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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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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수레를 타고 평원을 지나가는 일가족.

지워진 도시, 하란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시원하게 뚫려 있다. 샨르우르파를 벗어나면 그 끝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들판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시퍼런 물빛을 자랑하는 수로. 풍부한 수량과 빠른 유속을 자랑한다. 이 수로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 인간의 끝없는 도전 정신에 새삼 혀를 내두른다. 이게 바로 GAP프로젝트의 결과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실핏줄처럼 이어진 수로로 보내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것이다. GAP프로젝트가 미치는 범위는 터키 땅의 10%나 된단다. 관계자들은 이스라엘 땅보다 더 크다고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지금 지나고 있는 이 하란 평원은 터키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지만 비가 많지 않아서 농사에 애로가 많았지만 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터키 제1의 곡창지대로 우뚝 섰다. 특히 이곳에서는 목화가 많이 난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파란 목화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다. 목화가 벌기 시작하면 장관일 것 같다. 버스는 당나귀 마차를 타고 밭 사이를 지나는 일가족을 지나친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선 듯 평화롭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같은 나라 사람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하란은 샨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44km쯤 떨어져 있다.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와는 접경을 이루고 있다. 계속 달리던 차가 느닷없이 좌회전을 한다. 훌리아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듯이 급하게 말한다.

지금 좌회전한 데서 10km만 더 가면 시리아 국경이 나와요.”

, 조금만 일찍 말해주지. 이정표라도 찍어놨어야 하는데.”

 

하란으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

구경이 아닌, 뭔가 기록해야한다는 목적을 가진 취재여행은 고통을 동반한다.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겨놓고 챙긴다고 챙기지만 뭔가 놓치는 것 같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늘 하는 소리지만,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시리아 국경선으로 갔을 것이다. 곡창지대를 벗어나 하란으로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황량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사막에 들어선 것 같다. 푸른색보다는 누런 황토색이 더 많아지고 먼지마저 풀풀 날린다. 조금 더 달리니 길옆으로 하란성이 나타난다. BC 4000년부터 있었던 성이라고 하니 그 역사를 헤아려본다는 게 부질없어진다. 세월 탓인지 사람 탓인지, 지금은 거의 폐허가 돼 있다. 8개의 문이 있었는데 다 무너지고 1개만 남았다. 곧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옛 도시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말이 옛 도시지 어딜 가나 쓸쓸한 풍경뿐이다. 둘러보기도 전에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그 유서 깊은 고대도시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하란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가 하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정착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방증으로 삼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란은 구약성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그의 며느리가 되는 리브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리브가의 아들인 야곱은 모두 이 하란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 이야기는 뒤에 천천히 하기로 하자. 하란 여행에서 구약성서를 빼놓으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으니까.

 

하란에 들어서면 이런 폐허들이 나타난다.

역사에서도 하란은 중요한 도시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탄니 왕국의 중심지였다. 히타이트에 패망한 뒤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뒤 바빌로니아, 파르티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알렉산도르스왕에게 점령당한다. 한때는 시리아에 흡수되기도 했고 에데사, 즉 지금의 샨르우르파에 수도를 둔 오스로에네 왕국의 주요 거점이 된다. 지금은 침묵하는 땅, 하란평원이 품은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부족할 만큼 많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 중 하나인 크라수스가 이 평원에서 최후를 마친 이야기는 듣고 가야한다. 크라수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 공화국을 주무르던 실세였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서 죽어갔을까. 따지고 보면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사업가지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부동산에 특히 능력을 보였는데, 그것으로 로마 최고의 부호가 될 정도였다. 지금 태어났으면 땅값 좀 올려놨을 것 같다. 크라수스는 돈을 모으는 데 물불을 안 가렸다. 상도? 그런 건 개에게 던져줘 버렸다. 카이사르가 집권하기 이전의 로마에는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안대 같은 게 만들어진다. 여기서 크라수스의 도적질에 가까운 재능이 발휘된다. 어느 부호의 집에 불이나면 크라수스가 치안대를 이끌고 나타난다. 그리고는 집 주인을 불러 그 집을 팔라고 한다. 물론 불에 타고 있는 집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후려친다. 판다고 하면 불을 꺼주고 싫으면 그냥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결국 주인은 두 손을 들고 그렇게 산 집을 비싸게 되판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 뺨을 칠 사람이다. 혹시 직접 불을 지른 건 아닌지 모르지.

 

무너진 성 위엔 전봇대 뿐.

그런 그가 집정관으로 당선되면서 로마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 헌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폰토스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폼페이우스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전쟁 공훈이이 없었다. 지도자로서 엄청난 콤플렉스였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된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로마 시민이 인정하는 승리를 얻겠다는 열망으로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다. 이 원정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유능한 장군으로 성장의 아들 푸블리우스도 큰 몫을 했다. 물론 원정에 나서게 된 가장 큰 목적은 한 몫 잡아보자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크라수스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예루살렘신전을 비롯한 곳곳의 신전에서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얼 하랴.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BC 53년 크라수스는 총 6개 군단에 약간의 오리엔트 용병, 그리고 아들 푸블리우스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대 1천기까지 약 4만 명을 이끌고 원정을 나선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승패가 군인의 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당시 하란 지방의 군주였던 오스로에네 왕국의 아브가루스 2세가 파르티아와 내통하고 있었지만 크라수스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길잡이가 된 아브가루스는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가는 대신 하란 평야로 로마군을 유인했다. 길 안내를 맡은 사람이 아브가루스가 아닌 아랍의 귀족이란 설도 있다. 로마군을 사막지대로 유인하는 임무를 띤 첩자였다고 한다. 안내자가 누구였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크라수스는 애초부터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배회하는 소들.

한편 하란 평야에는 물자와 무기를 넉넉히 챙겨둔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덫은 단단했고 그물은 촘촘했다. 파르티아에는 수레나스라는 젊고 유능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마병 2만여 기와 로마군이 만났다. 짜식들~ 2만이야? 4!! 크라수스는 로마군 특유의 정사각형 형태의 밀집대형으로 군사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순식간에 기마병을 활을 쏘는 궁기병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낙타들을 이용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화살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파르티아의 궁기병은 돌격해서 맞장을 뜨는 대신 멀리서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문제는 파르티아 군의 활이 워낙 강해서 로마군의 방패가 그대로 뚫린다는데 있었다. 속수무책.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크라수스는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파르티아 궁수들의 뒤를 쫓으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궁기병들은 퇴각하면서 몸을 180도로 비틀어 활을 쏘는 파르티아군 특유의 공격(파르티안 샷)을 퍼붓는다. 용맹을 자랑하던 갈리아 기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푸블리우스는 추격을 자제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적들에게 우롱 당했다는 분노로 머리에서 김이 풀풀 날 지경이었다. 결국 퇴각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크라수스는 전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역시 독 안으로 찾아 들어가는 쥐 꼴이었다. 황무지 한가운데서 로마군은 완전 포위되었다. 로마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이번엔 파르티아 보병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무너진 옛 신전.

