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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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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테페 발굴 현장.

아슬란테페 유적지 입구의 석상.

아슬란테페 유적을 찾아간다. 말라티아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다. 유적은 말라티아에서 6~7km 떨어진 오르두주라는 동네에 있다.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주변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러갔을 때의 그 썰렁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시간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무엇이든 지우려 든다. 아슬란테페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능처럼 보인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잔티움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BC4000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1961년부터 발굴에 착수해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은 늙어서 세상을 떠났겠지? 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발굴 속도가 늦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거대한 유적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BC3000년부터 BC1000년까지 형성된 7개 시대의 흔적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 실제로 지금까지 발굴해놓은 8m 높이의 흙벽을 보면 시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그리 멀지 않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를 짓기 좋았을 것이다. 농경이 일반화됐다는 증거도 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 흔적이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가면 쓴 사람을 그린 벽화.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쓴 남녀를 그린 벽화. 남녀는 가면을 쓰고 무엇을 했을까. 가장무도회? 수천 년 전의 가장무도회라. 물론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제의(祭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도회라고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 몰래 땡땡이 쳐서 흐드러지게 놀아보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요즘으로 보면 아버지 몰래 클럽에 놀러가는 젊은 남녀들. 상상이 과도했나? 기록 없는 오래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지.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오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여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저 골짜기 어디쯤에 논밭을 일궜겠지. 6,000년 전이 엊그제인 듯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흙 언덕에 오르니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동묘지였다는 증거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 위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 무덤도 잊혀지고 풍화되고. 수천 년 시간이 지금 내 앞에 엎드려 있다. 무덤을 지나 한참 더 걸어가니 저만치 유프라테스 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인다. 드디어 인류 문명을 낳고 또 긴 세월 보듬어 키워온 강 앞에 선 것이다. 저 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이 땅에 묻힌 인간들의 영욕을. 한낮의 태양은 그 영욕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불타고 있다. 출국 전에 누군가 챙겨준 면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준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따뜻한 응원이 등을 민다. 가자. 또 가보자.

 

공동묘지 자리. 뼈들이 드러나 있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유프라테스 강이 보인다.

라반사라이(karavan sarai), 즉 대상숙소는 말라티아의 구읍(舊邑)인 바탈가지에 있다. 바탈가지,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마누라의 바가지'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대상숙소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카라반사라이를 찾아 헤맨다. 모든 게 변한 지금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오갔다는 유일한 증거가 이 카라반사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흔적조차 지워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헌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좀 심하게 현대식이다. 최근에 수리해서 오픈했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68˟76m의 사각형 건물에는 3방향으로 회랑이 있다. 그리고 정문 맞은편에 대상들이 묵던 숙소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마치 작은 성채처럼 생겼다. 문을 닫아버리면 날개가 없는 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마당은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돌이, 양 옆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곳에 말이나 낙타를 매어두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트4세 때인 1637, 재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가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370년이 넘은 건물인데 지을 때도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내 괜한 의심증이 도진 것이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실내도 무척 화려하다. 돌로 된 굵은 기둥과 샹들리에. 어지간한 호텔은 울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놨다. 한쪽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화덕이 있다. 대상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었다.

 

카라반사라이 전경.

 

카라반사라이 실내.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크로드는 몇 가지 루트가 있었지만 동쪽의 끝, 즉 출발지가 중국의 옛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은 이스탄불이었다. 이 개념을 신라에서 로마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품이 거기까지 갔다고 해서 실크로드가 연장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바탈가지도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대상 교역이 크게 활성화 된 건 셀주크 투르크와 룸 셀주크 시대였다. 이 두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따라서 대상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대상들은 9시간에 40km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40km마다 숙소를 하나씩 세웠다. 우리의 역참처럼 관급(官給) 숙소를 만든 것이다. 숙소 이용료는 3일까지는 무료였다. 방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에서도 잤다. 10시에 문들 닫았으며 아침 7시부터 출발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품들을 보관하고 지켜주기도 했다. 중간에 도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게 되면 물건 값만큼 돈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험제도가 시행된 셈이었다. 그러니 교역이 활기를 띨 수밖에. 중국의 비단이 유럽의 귀족들을 환호하게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라반사라이 조감도.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

 

아나톨리아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품도 짭짤하게 팔려나갔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다. 질 좋은 모직물을 뜻하는 앙고라라는 말은 앙카라 지방에서 수출된 염소의 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상이 오가던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낙타에 의지해서 수천km(이 길을 직접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라고 썼다)를 오갔을 대상들. 오가는 길에 병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했겠지. 한번 다녀가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었겠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두고 또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상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다. 아마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처럼 중국에서 대상이라도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바탈가지 읍장도 나왔다. 한국말로 된 설명서를 만들어 비치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고마운 일이지. 대상들이 머물던 방은 오스만 시대의 전통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으로 변신했다. 하긴 놀려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 본다. 꼬마아이 하나가 커다란 개 그림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듯 음이 제멋대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림 속의 개가 두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놀러왔단다. 대상이 별을 꿈꾸던 곳에서 이젠 아이가 키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개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멀리서 온 손님들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빈 공간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 배치가 완료되자 수염을 기른 청년 하나가 기타 같이 생긴 걸 들고 나온다. 자세히 보니 줄이 세 개뿐이다. 터키 전통악기 바흘라마란다. 이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연하는 청년인데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단다. 터키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손님 대접을 못해서 안달이다.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무척 슬프다. 혹시 대상들이 먼 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내려오던 터키 전통가요? 노래가 끝나고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다. 1960년대 어느 맹인가수가 부른 대중가요라고 한다. 왠지 한() 같은 게 깔려 있더라니. 대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밝혀졌지만 가슴은 이미 촉촉해졌다. 앙코르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신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라는데 당신을 본 순간 세상은 끝났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된단다. 호오! 멋진데. 졸지에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세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은 국적이고 뭐고 다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 나도 신나게 춤을 춘다.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왔을까. 내 나라에서도 사양하는 춤을(솔직히 말하면 출 줄 모르는) 터키의 시골마을에서 추다니. 혹시 내 전생이 멀고 먼 길을 걷던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대상이 내 몸에 빙의되어 이렇게 춤을 추는 건 아닐까.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신나는 시간이 그렇게 계속된다. 여행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이기도 한다.

 

 

목걸이 만드는 처녀.

 

살구를 나눠주는 꼬마천사.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내게 급히 뛰어오더니 조그만 돌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뭐지? 돌 위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오늘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얼마나 급히 그렸는지 그림 위에 칠한 바니시가 덜 말랐다. 이곳에서 일하는 화가 중 하나가 작정을 하고 그린 모양이다. 에구, 이런 영광이. 그나저나 태극 문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 사람 감동시키는 데는 특별한 자질을 타고 났다니까. 또 한 번 가슴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무리 좋아도 한없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오른쪽 회랑을 통해 나오다가 눈에 확 뜨이는 아가씨와 만난다. 얼굴을 조금 숙인 채 목걸이 공예를 하고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사진 찍어도 돼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마음의 교환까지 안 될까. 사진을 보여주며 시시덕거리다 보니 주위가 허전하다. 이러다 혼자 남을라.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이번엔 한 아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손에는 허름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이거 드세요

드세요? 사세요가 아니고? 비닐봉지에는 아직 덜 익은 살구들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는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그걸 나눠주고 있다. 저게 절대 공짜는 아닐 텐데.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흔드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미술의 거리 입구.

 

내내 카메라를 따라다니던 꼬마들.

