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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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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2011. 5. 16.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경기도 포천 축석고개 삼거리에서 광릉수목원 쪽으로 가다보면
무림리라는 작은 안내판을 만나게 됩니다.
무림하니까 공중을 휙휙 날아다니거나 장풍이라도 팡팡 쏘아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상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쪽과는 전혀 무관한 동네입니다.
대신 서울 근교에 이런 곳이?”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옛 정취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좀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동네가 끝날 때쯤 되면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와 만나게 됩니다.
얼핏 봐도 예사로운 나무는 아닙니다.
세월의 무게로 중간쯤이 부러지는 바람에 키는 작아지고 여기저기 수술 받은 흔적도 역력하지만, 과거에 보여줬을 위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어쩌면 마을이 생길 무렵부터 당산나무로서 마을사람들의 병을 막아주고 농사가 잘 되게 하는 영험을 보여줬을지도 모릅니다.

그쯤에서 차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찬찬하게 느티나무를 둘러보다 보면, ! 하고 감탄사를 감추지 못하는 순간이 생길 것입니다.
느티나무의 아래쪽에서 샘을 발견했다면 말이지요.
샘이 있는 곳은 단순히 나무의 아래가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뿌리 사이에서 물이 솟아 샘을 이뤘습니다.
샘을 품고 있는 나무라니.
저로서는 처음 본 광경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하는 공동우물의 역할을 했을 샘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랩니다.
집집마다 꼭지 하나로 물을 흔전만전 쓰는 세상, 누가 그곳까지 물을 뜨러오겠습니까.
하지만 느티나무와 그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은 여전히 예사롭지 않습니다.

샘 주변은 꽤 정갈합니다.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여전히 청소를 하고 물을 퍼내주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새벽녘 슬며시 와서 나뭇잎이라도 치우고 갈 동네 어르신들의 발걸음을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옛사람들은 물을 무척 귀하게 여기고 위할 줄 알았습니다.
우물을 팔 때는 신성한 영역이라는 의미로 금줄을 띄웠습니다.
명절이 오거나 동제를 지낼 때는 마을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동우물부터 청소했지요.
고사를 지내도 떡 한 그릇쯤은 갖다 바칠 줄도 알았고요.
세상살이 팍팍해지고 오로지 만 알게 된 것은 공동우물이라는 공동의 존재가 사라진 뒤부터 아닐까 싶습니다.
우물에서 아낙들의 웃음이 사라진 뒤 세상이 그만큼 삭막해진 것이지요.
늘 그렇듯이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어느 날, 사는 게 왜 이렇게 팍팍할까 싶고, 언젠가 잃어버린 정이 그리운 분이 있다면 무림리를 찾아가 보세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와 샘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한번 들어보세요.

 