로마군이 대패하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화평을 제의한다.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넘기라는 조건이었다.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로마 병사들은 회담장에 나가라고 압력을 가했다. 개죽음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겠지. 크라수스는 만약 자기가 죽더라도 적의 속임수 때문이지 아군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적을 향해 걸어갔다. 참 쓸쓸한 뒷모습이다. 총사령관을 혼자 보내는 게 못할 짓이라 생각한 참모장 옥타비우스가 장교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수레나스는 크라수스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는 강가에 따로 장소를 마련해두었으니까 거기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면서, 마부를 시켜 말을 끌고 오게 했다. 말이 한 마리뿐인 것을 본 옥타비우스는 수레나스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아챘다. 즉각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마부를 찔러 죽였다. 놀란 수레나스와 수행 장교들도 칼을 빼들었다. 그 때 옥타비우스가 소리쳤다.

"우리는 로마군이다! 총사령관을 빼앗기는 설욕을 참을 수 없다!!"

파르티아의 장교들과 로마 장교들의 칼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 옥타비우스가 숨지면서 크라수스도 숨을 거뒀다. 그를 찌른 건 아군이었다. 총사령관을 적의 포로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갸륵한 생각이었겠지. 찌른 자가 적의 편으로 갔다면 나쁜 놈이겠지만 같이 죽었다면 그 또한 충정일 터. 그런 과정을 거쳐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울루자미로 가는 길은 쓸쓸하다.

장신구를 파는 아이들.

BC 53년 크라수스의 나이 62세였다. 장군으로서 무능했든 오로지 돈만 알았든 삼두정치의 한 축이 그렇게 황야에서 숨진 건 충격이었을 것이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 걸 좌우명으로 삼았던 한 사내의 욕심 끝은 그렇게 비참했다. 나는 전쟁사를 읽을 때마다 빛나게 혹은 부끄럽게 죽어간 장군들보다는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크라수스나 푸블리우스, 옥타비우스가 아닌 장삼이사란 이름의 집단에 묻힌, 기억되지 않는 숱한 생명들. , 잊고 갈뻔한 뒷얘기가 하나 있다. 그 싸움에서 포로가 된 로마인들은 지금의 한나라와의 국경에 수비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얼떨결에 중국인들을 만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니었을까. 기원전, 그것도 멀고먼 나라의 집정관이 죽은 이야기를 너무 길게 썼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하란 평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찌 그를 만나지 않고 갈 수 있으랴. 버스는 삭막한 땅 한가운데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왜 이곳을 이렇게 내버려 둘까. 샨르우르파 주에서는 이곳 자체를 야외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의 신축이나 도로 포장을 허가하지 않는다. 반문명적인 내 시각으로는 무척 잘하는 일이다. 비까번쩍하는 건물이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얼마나 망가질까. 눈앞에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서 있다. 말이 건물이지 거의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에 황량한 들판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의연함이 있다. 8세기에 만들어진 신전이라고 한다. 금화 1000만개를 들여서 지었다고 하니 그 당시로는 엄청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한 때는 대상들의 숙박시설, 즉 카라반사라로 쓰였다고 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저 낙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득한 옛날이 돌로 남았다.

하란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서졌으면 신전조차 폐허로 변했을까. , 크라수스 이야기를 먼저 하다 보니 하란의 역사를 건너뛰었구나. 로마의 치욕은 크라스수의 죽음 정도로 끝날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296년에는 로마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이곳 하란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한판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다. 때문에 651년 이슬람군이 차지할 때까지 하란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세월이 흐른 뒤 유럽과 이슬람이 부딪힌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104년 제1차 십자군과 이슬람군이 하란성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는데 유럽의 참패였다. 바로 이웃인 에데사는 별 문제 없이 점령해서 나라까지 세웠는데 망신살이 뻗친 셈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하란의 역사가 끝난 건 아니다. 잘 나가던 도시가 왜 이렇게 폐허로 남았는지는 얘기하고 가야지. 셀주크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1259. 몽골에서 일어난 정복자 징키즈칸의 손자인 홀레구가 이끄는 원정군이 이곳에 도착했다. 셀주크군은 그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고 만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주거 역사를 자랑하는 땅, BC 2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고대도시, 한 때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말굽 아래 짓밟히고 사람들은 죽어갔다. 건물은 기둥뿌리까지 뽑혀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던지 길고 긴 세월이 흘러도 하란은 다시 도시로 피어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마을일 뿐이다. 어찌 사람만 죽어갔으랴. 그 긴 역사가 키워낸 문명과 유적들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흔적만 남은 울루자미.

 

무너진 모스크를 구경하고 있는데 흙집과 돌무더기 사이에서 나타난 송아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일행을 구경한다.

아저씨들은 어디서 왔어요?”

짜식,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이 동네에서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만 통제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동물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소와 염소가 많다. 땅 위에 거뭇거뭇 한 것은 모두 소똥이라고 보면 된다. 귀에 인식표가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있는 녀석들이다. 모래뿐인 이곳에서 저들은 대체 무엇을 찾아다니는 걸까. 몇몇 녀석은 별 것도 없는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하란 특유의 고깔모양의 흙집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걸어간다. 너무 쓸쓸하다. 인간이 인간의 흔적을 이렇게 파괴할 수도 있구나. 한낮의 기온은 기어이 온도계를 깨트려버리겠다는 듯 계속 치솟는다. 바로 시리아의 이웃이니 사막의 기온을 제대로 맛보는 셈이다.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한 그루 없는 대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걸어가며 나는 자꾸자꾸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 건지, 마음이 마른 건지. 울루자미로 가는 길에 대여섯 살 쯤 돼 보이는 아이들을 만난다. 손에는 역시 목걸이 같은 조잡한 기념품을 들고 있다. 내가 만난 일하는 아이들중 가장 어려 보인다. 사라는 말도 없이 그저 관광객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저 아이들을 이 뜨거운 햇살 아래 세웠을까.

 

저 문으로 누군가 드나들었겠지.

폐허에 쳐놓은 철조망은 무엇을 의미할까.

루자미, 아니 그 잔해는 평원에 누워있다. 그 와중에 저 홀로 우뚝 선 33.3m의 미나레트가 생뚱맞다. 나머지는 대부분 무너지고 깨어졌다. 흔적만 남은 담장, 아치형의 문. 그게 전부다. 누가 이곳이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지어진 모스크였을 거라고 짐작이나 할까. 모스크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큰 도시가 형성됐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모스크는 우마이아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 때 지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슬람 세계에 지어진 최초의 대학이라고도 한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에는 고대 세계의 점성가와 석학들이 모여들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원이 있었다. 주로 의학, 수학,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이곳은 뜻밖에도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야훼 하느님은 그 때문에 아브라함을 이 땅으로 인도한 것일까? 하란은 세계 최초로 파가니즘이 생겨난 곳이라고 한다. BC 1100년경 신(SIN이라는 달의 신을 숭배하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을 사비라고 부르고 종교는 사비아교라고 불렀다. 이 종교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이슬람 세계에 전해주었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신전을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로 개조하고 신학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교대를 하는 것인가 보다. 누군가 살던 땅을 타인이 점령하고, 또 누구는 점령자들의 문화를 초토화시키고. 철조망 사이로 아무리 안쪽을 들여다봐도 사람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이는 없다. 쓸쓸히 몸을 돌려 돌아가는 수밖에.

 

posted by sagang
2012. 11. 1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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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르우르파 도시박물관 야외전시장.

 

눈에 검은 돌을 박아 넣은 1만 년 전 인물상.