 

한 사람이 아이를 부르더니 돈을 쥐어준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친다. 어라? 파는 게 아니네? 그럼 왜?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도 왜 저걸 나눠주는지 모르겠단다. 그럼 하늘에서 살구천사가 내려온 건가? 자신이 따온 살구를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아이, 돈을 달랄까봐 손사래를 치는 어른.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나눠주는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길에서 배운다. 아이와 헤어져 바탈가지 읍내 구경을 나선다. 바탈가지(Battalgazi)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16000명의 작은 마을일뿐이다. 1837년 오스만 제국이 주민들을 현재의 말라티야로 강제 이주시켰단다. 고대 성벽 등의 잔해가 곳곳에 남았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아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 조금 걷다보니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땐 오래된 골목 특유의 궁색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바뀐다.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손을 흔든다. , ‘미술의 거리구나. 소위 벽화마을이라고 부르는 통영의 동파랑마을이나 홍제동 개미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런 골목에서는 사람도 소품이 된다. 아이들이 가을날 잠자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준다. 한 녀석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조금 있다 제 동생을 데려온다. 골목을 벗어날 때쯤에는 제 누나와 함께 서서 카메라를 키다리고 있다. 에구, 귀여운 것들.

 

허름한 담장에 걸린 시인의 사진.

미술의 거리에 그려진 그림과 조형물.

미술의 거리 전속모델들(?)

무너져가는 집의 담장에 큼지막하게 확대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시인이란다. 시인이 왜 저곳에? 존경 받기 때문이란다. 부럽다.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는 이미 부자다. 나는 사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탄의 눈으로 한없이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과 고풍스런 집들, 그 집들 사이의 골목. 그리고 담장의 그림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학원에 가야하고 컴퓨터와 놀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 예술작품의 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담장 앞에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줍게 웃으며 모델이 돼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골목의 끝에서 울루 자미를 만난다. '울루'’ '거대한'이란 뜻을 가진 터키 말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의미하는 터키어. 결국 울루 자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즉 대사원을 가리킨다. 과거 바탈가지가 큰 도시였음을 말해주듯, 모스크는 제법 규모가 크다. 1224년 셀주크 투르크 때 지었다니까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은 당시 지어진 그대로고 한쪽 면이 중앙 홀로 열린 형태의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돔을 올려다보니 청색과 보라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이 청색 염료는 이란에서만 생산되던 아주 귀한 것이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됐다고 한다.

 

울루자미의 실내.

청색과 보라색으로 치장된 돔.

울루자미 안에서 바라본 하늘.

예배시간이 아니라서인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소(聖所)에 왔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를 지켜야지. 빨간 카펫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걷다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되새김질한다. 카펫은 온 몸을 감쌀 듯 편안하고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속에 있다. 여행자에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집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는 자체가 틈을 찾는 과정 아니던가. 삶의 본질 역시 그 틈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는 벗겨져서 쓰리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난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안온을 맛보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무엇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고 소망조차 없지는 않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대신 오욕으로 가득한 업장(業障)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뚱이 주억주억 조아린다. 신이시여! 그 정도는 용서하소서.

 

posted by sagang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 입구.

박물관에 전시된 칼.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은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지금 터키가 자리 잡고 있는 땅, 아나톨리아는 굴러다니는 돌 하나까지 문화재급이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별로 크지는 않지만 아슬란테페 유적 등 다양한 유물들과 만날 수 있다. 아슬란테페 유적? 이름 자체가 낯설 테니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히타이트 제국 등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명멸한 문명들이 남긴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라고 해두자. 낯선 단어만 나오다 유프라테스 강 하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들어본 단어 아니던가. 물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유프라테스 강이 터키 땅에 있어? 에이, 금시초문인데. 이렇게 되면 또 막막해진다.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냐. 그나마 조금 덜 낯선 히타이트 문명부터 풀어가자. 이름이 낯선 사람도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하던 제국이라고 하면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히타이트 제국은 BC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다. 당시 유럽은 청동기 문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양들 한가운데에 늑대를 풀어놓은 격이었을 것이다. 파죽지세의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서부, 남쪽으로는 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했다. 그때 인류의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항아라등 도자기류.

고대 쐐기문자.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라는 벌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 역시 용감무쌍했지만 무른 청동칼로 단단한 쇠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때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평화조약이 카데시 조약이다. 히타이트는 철 생산기술을 절대 다른 나라에 알려주지 않았다. 돈을 가져와 사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값이 금값의 5, 은값의 4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렇다면 철을 기반으로 지중해가 마르고 아라랏산이 닳도록 번영을 누려야 했을 그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답은 예상 외로 좀 싱겁다. BC 1180년 이후 사라진 건 분명한데 뚜렷한 이유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바다의 민족(그리스계 도리아인으로 추정)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갑자기 그런 종족이 하늘서 떨어진 걸까? 엄청난 화재를 겪었다는 설도 있다. 또 전염병에 의한 멸망설도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전쟁을 할 때 히타이트에 사로잡힌 이집트 포로들은 천연두에 감염돼 있었다고 한다. 결국 군인들은 물론 히타이트 왕과 그의 후계자까지 천연두에 전염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멸망했다는 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생물학전의 원조가 아닐까. 아무튼 아무리 강한 자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분명히 남겼다. 주먹 세다고 너무 큰 소리 칠 건 없다. 히타이트 얘기는 이쯤 하자. 남의 땅의 문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한반도에 찍힌 공룡발자국만 하랴. 지금 나는 히타이트 제국이 융성했던 땅에 서 있고, 내가 들어서는 이 박물관에 그들의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설명이 좀 길어졌다.

 

화살촉 등 석기.

각종 장신구.

아기 옹관. 어린 아이의 뼈가 보인다.

박물관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전시물들의 이력은 만만치 않다. 유물 중에는 BC 600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옛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면역이 돼서 BC 6000년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떡 끄덕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놀랄만한 것들이다.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BC 2333년으로 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의 유물들이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뒤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은 것보다 무려 3,600년 전쯤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단군이 남긴 유물들이 있던가? 각설하고 고고학의 문외한인 내 눈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게 없다. 돌화살 같은 석기시대 유물과 그 뒤에 만들어졌을 각종 토기, 그리고 히타이트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칼들이 눈에 띈다. 아슬란테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폭풍의 신이 뱀과 벌이는 전투, 문의 사자, 타르훈자 왕의 조상, 생명의 나무, 풍요의 여신 쿠바바, 사슴사냥 등의 이름이 붙은 유물들이다. 이름들은 멋지지만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다. 1986년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유물도 많다고 한다. 역시 삽질은 반문명적이라니까. 밖으로 나오니 거리의 온도계가 34도에서 36도를 오르내린다. 서울보다는 높지만 이 정도야 뭐. 점심을 먹을 곳은 말라티아 전통가옥. 도심의 시네마 거리에 있는 이 가옥들은 1900년대에 지어진 2층집들이다. 2008년에 복원했는데 박물관, 예술의 집, 전통음식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1900년대 지어진 전통가옥.

우리로 보면 삼청각 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음식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역시 빵과 케밥이 주류. 하지만 역시 고급음식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입맛이 썩 당기지는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어디를 가도 없어서 못 먹는 내가 이번 여행엔 자꾸 입맛 타령을 하게 된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음식을 앞에 놓고 깨작깨작 속투정을 하다 보니 어제 이젯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젠 제법 친해져서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됐다.

일본 사람들 재미없어요. 심각해서 농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정말 재미있어요.”

정말? 혹시 일본 사람 만나면 한국 사람 재수 없다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이 훨씬 재미있어요. 한국 음식도 훨씬 맛있어요.”

그래? 내가 좀 재미있기는 하지.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뭐가 가장 맛있었어?”

김치찌개요. 그리고 라면.”

에이 참. 그게 뭐니? 입이 왜 그렇게 싸구려야?”

그런 대화를 나눴다. 헌데,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된다. 김치찌개와 라면이 싸구려라니. 그 맛있는 음식이? ,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 먹고 싶다. 고급음식 앞에서 김치찌개 타령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나도 배부른 여행자가 다 된 게야. 그러다 벌 받을 텐데.

 

점식식사로 나온 빵과 샐러드.

괜히 말 시켰나봐. 이젯의 김치찌개에 대한 열망은 집요했다.

