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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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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하산케이프. 티그리스 강이 흐른다.

 

반과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일정보다 많이 늦어져 조금 서둘러야 할 판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트만(Batman). 하산케이프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 격인 큰 도시다. 반에서 바트만까지는 4~5시간 정도 걸린다. 조금 달리다보니 산마다 차양처럼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갈을 오가는 차들은 거의 없다. 골골마다 박힌 집들은 하나 둘 등불을 밝히고, 차에게 질세라 걸음을 재게 놀리는 민둥산들은 황혼을 안고 황금빛으로 빛난다. 가는 도중에는 2000m가 넘는 고개도 있단다. 눈이 쌓였을지도 모르니 좀 더 서둘러야 했는데. 나귀를 몰고 재를 넘는 장돌뱅이처럼 마음만 자꾸 초조해진다. 차장 밖으로 눈길을 던지니 이 시간이 주는 특유의 쓸쓸한 기운이 천지간에 가득하다. 아냐, 아냐. 애써 머리를 털어낸다. 잘못하면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 쉽지.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반에서 바트만으로 가는 길. 설산에 황혼이 드리우고 있다.

차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건만 반호수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벗어났겠지 싶어 내다보면 여전히 바다 같은 물이 곁을 따라온다. 하긴 반에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타트완 항구까지 페리가 다니는데 가로지르는 데만 4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바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마치 서해안의 어느 한적한 해변 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그나마 가끔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 나타나서 덜 삭막하다. 이런 동네에 살면 옆 마을까지 가는데도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런 고립된 삶은 상상만으로도 고독감과 행복을 동시에 준다. 이런 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혀 살다 슬그머니 죽는 나를 그려본다. 하루 이틀 꿔온 꿈은 아니지만.

 

타트완이라는 조그만 도시를 지나다가 삼성디지털플라자 간판을 보고 반가움에 눈을 떼지 못한다. 큰 도시에서는 늘 보는 간판이지만 이런 작은 도시까지 진출해 있다니. 이런 턱없는 반가움도 국수주의의 일종일까? 아무튼 뿌듯한 기분은 감출 수 없다. 국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재벌문제가 그 위에 교차된다. 재벌을 해체해야한다. 그들의 패악이 크다…. 무슨 소리냐. 그나마 그들이 있어서 우리 경제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관점의 문제일 수 있는 이 해묵은 논쟁. 사실은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양심이라고 부르는 잣대를 들이대면 그 결과가 명확해지는…. 재벌이 도덕과 양심을 되찾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던가. 혜택 한번 본 적이 없는 나는 간판 하나로도 이렇게 반가워하는데.

 

휴게소에서 만난 일가족.

먼 길을 갈 때 동승자보다 운전자가 훨씬 더 고단한 건 당연한 이치. 저녁도 먹을 겸 휴게소에 들른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식당 안에 있던 예닐곱 먹은 꼬마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와 나 사이에는 넓은 통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하얀 히잡을 썼는데 본래의 용도보다는 멋으로 쓴 것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드러내놓았다.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고 앉아있을까.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큰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며 놀고 있으려니 이번엔 엄마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작은아이도 찍어줬으면 하는 눈치다. 눈으로 OK 사인을 보냈더니 작은아이를 얼른 데려온다. 하지만 이 녀석 이방인들과 커다란 카메라를 보더니 느닷없이 울면서 몸부림을 친다. 엄마는 가자고 하고 아이는 안 간다고 하고…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이곳이 교조적인 무슬림들이 사는 동부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굉장히 개방적인 엄마임에 틀림없다. 이 가족에게 얼른 가장이 돌아오길.

 

바트만 시내의 아침 풍경.

다시 바트만으로 가는 길. 날은 온전히 저물어 온 세상이 잉크를 엎지른 듯 캄캄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어두운 빗길, 게다가 도로 사정도 그리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베이셀의 운전솜씨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불안한 눈치를 감추지 못한다. 오후 8시 15분, 드디어 바트만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휴우~ 3시30분에 출발했으니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온 셈이다. 딱 한 번 쉬고 내처 왔는데도 이만큼 걸렸으니 멀긴 먼 거리다. 비는 더욱 거세져서 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다. 내일까지 그치지 않으면 일정에 차질이 클 텐데. 제작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트만 주의 주도인 바트만은 별 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도시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도 30만 명 전후로 그리 많지 않다. 주요 농산물은 목화이고 주민은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여기서부터 50분 정도 걸리는 하산케이프를 가려는 사람들은 보통 이 도시에서 하루 묵고 아침에 출발한다. 저녁을 일찍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은 스산하고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하산케이프로 가는 길에 펼쳐진 밀밭.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는데, 장 선생이 안타키아(Antakya)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전해준다. 안타키아는 십자군 전쟁 등을 다룬 역사서에 안티오크 혹은 안티오키아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며, 성서에는 안디옥으로 나온다. 시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데 최근 시리아가 내정에 빠지면서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피난민들을 겨냥한 테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다. 시리아 내전은 터키와 시리아 사이에도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분쟁지역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출발하기 전에 호텔 로비에 앉아있자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서너 명이 나타나더니 탁자를 닦고 바닥을 쓴다. 한 사람이 해도 될 일인데 이렇게 여럿이 나눠서 한담? 역시 일거리가 없다는 뜻이겠지. 헌데,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나를 흘끔거려가며 수줍게 웃는다. 에구, 이러다 마음 설레면 안 되지.

 

삭막해 보이는 산들도 만나고.

하산케이프로 가는 길. 다행이 비는 그쳤다. 비 그친 아침 특유의 싱그러운 공기가 세상에 그득하다. 특히 길옆으로 파란 밀밭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풍경이 눈길을 자꾸 당긴다. 겨울을 견뎌낸 생명들의 푸르른 노래. 고향의 청보리밭으로 돌아간 듯 한껏 흥겨워진다. 기분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하산케이프는 꼭 가고 싶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고대도시. 이번 촬영지를 정할 때 내가 꼭 들러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곳이기도 하다.

 

티그리스 강가의 동굴집들.

다리를 건너면 하산케이프다.

한참 달리니 굽이쳐 흐르는 강이 나타난다. 티크리스 강이다. 아!! 나는 또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처럼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또 하나 문명의 시원에 왔구나. 지난해 말라티아에서부터 샨르우르파로 가는 동안 내내 함께 했던 유프라테스 강에 얼마나 감동을 거듭했던지. 내가 무슨 팔자가 좋아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만들어낸 두 개의 강을 연달아 볼 수 있는지. 강의 뒤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서 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벌집처럼 뚫려 있는 동굴들. 인류의 조상들이 살기 시작해 대대로 주거 공간 역할을 했던, 원시적 형태의 ‘가옥’들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만큼은 최근까지 동굴에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원시적’이라는 말이 안 어울릴 지도 모른다.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웠다는 다리. 교각만 남았다.

