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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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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10. 08: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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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신당을 찾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신당을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와 묶인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당겼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내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부터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추억’, 즉 근현대 생활유산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와 관련한 짧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회의를 하는 중에 데스크의 눈이 내게 멈췄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추억’ 이라는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록 케이블TV라고 해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취재원 접촉. 전화 통화를 통해 알게 된 분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오문선 학예사였다. 여자 분이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근현대생활유산 수집을 전담하는 분이었다. 오 학예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세운상가 취재였다. 세운상가에 오래된 시계수리점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쓰던 수리용 공구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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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에 맞춰 대본을 쓰고 촬영동선을 짰다. 맨 먼저 시계수리점에 들러 물품 수집 과정을 담고 기증한 분의 인터뷰를 따고, 다음에 재개발 중인 모래내시장을 들러서 촬영하고…. 맨 마지막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찍고 관장 인터뷰를 따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동선이라 하루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촬영 당일 생겼다. 대본을 완성하고 PD, VJ와 시간을 조율하는 등 준비를 마쳐놓고 출발하려는데 오 학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수리점의 주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오 학예사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다행이 다른 아이템으로 부랴부랴 때웠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니 다음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주일 쯤 지난 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퇴원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오문선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곳이 보광동 신당이었다. 보광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남옥이란 큰 무당이 몇 달 전에 타계했는데,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수거작업을 할 때 촬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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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이라…. 낚시미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확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이 내게 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굿하는 과정을 밤새워 취재하고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도심에 있는 신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촬영 약속을 잡은 날은 12월17일.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 일찍 도착해보니 골목마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당이 있다는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바깥풍경을 스케치하는 중에 오 학예사가 도착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따라 들어가다 보니 약간은 냉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신당은 전실과 신당으로 구분돼 있었고 살림을 하는 공간은 별도로 있었다. 신당의 문 앞에 서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꼭 불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안온하거나 평안한 것과는 조금 다른…그물에 갇혔는데 그리 심하게 옥죄이지는 않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기침 참듯 안으로 꼭꼭 갈무리 하는 수밖에. 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신당은 서울 무당의 전통신당을 제대로 갖춘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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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수거팀이 도착하기 전이라 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당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징, 기물(器物), 종, 북, 명두 등 각종 무구(巫具)가 금방 사용하기라도 한 듯 제 자리에 놓여있었고 산신도, 최영장군상 등 무신도(巫神圖)들도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봤다. 살림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이나 요도 펴진 채 그대로였다. 누군가 잠을 자고 아침에 급히 나간 듯 모든 게 생생했다. 큰무당 장남옥 씨는 지난해(2010년) 10월에 타계했다. 1928년생으로 17세에 무당이 된 뒤 40년 동안 용산구 보광동에 거주하며, 둔지미 부군당의 당주무당으로 활동했다. 장남옥씨나 신당을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한다. 당주무당이란 과거에 마을마다 있었던 신당의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을 말한다. 또 부군당(府君堂)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그렇게 불렀으며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곳의 당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당주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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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옥씨가 당주무당으로 있던 둔지미부군당은 원래 지금의 용산로 6가(현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둔지미 마을이 1930년대 일제의 군사용지로 수용되면서 보광동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앉게 되었다. 어찌 보면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부군당인 셈이다. 장남옥 씨는 둔지미부군당뿐 아니라 서빙고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압구정동, 잠원동, 신사동 일대의 마을굿을 주관하던 큰 무당이었다. 굿거리와 재담에 능했다고 한다. 장남옥 씨의 유품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장 씨에게는 신내림을 해준 김점례라는 신어미가 있었다. 장남옥씨가 거주하던 신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분이 타계하기 전에 집을 보광동3경로당에 기증했는데, 조건은 신딸인 장남옥 씨가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리 정리가 되는 바람에, 장 씨가 타계한 뒤 집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무구 등 유품이 문제였다. 장 씨에게는 자식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륵인 셈이었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는 유품의 처리와 관련해서 회의를 열었고, 결국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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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학예사가 신당에 얽힌 사연을 거의 얘기했을 무렵 유품 수거팀이 도착했다. 훗날 신당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거 며칠 전에는 실측 및 촬영 작업을 했다. 유물을 포장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정교했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경로당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김영달 할아버지(69세)을 만날 수 있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 할아버지는 동네뿐 아니라 신당의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할아버지의 안내로 둔지미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에는 마을신으로 제갈무후(제갈공명)를 모시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여러 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부군당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명멸했다. 