그런데,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안 넣었으면 좋겠어요.”

? ? 김치찌개하고 돼지고기가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는데 그래. 그거 없으면 고무줄 없는 거시기지.”

말을 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한 셈이었다. 절에 가서 스님에게 왜 맛있는 새우젓을 안 드세요하면 기분 좋겠는가. 무슬림들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걸까.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누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슬람국가에서 왜 돼지고기를 안 먹는 줄 아세요? 옛날에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먹으려고.”

, 그건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이지. 혹시 먹는 것에서 초탈하라는 교훈 때문이면 몰라도.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근거가 분명하다. 역사 공부를 하느라 머리도 아플 테니 잠시 그 얘기를 풀어놓고 가자. 우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꾸란)을 읽어보면 돼지고기에 대해 분명히 언급해놓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먹지 말라고 써놓은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취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숭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니라. (코란 2172~173)

 

 

말라티아의 일반 가옥.

 

말라티아 거리 풍경.

코란의 저런 말씀은 왜 나온 걸까. 일반적으로 돼지고기에는 여러 가지 병원균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해롭다, 돼지의 품성이 게을러서 가까이 할 게 못된다, 고기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사막의 기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들 말 한다. 그것 말고도 돼지고기가 이슬람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막이나 평원에서는 이동 거리가 넓기 때문에 육포를 만들어서 갖고 다니며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다. 헌데, 돼지고기는 그 조건에 완전 미달이다. 지방질이 많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건조되는 대신 부패되기 쉽다. 지금이라면 통조림이라도 만들었겠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선택받지 못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먹기만 하고 나눠주지를 않다니, 고연 것. 뭐 이렇게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또 잡식성인 돼지야말로 풀만으로는 키울 수 없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곡식을 나눠주다니. 안 키우고 말지. 사막이든 산악지대든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부분 말려서 연료로 쓴다. 헌데 아무거나 먹어대는 이 돼지란 녀석의 배설물은 석 달 열흘을 말려도 냄새만 날뿐이다. 남 흉볼 것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뿐인가. 다른 곳에도 쓸모가 별로 없다. 등에 짐을 나를 수 있나? 타고 적과 싸우러 전쟁터에 나갈 수 있나? 털로 실을 만들 수 있나? 그런 돼지고기가 한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이슬람 전파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다.

 

간이 점포에서 옥수수 등을 팔고 있다.

지나가던 훌리아가 자신이 빠지면 큰 일 날세라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음식 얘기는 끝난 지 오래였다.

터키 여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무슨 색깔인 줄 아세요?”

글쎄, 나는 뭐 여자들을 유심히 안 보는 점잖은 사람이라.”

킥킥!(뻥 치시네) 빨간 색 옷을 많이 입어요.”

?”

터키 국기가 빨간색이니까요.”

이거 진담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한 애국심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가 이념싸움에 볼모로 잡혔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훌리아가 빨간 옷을 입었네? 진즉에 예쁘다고 해줄 걸.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터키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어딘 줄 아세요?”

으음~ 글쎄? 한국?”

물론 한국도 좋아하지만 미국을 가장 가깝게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가까운 곳은 유럽이지만.”

그럼,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딘데?”

그리스요.”

터키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스 사람은 터키 사람을 죽도록 싫어한다. 원래 이웃이란 건 그렇게 가깝고도 먼 것인가? 잠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떠올랐다.

 

거리의 작은 가게.

그리스 하면 대개 발칸반도 남단의 반도 국가를 떠올린다. 틀린 건 아니지만 거기서 끝나면 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는 국가 이전에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정석이다.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 그리스 문화는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발전했고,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또 하나, 그리스는 국가라는 틀 이전에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먼저다. 그들이 문화를 꽃피운 곳, 즉 그리스화가 가장 잘 이뤄진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차지한 아나톨리아 반도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숱한 국가가 명멸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아왔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의 새 주인은 오스만이 되었다. 오늘 날 앙숙이 된 결정적 계기였다.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백성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리스인들로 보면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오스만 체제하에서 간헐적으로 독립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스라는 국가가 태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8세기부터 불기시작한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이 그리스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829325일 정식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 ,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패하면서 동네북이 된 터키는 왕년에 우습게 보던 그리스에게도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거리의 온도계. 현재 온도 34도.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고,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19년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를 공격한다. 1920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을 차지했다가 후퇴하면서 도시들에 불을 질러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21년에 또 다시 침공했지만 무스타파 케말에게 패퇴한다. 더 큰 미움의 씨앗은 1923년 체결된 로잔조약이었다. 세계 1차대전 패전국 터키와 연합국간에 체결된 이 조약에서 터키는 이스탄불을 지키는 대신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내주고 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이 조약에 의해 자국 국민이 교환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살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이 터키를 떠났고 그리스 땅에 살던 40만 명이 터키로 돌아갔다. 터키인들은 지금도 바다만 바라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코앞의 섬들이 전부 그리스 영토니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를 수밖에. 증오가 얼마나 큰지 터키에서는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 TV 깨질까봐 차마 돌은 안 던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견원지간이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얼마나 '다정한' 이웃인지. 끝으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우리나라 사람들, 그중 세계 역사 좀 안다는 사람에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가 태어난 곳은 어디지요?’라고 물으면 터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혼동 때문이다. , 우리처럼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땅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헤로도투스든 사도 바울이든 소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터키 땅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터키 사람은 아니다.

 

 

posted by sagang

말라티아의 아파트와 삭막한 산.

예실류트로 가는 길. 산은 헐벗었어도 골짜기의 집들은 풍요로워 보인다.

 

730분으로 맞춰놓은 알람은 끝내 울지 못했다. 알람이 밥값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깨어버린 탓이다.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나는 늘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는데 실패하고 만다. 시간을 보니 정확하게 오전 6. 내 안의 자명종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배고플 때마다 울린다는 전설의 배꼽시계도울고 갈 지경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된다. 6시라고는 하지만 시차를 감안한다면 6시가 아니잖은가. 지금 서울은 낮 12시다. 내 몸이 기계적으로 길들여져 있다면 내가 잠에서 깼어야 할 시간은 지난 밤 12시다. 내 몸에 누가 자동인식 칩이라도 심었나? 조금 더 잤으면 좋으련만, 이미 각성을 맛본 몸은 더 이상 눕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과 터키의 시차는 7시간이다. 서머타임을 적용하는 328일부터 1030일까지는 6시간 차이가 난다. 피곤의 찌꺼기를 빨래 털 듯 털어버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은 눈치다. 억세 보이는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도 부족해서 두꺼운 커튼을 밀어부치고 있다. 커튼과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 창밖엔 뜻밖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혹시 내가 어느 혹성에 불시착한 건가? 이스탄불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떠돌았던 지중해 풍경과도 어디 하나 닮은 곳이 없다. 저 멀리로 황량한 산이 끝없이 달리고 눈앞으로는 성냥갑처럼 생긴 아파트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다. 두 풍경은 밤새 싸우고 돌아앉은 고부(姑婦)처럼 은근히 배타적이다. 한밤중에 도착하는 바람에 볼 수 없었던 말라티아와의 조우는 이렇게 낯설음으로 시작한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사막 같은 지형.

