 끼고 있었다. 거기서 건져 올린 아이들 머리 만한 호박돌이 돌담을 쌓는 재료였다. 하긴 산에서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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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내려온 막돌이나 밭에서 캐낸 잡석인들 돌담의 재료로서 모자람이 있으랴. 시골마을 대부분의 집들은 그만그만한 돌담으로 네 집 내 집을 구분했다. 한 집의 담을 따라서 가면 또 다른 집의 돌담이 이어지고 그렇게 어깨를 겯고 달리며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 여린 백성들이 사는 동리의 돌담은 솟을대문 우뚝한 대갓집의 담처럼 배타적이지 않았다. 집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라기보다는 그저 최소한의 영역을 구분하는 선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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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집 사이에 쌓은 돌담은 그리 높지 않아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곳이었다. 아낙네들은 담을 사이에 두고 낭자한 수다를 아끼지 않았고 쑥 넣고 버무리라도 찐 날이면 식을세라 순자야! 철수야! 불러서 넘겨주고 받고는 했다. 겨울 한낮,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돌담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햇살은 돌담을 사랑했다. 돌담 앞에 머물며 고운 손길로 오래 애무했다. 겨울바람도 돌담 앞에서는 칼날을 거두고 얌전해졌다. 아이들은 그 햇살 아래서 딱지도 치고 구슬치기도 하고 연도 날렸다. 어른들 몰래 킬킬거리며 담배도 한 모금씩 빨아보고 저녁의 닭서리를 모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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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뿐이 아니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양지바른 돌담은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터였다. 콧궁기 벌름거리며 곰방대 베어 물면 연기 한 줄기 푸른 꼬리를 남기며 하늘로 올랐다. "내 소싯적에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만주벌판을 달리기도 하고 종로 뒷골목의 주먹패가 되기도 했다. 가끔은 막걸리 내기 윷놀이 한판에 동네가 떠내려가라 흥에 겹기도 했다. 그런 돌담이 어느 순간부터 시멘트 벽돌담으로 바뀌고, 그 시점에 맞춰서 농촌에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담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골목에서 아이들의 힘찬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돌담이 사라진 지금 영랑의 햇발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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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2007. 3. 29. 14:51 길섶에서
한겨울의 칼날을 미처 감추지 못한 바람 한줄기가 할퀴고 지나면서 엉성하게 둘러친 포장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하지만 포장 안쪽의 네 사람은 바람쯤이야 아랑곳없다는 듯 여전히 따뜻한 눈길을 나눈다.종로 2가 버스정류장,그 곳에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노점상 가족이 있다.

사내는 쉴 틈 없이 빵틀에 반죽을 붓고 다 익은 빵을 옮겨 담는다.여자의 눈길은 자주 남자의 얼굴에 머문다.그동안에도 익숙한 손길로 꼬치를 끼우고 떡볶이를 뒤집는다.부부의 뒤로는 의자가 두 개 놓여있고 딱히 맡길 데가 없어서 데리고 나온 듯,아이 둘이 앉아있다.분수대의 포말처럼 흩어지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이 싱그럽다.대여섯 살 먹었음직한 큰 아이는 어린동생이 의자에서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자주 손을 내민다.

잠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던 부부의 눈길이 허공에서 만나더니 입가에 치약거품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무엇이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도 저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까.난방이 잘 된 사무실에 앉아 미소 한 가닥에 인색했던 나는,찬바람 속의 저들보다 훨씬 가난한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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