샤워를 하는데 아침마다 문안을 오던 코피가 소식이 없다. 이게 무슨 징조냐? 어라? 그러고 보니 속도 제법 편안하다. 완전히 내려간 것은 아니지만 뱃속에 얹혀있던 돌덩이가 제법 가벼워진 느낌이다. ! 그 덕이구나. 속이 편해진 배경에는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의 정성이 있었다. 먹지 못하고 고생하는 나를 위해, 누구는 가문의 비방(祕方)으로 지었다는 약을 가져오고 누구는 아끼던 깻잎 통조림을 풀었다. 음식점에 가면 따로 맨밥을 주문해주기도 했다. 그 마음들이 모여서 오래 속 썩이던 체증을 녹여낸 것이다. 사람의 마음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할머니의 약손에 약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듯이. 일단 아침밥도 어제 얻어놓은 인스턴트밥과 깻잎 통조림으로 혼자 해결하기로 한다. 전기포트에 물을 데우는데, 이런! 내부구조가 인스턴트밥이 안 들어가게 돼 있다. 반으로 구겨도 비틀어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는데 엉뚱한 데서 막혀버리니 괜히 안달이 난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얼음을 담아 놓는 아이스 볼이 눈에 들어온다. 너 잘 걸렸다. 겉은 스틸로 돼 있어서 활용이 가능할 것 같다. 안에 있는 플라스틱을 빼내고 인스턴트밥을 넣으니 원래 세트였던 것처럼 딱 맞는다. 그럼 그렇지. 다 살게 돼 있다니까. 포트에 물을 끓여서 붓고 뚜껑을 닫는다. 내 나라에서라면 좀 구차해 보이는 그림이겠지만, 며칠 굶은 자의 밥을 향한 일념 앞에서는 그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다. 15분쯤 기다린 뒤 열어보니 보슬거리는 밥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먹을 만하게 익었다.

 

멧돼지 상.

 

사슴을 사냥하는 사람.

이거 상당한 노하우인데? 맨입으로 공개해도 될까? 아무튼 조금 서걱거리는 인스턴트밥에 깻잎 하나뿐인 아침 밥상은 내 생애 가장 맛있는 식사 중 하나가 됐다. 먹으니 힘도 난다. 그래, 난 원래 이렇게 단순한 동물이야. 훨씬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은 두 곳의 박물관을 들르기로 한다. 먼저 찾아간 곳은 샨르우르파 도시박물관.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강렬하게 내 눈길을 끌어당긴 것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인물석상 하나. 사람 키 높이 정도 될까? 거친 돌에 조각된 석상의 코는 깨져 있고 가슴엔 V자 모양이 양각돼 있다. 허리는 금이 가 있다. 상체보다 하체가 무척 짧아서 손은 무릎 아래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대체 무엇이 자꾸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한참 들여다보니 두 눈에 검은 돌 같은 게 박혀있다. 마치 아몬드처럼 생긴. 저게 뭐지? 몸체와는 완전히 다른 재질과 색깔의 광물질로 눈동자를 해 넣은 것이다. 숱한 석상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다. 흑요석?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박물관 관계자가 설명을 해준다.

아브라함의 성스러운 연못 근처에서 발견된 석상입니다. BC 8000~9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으니, 지금까지 발견된 인간 모습을 한 석상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지요.”

나는 지금 1만 년 전에 만들어진 석상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아득한 옛날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모양을 갖춘 인간의 자화상. 그는 무슨 생각으로 검은 돌을 찾아 눈을 만들어 넣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석상은 저 검은 눈동자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1만 년을 견디어왔을까.

 

 

 

매장된 고대인의 모습.

 

출산 장면으로 보인다.

석상을 만든 사람도 그가 만든 석상도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고대 인간과 작별을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 박물관은 1964년에 발견된 ‘1만 년 전의 사원괴베클리테페에서 나온 유물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고 한다. 돌에 양각된 사슴과 사냥하는 사람, 멧돼지, 여우, 도마뱀거칠지만 살아있는 듯 생동적이다. 화살을 든 군인은 히타이트 제국의 전사다. 저건 공룡일까? 활짝 웃는 것처럼 이빨만 부각시킨 게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장난감 같다. 한 층을 더 올라가다 또 하나의 기묘한 석상을 만난다. 길쭉한 바위에 사람의 형상을 새겼는데 얼굴은 없지만 여자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밑으로 아기가 새겨져 있다. 출산 장면인가? 강한 주술적 기운이 전해진다. 석상에 여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BC 3000년경부터라고 한다. 그 밖에도 다양한 석상들이 있다. 그리스인들의 섬세한 조각과는 다른 원초적 모습의 인간과 동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 앞에서 1만 년 전 사람의 생각을 엿보려 한참 기다려본다. 누군가 돌 안에 배어 있는 신화를 조곤조곤 들려줄 것 같다. 보통 박물관에 가면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제법 오래 걸린다. 화두처럼 던지는 관계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유럽의 박물관에 있는 유물은 거의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간 것들입니다. 그걸 모두 반환 받으면 유럽 박물관은 텅텅 비겠지요?”

훔치거나 약탈한 남의 물건을 버젓이 전시해놓고 자랑하는 사람들. 아이들에게 뭐라고 할까? 우리 가까운 이웃에도 그런 나라 하나 있지.

 

매운 케밥.

맵지 않은 케밥. 재료는 양의 간이다.

점심에는 벼르던 매운 케밥을 먹어보기로 한다. 그동안 거의 물과 과일로만 때웠으니 이제 제대로 좀 먹어봐야지. 특히 샨르우르파에서는 그 유명한 매운 케밥정도는 먹어줘야 한다. 몸이 안 좋은 나를 위해 훌리아가 정보를 하나 준다.

터키에 여행을 다니다 몸이 안 좋을 때는 Eczane라고 쓴 곳을 찾으세요. 그곳이 바로 약국이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병원은 뭔데?”

“Hstane라는 간판만 찾으면 돼요.”

“ne자 돌림이구먼. 우리 동포들에게 꼭 전해줄게.”

나는 참 여러 가지 보살핌을 받으며 산다. 음식 이야기 계속해야지. 어딜 가나 먹는 건 중요한 거니까. 우르파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은 지에르라고 부르는 양간이다. 얼마나 양간을 좋아하는지 아침식사로 먹는 것은 물론 세 끼를 모두 그것으로 때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맵게 만든다. 빵에 끼워서 고춧가루를 듬뿍 뿌리고 동그랗게 말아먹는다. 양 간을 원료로 한 케밥인 셈이다. 음식점에 도착했으니 선택을 해야 한다. 재료는 소, 닭고기와 양간이 있으니 그 중에 고르란다. 선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세 가지를 다시 매운 것 안 매운 것으로 나눈다. 내게는 가장 안전한 게 안 매운 소고기일 것 같은데 과감하게 양간을 선택한다. 굳이 간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직접 먹어봐야 맛을 전해줄게 아닌가. 대신 안 매운 것으로 시킨다. 매운 육회를 상추에 싸먹는 음식도 있다는데 이 식당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매운 케밥에 또 고추를 얹어먹기도 한다.

이렇게 김밥처럼 둘둘 말아서 먹는다.

후식까지 먹어야 식사 끝. 왼쪽은 아이란.

