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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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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9. 09:2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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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땅거미를 동반한 산들바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면서 들판에 저녁 이내가 깔리기 시작한다. 그제야 장 주사네 마당에 장기판만큼 작아진 몸피로 미적거리고 있던 저녁햇살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느티나무 아래에 퍼질러 앉은 아이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무찌르자 오랑캐~’ 하늘까지 오를 것 같던 고무줄놀이는 언제부턴가 내팽개치고 공기놀이에 푹 빠져버렸다. 꺾기에 들어가는 순님이의 얼굴이 신대 잡은 무당만큼이나 엄숙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손등에 얹힌 돌이 떨어질세라, 채어 잡기 좋게 모으느라고 숨조차 아낀다. 잠시 뒤 손등위의 공깃돌을 던지듯 띄우더니, 병아리 덮치는 솔개마냥 잽싸게 낚아챈다. 성공이다!! 기쁨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 째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광자네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마당으로 들이닥친다. 돌아보지 않아도 광자 엄마의 목소리다. 밭에 나갔다가 막 돌아온 모양이다. 등에서 잠든 동생을 추스르며 순님이의 현란한 손동작에 넋을 놓고 있던 광자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야, 이년아. 애기 잠들면 물도 길어놓고 마루도 좀 훔쳐놓으라고 했더니 여지껏 거기 퍼질러 앉았냐? 내 이년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버려야지. 말 만한 년이 맨날 쳐 먹고 놀기만 하니….”

광자 엄마의 푸닥거리가 시작되나 싶더니, 공기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후다닥 일어나 뿔뿔이 흩어진다. 모두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와 허겁지겁 정신을 차린 얼굴이다. 부뚜막 부지깽이라도 심부름을 보내야 할 계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으니 집에 돌아가면 경칠 일만 남았다. 고무줄에서 끝냈어야하는데…. 공기놀이를 하자고 꼬드겼던 명자를 쳐다보는 눈초리에 가시들이 박혀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아이들의 발걸음이 추라도 달린 듯 무겁다. 그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만드는 게 공기놀이였다. 여자아이들은 어디든 모여 앉았다 하면 공기놀이를 했다. 마당은 물론 교실, 방안…. 가릴 게 없었다.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돌멩이 다섯 개면 모든 게 해결되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혼나기를 밥 먹듯 했다. 다른 놀이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도 공부시작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공기놀이에 빠졌다가 벌서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숟가락 들 정도만 되면 여자아이들의 손에는 공기가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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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깃돌은 보통 작은 새알만하다. 쓰이지 않는 돌은 없었지만, 특히 하얀 차돌이 인기가 있었다. 알맞은 돌을 주워서 사용하거나 기왓장 같은 것을 손에 맞게 갈아서 쓰기도 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했다. 예쁜 공깃돌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공기놀이에도 제법 복잡한 순서와 규칙이 있는데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경상북도에서는 ‘짜게 받기’, 경상남도에서는 ‘살구’, 전라북도에서는 ‘공기 따먹기’, 전라남도에서는 ‘닷짝걸이 등으로 불렀고 그 밖에 ’좌돌리기‘, ’조개질‘, ’좌질‘이라고는 이름도 있었다. 용어도 다양했다. ‘콩’은 공기를 받다가 떨어트렸을 때 콩! 하고 얼른 외치면 다시 주울 수 있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미친년’은 공기알을 바닥에 던졌는데 한 개가 비스듬히 서있는 것 가리킨다. 또 ‘반지’는 꺾기를 하는데 공기알 하나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끼는 것을 말하고 ‘피아노’는 꺾기를 위해 공기알을 손등 위에 잘 놓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밖에도 집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묘하게 집는 것을 ‘간빼먹기’라고 하고 공깃돌 하나가 다른 돌에 딱 붙어있는 것은 ‘밥풀’이라고 한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순서는 대개 비슷했다. 맨 먼저 ‘초집기’를 하는데 다섯 개의 공깃돌을 손바닥에 쥐어 바닥에 뿌려 놓는다. 그 가운데 한 알을 집어 던져 올리는 동시에 나머지 네 알 중 한 알을 얼른 집고 내려오는 돌과 같이 쥔다. 나머지도 같은 방법으로 하나씩 집는다. 돌을 집을 때 옆의 돌을 건드리거나 던진 돌을 잡지 못하면 실격이 되어 순서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두집기’는 공기알을 두 알씩 집으면 되고, ‘세집기’는 한 번에 세 알을 집은 다음 한 알을 집던가, 반대로 한 알을 먼저 집은 후 세 알을 집는다. ‘막집기’는 손에 다섯 알을 쥐고 한 알을 위로 던지면서 나머지 돌을 바닥에 놓은 다음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어 받은 돌을 위로 던지면서 바닥에 놓인 네 개의 돌을 한꺼번에 쓸어 쥐는 것과 동시에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렇게 네 알 집기까지 끝나면 ‘꺾기’에 들어가는데, 먼저 다섯 개의 공깃돌을 던져 손등으로 받는다. 이 때 손등에 얹힌 돌이 셋이면 3년, 다섯이면 5년으로 계산하는데 손등에 얹힌 돌을 그대로 띄운 다음 공증에서 낚아챈다. 