나를 반겨주던 강아지. 주인 없는 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눈에 들어온 첫 인상은 ‘쓸쓸하다’는 것. 이 세계적인 유적지에 사람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관광시즌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 강아지 몇 마리가 반갑게 꼬리치며 달려와 내 다리에 머리를 부비더니 아무것도 나올 눈치가 없자 다시 돌아가 게으르게 눕는다. 떠돌이 여행자가 줄 게 뭐 있겠니. 얼마나 순한지 이방인에 대한 경계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다리 건너 마을은 무척 쓸쓸해 보인다. 인구가 줄고 줄어서 3,000명에 불과하다고 하더니 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류문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도시 하산케이프가 이렇게 자꾸 쪼그라드는 것은 하류에 막고 있는 일리수 댐 때문이다. 댐 이야기는 차차 하겠지만, 좀 씁쓸한 농담이 이곳에 드리운 불안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댐 공사가 시작됐지만, 그리고 매년 “올해 말에는 잠긴다, 잠긴다” 하지만 티그리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 언제쯤이나 마을이 잠기느냐고 물어보면 “모르지요. 이미 50년 전부터 잠긴다고 했거든요”라며 웃는다. 아무튼 일거리는 없고 물에 잠긴다는 마을에 투자할 일도 없으니 인구는 자꾸 줄고 빈집도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각 끝에 지은 집.

세상사야 그러든 말든 강가에는 봄이 아주 깊숙이 와 있다. 아니, 아예 겨울이 다녀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둑에는 파란 풀들이 아우성으로 자라고 작은 꽃들도 앞 다퉈 봉오리를 맺고 꽃잎을 연다. 어제 그악스레 내리던 비는 티그리스 강에 누런 황톳물을 선사했다. 저만치 무너진 다리가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고 한다. 한때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과 낙타들이 지났던, 말 그대로 세계적 유적이다. 물론 댐을 막으면 저 다리도 잠긴다. 지금은 무너진 교각만 남았지만 천 년의 세월을 이야기해 주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내 눈길을 계속 잡아끄는 건 강가의 절벽마다 빽빽하게 들어앉은 동굴집들. 그리고 무너진 다리의 교각 끝에 덧대어 지은 흙집. 흙집에는 TV안테나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이 사는 게 틀림없다. 저들은 길고 긴 세월에 기대어 먹고 자고 싸고 빨래하고 아이들을 키우는구나. 이방인의 눈으로는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왜 저런 삶을 선택했을까. 외롭진 않을까. 무엇보다 머릿속에는 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우성친다. 낯선 땅에 와서 낯선 방식의 삶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posted by sagang

 

오늘 여행의 목적지인 악다마르 섬의 성십자가 대성당.

이번 여행의 출발지, 반에 있는 동안 묵었던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는 날이다. 사연도 참 많았다. 샤워를 하면 물이 방으로 들어와 수상침대에서 잔 것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PD와 카메라감독이 머물렀던 방은 난방장치가 안 돼 급기야 전기난로까지 동원했다. 문제는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호텔 전체가 정전되는 원시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그 뒤의 조치가 더 재미있다. 정전사태를 겪고 나서야 종업원이 벽에 걸려 있던 기존의난방장치를 가동하더란다. 왜 진즉에 안 하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위안 받기 어려운 사태들이었다. 그래도 떠나려니 여러 번 돌아보게 된다. 몸은 여전히 터키 식 식사를 거부한다. 쉬지 않고 진행되는 촬영으로 체력소모가 심하다보니 이중고에 시달린다. 그나마 아침은 호텔에서 삶은 달걀, 오이, 토마토 등으로 때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구는 라면 스프를 챙겨줬고, 혹시나 싶어서 컵라면까지 싸들고 갔지만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전기포트는 물론이고 뜨거운 물조차 구할 방법이 없다. 결국 짐만 늘어난 셈이 되고 말았다.

 

샤키르 씨의 부인과 형수가 빵을 만들고 있다. 

반 시내를 지나가는데 맷돌을 돌리는 여인의 동상이 있다. 가만? 이곳에서도 맷돌을 썼나? 당연히 썼겠지. 한반도보다 훨씬 전부터 밀농사를 지었다니까. 메소포타미아의 밀이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 땅으로 들어왔다는 가설이 맞는다면 출발지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때 맷돌도 함께 먼 길을 떠났겠지. 그리고 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연의 끈들이 얽히고설켜서 인류라는 이름의 동류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칼국수를 만들듯 홍두깨로 밀가루를 둥글게 민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엊그제 한 나절을 보냈던 샤키르 씨의 농가. 오늘이 빵 굽는 날이라고 해서 들르기로 약속했었다. 잠깐 들른다고는 했지만 정말 잠깐으로 끝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곳 농가들은 보통 일주일 먹을 분량의 빵을 한꺼번에 구워놓는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온 식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샤키르 씨는 단벌 외출복이 틀림없어 보이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저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농부가 농부 옷을 입어야 방송에 어울리지요. 하긴 새 옷이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분뇨로 질척거리는 마당을 몇 번만 오가면 새 옷인지 헌 옷인지 구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집안은 잔칫집처럼 들떠 있다. 빵을 만드는 헛간에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다. 낯익은 이 집 안주인 외에도 또 한사람의 여자가 있길래 누구냐 물으니 동서라고 한다. 보통 빵을 구울 때는 이렇게 친척 두 세 명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한다.

 

 

둥글게 민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돌려 넓적하게 편다.

빵을 굽는 절차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밀가루에 소금과 이스트를 넣고 반죽해서 부풀리는 건 옛날에 우리네 빵 만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머지는 칼국수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넓게 편 다음, 피자 돌리듯 손으로 돌려서(이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더 얇게 만든다. 땅에 묻은 큰 항아리가 바로 빵을 굽는 화덕이다. 안에 불을 피워 미리 달궈놓고, 둥근 기구를 이용해서 넓게 편 반죽을 항아리 벽에 찰싹 붙이면 된다. 가마 형태의 화덕은 탄디르라고 하고 이처럼 항아리 형 화덕은 테젝이라고 부른다. 도시에서는 빵을 사다 먹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대부분 직접 빵을 구워먹는다. 특히 이 집의 화덕은 지진이 났을 때 인기를 누렸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다른 집 화덕이 전부 부서졌는데 이 집 것만 멀쩡해서 동네의 빵을 전부 여기서 구웠다나.

 

항아리 화덕.

화덕에 불을 피울 때는 동물 배설물 말린 것을 연료로 쓴다. 손으로 연료를 던져넣고 그 손으로 빵을 구워도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두 여인은 연신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면서 깔깔거린다. 외간 남자에게 눈도 보여주지 않는 교조적 무슬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개방적이다. 여자들이 빵을 굽는 사이에 샤키르 씨는 마당에서 차이를 마시며 희희낙락이다. 저런 건 여자들이 하는 건데 뭘 구경하느냐는 듯, 자꾸 나를 불러낸다. 이번에 자랑하고 싶은 건 자신의 가계도.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는데, 부모가 이란으로 강제 이주됐다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돌아왔다고 한다. 오스만은 제국의 땅이 넓어지자 효율적 지배를 위해 점령지에 투르크족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앞서 밝힌 대로 이 동네는 씨족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전체가 샤키르 가문의 땅이다. 친인척도 무려 200명이나 된다. 샤키르 씨의 아버지는 두 명의 어머니에게서 모두 17명의 형제를 낳았다. 그 형제들 대부분이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형제 축구팀을 만들어도 후보까지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겠다.