모든 케밥은 보자기처럼 널찍한 밀가루 전(라와시)에 싸먹는다. 안 매운 양간은 요리할 때 고춧가루를 안 친다. 그렇다고 고추의 고장에서 그냥 지나갈 리가. 살짝 구운 빨간 고추가 곁들여 나온다. 이건 장식이 아니다. 반으로 갈라서 함께 싸서 먹는 거란다. . 그럼 매운 거 시킨 것과 뭐가 다르담. 식사의 기본 절차는 라와시를 펼치고 적당량의 고기를 올린 뒤 향신료와 우리의 고수 같은 풀과 고추를 얹어서 말아서 먹는 것이다. 향신료나 나네민트라는 풀 대신 양파를 얹어 먹기도 한다. 양간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하지만 내가 시킨 음식만 맛보고 갈 수는 없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동냥을 다니면서 조금씩 맛을 본다. 내 입맛에는 역시 안 매운 쇠고기가 가장 맞는다. 특히 깻잎에 싸먹으니 천상의 맛이다. 매운 것도 그렇게 엄청날 정도는 아니다. 희석식 요구르트인 아이란도 나왔지만 나는 시금털털한 것을 안 좋아하니 무효. 종업원들은 이방인이 자기네 음식을 열심히 먹으니 신기한 모양이다. 자꾸 주변을 오가며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모양이다. 드디어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벽에 걸린 하란 사진을 가리키며 가봤느냐고 묻는다. 그걸 계기로 몇 마디 손짓발짓 대화를 나누다 드디어 한국말 교육이 시작된다.

“Say! 안녕하세요.”

처음엔 수줍어서 말문이 안 터진다. 에이, 괜찮다니까. 어서 해봐. 그럼 그렇지. 몇 번 시키니까 자연스럽게 따라한다. 이젠 동양 사람들 나타나면 무조건 안녕하세요하면 돼. 알았지?

 

돈두르마를 만드는 모습.

돈두르마.

한낮의 거리는 프라이팬 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듯 뜨겁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이 나타난 뒤로 시원해졌다고 거듭거듭 강조하지만, 그래봐야 40도 가까이 되니 30도의 나라에서 온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 다행인 것은 땀은 별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사막에 가까운 지역이라 습도가 극히 낮아서 땀이 나오면 바로 마른다. 또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버스도 에어컨을 최대로 켜놓건만 선풍기를 켜놓은 정도의 역할밖에 못한다. 음식점에서 얻어올 때만해도 제법 시원하던 물은 거리를 조금 돌아다니면서 목욕하기 딱 좋을만한 온수가 되었다. 찹쌀떡을 닮은 아이스크림, 돈두르마 가게만 보면 뛰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왔을 때 조금 더 먹고 나올 걸. 그러고 보니 샨르우르파에서 돈두르마의 본 고장 카흐라만 마라슈까지 그리 멀지 않다. 돈두르마를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마라슈 아이스크림이라고도 부른다. 이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카흐라만 마라슈에서는 눈이 내리면 그 눈을 석굴이나 움푹 팬 곳에 꽉 채운 뒤 관목 줄기나 나무 도막으로 밀봉해서 여름이 와도 녹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그 눈을 퍼내어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 시럽을 섞어서 먹었다. 이게 바로 돈두르마의 기원이 됐다. 물론 시럽만 섞어서는 돈두르마처럼 쫀득한 맛이 안 난다. 거기에 야생 난초의 구근을 말려 가루로 만든 살렙과 질기게 해주는 유향수지 등을 첨부해야한다.

 

모자이크 박물관.

아킬레우스를 스틱스에 담그는 테티스.

돈두르마 생각을 하니 서울의 돈두르마 장수도 생각난다. 지금도 계속 장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동 입구에도 잘 생긴 아이스크림 장수가 있었다. 터키여행기 1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가 출간됐을 때 인사동에서 간단한 축하연을 하고 나오다 그 친구를 만났다. 터키라는 동질성만으로도 얼마나 반갑던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서 책을 보여줬더니 자기 와이프도 보드룸에 산다며 뛸 듯이 좋아했다. 그는 한국에서 터키를 그리워하고 나는 터키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셈이다. 어쩌다 보니 아이스크림 얘기가 신파조로 흘러버렸다. 정신 차리고 빨리 다음 목적지로 가야지. 지금 찾아가려고 하는 모자이크 박물관 역시 샨르우르파 시내 한 가운데 있다. 이 동네는 심심한 사람이 대충 삽질만 해도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도시 자체가 박물관인 셈이다. 모자이크 박물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박물관과는 영 다른 모습이다. 자그마한 야산 기슭에 누런 포장을 쳤을 뿐이다. 언뜻 보면 옛날 우리네 잔칫집 같다. 산 위에는 빈민촌처럼 보이는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모자이크가 펼치는 화려한 마술에 경탄을 아끼지 못한다. 넓은 토판에 작은 돌들로 섬세한 그림을 그렸는데 마치 스토리가 있는 달력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자 아킬레스건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태어나는 장면에서부터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장면, 트로이 전쟁에 나가는 장면, 그가 죽은 뒤 슬퍼하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반인반수.

얼룩말을 조련하는 흑인노예.

모처럼 아킬레우스를 만났는데 잠깐 신화 공부나 하고 갈까.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인 펠레우스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이 결혼하게 되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생략하기로 하자. 테티스는 자신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겠다는 갸륵한 욕심으로 스틱스강(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강)에 담갔다. 왜 느닷없이 소림사 18동인이라는 영화가 생각나지? 헌데 아무리 완벽하게 한다고 해도 바늘만한 빈틈은 있는 법. 아이를 담글 때 테티스가 손으로 잡고 있던 발뒤꿈치만은 젖지 않아서 급소가 되고 말았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가리키는 아킬레스건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트로이전쟁에 내보내지 않으려고 여장(女裝)을 시켜서 스키로스의 왕 리코메데스의 딸들 사이에 숨겨놓았다. 신화에 나오는 이름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하지만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다는 예언을 듣고 찾아온 오디세우스에게 발각되면서 전쟁터로 나가고 만다.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전사가 되어 싸우지만 결국은 치명적인 약점인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아 죽고 만다. 그는 트로이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모자이크는 아킬레우스의 일생 외에도 얼룩말을 조련하는 흑인노예를 그린 장면도 있는데 그 당시 아나톨리아에는 얼룩말이 없었단다. 대체 넌 어디서 온 거냐? 또 전설 속의 아마존 여인들, 아마조네스를 그린 모자이크도 눈에 띈다.

 

아마존의 여전사 아마조네스.

세계 최고로 일컬어지는 이 모자이크 보드가 발견된 것은 2007년이었다. 건물을 지으려고 공사를 하는 중에 엄청난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공사를 중단하고 박물관으로 전환했다. 작품들은 로마 후기나 비잔티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과정도 상상을 초월한다. 1m²5000~6000개의 돌이 들어간다고 한다. 돌 숫자가 많아질수록 좀 더 정교한 문양을 낼 수 있다. 돌들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가져왔는데 염색을 하지 않고 원래 색깔 대로 분류해서 썼다. 다양한 색깔의 돌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 발굴은 2007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인데,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이곳에 세계 최대의 박물관을 지을 계획도 갖고 있다.