posted by sagang
2008. 5. 26. 10:4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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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분쟁이 그렇듯이, 그 날의 싸움도 애당초 심각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물가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던 월산댁이, 물을 길러온 초랭이(원래 이름은 철홍이다) 엄마를 보자 한 마디 툭 던진 게 발단이었다. “그러잖아도 찾아가려고 했더니만, 초랭어매 잘왔네. 거 애 단속 좀 지대로 혀” “예? 왜요? 우리 초랭이가 뭔 일을 저질렀남요?” “왜는 뭔 왜여. 어제 우리 집 텃밭에 들어가서 익지도 않은 토마토를 죄다 따서
” “어이구, 애새끼가 극성맞어서. 그런디 성님, 애들이 놀다보면 그러기도 허구….” 그나마 대화처럼 생긴 건 딱 거기까지였다. 월산댁의 입에서 “뭣이 어쩌고 어째?” 라는 호통이 천둥소리 만하게 터지면서 급기야 대판싸움으로 변한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월산댁이 폭발한 건, 초랭이 엄마가 말끝에 “당최 애를 키워봤어야 알지” 어쩌고 하며 구시렁거린 때문이었다. 차라리 호랑이 코털을 뽑는 게 낫지. 그러잖아도 애를 낳지 못해, 한이 수박 만하게 맺힌 여자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으니 그게 보통 일인가. 급기야는 우물가에서 엎치락뒤치락 육탄전이 벌어졌다. 곁에 있던 동네여자들이 뜯어말렸지만 서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찌 손 써볼 수가 없었다. 결국은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한주먹씩 뽑은 다음에야 씩씩거리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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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우물가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물론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성님, 아우님으로 돌아가는 게 이 땅의 여인네들이었다. 우물가에서 매일 만나야 하는 처지에 끝까지 원수처럼 살 수야 없었다. 전에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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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마다 공동우물이 있었다. 물이야말로 촌락이 형성되기 위한 필수요소였다. 지하수가 흔한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따로 샘을 갖기도 했지만 대개는 공동우물을 파기 마련이었다. 공동우물은 부정을 타면 안 되는 귀한 존재여서, 팔 때는 금줄을 치고 정성들여 작업을 했다. 우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만들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그네와 동네처녀 사이의 사연은 대부분 공동우물가에서 시작됐다. 고려 태조 왕건도 그런 인연으로 장화왕후를 얻었다든가…. 우물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뉘었다. 지하수가 풍부하게 흐르는 곳은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기 때문에 간단하게 돌을 쌓거나 시멘트로 우물을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는 항상 물이 철철 넘쳐흘러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썼다. 또 샘 아래쪽으로 흐르는 물을 가둬 빨래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물이 귀한 동네에서는 물길이 잡힐 때까지 땅을 파서 ‘노깡’(시멘트 토관)을 박거나 돌로 벽을 쌓고 두레박을 걸쳐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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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공동우물은 물을 길어가는 곳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소통과 정보교환의 장으로서의 역할도 컸다. 어젯밤 누구네가 부부싸움을 했다든지 누구누구 일가족이 야반도주를 했다든지 하는 소식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의 입으로부터 온 동네에 전해졌다. 그런 정보를 듣기 위해 샘이 있는 집의 아낙도 공동우물로 나오고는 했다. 공동우물은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이기도 했다. 힘겨운 노동과 고부간의 갈등이 반복되는 삶에서 조금이라도 비껴날 수 있는 유일한 틈이 바로 공동우물이었다. 아낙네들은 울화가 치솟아 오르면 물동이를 이거나 함지박에 빨래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우물가로 나갔다. 그 곳엔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대신 속을 풀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나와 있기 마련이었다. 퍽퍽퍽! 빨래방망이를 두드려대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공동우물에서는 가끔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샘 앞에서 애들을 씻긴다고 핀잔을 주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고, 물 가까이에서 빨래를 했다고 다투기도 했다. 또 동네마다 앙숙이 한 둘 쯤은 있어서, 누가 뽕밭에서 뭘 했느니 말았느니 흉을 보다가 그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공동우물에서 만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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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공동우물 풍경은 시골과는 조금 달랐다. 수돗물의 혜택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달동네나 변두리에서는 동네사람들끼리 돈을 추렴해서 공동우물을 팠다. 하지만 어렵게 물길을 잡아 우물을 파놔도 물은 여전히 부족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툭하면 물싸움이 나고는 했다. 도시의 우물은 주로 깊게 파서 두레박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두레박질이라는 게 도르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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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놔도 감질이 날 만큼 더딘지라 양동이를 줄 세워놓고 기다리게 마련이었다. 아침이나 저녁 무렵이면 그 줄이 더 길어졌다. 그러다 화장실 간 사이에 새치기를 했느니 원래 내 자리였느니 하는 자리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름철에 가뭄이라도 길어지면 우물은 시나브로 말라갔고, 그에 비례해서 사람들의 가슴은 쩍쩍 갈라져갔다. 그럴 땐 물 한 방울이라도 더 긷기 위해 밤새 우물가를 지키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공동우물이라고 갈등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비가 흔전하게 내려 물이 많을 땐 동네 인심도 넘쳐흐르게 마련이었다. 상추를 씻으러 왔다가 이웃에 한주먹 집어주거나 모처럼 사온 참외를 씻다가 슬그머니 찔러주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제대로 된 담조차 없이 사는 변두리 사람들의 삶이라 워낙 숨길 게 없기도 했지만, 우물가에 아낙 몇 명이 앉으면 누구네 집 부엌의 은수저 도둑맞은 얘기까지 낭자하게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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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골이든 도시든 공동우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어지간한 오지까지 수도가 놓여 있기 때문에 공동우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돼버렸다. 그 많던 우물은 메워져 흔적조차 없거나 뚜껑을 뒤집어 쓴 채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설령 메워지지 않은 우물이라도 가끔 강아지나 찾아가 얼굴을 비춰볼 뿐 찾는 이가 없다.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바가지를 얹어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우리네 어머니와 누이가 다시 우물가를 찾을 날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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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 18:42 사라져가는 것들