신당이나 무당, 무구들. 그리고 부군당.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잊혀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건, 무속 자체를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여 경원시 하는 시각이야 말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속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 고유의 신앙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이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그렇게 긴 세월 백성 곁을 지켜왔으니 전통문화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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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2008. 3. 31. 18:5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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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기억일 뿐이다. 그래서 직접 본 것인지 간접경험에 의해 어느 순간 뇌리에 틈입한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대장간 옆 자그마한 공터에는 튼튼한 나무말뚝이 몇 개 박혀 있었다. 평소에는 텅 비어 있어 바람이나 놀다 가지만, 가끔 그 말뚝의 용도를 확인할 기회가 왔다. 소를 묶어놓고 굽에 U자 모양의 쇠붙이를 붙이는 작업을 그 곳에서 했다. 쟁기질을 하는 일소는 아니었고, ‘구루마’라 부르던 우마차를 끄는 소가 대상이었다. 당시 큰 짐은 대부분 우마차로 날랐고, 우마차를 끌고 먼 길을 다니는 소의 굽에는 어김없이 쇠붙이가 붙어있었다. 어른들은 그 쇠붙이를 ‘징’이라 불렀던 것 같다. 그것의 진짜 이름이 편자라는 건 훗날에 알았다.(주) 아마 ‘개발에 편자’ 따위의 속담을 배울 무렵이었을 것이다. 기억에 특별한 오류가 없다면, 몇 번 편자 바꾸는 모습을 구경을 한 적이 있다. 워낙 어릴 적이라 구체적인 과정은 흐릿하지만, 편자에 못을 박던 걸 본 기억은 뚜렷하다. “얼마나 아플까…동물에게 왜 저런 짓을 하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게 전부였다. ‘편자의 존재’ 정도만 기억하고 살았을 뿐이다. 앨범을 들여다보듯, 어릴 적 추억을 펼칠 때마다 가끔 그 때의 광경이 고개를 내밀었고, 이제는 사라져서 다시는 볼 수 없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주)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징은 ‘신의 가죽 창이나 말굽·쇠굽 따위에 박는, 대가리가 크고 넓으며 길이가 짧은 쇠못’을 편자는 ‘말굽에 대어 붙이는 U자 모양의 쇳조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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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편자는 아주 사라진 게 아니었다. 편자와 다시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생김으로써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 후배기자들의 취재현장에 동행할 일이 있었다. 그들의 취재처가 바로 말의 편자를 갈아주는 곳, 과천 서울경마공원 장제소였다. 살면서 경마장 한번 가본 적 없으니, 말과 편자를 연관 지어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다. 수십 년 만에 보는 편자였다. 편자를 다른 말로 하면 ‘말 신발’이다. 편자를 달아주는 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장제(裝蹄)’다. 꾸밀 장(裝)자와 굽 제(蹄)자를 쓴다. 그곳에서 베테랑 장제사 신상경(45)씨를 만났다. 그는 25년째 말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를 통해 비로소 ‘발굽을 깎고 뜨겁게 달궈진 쇠를 대고 못을 치는 것’이 동물학대가 아니라 동물보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의 시각교정이었다. “말의 발굽에는 신경이 없어서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톱이나 발톱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히려 굽을 다듬지 않거나 편자를 대주지 않으면 말이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지요.” 승용마든 경주마든 모든 말은 발굽의 손상을 막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발굽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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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는 발굽의 마모 방지 외에도 질병 예방과 교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순서는 우선 발굽 상태를 검사하고 기존의 편자를 떼어 낸 다음 발굽이 자란 부분을 깎아내고 줄로 형태를 고른다. 편자를 발굽의 모양에 맞도록 수정하여 붙인 뒤 고정용 못을 박으면 끝이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최소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 걸리는 작업이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장제사에게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말은 400kg이 넘는 거구지만 겁도 많고 신경이 무척 예민하다. “말이 움찔하는 순간 비껴 맞아도 골절상입니다. 장제사들 중에 흉터 없는 사람이 없어요. 워낙 위험한 일이다보니 경력 5년이 안 되면 혼자서 작업을 못하게 합니다.” 신 장제사는 일을 하는 중에도 장제과정마다 상세한 설명을 잊지 않는다. “이 일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시끄럽지 먼지나지 땀나지….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회의가 들 때도 많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눈은 말에 대한 사랑과 일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에 대한 애착 없이는 어림도 없지요.” 교육생을 훈련시키는 도중에 자질이 없어 보이면 “이 길은 네 길이 아니다.”라고 바로 커트한다고 한다.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장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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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사가 갖춰야할 최고의 미덕은 성실이다. 물론 눈썰미와 타고난 솜씨는 필수요소다. 교육을 마치고 장제사가 되었다고 해도 실력이 떨어지면 의뢰가 안 들어온다. 말에게 편자는 생명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제사로 입문해서 3~4년이 지나면 개인별 능력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베테랑 장제사들은 말과 교감을 나눈다. 피부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신 장제사는 말에 대한 애정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말이란 동물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얼굴을 잘 보세요. 눈에 쌍꺼풀도 있고 아주 선하게 생겼거든요. 말과 교감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나 못하는 게 장제사인가 보다. 국내에 장제사는 약 50명 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15명 정도가 서울경마공원 소속인데 몇 명은 ‘개업 장제사’로 독립해서 일한다. 그밖에는 지방의 소규모 승마장 소속으로 일하기도 한다. 그가 장제사가 된 계기는 약간 드라마틱하다. 원래는 기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체중이 문제였다. 기수는 50㎏ 이하여야 하는데 그 당시 60㎏ 가까이 됐단다. 그래서 포기하려는 참이었는데 한 마필관리자의 권유를 받고 장제사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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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어선 길이지만, 신 장제사의 눈은 살아온 날에 대한 보람으로 빛난다. 경마장을 찾는 사람들이 장제사의 존재를 알기나 할까. 하지만 장제사가 없으면 경마 자체가 이뤄질 수 없다. 어디 경마뿐이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사회가 그나마 지탱되지 않던가. 그의 가장 큰 소망은 장제학교를 세워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1급 장제사가 되려면 최소 17년이 걸린다. 그리고 그만큼 되기 위한 과정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 어려운 길을 가려는 젊은이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 것도 그에겐 걱정거리다. 어렵게 교육생을 뽑아놓으면 고된 과정을 못 견디고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그는 장제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려나 이 나라에서 말이 영원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제사 역시 말이 있는 한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동서남북으로 파발마가 달리고 우마차가 짐을 싣고 고갯길을 넘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편자 박는 사람을 생활주변에서 보는 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숨어있는 장인(匠人), 장제사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전하는 건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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