 

샤워를 하는데 뭔가 찝찝한 느낌에 거울을 보니 또 코피가 흐른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최근 며칠 간 아침마다 치르는 행사다. 처음엔 놀라고 낯설었던 것들도 익숙해지면 풍경처럼 객관이 된다. 휴지로 대충 막고 샤워를 마친다. 늦은 밤 빨아놓은 빨래는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남쪽의 고원지대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나도 움직여야 할 시간은 아직 한참 더 남았다. 뭘 하지? 몇 가지 기록을 한 뒤 비행기에서 읽다만 소설가 김훈 선배(같은 시대 신문사 밥을 먹었다는 일방적 동질감으로 일면식도 없으면서 이렇게 부른다)바다의 기별을 펴든다. 출발할 때 열 권 쯤의 후보들 중에 엄선된 책이다. 그물코처럼 촘촘한 문장들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어느 대목에서 기어이 코끝이 찡해지고 만다. 사위인 김지하가 교도소에서 나오기로 한 어느 겨울 날, 김지하의 아이를 업고 멀찍이 서서 발을 동동거리는 박경리 선생. 어둠이 깔려도 사위는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한 시대의 질곡이 삭막한 풍경화로 그려져 책 속에 걸려있다. 박경리를, 김지하를, 그의 아이를, 그 풍경을 바라봤을 기자 김훈을 생각한다. 카메라와 배낭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찬다. 돌을 던지면 쨍! 하며 깨질 것 같다. 기온은 생각보다 그리 높은 것 같지 않다. 몇 도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섭씨 30~32도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서울과 비슷하네. 괜히 쫄았나. 버스는 말라티아 시내의 남쪽에 있는 예실류트라는 곳으로 향한다.

 

공동묘지.

 

경찰차가 계속 앞서 달리길래 우연인 줄 알았더니 일행을 경호(convoy)하는 거란다. 어젯밤 공항에서는 장갑차가 대기하고 있더라니. 고백하건대, 이런 호강 여행은 그리 달갑지 않다. 아니, 도와주고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척 싫어한다. 호강에 겨우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현지 사람들과의 만남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잘못하면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내가 즐기는 뒷골목 탐험 같은 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없으니 사색의 시간도 줄어든다. 내 여행은 어느 정도 정처 없음이 전제가 돼야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난 여전히 돈과 시간에 지배당하는 아마추어 여행가일 뿐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런 여행에 장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큰 불편 없이 그 지역에 있는 명소를, 가끔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번엔 여행 전문기자나 여행작가와 동행하기 때문에 다행이다. 그들과는 기대치도 비슷하고 어느 정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는 같이 움직이되 현장에서는 최대한 내 시간을 만드는 수밖에. 말라티아 시내는 그리 넓지 않다. 금세 교외로 빠져나간다. 숙소에서 봤던 황량한 풍경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깊은 골짜기와 좁은 길이 이어진다. 어느 순간 살구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살구가 밭에 있다니, 기껏해야 마당가에 서 있는 늙은 살구나무만 보던 내게는 낯선 풍경이다. 아침햇살을 받은 열매들이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덜 익은 살구.

터키의 말라티아는 살구와 체리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살구나무가 지천이다. 여름에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은 장관이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엔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그 계절에 꼭 한번 다시 와야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동요도 생각난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던~’ 나훈아 노래는 덤으로. 말라티아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살구가 이곳에서 난다.”고 자랑한다. 세계에서 소비되는 말린 살구의 80%가 말라티아산이라고 한다. 또 하나 유명한 게 체리다. 체리가 익을 무렵엔 페스티벌도 열린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 도시를 잠깐 소개하고 가자. 말라티아는 아나톨리아 남동부 고원 내륙에 있는 말라티아주의 주도(州都). 유프라테스 강과 지류들이 만든 평야에 자리 잡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비행기로 1시간 35분쯤 걸리는데 0640, 2010분 등 매일 2회의 직항이 있다. BC 2000년경부터 히타이트 제국의 중요 도시였으며, 아시리아에 예속되기도 했다. 로마시대에는 소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고 아랍과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티무르 등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의 말라티아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다. 원래는 북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바탈가지가 도심이었다. 도시에는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사라이 외에는 특별한 게 없지만, 이 말라타야말로 아나톨리아의 숨어있는 보석이다.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대는 귀빈이 된다.

 

아침식사를 한 음식점 안뜰.

체리와 살구나무를 따라 가는 길은 다채로운 풍경이 교대로 나타난다.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지만 골짜기에는 숲이 우거지고 빨간 지붕의 집들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다. 농가들일까?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인다. 지붕마다 원통형의 구조물이 달렸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태양광 시설이란다. 하긴 일조량이 좋으니 태양광을 사용하는데 제격일 것 같다. 가는 길에 동승한 말라티아 주의 관계자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살구 자랑을 좀 해보라니까 떠돌이 약장수 못지않게 신이 오른다.

변비에 즉효예요. 아침 식사 전에 살구 하나 먹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만병통치라고 안 한 게 다행이다. 나는 변비 걱정을 해본 적 없으니 그리 실감나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살구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한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왔나? 참 먼 곳까지 와서 산다. 그에게 넌지시 속내를 드러내본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여기 와서 살고 싶은데 어때요?”

환영입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주거문제 책임지겠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감탄하면 나중에 정말 아름다운 곳에 가서는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 네 동네 아름다워서 좋겠다. 조금만 칭찬을 해주면 그저. 하지만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차가 멈춘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 조금 걸어 들어가니 숲속에 커다란 음식점이 숨듯 웅크리고 있다. 우리로 보면 전원식당인 셈이다. 아침 먹을 곳이다.

 

푸짐한 아침식사.

음식점 마당에는 살구나무와 체리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뽕나무. 여기서는 오디나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 잎이 아닌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심는다. 서울에서도 엄지손가락만한 오디가 시장에 나온 것을 보긴 했지만 이곳 오디는 정말 탐스럽다. 특이하게도 다 익으면 하얀색에 가깝다. 처음엔 병든 오디인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달콤한 게 자꾸 손이 간다. 그나저나 아침상 한번 푸짐하다. 민트 등을 주재료로 하는 각종 채소에 토마토, 오이, 고추 등이 포진하고 있다. 치즈도 참 다양하다. 두부처럼 생긴 것, 가루를 뭉쳐놓은 것, 떡가래처럼 뽑아놓은 것. 그리고 올리브. 라와시라고 부르는 빵도 아예 소쿠리로 나온다. 날마다 이렇게 먹으면 살림 거덜 나겠다. 나그네가 이렇게 잘 먹고 다니면 눕고 싶어지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살구와 체리, 그리고 오디. 내 손은 식사보다는 살구와 체리에 주로 머물러 있다. 그 중에 체리가 압권이다. 평소에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것이다. 오늘 허리띠 한번 풀어 보자. 살구는 언뜻 보기에 아직 덜 익은 것 같은데도 전혀 시지 않다. 거참 이상하기도 하지.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까지 실크로드를 걸었던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살구 먹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배고프면 저 신걸 먹는담혀를 끌끌 차고는 했는데, 이 정도면 괜한 걱정이었다.

 

살구와 체리, 그리고 오디.

내 어릴 적 먹었던 살구는 시금털털한 기억밖에 없다. 과일 축에 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그걸 주우려고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김나는 쇠똥도 빵으로 보일만큼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주인 영감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늘 고양이 걸음이었다. 바깥마당에 지천으로 떨어져 썩어가는 데도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니 살구에 대한 추억이 별로 안 좋을 수밖에. 왜 이렇게 맛이 다를까. 이게 정상이라면 과거에 먹은 건 작은 이도령 설 때 춘향이가 먹는 개살구였단 말인가. 에라, 모르겠다. 공짜라니 그냥 먹어나 보자. 평생 먹을 체리와 살구를 한꺼번에 다 먹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아가씨 하나가 유난하게 자주 들락거린다. 그러면서 일행의 얼굴을 유심히 훔쳐본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훌리아를 불러 저 아가씨가 왜 그러는지 물어보라고 했더니 내 짐작이 옳았다. 치담이라는 스물한 살 먹은 이 아가씨, 열렬한 한국 팬이란다. 한국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드라마도 자주 본다고 고백한다. 특히 좋아하는 건 대장금이란다. 요리하는 것 나오는 드라마가 좋다나. 비행기로 무려 14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한국 연예인에 열광하는 시골처녀가 있다니. 이게 정말 한류의 힘이라는 건가? 좀 미심쩍던 한류의 실체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아가씨를 불러, 나도 TV 정도는 숱하게 나왔으니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부리나케 달려가 카메라를 가져온다. 헌데 원래 눈독을 들인 건 내가 아니었나 보다. 나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용기가 생겼는지 일행 중의 젊은 친구 옷소매를 잡아끈다. 그럼 그렇지. 요즘 젊은 것들이란. 체리의 뒷맛이 느닷없이 씁쓸하다.