 

화덕에 붙인 모습.

다 만들어진 빵.

전통적으로 밀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이곳에서는 사람을 노동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긴 우리 전통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이면 노동력이 증가한 것으로 본다. 딸을 시집보내는 집에서는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돈이나 재물을 받는다. 보통 열다섯 살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정도 살림을 배우고 열일곱 살쯤 시집을 간다. 최근 이 지역에서는 열네 살짜리 딸을 소 한 마리와 바꾼 일이 있었다. 좀 심했다고 빈축을 샀지만 아비는 당당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아직도 친족 중심의 혼인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 결혼은 보통 4촌끼리 한다. 그러다보니 숙모가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빵을 구우면서 저렇게 다정한 동서지간이 어쩌면 자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끔찍한 이야기도 해보자. 대부분은 장 선생이 틈틈이 해준 이야기다.

 

 

아내가 빵을 굽는 시간에 샤키르 씨는 손님들과 희희낙락.

이곳에서는 첫날밤을 보낸 뒤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었을 경우 가차 없이 살해하는 풍습이 아직도 있다. 신랑이 친정에 연락하면 아버지가 알아서 죽인다. 이유는 집안망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명예스런 일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는 신부 30명이 한꺼번에 자살한 일도 있다. 오죽 비인간적 풍습이었으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나오기도 했단다. 아무튼 군에 간 오빠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나와서 집안망신 시킨 동생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정 선생이, 말이 나온 김에 들려주는 것이라며 복수살인 이야기도 해준다. 이것 역시 결혼에 얽힌 얘긴데 4년 전 마르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형에게 딸을, 즉 조카를 며느리로 달라고 했지만 형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자신의 처가에 시집보내기로 한 것. 사건은 약혼식 날 터졌다. 총을 들고 나타난 동생이 형의 일가족을 난사한 것이다. 그 와중에 막내아들, 살인자로 보면 막내 조카만 살아남았는데, 잡혀가는 작은아버지를 향해 둘째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더란다. 그건 단순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기다려라는 뜻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 손가락질을 하는 순간 널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바로 집안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일도 다혈질인 쿠르드족의 특성 중 하나일까?

 

샤키르 씨 멋지죠?

역시 샤키르 씨 가족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엊그제 한번 연습을 했는데도 절차는 마냥 늘어진다. 비슷한 작별 인사가 오가고 동네사람과 강아지들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드는 일의 반복. 그래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다시 반 호수. 악다마르 섬을 찾아가는 길이다. 호수로 가는 길에는 미루나무들이 많이 서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무. 하늘을 흠모해 끝없이 오르는 나무. 왼쪽으로 거대한 설산이 따라온다. 이름을 물어보니 아르호스 산이란다.

 

멀리서 바라본 악다마르 섬.

악다마르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동네는 아탈란이란 곳이다. 이곳에서 섬까지는 4.8km. 유람선을 타고 15~20분 걸린다. 섬은 물 위에 떠 있는 듯 흐릿하게 흔들린다. 섬에 올라가 발을 구르면 푸욱! 혹은 퐁!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다. 배를 오르니 선장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지. 메르하바! 콜라이겔슨(수고하십니다) 어쩌고 친한 척 하면서 선장의 빵과 차이를 반쯤 빼앗아먹는다. 수다도 흐드러진다. 그런데 우린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눈 걸까? 호수는 넓고 물은 맑다. 잠시 뱃놀이를 나온 사람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이 호수에도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냥 이야기로 그치는 것만은 아닌 듯, 한때는 일본 탐사대가 본격적으로 탐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 뱃전에 서서 물속을 주시한다. 괴물이란 녀석이 불쑥 머리를 내밀지 알아? 이왕 온 거 세기적 특종이나 한번 해보자.

 

성십자가대성당.

섬은 가까이 가면서 바윗덩어리에 불과한 실체를 보여준다. 멀리서는 환상적이었는데. 섬이든 사람이든 조금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길이 700m, 너비 600m의 이 돌섬은 둘레의 연장길이가 2km밖에 안 되지만 사연은 하와이만큼이나 많다. 이 작은 섬에도 역사의 굴곡은 큰 흔적을 남겼다. 이곳에 왕궁을 지은 사람은 아르메니아 바스푸라칸 왕국의 초대 왕 기긱1. 915년부터 921년에 걸쳐 궁전과 성당을 지었다. 궁전은 세월 따라 지워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 십자가 대성당’. 수도사들은 간데없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 교회는 1116년부터 1895년까지 아르메니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대성당이었다. 1915년까지도 수도원으로 썼는데 바로 그해 이곳의 수도사들이 모두 학살되고 교회는 파괴됐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였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검은 손이 이 섬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현재 서 있는 건물은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설의 섬.

잠시 교회 마당에 앉아 이 섬에 얽힌 전설을 떠올려본다. 옛날 이 섬에 작은 왕국이 있었다. 왕에게는 타마르라는 이름의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건너편에 사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건너편이라면 배가 출발한 곳쯤 되겠지.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지만 공주와 평민의 사랑이라니. 전설이나 옛날이야기가 선호하는 비극의 조건을 충분히 품고 있는 셈이다. 청년은 밤이면 헤엄을 쳐 섬까지 건너와 공주와 밀회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길수 없었다. 왕이 둘의 관계를 눈치 챈 것이다. 어느 비바람이 거센 밤. 왕은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흔들었다. 공주가 부르는 것으로 안 청년은 폭풍우 속에서도 힘차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왕은 등불을 들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등불을 따라 계속 방향을 바꾸던 청년은 얼마 뒤 힘이 빠져 더 이상 헤엄을 칠 수 없었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 타마르, 타마르였다. 그 사실을 안 공주도 호수에 몸을 던졌다. 지금도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아! 타마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론 이 섬의 이름 악다마르는 그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 외부의 부조들.

교회 내부의 돔형 천장. 프레스코화들이 대부분 지워졌다.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방. 거의 무너졌다.

이젠 교회 구경을 해보자. 이 교회가 유명한 건 외부 벽에 새겨진 부조들 덕분이다. 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벽의 맨 오른쪽에는 한 남자가 서 있고 사자 두 마리가 거꾸로 서서 발을 핥는 그림이 있다. 우상숭배를 거부했다가 사자 우리에 던져졌다는 다니엘 성인이다. 금단의 열매를 따는 아담과 이브, 사자를 죽이는 삼손, 세례 요한,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 일일이 머리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 부속 교회, 기도실 등을 지나 중앙 홀로 들어가게 돼 있다. 중앙 홀의 벽에는 다양한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외부 벽이 구약이라면 내부 프레스크화들은 신약성서를 소재로 했다. 성화들이 상당부분 지워져 있는데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나처럼 종교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한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뒤에서 본 교회. 