 

 

 

그동안 블로그에 올렸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가 곧 책으로 출간됩니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의해 연재는 이번 주로 마칩니다. 나머지이야기는 책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더 재미있는 여행 이야기로 여러분을 만나겠습니다.

posted by sagang

우르파의 옛집. ㅁ자형으로 지었다.

대가족의 여자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

울루자미를 찾아가는 길. 어느 건물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훌리아에게 물었더니 오늘이 바로 71일 월급날이란다.

월급날이면 사람들이 저렇게 은행 앞에 줄을 서?”

그럼요. 은행에 가야 월급을 찾아오지요.”

그렇구나. 옛날에 월급날이면 누런 봉투를 나눠주던 생각이 난다. 그땐 그마나 그날만큼이라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 아내의 살가운 눈길 속에 삼겹살과 소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뀐 뒤부터 월급쟁이들은 월급기계로 전락해버렸다. 괜한 감상으로 가슴이 뜨뜻하다. 울루자미로 가기 전에 키친박물관이라는 곳을 잠깐 들른다. 과거 우르파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골목 안에 있는 집은 무척 크다. 지금의 큰 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호가 살았을 것 같다. 지은 지 200년 됐다는데 4각형 구조로 문을 빼면 사방이 모두 막혀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대도 있다. 지하층에서는 동물들을 키웠다. 우물도 부엌에 있다. 집안에서 모든 걸 해결한 셈이다. 대가족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이라 20~30명이 한 집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분가하는 게 아니라 방을 하나 내줘서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 당시 생활상을 모형으로 꾸며놨는데 여자들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다. 시어머니,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 . 날마다 잔칫집 같았겠다.

 울루자미 입구.

 

대사원이란 뜻의 울루자미 역시 샨르우르파 시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457년에 36개의 붉은 기둥 위에 세운 교회였다고 한다. 그래서 붉은 교회라고 불렀다. 1175년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8각형으로 우뚝 솟은 미나레트는 이 도시 최초의 시계탑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왼쪽에 묘지가 보인다. 사원 내 공동묘지인 모양인데 별로 넓지 않은 곳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좀 답답해 보인다. 돌로 만든 구조물 위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고 맨 땅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다. 묘비는 제각각이다. 짧은 것, 긴 것, 글씨를 새긴 것, 지워진 것, 모양을 낸 것, 밋밋한 것. 묻혀있는 사람들도 살아있을 때 저렇게 제 각각이었겠지. 죽음으로도 동질화되기 어려운 게 사람인가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내세를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인다. 또 시신을 화장할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는 믿음 때문에 매장문화가 일반화 돼 있다. 일종의 영혼이 거주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슬람사회의 장례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보통 24시간 이내에 매장한다. 사람이 운명을 하면 사자의 머리를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염을 하는데 염 절차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솜으로 입과 귀, 코 등을 막은 뒤 흰 무명천으로 시신을 둘러싼다. 묻을 때는 관 없이 매장한다. 사람 키 높이 정도로 비교적 깊고 넓게 판 묘실에 얼굴을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시신을 안치한다. 시신 위에 일정한 공간을 두고 석판 등으로 덮는다.

사원 내의 공동묘지. 

크고 작은 묘비들.

묘실을 팔 때는 보통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넓게 파는데, 한 세대가 지나면 한 무덤에 또 다른 가족을 매장하는 관습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도 역시 묘 자리가 부족한가보다. 요즘은 묘지를 쓴 뒤 7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영혼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의 임대차 한도가 고작 7년인 셈이다. 매장문화의 문제점이라고 할까. 하지만 종교를 배경으로 한, 즉 내세 부활을 전제로 생긴 매장문화이기 때문에 단시간 내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망인 얘기나 잠깐 하고 가자. 전통 이슬람사회(터키는 무척 유연할 것이다)에서 미망인은 남편과 사별하게 되면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해 집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절대적 재혼 금지기간일 것이다. 보통은 1년이 지나야 재혼이 허용된다고 한다. 재혼의 대상은 제한이 없지만 전통적인 유목사회에서는 근친이나 족내혼을 주로 한다. 다른 가문이나 부족의 남자와 재혼할 경우 집안의 수치로 받아들여 부족 간의 적대관계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다 공동묘지 옆을 지나는 바람에 장례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원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앞에서 언급한 시계탑 정도가 눈에 띌 뿐. 마당 가운데에는 우아하게 지붕을 해 얹은 우물 하나가 있다. ! 이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을 지닌 우물이구나.

울루자미의 시계탑.

사원 내에 있는 해시계.

예수의 얼굴을 닦았던 수건이 이곳에 떨어졌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수가 에데사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나 남겼다. 붉은 교회를 방문한 그가 수건 한 장을 자신의 얼굴에 대자 얼굴의 모양이 그대로 찍혔더란다.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루스왕이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니까 얼굴이 찍힌 수건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성화라고 일컬어지는 성스러운 수건이다. 이 수건은 944년까지 에데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943년 비잔티움 제국의 로마노스 1세가 도시를 포위하고 수건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기독교의 유물이리니 돌려달라는 뜻이었겠지.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수건일 수밖에. 하지만 힘없는 자가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나. 결국 강탈당하다시피 한 수건은 944815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기독교의 나라를 약탈했던 제4차 십자군이 1207년에 이 수건을 슬쩍한다. 수건은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지만 그 뒤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건 프랑스에서였다. 루이 9세 때 파리의 성샤펠 성당에 다시 나타났다가 1700년대 후반의 프랑스혁명 때 또 사라졌다. 그 뒤로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앤 게 아니라 욕심이 없앤 거겠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깟 수건 한 장 뺏고 빼앗기고.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도나 하지.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이 탄생한 우물.

 

성스러운 수건이라니까 혹시 베로니카의 수건을 두고 착각한 거 아냐?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성스러운 수건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피와 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를 본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갖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의 피와 땀을 닦아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수건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나왔다는 것이다. 그걸 베로니카의 수건이라 일컬었는데 이 수건이 여러 번 기적을 일으켰다. 목이 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고 눈먼 자를 고쳐주었으면 심지어는 죽은 자를 소생케 한 일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이 수건을 성물(聖物)로 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 수건 역시 인간들의 손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는다. 1527년 로마가 이방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폭도처럼 변한 군중들에 의해서 파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작가는 베로니카의 수건이 도난당해 로마의 이곳저곳 주점에서 나돌고 있었다고 쓰기도 했다. 혹자는 무슨 소리냐,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며 폭도들이 약탈한 물건 중에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없었다고 기록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설령 베로니카의 수건이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해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성물은 아니라는 것. 물론 행방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터키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런 때 공부 조금 더 한다고 남 주는 건 아니니까. 어떤 경우든 인간들의 욕심이 저지른 파국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원에 놀러온 꼬마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울루자미는 우리 일행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꼬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주변을 맴돈다. 그것도 갓 부화한 물고기 떼처럼 한꺼번에 몰려다닌다. 어휴! 귀엽지만 시끄럽다. 이런 땐 어찌해야 되는지 잘 알지. 카메라를 녀석들 앞으로 들이밀었더니 느닷없이 조용해진다. 잠시 뒤에는 저희들끼리 알아서 정렬까지 한다. 거봐. 사진이 특효라니까. 짜낸 것 같은 성스러움으로 위장한 사원보다는 이렇게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 구실도 하는 곳이 훨씬 더 정감이 간다. 아이들은 천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원에 천사가 찾아오면 최고의 손님이지. 시장으로 가는 길은 번화가다. 좁은 길에 신문가판대도 세워놨고 노점상도 있다. 어디 가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 마을버스도 오간다. 버스요금은 1리라라고 한다. 환율을 700원쯤으로 잡으면 우리와 비슷한가? 물 한 병은 25크루슈. 1크루슈는 1리라의 1/4이다. 그러면 우리 돈으로 170~180원쯤 되겠네. 물 값은 싼 편이군. 걸어가면서 훌리아에게 묻는다.

