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단 밑에는 입산자 색출 때문에 종종 마을에 나타나던 함덕지서 순경 두 명과 창 끝이 검게 그슬린 대창을 든 대동청년단 청년 예닐곱 명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뒤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군인들이 이열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 중에서]
결국 나는 그날 올레길의 초입에서 멈추고 말았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발길을 잡고 놓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려는 생각에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가니, 역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었다. 금세 목이라도 조일 것 같은 전율을 등에 지고, 그곳에 적힌 내용을 단숨에 읽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에서 곤을동의 비극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4․3유적지 곤을동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 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뎃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6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에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뎃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분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모살불’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서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순이삼촌’ 중에서]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한 마을이 그렇게 고스란히 지워졌구나. 이방인도 아닌 한 핏줄로 태어난 사람들의 손에 의해, 1세기나 2세기 전도 아닌 1949년에…. 그 비극의 안쪽에 나라가 죽고 살만한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었든, 아니면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들 간의 싸움이었든, 한 마을을 통째로 없앤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같은 무지한 ‘일반인’들은 4․3이라고 하면 그저 ‘좌우익의 충돌이 빚은 현대사의 운명적 비극’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가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가슴 저린 통증의 일단을 눈치 채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 역시 대단한 실감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비극이 낳은 참혹한 결과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다니.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순이삼촌’ 중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역사는 이른바 '4.3 사건'이라고 규정짓는다. 하지만 그 규정은 불길을 잠시 멈춘 휴화산처럼 아직도 ‘변신 중‘이다. 명칭도 4.3 사태, 4.3 사건, 4.3 민중 항쟁 등으로 시절이나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왔다. 아예 장식을 떼어버리고 4․3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4․3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책 몇 권을 쓴대도 부족하겠지만, 지난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즉, 본질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었다. 위원회는 4․3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를 2만500명~3만 명으로 잠정 추정하였다.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었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순이삼촌’ 중에서]
올레길을 통째로 포기하고 ‘사라져버린’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잔인한 가정이지만, 비극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 생각 없이 쉬어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입간판의 설명대로 세 마을이 나란히 있던 가운데로 냇물이 두 갈래로 나눠 흐르고 있었다. 마을과 바다는 그리 넓지 않은 모래밭을 경계로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냇물은 금세 바닷물과 만나 어우러졌다. 그 시절 마을에 살았을 어느 영감님을 흉내라도 내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돌담 사이를 내려갔다. 구름 사이에서 잠깐 잠깐 얼굴을 내미는 햇살은, 학예회의 아이들처럼 우쭐거리는 풀과 나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돌담 사이에 핀 꽃들은, 이 동네에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살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 천진한 얼굴을 자꾸 디밀었다. 아, 그 아이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귀청을 찢는 총소리와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그리고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을 연기. 돌아오지 않는 할아비, 아비, 삼촌…. 어린 누이의 숨죽인 통곡….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곤을동. 터를 일군지 700년이 넘도록 평화스럽게 살았다는 마을. 그 마을이 있었던 곳과 바다가 만나는 사이에는 까맣게 타버린 모래와 미처 부서지지 못한 자갈들, 설움을 결핵처럼 가슴에 품은 바위가 신음을 삼키며 누워있었다. 그리고 누구의 도끼질에 깨어졌는지 모를 조각난 비문 하나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