언덕에서 바라본 교회와 건너편의 설산.

 

밖으로 나와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본다.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던 방들은 거의 다 무너져 있다. 그러든 말든 나무들은 저희들끼리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으며 세월을 헤아리고 있다. 교회를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간다. 토끼들이 놀던 자리, 양지바른 곳에는 흙들이 부드럽게 풀어져 봄맞이를 하고 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섬과 눈을 뒤집어 쓴 알투스 산의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수도사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 다스리는 일도 쉽지 않았겠다.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욕심도 미움도 한 뼘의 땅도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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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호수의 하늘.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점심은 반 시내로 다시 돌아가 해결하기로 한다. 반 성채 인근에는 눈을 씻고 봐도 구멍가게 하나 없다. 오늘 찾아가는 집은 피데 전문점. 피데는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납작하게 만들어 화덕에 구운 터키의 전통 빵이다. 어디 가나 쉽게 이 피데를 볼 수 있다. 야채와 고기, 치즈 등을 올려서 굽기도 한다. 타원형과 원형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피자와 사촌 쯤 돼 보인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인 피자가 터키의 피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꽤 설득력을 얻는다. 피데 굽는 광경을 한참 구경하는데 주인이 한번 해보겠느냐고 나를 살살 꼬인다. 피데는 밀가루 반죽을 긴 주걱에 얹은 다음 화덕 안쪽에 던져서 굽는다. 제대로 위치를 잡아야하기 때문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다할 내가 아니지. 주인이 시켰으니 잘못된들 내 책임이랴. 화덕 앞에 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밀가루 반죽을 던진다. 그럼 그렇지. 초보자가 잘 할 리가 있나. 여기저기 불시착의 연속이다. 하지만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는다. 결국 먼 나라 사람끼리 친구가 되는 걸로 ‘피데 사건’은 마무리 된다.

 

피데집 사장님. 잘 생겼지 않은가.

느닷없이 만난 눈밭.

상치 못했던 상황과 부딪힌 것은 반호수를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반 호수를 간다 간다 해놓고 이틀 째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제야 고개를 넘는 중. 어느 고갯마루에 오르자 느닷없이 풍경이 바뀌어버린다. 어라? 이게 무슨 조화지? 눈앞에는 끝을 헤아리기도 힘든 설원이 펼쳐져 있다. 조금 전에 ‘맨땅’을 지나왔는데…. 그리고 이 높은 곳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니. 아나톨리아가 예측 불허의 상황을 곳곳에 감춰두고 있는 땅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상상을 한참 초월하는 상황이다. 눈도 그냥 눈이 아니다. 최소 20cm는 쌓여있다. 일본의 홋카이도가 부럽지 않은 눈의 세계. 나는 신이 났는데 운전하는 베이셀은 영 걱정스런 눈치다. 차를 세우더니 저만치 걸어간다. 이 정도 눈이면 앞길이 막혔을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인가도 없는 곳에 꼼짝없이 갇힐 판이다. 한참 있다 돌아온 베이셀이 다행히 차가 못갈 정도는 아니라고 전한다. 그럼 잘됐다. 차에서 내린 김에 눈밭에서 좀 놀다가야지. 나는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고 카메라는 웬 떡이냐, 따라다니고. 알고 보니 이 넓은 평원은 밀밭이라고 한다. 고원지대인지라 겨울에는 눈에게 자리를 내주고 봄이나 돼야 밀의 영역을 되찾는 것이다.

 

눈길을 헤치고. 저만치 쉬판 산이 보인다.

길을 내려오다가 고즈넉하게 숨어 있는 마을 하나를 만났다. 왼쪽에는 고대 우라루트 왕국이 자리를 잡았다는 우라루트 성이 남루를 외피로 두른 채 남아 있다. 반 성채와 같은 시기에 축조됐다고 하니 3,0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리고 저만치에는 거대한 산이 하나 서 있다. 쉬판 산이라는 이름의 4,000m급 고산이다. 산이 호수에 들어앉아 있는 듯 산과 호수의 경계가 흐릿하게 지워졌다. 여기서부터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짐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모호하고 신비로워 보일뿐이다. 신이 사는 산의 모습이 저러할까? 마을이 하도 정감 있게 생겨서 이름을 물어보니 아야느스쾨이라고 한다. 왜 밑도 끝도 없이 이 작은 마을에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눈이 쌓인 마을 어귀를 기웃기웃 돌아다닌다. 이 마을은 모든 것이 작다. 아주 작은 학교, 작은 과수원들, 작은 모스크…. 개 짖는 소리와 양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시도 때도 모르는 닭울음소리도 간간히 끼어든다. 거기에 아이들 노는 소리. 아이들은 눈 위에서 간이 썰매를 탄다. 우리로 보면 비료부대 썰매를 타는 것이다. 모든 게 ‘너무’ 평화롭다. 이렇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화로워도 되는 거야? 안온한 기운이 올가미가 되고 덫이 되어 내 발목을 꽁꽁 묶는다. 나는 그동안 너무 삭막하게 살아왔구나.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내 발길을 잡았던 아야느스쾨이. 쾨이는 마을이란 뜻이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명태 덕장 꼴이 되는 바람에 반 호수를 둘러싼 길은 엉망이다. 차가 하도 덜컹거려서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다. 그래도 베이셀은 능숙하게 앞으로 나간다. 왼쪽에는 반 호수가 차를 따라 달리고, 오른쪽에는 과수원과 작은 집들이 푸른 물빛에 그림자를 담그고 있다. 호수가 곁으로 바짝 다가서는 순간, 바다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누가 이 넓은 물을 호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은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맑고 잔잔하다. 반 호수는 거대한 호수지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는 바람에 파도가 거의 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저나 대체 이런 걸 무슨 색이라고 하지? 파랑? 녹색? 아니면 비취? 사파이어? 아! 부질없다. 구별하고자 하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색을 자신들이 만든 분류 안에 포함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일 뿐. 반 호수의 물은 일곱 가지 색깔을 띤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하려는 오만이라니. 그냥 호수의 색깔일 뿐이다. 반 호수의 색깔… 호숫가에는 새알처럼 생긴 돌들이 한없이 깔려 있다. 돌들도 색깔이 제각각이다.

 

반 호수에 깔린 자갈들.

