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는 ‘정미소’라는 이름의 기계식 방앗간이 적어도 두세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다. 방앗간은 학교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대부분 신작로 옆에 있었는데 추수철이면 벼 가마니를 실은 소달구지가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물론 방앗간이 벼만 찧는 곳은 아니었다. 설을 앞두고는 가래떡을 뽑았고 가끔 고추방아도 찧었다. 아이들은 동그란 관을 통해 매끈하게 빠져 나오는 하얀 가래떡을 얻어먹는 재미에, 떡을 할 때는 엄마를 따라가곤 했다. 방앗간의 터줏대감은 당연히 발동기였다. 발동기는 어지간한 바위만큼이나 커서 아무나 시동을 걸 수 없었다. 덩치 큰 사내가 쇠를 걸고 얼굴이 벌겋게 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돌렸다. 처음엔 시~~코~~ 시~코~ 시코하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돌아가다가 어느 정도 가속이 붙으면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돌리는 사람의 힘이 달리면 시코 시코 하다가 피이~하고 나자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발동기에는 커다란 구동바퀴가 붙어있었다. 그 육중한 쇠바퀴와 천정 구동축에 걸린 바퀴가 넓적한 피대로 연결되었다. 피대는 8자 모양으로 돌아가면서 천장에 곶감처럼 매달려있는 바퀴들을 돌렸다. 발동기에서 시작한 에너지가 피대를 타고 바퀴들을 돌리고 그 힘으로 쌀도 찧고 고추도 빻는 것이다.
방앗간은 힘과 기운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발동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조용하던 마을이 기지개를 켜며 두런두런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들판을 달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줬다. 방앗간은 가을이 가장 바빴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서 발동기가 쉴 새 없이 돌기 시작해서 초겨울 찬바람이 들판을 점령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농부들에게는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 찧어진 햅쌀이 가마니에 채워질 때 나던 그 향기는 어쩌면 그렇게 달콤했는지. 그렇게 한철을 보내고 겨울이 오면 방앗간은 특별한 날을 빼놓고는 쉬게 마련이었다. 그때부터는 참새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방앗간 마당은 소달구지나 드물게는 트럭도 드나들기 때문에 여느 마당보다 넓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최고였다. 사내애들은 구슬치기, 말뚝박기(말타기)놀이에 정신이 팔렸고 여자애들은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앗간은 또 숨바꼭질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왕겨가 쏟아져 쌓이는 곳이나 각종 장치가 있어 몸을 숨기기 좋았다. 왕겨더미에서 놀다가 온 몸이 껄끄러워 혼이 나기도 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보면 광식아, 정자야 부르는 소리가 고샅을 달려 메아리로 돌아왔다.
아이에게는 아픔을 내포한 방앗간이지만 농촌출신들에게는 추억의 보고이자 고향의 깃발이었다. 먼 길을 떠났던 이가 피로를 등에 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방앗간 발동기 소리가 먼저 반겨줬다. 고갯마루에 서서 아련한 그 소리를 들으면 지친 발걸음에 힘이 솟아 내닫듯 고개를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런 방앗간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80년대 이후 곳곳에 정미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방앗간 주인들의 기운이 떨어지는 것과 비례해 수익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었다. 요즘 농가에서는 집에서 먹는 쌀은 개인용 정미기계를 설치하여 필요할 때마다 찧는다. 그렇다고 모든 방앗간이 문을 닫은 건 아니다. 양철지붕은 벌겋게 녹슬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하얀 쌀을 쏟아내는 방앗간은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중년의 사내가 된 아이는, 지금도 시골길을 가다가 방앗간이 보이면 멈춰 서서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머니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리는 없지만, 어머니가 남긴 슬픔만은 어딘가 떠돌고 있을 것 같아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밥 굶지 않고 살만한 세상이 된지 오래건만, 왠지 견디기 힘든 공복감에 시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