발르클르 연못(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한국말로 뭐라고 한다고?”

~ 물고기 수영장요.”

흐흐흐, 아직도 물고기 수영장이냐? 물고기 연못이라고! 물고기 연못!!”

무슨 소리인가 하면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아무리 가르쳐도 연못이라는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을 때마다 수영장이란다. 그 재미에 묻고 또 묻는다. 이젯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혹시, 내가 이들을 놀리는 게 아니라 이들이 짜고 날 놀리는 건가?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고춧가루 종류가 열 가지도 넘는다.

시를 쓰는 노점상.

구두닦이? 광약 장수? 정체가 불분명한 노점상.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여러 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역시 시장 체질이다. 느닷없이 피가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한다. 곡물가게 앞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곱게 빻아놓은 고춧가루다. 터키에 무슨 고춧가루?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샨르우르파는 고추의 주산지다. 그래서 이 동네는 매운 케밥으로도 유명하다. 요리에 고추구이가 필수적으로 딸려나온다. 심지어는 가지만한 풋고추를 우적우적 씹어 먹기도 한다. 현지인이 먹는 걸 보고 한번 따라했다가 매워서 사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내가 워낙 매운 걸 못 먹기도 하지만 여기 고추는 맵기가 보통이 아니다. 고추를 먹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 사람들과 동료의식을 느낀다. 고춧가루도 참 여러 가지다. 분홍에 가깝게 빨간 것, 아주 빨간 것, 거무스레한 것, 아주 검은 것. 종류별로 나눠 나눠놓은 비닐포대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원래 고추 자체의 종류가 그리 많은 건지, 건조 과정에서 색깔이 달라진 것인지. 좌판을 벌여놓고 잡동사니를 파는 할아버지는 뭔가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혹시 길거리의 시인이 아닐까. 광약을 파는 건가? 구두를 닦는 건가? 조금 애매해 보이는 아저씨도 앉아있다. 조그만 문을 지나가니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쇠전도 아니고 시장 한복판에 광장이라니 좀 느닷없다. 사람들이 파라솔 아래 나무의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이를 마시고 있다. 카라반사라이가 있던 자리인가? 시장 한가운데에 대상들이 쉴 수 있는 큰 뜰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남자들뿐이다. 시장에도 금녀구역이 있는 모양이군.

 

시장 안의 휴식광장.

실크 상가.

실크상가에서 만난 사내.

실크상가로 들어간다. 실크로 만든 모든 상품이 있는 곳이다.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데 날카로운 눈초리 하나가 등에 와 박히는 느낌에 움찔한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 숲에서 벗어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때쯤 잃어버렸던 본능 같은 게 살아나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굳이 경계의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좀 미흡한, 필요 없다고 어디엔가 내던졌던 민감한 신경같은 것일 게다. 시선 쪽으로 눈을 돌리니 한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장 풍경과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내다. 타임머신을 타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군단에 용병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느낌. 그런 단단함과 날카로움이 적절히 버무려진 사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그런 땐 독일병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다. 가까이 온 그가 나를 끌어안더니 자신의 뺨을 내 뺨에 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대쪽 뺨. 다음엔 손을 내민다. 나 역시 아무 거부반응 없이 손을 내민다. 악수를 마친 그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거수경례를 한다. 나는 경례를 받는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눈은 웃고 있는데 입은 독일병정처럼 꼭 다문 저 사내는 나와 무슨 인연으로 여기서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 왜 내겐 낯선 사내의 거친 뺨이 낯설지 않은 것일까? 전생, 어디를 흐르는 강쯤에서 헤어졌다가 이리 만난 것일까? 눈짓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인파 속으로 묻힌다.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녀.

옛날식 다리미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진사가 되는 건 금방이다. 히잡을 두른, 모녀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자꾸 내 카메라에 시선을 보낸다. 표정은 수줍기 짝이 없지만 낯선 물건에 대한 관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카메라를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 연신 주고받는다. 그런 땐 무기가 있지. 삶은 콩 얻어먹은 당나귀처럼 잇몸까지 보이며 웃어준다. 마음이 놓이나 보다. 젊은 여자가 묻는다.

필름?”

노 필름

이 정도면 서로 영어 좀 되지 않는가? 디지털 어쩌고 안 하고도 서로 하고 싶은 말 다했다. 사진보다는 카메라 자체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카메라를 내밀면서 한번 찍어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찍을 줄은 모르고 자신들을 찍어서 보여 달라는 것이다. 수줍음 속에서도 할 건 다한다. 오케이, 오케이! 얼마든지요. 노소 무슬림 여성을 모델로 시장 한가운데서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사진을 보여줬더니 할머니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고맙단다. 디지털 카메라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보시하기 쉬운데 뭘. 모델 확보해서 좋고 고맙다는 인사 들어서 좋고.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늘 이렇게 저절로 모델이 구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인상이 좋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항상 웃는 얼굴이어야 한다. 찡그린 사진사에게 모델이 돼주는 경우는 없다. 다음으로 눈이 마주치면 현지 말로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아야한다. 예를 들어 터키에 가면 귀나이든(잘 잤어요? 좋은 아침!!)~ 메르하바~(안녕하세요?) 정도는 입에 달고 사는 게 좋다. 인사한다고 욕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이 아이 대신 장사를 해줬다.

대장장이.

주석공방 골목.

어느 가게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이 일하는 걸 보는 게 이젠 낯설지 않다. 방학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 가게를 보는 아이들이 많다. 헌데, 이 녀석 정말 기특하다. 서 있는 나를 보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앉으란다. 이런 경로사상이 투철한 아이가 있나.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였나?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지. 아이를 한쪽에 세워놓고 장사를 시작한다.

싸요, 싸요. 최고급 실크 머플러가 말만 잘하면 공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일행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든다. 다른 터키 사람들도 이방인이 싸구려를 외치니 신기하다는 듯 모여든다.

다른 데 갈 것 없어요. 싸게 드릴 테니 여기서 사요.”

손님과 아이 사이에서 흥정을 벌인 끝에 두 장을 팔았다. 물론 사는 사람들도 혜택을 봐야하니까 30리라짜리를 25리라로 깎아줬다. 아이도 불만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뭐. 아이와 작별을 하고 실크 상가를 벗어난다. 바로 앞에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 분위기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화덕과 모루, 각종 장비그리고 대장장이의 힘찬 망치질. 만드는 물건은 좀 다르다. 도끼나 칼 등도 있지만 주로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만든다. 저게 뭘까? 물어봤더니 케밥을 만들 때 쓰는 꼬챙이란다. 대장장이는 다섯 살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45년 동안 이 일만 해왔다고 한다. 쉰 살이라는데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 평생 불 앞에 살아서 그럴 거야. 익은 거지 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공방들이 줄지어 있다.

