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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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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12. 19:06 사라져가는 것들

풀수록 신나는 추억의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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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대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박치규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난 정도가 아니라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출입이 찾아졌다. 그는 내가 다니는 읍내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내 상식으로 박 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출현할 이유는 누에씨만큼도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가정방문이 있을 턱도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모르는 가정방문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소문은 잘 익은 보리들을 간지럽히며 지나는 바람을 타고 금세 온 동네에 퍼졌다. 선생님이 맞선을 본 여자가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여자가 다름 아닌 빨간기와집 순자누나라는 소식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담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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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소문은 두어 주일이 지날 무렵 친구 상길이가 전해줬다. 상길이는 그날따라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아끼던 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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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도 나눠주듯 그 소식을 전했다. 박 선생님이 우리 동네를 다녀갈 때마다 보리밭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유 없이 밭 한가운데의 보리들이 땅바닥에 눕기도 하고, 사람 한 둘이 누울만한 공터가 생기고…. 그 날 이후에도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골목길을 배회했다. 누군가가 박 선생님과 순자누나가 보리밭에서 같이 나오는 걸 봤다느니, 그 때 순자누나의 옷에 지푸라기가 잔뜩 묻었더라느니…. 그 해 가을, 박 선생님과 우리 동네의 가장 예쁜 처녀 순자누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순자누나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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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에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보리밭은, 언제 풀어도 신나는 일이 툭툭 튀어나오는 추억의 보따리일 것이다. 보리밭은 그 혹독한 겨울의 추위 속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여리고 때로는 흔들리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민초들의 희망처럼. 봄이 되면 잔설을 뚫고 웅성웅성 올라오는 보리들 사이로 달래, 냉이 등 나물이 얼굴을 내민다. 나물 뜯는 보리밭의 누이들은 아름다웠다. 보리가 조금 자라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언덕에 누워 보리밭 사이로 총알처럼 솟아오르는 종달새를 보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뱃가죽이 등에 닿을 무렵이면 잊지 않고 보리는 익어갔다. 아이들은 자나깨나 배가 고팠다. 밀서리 보리서리에 빠진 아이들의 입 주변은 늘 거뭇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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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했다.

지금은 농촌에 가도 보리를 보기가 쉽지 않다. 거의 심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의 수요가 없기도 하지만, 벼를 벤 자리에 보리를 뿌리는 이모작을 할 만큼 그악스럽게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그래도 보리밭을 보고싶은 이가 있으면 남도 땅으로 가면 된다. 경남 하동이나 전남 보성, 벌교, 순천 등 넓은 벌을 지나노라면, 지금도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가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온 들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다. 보릿짚을 태우는 연기다. 길가에 서서 가만히 보노라면 그 연기 속에 우리들의 추억이 성큼성큼 걸어나온다. 박치규 선생님이나 순자누나, 그리고 나물 뜯던 누이들, 장난꾸러기 상길이가 손을 흔들거나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