이쯤에서 반 호수에 대해 소개를 하고 가는 게 예의겠지? 이 호수는 해발 1,646m의 고원에 위치하고 는 터키 최대의 호수다.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고도가 설악산 대청봉(1708m)에 근접하는 셈이다. 호수를 둘러싼 호안선이 약 500km나 되는데 쉽게 풀어보면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가 다섯 시간은 걸려야 호수 한 바퀴를 구경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호수 주변의 도로사정을 감안한다면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평균 깊이는 171m, 가장 깊은 곳은 451m나 된다고 한다. 이 호수는 세계 최대의 염호(鹽湖)로 소금의 농도가 매우 높다. 물이 들어오는 하천은 있는데 물이 나가는 하천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즉, 대부분의 물이 증발된다는 얘기다. 호수 밑바닥에서는 물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에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다. 곳에 따라 염도가 달라 상류 쪽 강 부근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반 호수와 쉬판 산의 아련한 풍경.

저만치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언뜻 봐도 어선들이다. 어선 중에서도 통통배를 벗어난 중급 어선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정말 바다의 풍경을 그대로 닮았다.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마침 고기잡이를 마치고 온 어부들로 늦은 오후의 호숫가가 시끌벅적하다. 아니, 아무리 봐도 호숫가라는 생각은 안 들고 우리나라 서해안 어느 항구쯤에 도착한 기분이다. 오늘 잡은 물고기들을 배에서 내리는데 어황은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물고기를 담은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상자의 수가 몇 개 안된다. 반 호수에서 잡히는 고기는 단 한가지다. 바로 ‘임지케파르’라고 부르는 청어처럼 생긴(크기는 좀 작다) 물고기다. 보통은 물고기라는 뜻의 ’발륵‘이라고 부른다. 이 호수의 어종이 단 한가지이기 때문에 그저 ’물고기‘인 것이다. 소금호수에서 아무 물고기나 살 수 없는 건 자명한 일. 결국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다른 말로 독한 녀석들만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도 바다가 아닌 바다에서 물고기가 산다는 게 신기하다. 이 물고기는 주로 바비큐용으로 쓰인다.

 

반 호수 유일한 물고기인 임지케파르.

어부들은 눈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2011년 지진으로 16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부터 해준다. 진앙지가 이 호수였던 것이다. 아픈 기억은 뼈에 깊이 각인 되는 법. 이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끔찍했던 재앙이 가장 큰 화제일 수밖에 없다. 눈을 들어 어림해본다. 땅이 통째로 흔들렸을 그때 이 잔잔한 호수는 얼마나 크게 뒤채였을까. 어부 하나가 저쪽 산허리까지 물이 치고 올라갔다고, 할머니에게 악몽을 하소연하는 손자의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어부들의 이야기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현실로 이어진다. 우리네 바다처럼 이 호수도 어자원이 말라가고 있는 걸까. 애써 잡은 물고기도 값이 싸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이들이 받는 값은 1kg에 1.5리라다. 우리 돈으로 치면 미처 1,000원도 안 되는 액수다. 그걸로 살 수 있는 게 빵 두 개에 불과하다고 늙은 어부는 주름을 더욱 좁힌다. 그 얼굴엔 삶의 기대나 희열 대신 피곤이 그득하다. 게다가 기름 값이 갈수록 오른다고 또 한숨이다. 터키의 기름 값은 우리보다 비싼 편이다. 배에 쓰는 디젤연료가 1리터에 4리라인데 한번 나가면 30~40리터 씩 쓴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밑지는 장사인데 이들은 또 날마다 호수로 나간다. 어로행위는 겨울에 주로 하는데 4월15이면 끝난다. 이후에는 산란기이기 때문에 금어기간으로 정했다. 호수로 나가지 않을 때는 양을 키운다.

 

멀리 나갔던 어선들이 속속 들어온다.

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에게 하소연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부들은 뭔가 자꾸 털어놓고 싶은 눈치다. 이들은 정부에서 아무 지원도 안 해 주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쿠르드족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흑해 쪽 어부들은 기름 수급 등에서 편의를 봐주는데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바로 그 증거란다. 더구나 외부에서 오는 후원조차 중간에 가로채서 폭탄 만드는데 쓴다고 이구동성이다.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들의 낡은 배만큼 서글픈 현실이다. 어쩌면 이들의 눈물로 호수가 자꾸 짜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고기가 담긴 상자를 나르는 어부들.

배는 계속 들어온다. 이번에 들어온 배에서 나온 상자는 여섯 개. 아까 다른 배에서 나온 세 상자보다는 낫다. 늦게 들어오는 배는 물고기를 찾아 좀 더 멀리 나갔다 오는 것이다. 저만치 마지막 배가 들어온다. 저 배는 만선의 꿈을 이뤘을까? 굳이 부두에서 서성거리다가 상자수를 헤아려 본다. 하나, 둘, 셋. 기껏 세 상자라니…. 결국 또 헛수고를 한 셈이다. 9척의 배가 모두 돌아온 게 3시50분. 부두는 벌써 파장 분위기다, 중간상에게 넘길 건 넘기고 오늘 저녁 먹을 것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하나둘 떠나는 어부들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꼭 석양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호숫가는 적요만 맴돈다. 배 위를 맴돌던 갈매기들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나 둘 자취를 감춘다. 호수는 여전히 유리처럼 매끄럽다.

 

배들이 정박한 부두.

다섯 시가 가까워지면서 호수 저쪽에서부터 검은 카펫을 깔듯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짐승 하나가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차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사위를 점령한 뒤다. 헌데, 이게 웬일? 총을 멘 몇 명의 청년들이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가슴이 덜컥한다. 시골길에서, 더구나 밤에 총을 멘 젊은이들이라니. 여기는 강성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 아닌가. 그런 분위기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닌 듯 차안의 공기가 일순 무겁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베이셀은 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그대로 차를 몰아 지나친다. 무엇을 하는 젊은이들이냐고 물어봤더니 사냥꾼들이란다. 휴우~

 

설산 위로 갈매기가 나르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부군과 반정부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시골에서 총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코루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단다. 쿠르드족이지만 정부에 고용돼서 동족 게릴라를 잡는 사람들이다. 옛날 ‘일제 앞잡이’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쿠르드족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월급을 받아서 쿠르드족의 투쟁자금으로 넘기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 참…. 쿠르드족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씨족단위의 개념이 강해서 단합이 쉽지 않다. 어쩌면 그런 특성이 아직도 나라를 세우지 못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쿠르드족이 잘하는 건 싸움과 목축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을까. 실제로 쿠르드족은 싸움에 있어서 발군이다. 6.25때도 터키군의 쿠르드족이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쿠르드족의 용병 역사는 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 부시가 치른 걸프전이나 아들 부시가 치른 이라크전(전쟁이라기보다 일방적 공격이었지만)에도 쿠르드족이 용병으로 고용됐다.

 

호수에 어둠이 깃든다.

차가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장 선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 이런 시골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건 아주 간단하다고 한다. 콜타르를 대충 뿌리고 나서 그 위에 콩자갈(아주 작은 돌)을 쓰윽 뿌리면 그걸로 끝이란다. 우리처럼 롤러로 밀고 다지고 하는 과정은 그 위를 다니는 차들이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아스팔트를 깐 길을 지나간 차들은 바닥이 콜타르 범벅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공사를 대충 하니 겨우내 도로는 누더기가 되고 여름에는 다시 ‘콩자갈 공사’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동안 차는 반 시내에 도착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이 어두운 색깔의 옷에 둘러싸여 유령처럼 배회하는 도시 반. 반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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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성채로 올라가기 전 나는 자꾸 미루나무에 눈을 빼앗겼다.