노인을 만난 건 양평장에서였다. 애초부터 장을 보러 양평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곳의 한 공원에서 연날리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간 터였다. 요즘은 연 띄우는 걸 보려면 축제장이라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연날리기대회였다. 그날따라 강변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바람 없는 날의 연이란 휘발유 없는 자동차나 다름 없었다. 아이들은 연을 꼬리처럼 매달고 씩씩거리며 고수부지를 달렸지만, 하늘 턱 밑에도 못 가보고 바닥에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래서 '읍내구경'이나 하자는 심사로 고수부지를 벗어났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장날이었다. 5일장이야 아무리 돌아다녀도 질리지 않는 구경거리의 진미가 아니던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튀김도 사먹고 싸구려 옷도 하나 사면서 모처럼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장터에서 나오는 길에 할머니를 본 것이었다. 노인 하나가 사람들이 오가는 복잡한 길가에 신문지 한 장만큼의 전을 펴놓고 있었다. 장터의 난전에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잡상인 중의 잡상인인 셈이었다. 전을 폈으니 파는 물건임에는 분명한데 너무도 초라하여 가격을 묻기도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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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에서부터 오그라든 시금치까지… 그 날 아침 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건 모두 끌고 나온 것 같았는데도 그리 초라했다. 물론 내 눈길을 잡은 건 잡곡이나 채소는 아니었다. 짚을 추려서 엮은 달걀꾸러미에 곧장 시선이 박혔다.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시골에서야 아직도 드물지 않은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 도시인으로 편입돼 다람쥐처럼 쳇바퀴나 돌리고 있는 처지로서는 뜻밖의 물건을 만난 셈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까짓 달걀꾸러미 하나에 뭘 그리 호들갑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게 육친처럼 반가운 사람도 다른 이에겐 낯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쪼그리고 앉아 얼마냐고 물었더니 반색하며 3천 원을 부른다. 놓아먹인 토종닭이 낳은 알이니 몸에도 좋을 거라고 입에 침이 마른다. 나는 꾸러미에 반하고 할머니는 달걀을 자랑하는 '동상이몽'이 이루어진 셈이다. 노인의 말이 그럴듯한 게, 달걀이 보통 것들의 2/3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 꾸러미면 열 개니 하나에 300원인 셈이다. 비싼지 싼지 가늠도 해보기 전에 누가 뺏을세라 덥석 돈을 치른다. 운도 좋지,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달걀꾸러미를 만나다니. 튼튼한 계란판이 남아도는 세상에 아직도 이런 게….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이었을 것이다. 앞에 앉은 아이의 등판으로 통통한 이 한 마리가 고물고물 기어다닐 만큼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런 날에 공부를 해야한다는 건 고역이었다. 허파에 봄바람을 가득 채우며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공부보다는 하품에 더 열중하던 끝에 수업은 끝났다. 하지만 소망대로 운동장으로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 그 날은 대청소 날이었다. 난 유리창을 닦는 당번이었다. 유리창에 매달려 하아하아~ 입김을 불고 있는데 느닷없이 비명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물 쪽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우물물을 쓰고 있었다. 간혹 펌프를 놓은 곳도 있었지만 청소를 하기 위한 허드렛물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서 썼다. 우물은 꽤 깊었다. 물길이 잡힐 때까지 판 다음 '노깡'이라 부르던, 시멘트 토관을 박아 넣었다. 비명은 예사롭지 않았다. 청소를 하던 아이들이 쏜살같이 우물가로 달렸다. 우물가에는 아이들 몇 명이 울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물을 길어 올리던 남자아이가 우물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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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들로는 뭘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짐승의 아가리처럼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그때 교무실 쪽에서 선생님이 맨발로 달려왔다. 선생님은 주변에 있던 긴 끈을 집어 한쪽 끝을 기둥에 묵고 한쪽 끝을 허리에 묶더니 줄을 타고 우물로 들어갔다. 우물 안은 이끼가 끼어 무척 미끄러워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우물에 빠졌던 아이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이어서 선생님이 올라왔다. 무사한 두 사람을 보며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허름하게 차린 아주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칠판에 글씨를 쓰던 선생님이 돌아서며 어찌 오셨냐고 묻자 쭈뼛쭈뼛 대답을 망설였다. "지가 **이 에민디유, 선상님이 물에 빠진 우리 애를 살려주셨다고 혀서…" 전날 우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러면서 손에 든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그 손으로 쏠렸다. 허름한 보자기로 싼 달걀꾸러미였다. "보답을 혀야 쓰것는디, 집에 이것밖에 웂어서…."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선생님은 머리에 화로라도 뒤집어 쓴 듯, 펄펄 뛰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달걀꾸러미를 교탁 위에 놓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갔다. 아! 달걀 한 꾸러미.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달걀 꾸러미가 아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달걀은 '귀한 것'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집에서는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나 밥상 위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달걀은 현금 대신 쓰였다. 그래서 비상시를 위해 아껴둬야 했다. 아이들이 학용품을 사야하거나 미술준비가 필요할 때 어머니는 돈 대신 달걀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쌀독 깊은 곳에 하나 둘씩 모았다가 열 개, 스무 개가 차면 꾸러미로 만들어 돈을 사거나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고는 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집에서도 그렇게 아끼고 아껴 모았던 달걀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가장 귀중한 그것을 자식의 목숨을 구해준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긴 다른 것을 드리고 싶어도 그럴 만한 게 있을 리 없는 살림이었겠지만…. 양평장에서 만난 할머니와 그 앞에 놓인 달걀 꾸러미 위에 40년 전 교실의 풍경이 겹쳐졌다. 이상하게도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그 시간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돌아섰다. 다 팔아도 몇 만원이 안 될 것 같은 물건을 앞에 놓고 떨고있는 노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죄가 될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것'의 자료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장을 벗어나는 내내 시선은 뒷꼭지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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