 

완성된 주석 제품들.

주석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일하는 아이.

전통기법으로 주석 용기를 만드는 곳이란다. 주석이 이렇게 예쁜 물건으로 변할 수도 있구나. 보석 못지않게 화려하다. 한 집에 들어갔더니 부자(父子)로 보이는 장년 사내와 아이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동그란 주석 판에 문양을 새기고 아들은 판 위에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인다. 아홉 살 쯤? 커다란 나무망치를 들고 연신 내리치는데 그 나이에 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인다. 하지만 이 녀석 조금도 싫증난 표정이 아니다. 입가에 미소까지 매달고 있다. 착하고 착한지고. 저렇게 일하는 아이도 있는데 어른인 내가 여행을 하면서 뭐가 힘들다고. 배낭을 추슬러 올리고 힘차게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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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연못으로 흐르는 수로.

성스러운 연못과 모스크.

아브라함은 정말 샨르우르파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 대답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를 좀 추적해보자. 아브라함은 아담의 후손이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고 175세에 세상을 뜬 그는 노아의 방주노아와도 58년이나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의 출생은 전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삶의 궤적은 전설보다 역사 쪽에 가깝다.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는 홍수 심판이 있은 지 대략 292년이 지난 뒤고 바벨탑 사건 이후 100년 정도 지난 뒤이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고대 바빌론의 황제 함무라비 보다는 200년쯤 앞서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행적은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해 하란과 세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른다. 그런데 왜 태어난 곳이 그리 명확하지 않을까? 그 답은 갈대아 우르에 들어 있다. 잠깐 구약성서를 보고 가자. 아브람(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이다)이라는 사람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1126절부터다.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흘과 하란을 낳았더라(창세기 11-26)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세기 11-29)

 

문제는 본토라고 적은 갈대아 우르가 어디인지 확실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터키 사람들은 샨르우르파야 말로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갈대아 우르라고 주장한다. 또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져 왔다. 1930년대 이후 시리아의 몇 곳에서 출토된 토판 문서를 해독해보니 우르라는 도시가 여러 곳 있으며 모두 하란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브라함 동굴 같은 유서 깊은 곳도 이곳에 있지 않은가.

 

장작이 변했다는 물고기의 후손들.

먹이를 탐하는 물고기들.

하지만 학자들은 옛 바빌로니아가 있었던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지역, 즉 지금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가 있는 지역을 우르라고 본다. 북쪽의 우르, 즉 샨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 고대도시 우르가 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울리라는 사람에 의해 발굴되면서 바로 갈대아 우르가 이곳이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발굴된 지하 무덤, 부장품 등이 갈대아 우르임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특히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여기저기 떠도는 별 볼 일 없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 사실은 그의 고향 우르에서는 대도시의 귀족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가나안 땅에 간 것이 아니라 발달된 도시 문명의 법과 도덕 등을 가지고 가서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입증됐다니 믿을 수밖에. 그런데도 왜 나는 자꾸 샨르우르파 쪽에 정이 더 갈까? 내가 이라크에 있다는 우르를 직접 가보지 못해서 그럴까? 과학보다는 전설을 믿고 싶어 하는 비과학적 사고방식 때문일까? 구약과 지도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꾸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데라가 그의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세기 11-31)

 

산책 나온 무슬림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창세기의 내용을 기억한 뒤 지도를 보자. 학자들이 갈대아 우르라고 주장하는 이라크의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까 말했듯이 1,500km나 된다. 그곳에서 가나안,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 서쪽 해안지역은 서쪽으로 방향만 틀어서 곧장 가면 그 거리를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남쪽으로 갔다는 그들이 왜 북쪽에 있는 하란으로 갔을까? 차는커녕 마차 한대 없는 그들이 굳이 그 먼 길까지 올라간 이유는 뭐였을까. 또 지나가는 길이었다면 그냥 지나갈 것이지 그 낯선 하란에서 말뚝 박고 살 건 또 뭐란 말인가. 혹자는 가로지르는 길이 사막이라서 좋은 길을 택하다 보니 돌아서 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가보지 않아서 큰 소리 치긴 좀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벗어나면 그 어느 곳도 광야이긴 마찬가지다. 하란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스팔트가 깔려있을 턱이 있나. 그렇다면 지금의 샨르우르파, 아브라함의 전설을 지닌 그곳이 창세기에 나오는 우르에 더 가깝지 않을까? 손자까지 봤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문제였을 것이다. 샨르우르파를 당당하게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란쯤 걸어가다가 아이구! 허리도 아프고 난 더 이상 못 가겠다하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린 건 아닐까. 믿음이 별로 깊지 않았던 그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멀고먼 가나안땅까지 갈까. 하란까지만 갔으면 성의를 보인 거지. 별 지식도 없이 너무 따지는 건가? 내가 성서 전문가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의 뿌리는 여전히 뽑히지 않는다.

 

동네 아이들도 많이 눈에 띈다.

이제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구경을 가보자. 연못은 아브라함의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다. 수로를 따라가다 보면 르즈마니예와 압두르하르만이라는 두 개의 모스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직사각형의 긴 연못을 볼 수 있다. 이 연못은 도시의 더위를 식혀주는 역할도 하는 듯,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거닐고 있다. 그런데 왜 이곳이 성스러운 연못이 되었을까? 아브라함 동굴에서 끊어진 전설은 여기서 계속된다. 신상을 파괴한 죄로 감옥에 갇힌 아브라함은 드디어 사형대에 오르게 된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님로드 왕, 그냥 죽이기에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성 꼭대기에 화장용(火葬用) 장작을 쌓고 아브라함을 매단 다음 불을 질렀다. 말 그대로 화형(火刑)을 시행한 것이다. 이걸 그냥 두면 하나님이 아니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아브라함을 에워싸려고 하자 느닷없이 천둥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치기 시작했다. 화형장은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님로드 왕이 도망쳤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아브라함은 성 아래 장미 밭으로 떨어지고, 그 장미 밭은 호수가 되었다. 타다 만 장작들은 물고기로 바뀌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 연못에 있는 물고기들이 바로 그때 타다만 숯이 변한 물고기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잉어처럼 생긴 이 물고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뭇거뭇한 자국을 볼 수 있다. 기적의 증거인 이 물고기들은 아무도 잡지 않는다. 만약 잡아먹게 되면 곧바로 장님이 된다는 설도 있다. 연못을 들여다보니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다. 물고기들이 너무 많다 보니 저희들끼리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일일 것 같다.

 

저거 하나 건져봐?

물고기 밥을 조금 얻어서 던져본다.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몰려들더니 저희들끼리 머리를 박고 꼬리를 치고 난리도 아니다. ! 이게 바로 아귀다툼이라는 거구나.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일단 먹고 보자가 그들의 모토인 것 같다. 나는 왜 이 성스러운 물고기들에게서 지옥도를 보는 걸까. ‘너 죽고 나 살자고 진흙탕에서 구르는 욕심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그들과 자꾸 겹쳐진다. 대체 성스러운 것은 무엇이고 속된 것은 무엇인가. 그 경계는 누가 어떻게 지어준단 말인가. 아이 둘이 지나가길래 불러서 묻는다.