새벽 두 세 시나 됐을까? 살얼음처럼 얇던 잠은 금세 금이 가고 만다. 민감한 신경줄을 가진 사람은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몇 시간 늦춰 산다는 것조차 이렇게 힘이 드는구나. 예외 없이 머릿속에는 ‘생각충’들이 바글거린다. 밑 짧은 잠으로는 다 털어내지 못한 피곤을 안은 채 몸을 일으키다 하릴없이 거울과 눈이 마주친다. 익숙하고도 낯선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이 사람은 왜 이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근 9개월 만에 나선 긴 여행, 쉬는 동안 제멋대로 이완된 근육들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마음은 서울에서의 번잡을 그대로 껴안고 있다. 얼마 전부터 가슴에 자리한 은은한 통증은 지병으로 자리 잡을 모양이다. 비온 뒤 솟아나는 잡초처럼 자꾸 고개 드는 잡념을 누질러보지만 제멋대로 분열과 번식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얼마나 더 걸어야 마음에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 창공을 날 수 있을까.

멀리서 바라본 반 성채. 역광이라 별로 아름답진 못하다.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본 반 성채.

아침 일찍 찾아간 반 성채(Van Kalesi) 앞에서 잠시 문제가 생겼다. 영상카메라는 들어갈 수 없으니 수도인 앙카라에 가서 허가증을 받아오란다. 여기서 앙카라가 얼마나 먼 곳인데. 결국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는 것이다. 유연성 없는 관료주의에 기가 질린다. 내가 멘 스틸카메라는 되고 뒤를 따라오는 영상카메라는 안 된다? 요즘은 대부분 전문가용 스틸카메라를 영상용으로 쓴다. 다만 필요에 따라 보호용 외장 케이스나 마이크를 장착하기 때문에 커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외장만 벗기고 올라가면 되겠네? 아주 간단한 잔머리에도 무사통과다.

 

대부분은 흙벽이다.

반 호수의 동쪽이자 반 시 외곽 거대한 바위산에 쌓은 토성(土城). 하얀 눈을 머리에 쓴 반 성채는 마침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장엄하게 빛난다. 이 성은 고도의 문명을 구축했던 우라루트 왕국의 사르두르 1세에 의해 BC 825년에 세워졌다. 3,000년 가까이 된 고대의 유물이란 뜻이다. 너비는 70~80m에 길이 1.5km, 높이는 80m.

2월 말인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관람객은 거의 없다. 두껍게 쌓인 눈 위에 어제 찍힌 발자국이 분분하게 남아있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저 아래로는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마치 미니어처로 꾸며진 동네를 보는 것 같다. 반호수로 가는 길에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그림처럼 서 있다. 하늘에 닿으려는 열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가슴에 잔물결로 자리한다. 긴긴 세월 이곳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누가 일부러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셀 수없이 많은 왕국과 권력이 이곳에서 영욕을 맛보았다. 지리적으로 근접한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셀주크와 오스만투르크. 그들은 이 성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 각자의 흔적을 조금씩 남겼다. 그래서 각기 다른 건축자재가 섞인 복합적 구조의 성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위 위에 쌓은 흙벽. 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기도 했고 흙벽돌에 밀짚 같은 섬유질을 넣기도 했다. 과거 우리 땅에서 흙벽돌을 찍을 때 볏짚을 썰어 넣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튼튼하게 짓기 위해 흙에 타조알을 섞기도 했단다. 그런 다양한 공법들이 세월과 지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별 보호조치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비바람에 마모돼 가고 있다.

 

멀리 반 시내가 보인다.

성 꼭대기에 올라가도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우라르트 왕 아르기스티 1세의 무덤 등 몇몇 유적이 있지만 특별한 감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반 시내와 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경치가 일품이다. 내 시선을 잡고 오랫동안 놓지 않은 것은 남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원. 아니, 폐허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이는 거대한 공터다. 성에서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다. 성 위에는 가드레일 같은 것을 전혀 해놓지 않아서 나 같은 중증 고소공포증 환자는 언뜻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폐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역사의 비극 속에서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기둥은 찬바람 속에 을씨년스럽다. 세상에는 살아 있어서 슬픔을 전하는 것도 있구나.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폐허가 바로 원래의 반이 있던 곳이다. 새로 세워진 반의 반대쪽인 셈이다. 그 도시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았다. 하지만 1915년 이후 이 인근에서 아르메니아인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3,000년 동안 번성했던 도시도, 그곳에서 누대로 살아온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저렇게 황량한 폐허만 남은 것일까.

 

흙벽들이 세월에 녹아가고 있다.

입에서 꺼내기조차 저어돼 미뤘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여기서 털고 가야겠다. 바다처럼 넓은 반 호수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5,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한때 번성을 누렸던 우라루트 왕국이 사라진 다음, 이곳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그 사이에 숱한 왕조가 명멸했던 사연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때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고 비잔티움 제국을 거친 뒤에는 이슬람시대가 열렸다. 1045년 셀주크투르크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아르메니아 왕국의 1,000년 역사는 기록 속으로 사라진다. 셀주크투르크의 뒤는 오스만투르크가 이었다.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이곳에 삶터를 잡고 살아갔다. 사람살이에 왕국이나 제국이나 공화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참담한 비극이 닥친 건 근세 들어서였다.

 

저 아래 보이는 공터가 원래 반이 있던 곳.

1877년 발발해 2년 동안 계속된 오스만투르크-러시아 간 전쟁에서 오스만이 패한 게 화근이었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더욱 증폭됐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 격이지 뭐. 그런 와중에 1894년 오스만투르크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세금을 고의적으로 무겁게 매기자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과 쿠르드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학살을 시작했다. 1894년 이후 2년 동안 10만 명에서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4년 오스만은 러시아를 재차 침공했지만 역시 지고 말았다. 오스만은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1919년 4월20일 반에서 군인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인을 구하려던 아르메니아 청년 둘이 사살 당하자 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빌미로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모든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법이 입안됐다. 강제 수용되는 과정에서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범죄와 기아, 질병으로 죽어갔다. 수용소 안에서도 조직적인 학살이 이뤄졌다. 3,000년 역사의 반 시는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미나레트만 을씨년스럽다.

한마디로 증오와 광기가 난무한 인종청소였다. 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을 터키 측에서는 30만 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150만 명이이라고 주장한다. 제 3자적 시각으로도 최소한 50만에서 60만 명 정도는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주 먼 옛날이 아닌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세기의 비극이다. 어떤 설명으로도 그 같은 범죄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스만투르크를 이어받은 터키에게도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일 수밖에 없다. 내 역시 아무리 터키에 우호적이라고 해도 이 비극을 외면하고 갈 수는 없다. 반 호수를 둘러싼 너른 평야에서 양떼를 몰고 밀농사를 지으며 평화의 노래를 불렀을 아르메이아인들. 그들은 간데없고 기둥 몇 개만 남아 비극을 애기해주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아득한 절벽은 또 아득한 세월이기도 하다.