예실리티 읍장의 집.

 

아기까지 구경을 나왔다.

식당에서는 살구와 체리를 한보따리 싸준다. 흔한걸 걸신들린 듯 먹는 게 안쓰러웠나? 인심이 그만큼 좋은 것이겠지. 그나저나 먹는 고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예실류트 읍장이 자신의 집에 일행을 초대한단다. 7년 전에 서울에 가서 3일이나 묵었다고 자랑하는 슈남이라는 이름의 읍장은 친한파(親韓派)를 자처한다. 터키는 일본보다 한국을 닮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옳으신 말씀. 이 동네 분들은 따로 교육이 필요 없다니까. 1936년에 이 동네에서 태어난 그는 1994년 읍장이 된 이후 20년 가까이 장기집권 하고 있다. 존경 받는 지도자의 표상을 보는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초대는 무슨, 가만 놔두는 게 도와주는 건데. 투덜거려 보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읍장 집으로 가는 동안 아까 그 친구와 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부 살구나 체리농사로 먹고 살아요?”

다 그런 건 아니고요. 주로 시내에서 직장을 갖고 있으면서 이 동네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아요.”

, 베드타운이구나.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집 하나 봐놓고 갈까? 돈도 없는 주제에 시골집 욕심은 습관이 돼버렸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읍장님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뒤뜰에 풀어놓는다. 그 순간 투덜거린 게 미안해진다. 내가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던가.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삶을 들여다보고 친구가 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준 분에게 투덜거리다니.

 

잘 익은 체리.

노란 체리.

'체리아가씨' 베릴.

모두들 입에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뒤뜰엔 커다란 체리농장이 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이참에 열매 많이 달린 체리 나무 한 그루 뽑아갈까? 이거야 원.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입만 열면 체리가 알아서 척척 들어온다. 씹기만 하면 된다. 예가 바로 천국 아닌가? 배가 조금의 틈도 없이 꽉 차고 나서야 고국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그들도 함께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기한 건 검은 체리만 있는 게 아니다. 노란 체리를 아십니까? 정말 있다. 주로 잼용으로 쓴단다. 먹어보니 그 역시 맛이 있다. 읍장 집은 우리 일행 말고도 현지인들로 북적거린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 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이 많다. 벌써 방학 중이란다. 터키는 여름방학이 무척 길다. 68일부터 924일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다. 그럼 겨울방학은? 15일에서 20일 정도밖에 안 된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비교적 춥지 않기 때문이다. 베릴이라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와 친구가 됐다. 열 두어 살은 돼 보이는데 아홉 살밖에 안됐단다. 이 소녀는 아버지가 축구단 구단주다. 이 나라에서 구단주는 최고의 권력이다. 그 최고 권력의 딸 베릴은 체면도 없이 카메라를 졸졸 따라다닌다.

베릴, 여기 좀 서볼래? 아니, 이렇게 말이야.”

모델 요청을 하면 스무 번 백 번이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착한 것. 체리를 따서 입에 넣으라면 넣고 귀에 걸라면 걸고 웃으라면 웃고 멀리서 걸어오라면 군말 없이 걸어오고. 세상에 이렇게 말 잘 듣는 모델이 어디 있어.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한 동네 아가씨들.

예실류트 읍장님.

모두 나와 전송해준다.

친절한 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손님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혹시 불편한 게 없나 지켜보다가 목이마른 눈치면 물을 날라다 주고 차를 권한다. 의무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물을 마시고 컵을 어디다둘까 두리번거리면 읍장님이 저만치서 달려온다. 이 동네에서 가장 존경 받는 76세의 노인이 스스럼없이 컵을 받아간다. 우리나라 정치하는 분들 연수 좀 보냈으면 좋겠다. 조금 지나니 누가 한국 사람이고 누가 터키 사람인 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어울려서 얘기하고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고 그네도 타고. 말이 통하면 통해서 웃고 안 통하면 안 통해서 깔깔거리고. 결국 몇몇은 페이스북 주소까지 주고받는다. ! 지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디에 살든 애당초 남남이 아니었나보다. 아침 먹을 때만 해도 이런 기록은 생략하려고 했었다. 어떻게 하면 이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다녀볼까 머리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생애 최고의 특별한 기억을 놓칠 뻔 했다. 읍장 가족,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작별을 하는데 도로가 가득 찰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사진 찍자고 부르면 끊어진 진주목걸이처럼 까르르 도망치던 아이들까지 모두 달려 나와 손을 흔든다. 출발은 자꾸 지연된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살면서 이만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더 잘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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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이 아시아 땅이다.

톱카프 궁전의 제4정원으로 가는 길은 문이 따로 없다. 보석박물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느닷없이 시야가 탁 트인다. 오른 쪽으로는 마르마라 해협이 검푸른 색깔로 누워있고 앞으로는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왼쪽으로 조금 돌리면 보스포루스 해협의 들머리가 보이고 좀 더 왼쪽에는 유럽 땅인 신시가지와 골든혼이 있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바쁘게 또는 한가롭게 흘러 다닌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나는 유리 안에 갇힌 억만금짜리 보석보다 이런 풍경 앞에서 훨씬 행복하다. 이곳이야말로 톱카프 풍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술탄과 그의 가족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몰래 감춰두고 자신들만 야금야금 즐긴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었던 셈이다. 술탄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꽃밭을 가꿨다. 특히 아흐메트 3세 때는 튤립을 많이 심어서 튤립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바람을 타기 시작한 튤립은 튤립시대’(1718~1730)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열풍을 불러왔다. 튤립에 흠뻑 빠진 아흐메트 3세는 이 꽃을 즐길 수 있는 잔치를 자주 열었다. 톱카프 궁전과 정원에서는 밤낮으로 연회가 벌여졌다. 이스탄불 시내도 튤립 천지였다. 새봄의 첫 대보름에는 튤립축제가 열렸다. 술탄과 귀족들은 비단을 드리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오가며 튤립의 정취를 즐겼다.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이었을까. 게다가 전쟁도 없는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그림자 없는 빛이 어디 있던가.

 

 

제4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신나게 놀았으니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건 당연한 이치.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나무꾼처럼, 아차! 싶어 곳간 바닥을 긁어보지만 쌀 한 톨 나올 리 있나. 애먼 백성 허리만 더욱 구부러질 뿐이었다. 원성이 높아지자 참견꾼 예니체리(앞에서 다 배운 것들이다)가 가만있을 리 있나. 1730년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다. 꽃과 사랑에 빠졌던 튤립술탄야흐메트 3세는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나고 튤립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꽃이든 사람이든 적당히 사랑하고 볼 일이다. 튤립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냐고? 설마! 우리는 튤립파동(Tulip mania)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야한다. 이야기는 무대를 네덜란드로 옮기면서 터키의 튤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탄불에 와 있던 네덜란드 대사가 튤립을 가져간 게 화근이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사재기가 난무할 정도로 튤립의 인기가 치솟았다. 튤립은 단기간에 번식이 어렵기 때문에 늘 품귀였고 가격은 그만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미래 어느 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고판다고 계약하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꽃은 꽃일 뿐. 16372월을 정점으로 튤립 가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팔겠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사겠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른바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튤립 값은 X값이 됐고 파산자가 속출했다. 이 튤립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 됐다고 한다. 꽃 하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나는 지금 그런 역사적 파동을 잉태한 현장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튤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거나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나 같으면 기념으로라도 튤립을 심겠다. 아픈 역사야말로 교훈의 어머니 아니던가.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카페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파라솔 아래서 식사와 음료를 즐기고 있다. 언뜻 봐도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자가 앉을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술탄이 즐기던 비밀의 정원에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 그것만으로도 폼 좀 나겠지. 물론 부자들 얘기다. 내려가서 구경이라도 할까 하다가 조금 구차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세월을 듬뿍 머금은 바다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시간을 오르내린다. 골든혼 쪽을 바라보다보니 느닷없이 역사의 한 자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저쯤이 바로 배가 산으로 올라간 곳이겠구나. 배가 산으로 올라가다니, 느닷없이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이왕 역사의 현장에 왔으니 그 얘기를 좀 풀어놓고 가자. 그 일이 일어난 건 1453422일이었다. 그 즈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비잔티움을 함락하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헝가리 출신의 대포 제조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거대한 대포로 연일 두드려 봤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잠깐, 이 우르반이란 인물이 누구던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포를 팔러갔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자 메흐메드 2세를 찾아와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무기상들의 손에 달린 것인가.