이 물고기 잡아먹으면 어떻게 돼?”

죽어요.”

정말? 네가 봤어?”

아뇨. 먹고 죽은 사람이 있대요.”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왜 먹으면 안 되는지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성스러운 물고기니까’ ‘병에 걸린답니다’ ‘눈이 멀어버린대요대답도 가지각색이다. 하긴 정답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나는 직장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있는 면접요원처럼 집요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왜 이 물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지 물어본다. 재미있는 대답도 있다.

이건 나무가 변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물고기를 먹으면 나무를 먹는 거지요.”

흐흠, 그건 그렇겠네. 나무를 먹으면 반칙이지. 지금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시절도 아니잖아.

 

반대쪽 모스크.

 

결정적인 대답을 듣고 질문 행각을 멈춘다.

나 같이 종교를 안 믿는 사람은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세요.”

어떻게 되는데요?”

잡으려고 손을 넣는 순간 다른 사람들한테 맞아죽을 걸요?”

그래. 그게 정답이네. 맞아죽지 않으려고. 그럼. 이 먼 곳까지 와서 맞아죽으면 안되지. 사실 나도 그 신성함을 믿는다. 신성은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그 영역까지 무너트리고 나면 대체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늘 그 영역을 들여다보지 못해 안달이다. 나야말로 이 물고기들이 영원히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은 이 연못에서 하얀색 물고기를 보면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천국행 티켓 한 장 확보해볼까 하고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풍진에 물든 흐리멍덩한 눈에는 회색빛 물고기 한 마리 들어오지 않는다. 이 연못을 비롯한 공원 수로를 흐르는 물은 모두 성채가 있는 담라즉 언덕에서 흘러들어온 지하수라고 한다. 그런데도 물고기가 워낙 많다보니까 지하에 산소를 공급하는 파이프를 묻어놓았다고 한다. 또 프랏대학교 연구진이 조사를 해봤더니 모두 네 종류의 물고기가 살고 있더란다. 그러니까 장작이 네 종류나 있었다는 얘기?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눈에는 비슷비슷하다.

 

샨르우르파 지도.

 

샨르우르파의 역사를 잠깐 얘기하고 가야지. 해발 540m에 자리 잡은 이 도시의 역사는 9,000년을 헤아린다. 아니, 뒤에 가볼 괴베클리테페를 감안할 때는 그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역사에는 약 4,500년 전에 일어난 일부터 기록돼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후리라고 불렀던 종족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후리아인이인데 BC 2500년경에 코카서스 산맥을 출발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시리아, 이라크 북부까지 내려가 정착했다. 이들은 우르퀘쉬라는 왕국을 세우고 잘 나가는 듯 했지만 BC 2000년대 초반 바빌로니아 제국의 힘이 팽창하면서 그 속국으로 편입된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바빌로니아 역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불꽃처럼 일어났던 히타이트에 망하고 만다. 그게 BC 1531. 후리아인들은 다시 미탄니라는 왕국을 세우지만 또 히타이트 왕국으로 흡수되는 운명을 맞는다.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뒤 BC 6세기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BC 333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 들어간다. BC 303년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는 이곳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마케도니아 퇴역병들을 정착시킨다. 낯선 땅에서 살게 된 그들은 이 곳을 자신들의 고향인 마케도니아의 수도 이름을 따서 에데사라고 부르게 된다. 이 에데사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 두자.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에데사는 BC 63년 로마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다. 그 뒤 로마의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초기 기독교 교회도 발달하게 된다.

 

샨르우르파 거리.

낯선 땅의 역사를 편년체로 늘어놓는다고 머리에 쏙쏙 들어올 리가 있나. 이왕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람 이야기나 하나 하고 넘어가자. 통치자들 중에 세계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굴까. 바로 샨르우르파에 있었던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루스 왕이다. 아브가루스 왕은 끔찍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예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예수에게 편지를 썼다. 병을 낫게 해주소서. 예수는 답장을 한다. 내가 요즘 바빠서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제자들 가운데 한명을 보내겠소. 예수의 보내진 70중 한 명인 타데우스(다대오)가 에데사 왕국의 궁전에 들어서는 순간 왕은 그의 얼굴에서 놀라운 환상을 보고 엎드려 절을 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환상이었다. 우리 왕이 죽을 병에 시달리더니 맛이 좀 간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시선이 문제가 아니다. 왕이 묻고 타데우스가 대답한다.

당신이 예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제자입니까?”

왕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을 진심으로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왕이 예수와 성부를 믿는다고 고백하자 타데우스는 왕에게 손을 얹었다. 병은 순식간에 나았다. 타테우스는 그곳에 머물면서 왕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했다. 아브가루스 왕은 성자로 추앙되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511일을 그의 축일로 삼고 있다.

 

숙소에서 바라본 샨르우르파.

에데사는 로마를 거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된다. 609년에는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지만 622년에 되찾는다. 하지만 638, 페르시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슬람군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1087년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에 편입된다. 이 에데사가 역사, 특히 유럽사에 이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계기가 또 한 번 있었는데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1차 원정 때 참가한 젊은 지도자 보두앵 백작은 에데사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다. 그는 12년 동안 이 왕국을 통치 한 뒤, 예루살렘 왕국의 성묘 수호자였던 형 고드프루아가 사망하자 그곳 왕으로 옮겨간다. 그 뒤 에데사 왕국은 침체일로에 놓이게 된다. 결국은 11441224일 이슬람의 강자 젠기(장기)의 대대적 공세에 의해 무릎을 꿇고 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스러운 크리스마스이브, 이 왕국에 끔찍한 불행이 닥친다. 남자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서방세계는 죽 솥처럼 들끓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게 아니냐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데사 왕국이 망한 데에는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십자군 원정사를 읽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다. 1차 십자군들이 어떻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 십자군은 나라에서 보내는 군인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병보충이 될 리 없었다. 싸우다 죽고 부상당해 죽고 늙어서 죽으니 병력은 갈수록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네 개의 나라를 세웠다. 물론 이슬람 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자신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곳이라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인 서방세계. 성스러운 도시 에데사를 탈환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2차 십자군이 출발하지만 땅 한 뼘 찾지 못하고 궤멸된다. 셀주크투르크 이후 에데사는 몽골, 티무르, 이집트의 맘룩 조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으로 치면 엄청나게 드센 팔자다. 1517년에 오스만투르크 땅이 된 뒤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1637년에는 지명이 에데사에서 우르파로 바뀌었는데, 그 근원은 이 지역을 거쳐 간 왕국 중의 하나인 오로아 또는 오흐하에서 온 것이다. 우르파가 오스만투르크가 아닌 다른 나라 땅이 되었던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끝난 뒤. 독일편에 가담했던 오스만투르크가 패전국이 되면서 처음에는 영국군이 그 뒤에는 프랑스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슬람 민병대는 이곳을 시리아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1920411일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1924년 이 지역은 새로 들어선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샨르우르파라는 지금의 이름은 1984년 얻게 됐다. 샨르는 영광스러운이란 뜻으로 터키 혁명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도시들에게만 허용되는 명칭이다. 우르파 지역 주민들은 이 이름을 얻기 위해 10년 이상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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