성의 맨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반 호수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풍경 앞에서는 역사가 흘렸던 숱한 피조차 무색해진다. 성의 맨 꼭대기에 올라 넋을 놓고 사방을 바라본다. 그러다 선글라스를 쓰고 언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운전사 베이셀과 눈이 마주친다. 이 친구는 선글라스만 씌워놓으면 영화배우 부럽잖게 멋있다. 느닷없이 장난기가 돌아 손가락을 치켜들며 “You look great” 했더니 이 친구 “Thank you” “Thank you” 어쩔 줄 모른다. 짧지만 영어를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대화는 문제가 없다. 베이셀은 칭찬 받아 마땅한 친구다. 터키에 갈 때마다 보는 것이지만 운전사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차 안에서 쉬거나 본인의 볼일을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제작팀을 따라다닌다. 그것도 그냥 구경 삼아 가는 게 아니라 트라이포드나 렌즈 가방을 들고서.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Thank you”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친구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고백하듯 말한다. “I am happy” 그래, 그래.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하다면 나야말로 행복하다. 사실은 나도 너를 볼 때마다 행복해. 세상에 성실한 청년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어디 있으랴.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가 떠오르는 바람에 마음에 드리워졌던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반 호수가 보인다.

양지바른 언덕 쪽엔 벌써 봄이 푸르게 깔려있다. 땅은 젖가슴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틈틈마다 작은 풀들을 밀어올리고 있다. 아, 먼저 살다간 이들이여. 그대들의 욕망이 아무리 하늘을 찔러도 이 풀잎 하나만도 못한 것을. 그대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해매다 싹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 홀로 미리 온 봄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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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키르 세케 씨의 딸과 아들. 아이들부터 사진을 찍어주면 그 집에서 환영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샤키르 세케 씨의 농가를 찾은 건 애당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저 시골길을 지나던 중이었을 뿐이다. PD의 제안이었겠지. 그는 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니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양을 많이 찾아다녔든지 양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양을 사고파는 시장에 가봤으니 이왕이면 목축 농가도 들러보자는 PD의 주장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내 일만 많아진 거지 뭐.

 

샤키르 씨네 집. 왼쪽이 정부에서 새로 지어줬다는 집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고백하고 가자. 방송이 나간 뒤에도 여러 번 들은 질문이지만 세계테마기행에는 각본이 없다. 오로지 무대뽀 정신만 갖고 다닌다. 촬영기간 내내 대본을 받거나 연출 지시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걸 맨땅에 헤딩으로 해결하라니. 촬영장소를 미리 헌팅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출연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다가 저만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럼 정 PD가 말한다. “그림 괜찮지 않아요?” , 말은 쉽지. 안 괜찮다면 안 찍을 거야? 이미 익숙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한번 올라가볼까요?” 그러면 카메라가 따라오고 나는 안녕하세요보다 더 익숙해진 인사 메르하바!(안녕하세요)”를 외치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워낙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미리 섭외할 틈도 없고, 그럴 인력도 없다. 또 섭외를 해놓으면 찍을 때 뭔가 어색하다는 카메라감독의 지론도 한몫을 했다. 그래, 출연자 피 짜내서 좋은 영상 실컷 만들어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피디나 카메라 감독, 코디까지 호흡이 척척 맞는 촬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닐하우스 속의 양들.

이쯤에서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길을 가다 무작정 찾아들어간 농가가 샤키르 씨의 집이었다. 알라쾨이라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양은 봄부터 가을까지 방목을 하지만 겨울에는 우리에 두고 먹이를 주기 때문에 그림이 될지 여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무대뽀 정신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구멍가게에 들러 양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뒷집을 가리킨다. 그걸 말로 하면 이 동네는 모든 집이 목축을 한다는 얘기다. 무조건 찾아가 기척을 하니 초로의 사내가 나온다. 사내 뒤로는 남녀 꼬마 둘이 따라 나온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첫 인상이 할아버지 같았던 사내, 샤키르 씨는 기껏 50대 초반이었고 손자손녀 같던 아이들은 아들과 딸이었다. 아무튼 어김없이 메르하바”, “호쉬 겔디니스”(어세오세요) 인사가 오간 뒤 사정을 얘기하니 타맘”(OK) “타맘이 터져 나온다. 아무 약속도 없었는데도 마치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거리낌이 없다. 아니, 슬쩍 훔쳐보니 이게 웬 떡이냐하는 표정이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통째로 내 집에? 알라신에게 감사기도라도 드릴 태세다.

 

지진의 흔적. 여기도 갈라지고 저기도 무너지고.

앞장서서 걷는 샤키르 씨의 걸음걸이에 신명이 붙는다. 이거, 일이 커지겠는 걸. 그를

따라가 보니 안마당에 사과나무까지 심어놓은 꽤 넓은 집이다. 이곳도 마당이든 어디든 가축의 배설물로 도배를 했다. 마른 데를 골라 디디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밟자, 밟아! 샤키르 씨가 먼저 축사로 안내한다. 비닐하우스 같은 가건물의 문을 열자 꽤 추운 날씨인데도 열기가 확 밀려나온다. 어디 열기뿐이랴. 기다렸다는 듯 코끝으로 달려드는 잘 발효된 분뇨 냄새.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축사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헉! 하는 비명이 터진다. 생각해 보라. 컴컴한 곳에서 수백 쌍의 눈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장면을.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좁은 곳에 서 있는(누울 틈이 없어서인지 원래 그런 건지 모두 서 있다) 양의 숫자가 무려 150마리라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당나귀도 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아무튼 그들도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 때도 아닌데 느닷없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상하게생긴 사내.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입만 터졌다면 가축시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동이 벌어졌을 뻔 했다. 아무튼 양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든 말든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 했다. ?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오니까. 분뇨, 열기, 냄새, 그리고 경계를 담은 300개의 눈동자.

 

기어이 2층까지 올라가 지진피해를 설명한다.

양과 염소들은 하루 종일 축사에 있다가 밥 때만 하루 두 번 바깥 구경을 한다. 원래는 축사가 따로 있었다는데 2011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거의 무너지는 바람에 이곳에 임시 축사를 지었다고 한다. 축사는 건성건성 소개하던 샤키르 씨가 나를 끌고(나 하나만 움직이면 수행원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곳을 일일이 설명해준다. 여기는 이렇게 갈라졌고 저기는 저렇게 무너졌고. 정작 샤키르 씨가 내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정부에서 새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내가 그 은혜로운 사실을 잊을까봐 여러 번 반복한다.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새 집이 생겼으니 그에겐 불행이 행운이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양에 올인하고 싶은 제작진의 소망과는 반대로 샤키르 씨는 오로지 지진에 올인할 태세다. 원래는 인부들의 숙소였다는 2층까지 데리고 올라가 일일이 피해상황을 브리핑한다.