 

가운데로 뻗어나간 바다가 보스포루스 해렵. 왼쪽 하얀 배가 진행하는 방향이 골든혼.

우르반이 만든 이 대포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고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 7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비잔티움의 군사들은 무너진 성벽을 보강했다. 시시포스 돌 굴리듯 결과 없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메흐메드 2세로서는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육지 쪽으로 돌아가자니 2, 3중 성벽이 걸리고 바닷길을 뚫자니 골든혼에 쳐놓은 쇠사슬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게 바로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 술탄의 생각이었는지 부하 중에 그런 용감무식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니까. 술탄의 군대는 어둠을 틈 타 기름이 칠해진 둥근 통나무를 바닥에 깐 다음, 72척의 배를 밀고 산을 넘었다. 병사들은 죽을 노릇이었겠지만 보기에는 장관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흔적이 모두 지워졌지만, 대략적으로 복기해보면 갈라타탑 동편의 톱하네에서 골든혼의 카슴파샤까지 배를 옮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비잔티움 병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하룻밤 사이에 적의 배들이 코앞까지 들어오다니. 그렇다고 바로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함락된 것은 아니다. 늙은 사자처럼 갈기가 부서지고 발톱은 빠졌어도, 비잔티움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나 더 지난 528일 밤, 드디어 메흐메트 2세는 16만 대군에게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새 이어진 공방전 끝에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노천카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날 밤을 새워 1200년 제국의 수도를 지킨 병사는 7,000여명에 불과했다. 1453529일 화요일. 로마의 적통을 이은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은 이렇게 마지막 숨결을 놓았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1, 마침 동로마 제국을 일으킨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말을 꺼낸 김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가자. 그도 처음부터 잘 나가던 술탄은 아니었다. 아버지 무라드 2세가 갑작스레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바람에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됐다. 하지만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느닷없이 왕을 다시 하겠다며 아들을 내쫓았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 조상들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했다.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내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왕궁으로 말을 달려 왕관을 머리에 썼다. 아버지의 조기교육으로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일찌감치 터득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술탄을 꼽으라면 대부분 쉴레이만을 들지만 나는 메흐메드 2세를 앞세운다. 이 이슬람의 술탄에게 점수를 가장 후하게 주는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도 있지만, 이교도인 기독교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와 예술이 밥 먹여주느냐는 수장이야말로 성군이 되기에는 애당초 글러먹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성소피아 성당의 유물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메흐메드 2세 덕분이란 사실에 늘 감동할 수밖에 없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메흐메드 2세의 이야기가 길어지니 슬슬 지루하겠지만, 딱 한 가지만 더하고 가자. 게다가 이건 드라큘라 얘기다. ? 느닷없이 웬 납량특집?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역사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다. 드라큘은 또는 악마라는 뜻을 가진 루마니아 말이다. 1431~1476 사이에 살았던 드라큘라의 원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다. 그는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계승자였다. 그의 이름이 드라큘라로 알려진 건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유럽 용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큘라는 (드라큘)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메흐메트 2세와 인연이 많다. 소년시절을 인질로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그는 왕위에서 추방됐다가 복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두 번째 권력을 장악한 뒤 오스만제국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자 메흐메드 2세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온다. 드라큘라는 게릴라전으로 여러 번 대군을 물리친다. 그는 1462년 동생에 의해 또 한 번 추방당했다가 1476년에 복위하지만 곧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결론적으로 드라큘라는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가 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그는 잔인한 처형 방법 때문에 많은 원성을 들었다. 특히 나무를 깎아 만든 날카롭고 긴 꼬챙이로 산 사람의 몸통을 꿰뚫는 것을 가장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 포로가 꼬챙이에 꿰어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말로 체페슈는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결국 드라큘라라는 이름과 피를 즐기던 괴벽이 합쳐져 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1897)의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은 역사 얘기가 너무 길었나? 돗자리 말 듯 상념을 둘둘 말아들고 궁전을 나온다. 관람객은 여전히 정원 곳곳을 그득 채우고 있다. 그들이 타고 온 유람선은 오늘 밤 이스탄불에서 머무나 보다.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만난 훌리아에게 궁금하던 걸 묻는다.

오늘은 저렇게 차도르 입은 사람들이 많지? 전부 터키 사람들이예요?”

아뇨. 터키 사람들은 저렇게 안 입어요. 두바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그렇구나. 저들 역시 유람선의 승객인 모양이다. 복잡한 톱카프 궁전에서 나오니 세상이 전부 한가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인연이 안 닿았던 곳이다. 톱카프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지간한 명소는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모여 있다는 점도 이스탄불 관광의 장점이다. 먼저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 있는 개인 환전소에서 돈을 바꾼다. 대도시는 유로화가 통용되지만 지방에는 터키 리라가 필요한 곳이 많다. 환전은 유로화나 달러 모두 가능한데, 한꺼번에 100달러 이상이 돼야 바꿔준다고 한다. 별 이상한 원칙이 다 있네. 환전해주는 돈의 배분도 자기들 입맛대로다. 예를 들면 50리라 두 장, 5리라 몇 장주는 대로 받아야한다. 한국에서 환전을 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리라화를 바꿀만한 곳이 거의 없다. 아무튼 실탄도 장전했으니 장 구경을 해보자.

 

그랜드 바자르 입구.

바자르 안에는 이런 골목이 65개나 있다.

 

 

바자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의미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식량을 교환하던 곳이 바자르의 원조인 셈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그랜드라는 단어답게 담과 문, 지붕을 완벽하게 갖춘 거대한 옥내(屋內)시장이다. 바자르 입구에서 고색창연한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문장 안에 창이나 도끼도 있고 저울도 보이고복잡해 보이는 게 사연이 많을 것 같다. 그 밑에는 KAPALIÇARSI라고 쓰여 있고 또 옆으로 1461이라는 숫자가 있다. 맨 아래에서 드디어 GRAND BAZAAR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원래의 바자르 건물은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워졌는데 메흐메드 2세가 1461년에 확장했다고 한다. 1461이라는 숫자가 바로 그 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1701년과 1894, 1954년 등 네 차례나 큰 불이 났지만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3700m²의 면적에 65개의 골목과 4,000개의 점포가 들어선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한지 골목 하나 삐끗 잘못 들어서면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바자르 내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 등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모두 27개의 문이 있는데 밤에 문을 잠그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다. 바자르 입구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진열된 상품도 가지각색이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펫, 가죽제품, 수공예품, 각종 그릇, 동으로 만든 찻잔, 가죽의류, 모피류, 액자에 든 그림, 로쿰이라 부르는 터키 과자에구, 숨 차라. 차라리 없는 걸 찾는 게 낫지.

 

그랜드 바자르 안의 보석가게.

그랜드 바자르에서 파는 각종 그릇들.

가장 많은 건 역시 보석가게. 온갖 귀금속이 조명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크고 작은 금팔찌들을 수백 개 진열해놓은 가게 앞에서는, 보석에 별 관심이 없는 나까지 황홀해진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자랑거리가 카펫. 카펫의 발상지는 페르시아가 아닌 터키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목민들이 이동식 천막을 칠 때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여성 동행자와 함께 보석가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한국말로 소리친다.

아주머니, 많이 싸요.”

아주머니? No! 아가씨!!”

내가 농담으로 받자 연신 아가씨? 아가씨?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이 아저씨, 결국 수정안을 내놓는다.

언니!! 많이 싸요.”

흐흐, 참말로. 웃어야겠지? 우리말이 튀어나오는 걸 거 보니 한국 사람도 많이 찾아오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랜드 바자르야말로 외국인들에겐 필수 관광코스 중 하나다. 이곳은 흥정도 가능하다. 하긴 시장에서 흥정 빼놓으면 무슨 재미. 닳고 닳은 상인들에게 관광객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겠지만, 어차피 깎을 걸 감안하고 부르는 값이니 밀당’(밀고 당긴다는 뜻을 모르는 분은 없지요?)의 재미를 즐겨볼만 하다. 시간과 노력에 따라 엄청 깎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 맛을 못 보고 말았다. 살 물건이 있어야지. 나 같은 여행자야말로 각 나라 시장의 입구마다 공적이라는 수배 전단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카메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로쿰 가게 사장님(?)

한글로 쓰여진 '착한 가게'

이런 친구가 왜 안 나타나나 했다. 터키 전통과자인 로쿰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내 카메라에 시선을 들이민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물건 팔 생각을 분실한 지 오래다.

“Oh, canon! canon! My camera is Sony. Your camera is wonderful.”

처음에는 노래의 한 대목인 줄 알았다. 어찌나 운율이 잘 맞는지. 그래, 네 카메라 소니야. 그런데 내가 언제 물어봤어? 터키 청년들은 DSLR 카메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아마 일종의 유행이 아닐까. 돈을 벌어 사고 싶은 품목 1호가 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란 상징성에서라도 그랜드 바자르는 꼭 들르고 싶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나와 궁합이 척 들어맞는 곳은 아니다. 너무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장은 말 그대로 난전이다. 시끌벅적 뒤죽박죽. 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무질서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는 곳. 터키에도 그런 시장이 많다. 서너 골목 탐색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다. 바자르 밖의 좁은 골목이 더 재미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중에 반가운 글씨를 만난다. 나자르본주나 팔찌 같은 장신구 가게 진열대에 한글로 써놓은 착한 가게’. 장삿속이긴 하겠지만 기분이 좋다. 착한 가게 맞네요. 돈 많이 버세요. 오늘 저녁엔 이스탄불을 떠나 말라티아로 간다. 돌아오는 날 반가운 해후를 위해 마음 한 자락 놓고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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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카펫수선 아저씨. “훌리아! 톱카프 궁전에 가면 예니체리 나무라고 있다거든? 관계자에게 물어봐서라도 꼭 좀 찾아줘요.”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에 훌리아에게 신신 당부했다. 그녀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훌리아와는 그새 제법 가까워져서 반은 내 개인 가이드가 돼버렸다. 역시 나는 사람 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시라. ‘여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그녀도 예니체리는 알지만 예니체리 나무는 처음 들어본단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확인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예니체리 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일단 들어가 보면 감이 잡히겠지. 톱카프 궁전 앞에는 오늘따라 이상스러울 만큼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카펫 수선하는 아저씨가 근사해 보이길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눈길 한 번 주더니 말없이 바느질만 한다. 터키 사람이라고 모두 상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그래도 특별히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땐 그냥 찍으면 된다. 몇 마디 나눠볼까 하다가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가 있길래 부리나케 쫓아간다. 현장에서는 혼자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일단 매표소를 통과할 때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톱카프 궁전 앞의 기념품 가게. 1472년 착공해서 1478년 준공. 1856년 돌마바흐체가 지어질 때까지 3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 총 면적 70만m². 이런 이력을 가진 톱카프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아마 다섯 번 쯤은 와야 제대로 봤다고 큰소리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달쯤 머물면서 이 궁전만 연구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대문에 해당하는 커다란 문만 해도 세 개, 넓은 정원만 해도 네 곳이나 된다.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체하고 말 건 당연지사. 그래도 일단은 들어가 봐야 곰을 잡든 법을 잡든 하겠지. 첫 번째 문(황제의 문)을 지나면 제1 정원이 나온다. 흔히 예니체리 정원 혹은 예니체리 마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예니체리가 뭔지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하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터키 역사서를 읽다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유난히 가슴을 헤집었을 뿐이다.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긴장할 건 없다. 다 듣고 나면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예니’는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체리’는 그 달콤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병사’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병사’가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때 만들어진 술탄 직할의 직업군인을 바로 예니체리라고 한다. 전쟁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해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정예군으로 싸웠다. 톱카프 궁전의 첫번 째 문. 예니체리의 시작과 끝은 영광보다는 슬픔의 역사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잡힌 아이들과 점령지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 소년들로 주축을 이뤘다. 전쟁터에서 졸지에 부모와 헤어진 것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 낯선 땅으로 보내진 아이들.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늘. 이렇게 이스탄불로 데려온 아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일반 가정으로 보내 투르크 말과 이슬람에 관한 일상을 배우게 했다. 그 후 재능 있는 아이들은 궁정 일을 배우게 하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훈련부대'로 보냈다. 그곳에서 환관들의 감독 아래 6년 이상 엄격한 훈련과 무기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면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부대는 몽골군과 비슷하게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됐다. 재미있는 것은 부대 용어가 주방과 관련돼 있다는 것.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으로 불렀다. 부대장은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 소대 깃발에는 커다란 솥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깃발에 그려진 솥은 큰 상징성을 갖게 된다.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솥을 뒤집어엎었다. 거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듯, 뭔가 요구하는 도구로 솥을 활용한 셈이다. 그들은 특별한 군복을 입고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다른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콧수염 외에 다른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또한 영외 거주는 물론 초기에는 결혼도 금지했다. 예니체리 정원. 예니체리는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능력도 탁월했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6세기. 숫자도 1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여기까지였다. 뭐든지 문제는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 영향력은 커지고 늘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다 보니 자꾸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됐다. 또 초기와 달리 세습체제로 바뀐 것도 권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눈을 돌린 게 바로 정치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그 괴물의 입에 통째로 머리를 넣었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점차 이익집단화 돼갔다. 그에 비례해서 전투력은 약화됐다. 싸움판에서도 펑펑 나가떨어졌다. 배는 나오고 싸움은 못하는 일종의 괴물군대가 된 것이다. 그럴수록 무도함은 하늘을 찔러 술탄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결국 17세기부터는 끄떡하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살해하거나 자신들 입맛대로 갈아치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이 바로 마흐무트 2세. 참다못한 그는 예니체리를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했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니체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탕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뻔한 결말로 갈 차례. 톱카프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해 6월 14일과 15일 예니체리 반란군은 술탄의 군대에 밀려 자신들의 막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술탄은 막사에 포격을 명령했다. 15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반란군 막사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대부분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새삼스레 교훈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시신(혹은 머리라고도 한다)을 어느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예니체리 나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나무를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떠나, 아비규환 속에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들에게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영혼 중 하나가 내게 손짓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예니체리 나무는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훌리아가 괜히 미안해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 자르는 나무’가 있대요. 물 대신 피를 먹여 키웠다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됐어요. 이젠 포기할래.” 호러물이 그리워서 예니체리 나무를 찾은 건 아니라네. 병사들이 훈련을 했을 법한 마당에는 잔디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월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이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저들 중 하나겠지. 예니체리 광장의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 이레네.