 

건초더미에서 건초를 내리는 샤키르 씨.

그렇게 다니는 사이에 나는 이 집 막내아들과 친구가 돼 버렸다. 귀염둥이로 자라서인지 별 거침이 없는 이 녀석은 계속 나를 졸졸 따라 다닌다. 카메라 감독 좀 피곤하겠는 걸. 이 집으로는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위로 딸만 넷이 있었는데 끝없는 노력 끝에 이 아이를 낳았다고 자랑한다. 아직 아들 선호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유목민들의 피가 흐르는 이곳 사람들이야말로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들을 바라보는 샤키르 씨의 눈길은 귀한 보석을 보는 듯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건초를 저렇게 싣고 가서 눈 위에 뿌린다.

2지진피해현장에서 내려와 잠시 쉴까했더니 샤키르 씨가 또 은밀한 몸짓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아끈다. 카메라 따위는 오든지 말든지. 주인이 다큐멘터리의 진행에 연출까지 다 맡아버리니 PD는 할 일이 없어진다. 창고의 문을 여는 그의 얼굴에 환희가 꽃으로 피어난다. 대체 뭐가 있길래 보물창고를 여는 표정이지? 들어가 보니 커다란 트랙터가 점잖게 앉아있다. 얼마나 아끼는지 겨우내 닦고 문질러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롤스로이스도 이 정도로 빛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끼고 아끼던 걸 보여줄 때의 그 희열에 가득 찬 몸짓. 하긴 농부에게 이만큼 소중한 재산이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2대 보물, 즉 아들과 트랙터를 모두 본 셈이다.

 

마당에서 딴 사과. 정말 맛있다.

카메라가 스케치를 하는 동안 샤키르 씨가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쟁반에 사과를 가득 담아 내온다. 지난 가을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수확한 거란다. 한 조각 입에 넣어보니 이럴 수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지금까지 먹어본 사과 중에 가장 맛있다. 어떻게 사과에서 이런 맛이 나지? “촉 레젯틀리, 촉 레젯틀리”(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저절로 나오는 나의 예찬에 샤키르 씨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그가 또 뭘 보여줄 게 없나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 손을 잡아끌자 이번엔 정 PD가 과감하게 막아선다. 계속 끌려 다니다 보니 작업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이젠 양 먹이 주는 걸 찍고 싶은데.”

타맘(OK), 타맘

그의 사전에 ”(안 됩니다, 없습니다), “하이으르”(아니요) 같은 단어는 없다.

 

양들이 풀을 맛있게 먹고있다. 그 사이에 한 녀석은 탈출을 감행한다.

밥을 먹이긴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그는 서슴없이 마른풀을 손수레에 싣는다. 여름에 베어서 말린 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풀이다. 겨우내 먹여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모든 식구가 꼴을 베는데 동원된다고 한다. 이래서 식구가 많은 집이 부자라니까. 양들은 겨우내 이렇게 들어앉혔다가 들판에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깔릴 무렵 교배를 시키고 풀이 자라서 방목을 시킬 무렵 새끼를 낳게 한다. 초유를 아기양이 먹은 다음부터 상품이 될 수 있는 젖을 짠다. 절차상의 실수로 겨울에 낳는 새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그 원칙을 따른다. 샤키르가 풀을 거의 날랐을 무렵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양을 풀어서 길가로 몰아간다. 바깥구경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가끔 엉뚱한 길로 새는 녀석도 있기 때문에 한곳에 모으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나도 카메라와 배낭을 벗어던지고 양몰이에 나선다. 결국 흥에 겨워 샤키르 씨의 손에서 풀 나르는 손수레까지 빼앗는다. 헉헉! 이것도 쉽지 않은 걸. 그래도 이 녀석들아.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 나 같은 스타에게 밥 얻어먹는 게 쉬운 줄 아냐?

 

 

샤키르 씨네 가족. 동네 아저씨 하나 동네 꼬마 둘도 끼어있다.

양들이 먹이를 다 먹고 나니 이번엔 사람이 출출하다. 그걸 눈치 못 챌 샤키르 씨가 아니다. 어느 새 마당에는 점심이 한 상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구운 빵, 뒤뜰에서 뜯은 약초를 넣어 만들었다는 치즈, 조금 거칠지만 개운한 차이까지. 차려진 건 점심뿐이 아니다. 제작팀이 왔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동네 사람들이 슬슬 모여든다. 내가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지. 잘만 하면 TV에도 나올 텐데모두의 얼굴에 그런 결의가 씌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건 서로 아저씨 아니면 조카다. 샤키르 씨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사람 모두가 일가친척이란다. 한 마디로 씨족사회의 원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수다는 가능하다. 그 사이에 셋째 딸, 넷째 딸과도 친구가 됐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셋째 딸은 무척 똑똑하다. 나를 선망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더니 장 선생에게 저 사람이 한국의 유명한 앵커냐고 묻는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걸 보니 커서 훌륭한 방송인이 될 것 같다.

 

차이를 다 마시고 잔을 놓는 순간 샤키르 씨가 또 은근하게 나를 부른다. 나도 이쯤 되니 그의 부름이 조금 겁난다. PD 역시 은근히 피하는 눈치다. 이번엔 뭘 자랑하려고? 버텨봐야 소용없다. 결국 따라가는 수밖에.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지진 피해농가에게 정부에서 지어줬다는 새 집. 아까 피디가 방해하는 바람에 자랑의 순서에서 빠진 게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집의 형태는 거의 갖췄다. 샤키르 씨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내게 들이대고 이것저것 설명한다. “여기는 큰 방이고, 여기는 애들 방, 주방도 멋있지?” 결국 화장실 앞에서 촉 귀젤!(엄청 멋져요)”을 선언하고서야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먼 나라 사람에게 자신의 새 집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슴 졸이는 소박한 마음이라니.

 

헤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가족사진. 이번엔 동네 사람이 좀 더 많이 섞였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이별은 오는 법. 이젠 정말 떠나야할 시간이다. 목축 농가를 살짝 스케치 한다는 게 거의 한 나절 이상을 머물렀으니. 하지만 아무리 짧은 정이라도 이별이 그리 쉬운가. 동네 사람들은 물론 아이들, 강아지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든다. 저 순박하고 선량한 눈들.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막내가 달려와 내 손을 꼭 잡고 자꾸 뭔가 이야기한다.

? 뭐라고?”

사진! 사진 꼭 보내달라고요

, 사진! 보내주고 말고. 당연히 보내줘야지. 아이와 약속을 하느라고 이별의식은 좀 더 연장된다.

호쉬차 칼른”(안녕히 계세요)

귤레 귤레”(안녕히 가세요).

이 길고 긴 이별의식 오늘 중에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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