 

사람들은 그 나무들 사이를 무심히 오간다. 잔디에 앉은 연인들의 얼굴엔 행복이라고 쓰여 있다. 저들에게 그 비극의 한 자락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떤 방식이든 생명은 늘 오고가는 것을. 두 번째 문을 통과하려면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한다. 아참, 자꾸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제1정원에서 놓치지 말고 가야 할 건물이 하나 있다. 왼쪽 나무그늘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아야 이레네(Aya irene). 성소피아 성당 이전에 세워진 초창기 교회의 하나로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다.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니카의 반란’ 때 불태워져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예니체리의 무기창고로 쓰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고깔모자 기둥이 2개 우뚝 서있는 두 번째 문을 지난다. 전에는 오로지 술탄만 말을 타고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도 영화도 덧없는 것. 지금은 땀에 전 동양 사내 하나가 배낭을 메고 그 문을 지난다. 문을 나서면 바로 제2정원. 다섯 갈래의 길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붓처럼 생긴 향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제2정원에는 대형 부엌이 있다. 궁전에서 일하는 5,000명의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예니체리들은 월급과 빵을 받을 때 궁전에 왔는데 이때 모든 빵은 무게가 같아야 했다. 만약 다를 경우 빵 만드는 사람의 손목을 댕강 잘랐다고 한다. 어디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예니체리와 관련된 얘기는 왜 이리 끔찍한 게 많지?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  여기에도 ‘술탄의 여인들’이 사는 하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번엔 하렘도 꼭 돌아보고 싶었지만 역시 여의치 않다. 별도로 티켓을 끊어서 관람해야한다. 티켓이 문제가 아니라 30분마다 그룹을 지어 입장해야 한다. 그만큼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훌리아를 찾아서 물어보니 일정에 하렘 관람계획은 없다고 한다. 허탈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닐 때 가장 난감한 점이 이런 것이다. 조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포기하는 수밖에. 세 번째 문인 행복, 혹은 지복의 문을 지나 터덜터덜 제3정원으로 걸어들어간다. 오늘 관람객 정말 많다.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빽빽한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대 유람선이 들어왔단다. 바다를 낀 도시니 크루즈로 오는 관광객도 많다. 하필 그들과 톱카프 궁전에서 만난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여기가 바로 인종 전시장? 제3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오른쪽에 있는 보석박물관. 내겐 쓰린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다가 경비원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물러났던 그곳. ‘스트로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사진 좀 찍는다고 보석이 경기를 하냐?’ 어쩌고 꿍얼거린 기억이 있다. 거길 들어가기 위해 뙤약볕 아래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보석에 대한 원초적 열망일까? 아니면 남들이 서니까 얼떨결에? 보물박물관 위쪽이 바로 의상 전시실이다. 옛날에는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역대 술탄의 옷들을 전시한 곳이다. 제2정원. 톱카프 궁전의 세 번째 문. 보석박물관 앞의 긴 줄.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옷과 비슷한 터키 전통의상이 전시돼 있다는 기 록이 생각나 슬그머니 방향을 바꾼다. 고구려와 터키인의 조상 돌궐 사이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할지 알아? 마침 줄을 선 사람도 없고 한가한 편이다. 그렇다면 둘러보고 가자. 하지만 들어가서 첫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보석박물관의 ‘그’와 똑같이 생긴 경비원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온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치사해서 안 찍고 만다. 그래도 한 장 찍은 건 안 지울 거지?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나무그늘에 의지해 더위를 식힌다. 유난히 얼굴을 가린 아랍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히잡은 차라리 애교스러울 정도다. 아예 전신을 까만 통옷으로 덮은 여성들이 ‘Blackfish’처럼 정원을 유영한다. 심지어 한 여성은 까만 통가죽 옷을 입었다. 이 더운 여름에? 아주머니, 그러다 땀띠 나십니다. 평생 갇혀 살아야했던 하렘의 여인들이 오버랩 된다. 궁전에 갇혀 살든 검은 옷에 갇혀 살든 자유를 저당 잡힌 건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종교 가 어떻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헌데 좀 이상하다. 요즘 터키 여인들은 시골이나 아주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을 빼놓고는 히잡도 잘 안 쓰는데.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그나저나 그녀들이 입은 게 대체 차도른지 부르카인지 알 수 없다. 역시 책으로 배운 지식의 한계다. 무슬림 여성들의 몸을 가리는 옷이 한 가지인 줄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  고구려 벽화의 옷과 비슷하다는 투르크족의 전통 의상. 우선 여성들이 밖에 나갈 때 머리에 쓰는 가리개를 히잡이라고 한다. 스카프나 두건과 비슷한데 얼굴과 가슴까지 가리는 것도 있고 머리에만 쓰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정작 구분하기 어려운 건 머리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망토 형 통옷이다. 페르시아 말에서 온 차도르(chador)는 이란 등의 시아파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옷을 말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입는 검은 망토는 아바야(abayah)라고 부르고 아라비아반도와 베두인족 일부 여성들이 입는 옷은 부르카(burqah)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뭐가 차도르고 뭐가 부르카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또 옷의 형태까지 다른 건지 이름만 다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전에는 눈 주변에만 작은 구멍이 트여져 있거나 베일을 댔는데 요즘은 짙은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 참 아이디어다. 멋도 내고 가리겠다는 목적도 달성하고. 어떤 여성은 DSLR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자기들끼리 수다도 떤다. 그래. 다를 게 무어람. 세상도 궁금하고 멋도 부리고 싶은 똑 같은 여성이겠지.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해보니 정면에서 셔터를 누르기가 민망하다.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익명 속으로 가두는 수밖에. 일부러 역광을 안고 서서 뷰파인더 안에 그녀들을 불러낸다. 내 사진 속에서 그녀들은 검은 실루엣일 뿐이다.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일가족 중에 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불쑥 묻는다. 톱카프 궁전의 제3정원. 

이슬람 고유 의상을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성.

 

“Where are you from? Japan? Core?” Japan 다음에 China? 라고 묻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얼른 Core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그러는 너는 어디서 왔니?” “나? 제노바” 으음, 제노바. 굉장히 멀리서 왔네? 아니지? 난 지금 이스탄불에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멀리서 온 거고 이 친구는 이웃에서 온 거지. 해외를 다니다 보면 가끔 그렇게 공간 개념을 분실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그의 아내다. 그녀는 부르카인지 챠도르인지로 전신을 완전 싸매고 있다. 예의 선글라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내게 말을 건 남편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을 했고, 부인을 따라가는 아이들 셋 역시 평범한 옷차림이다. 어찌 보면 부조화의 극치다. 제노바에도 저렇게 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무슬림이 살고 있나? 아니면 아랍의 무슬림이 제노바에 가서 임시 거주 중일까. 유럽인과 아랍인은 쉽게 구분이 가능한데 이 친구는 좀 헷갈린다. 궁금한 걸 푸는 건 나중문제고 이렇게 특이한 가족을 만났는데 그냥 말 수 있나. 얼른 사진 한 장 찍어두자. 또 다른 걸 참견하려는 사내를 불러세운다. “이 사람들 몽땅 네 가족이냐?” “응. 맞아.”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No!! 절대 안돼.”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 뭐야, 장난하는 거야? 말이나 걸지 말지. 조금 전에는 실실 웃으며 간이라도 빼줄 듯하더니, 사진을 찍는다니까 그렇게 펄펄 뛰냐? 에라이! 치사한…. 헌데 아직도 저런 남자가 있구나. 이 더운 날 통옷을 입고 버티는 아내에게 애들 셋을 혼자 맡기다니. 남자는 슬리퍼 끌고 마실 나온 사람처럼 이 참견 저 참견 다하며 지나가는데 여자는 아이들에 짐까지… 구경이고 뭐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 하긴 한국에도 저렇게 간 큰 남자들이 없지는 않더라. 남들 걱정 그만 하고, 좀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봐야지. 카메라를 바투 쥐고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돌진한다. 하나, 둘 셋…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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