손등에 공깃돌이 하나도 얹히지 않거나 던진 돌을 모두 잡지 못하면 실격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한 점수를 먼저 난 사람이 이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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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놀이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작된 시기가 무척 오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축의 뼈로 만든 둥근 알들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했는데, 훗날 놀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증언하듯 그 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신들과 남자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땅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즐겨 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둥근 돌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공기놀이는 무척 성행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TV가 집집마다 보급되고 각종 장난감이 쏟아지면서 전래돼 오던 놀이들은 하나 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 놀이 중 대표적인 것이 공기놀이다. 요즘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플라스틱 공깃돌을 판다고 한다. 물론 공기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도 여전히 있을 테고. 하지만 아무래도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리워 어느 날 순님이, 광자, 명자가 퍼질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장 주사네 마당을 찾아가보본다. 하지만 느티나무 아래엔 잡초만 무성하고 허리 굽은 노파 하나 먼 하늘에 고단한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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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6. 09:0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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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애인과, 친구라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동해바다 피서를 도모해본 적 있으십니까?
이왕이면 폼 나게 가야지 대중교통이 웬일이냐고, 졸부가 된 오촌 당숙을 혀가 닳도록 설득한 끝에 차를 빌리는 데 성공하지요.
그렇게 떠나는 길, 하늘의 구름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큼 온몸이 둥둥 떴을 겁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꿈은, 곧잘 끔찍한 현실을 동반하기도 하지요.
막히는 길이야 애당초 각오했던 일이고, 애인의 솜사탕 같은 수다도 있으니 별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한숨 쉴 일은 인제를 지나 미시령 초입에 접어들어서면서 시작됩니다.
이까지 갈며 잠들어버린 철없는 애인 때문이냐고요?
그건 아니고…, 아찔한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급경사, 급커브 길 때문이지요.
숙달된 운전사도 천지신명, 조상님 찾으며 납작 엎드려야 통과시켜준다는 길이 미시령 아닙니까.
하물며 지갑 속에서 잠만 자던 면허증 소지자가 남의 차 빌려 타고 길을 나섰으니, 지옥문으로 발 하나 들여놓은 셈이지요.
하지만 자존심 하나로 험한 세상 버텨온 몸,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나요.
등이 축축해지고 이가 뽀득뽀득 갈리지만, 여유 있는 척 해가며 부득부득 올라가는 길, 그게 바로 미시령입니다.
하지만 지옥길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 아닙니다.
미시령 정상에 거의 다가갈 무렵, 차는 어느 순간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새벽녘의 들개들처럼 우우~ 소리치며 몰려다니는 그 구름을 드디어 만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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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고성(古城)처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미시령 휴게소.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하던 풍경에 당신의 입은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을 겁니다.
어떻게 이 높은 고갯마루에 저리 넓은 곳을 숨겨뒀을까 싶은 광장과, 조금은 이국적 양식의 휴게소 건물.
그리고 축축한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구름 또는 안개.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어서 꼬집어본 사람인들 없었겠습니까.
갑자기 엄마 품에라도 안긴 것 같은 안도감에, 눈물까지 찔끔거린 마음 약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요.
맑은 날에 만나는 미시령 정상도 천상의 후원처럼 아름답습니다.
주차장 난간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면 속초 시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게 펼쳐진 동해바다.
쓔웅! 하고 몸을 날리면 바다로 풍덩 빠져들 것 같은, 그 터무니없는 거리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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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때문에 곧잘 통제되긴 했지만, 겨울이면 겨울대로 독특한 ‘맛’이 있었습니다.
흰 눈을 가득 이고 서 있는 설악의 줄기, 봉우리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 거리는 바다….
눈 때문에 휴게소에서 오도가도 못 한, 끔찍한 추억을 가진 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요.
휴게소는 꽤 큰지라 대형식당은 물론이고 간이음식점, 특산물 매점, 기념품가게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넓은 곳이 늘 인파로 북적거렸습니다.
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그저 담배 한 대 태우며 이국적 풍경을 만끽하고는 했지요.
한계령, 진부령과 함께 동해로 가는 세 개의 고개 중 하나이자, 속초로 가기 위한 유일한 관문.
그곳, 미시령 휴게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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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얼마 전에 다녀왔습니다.
결론부터 전해드리면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때 당당함을 자랑했지만 이젠 죽음을 코앞에 둔, 늙은 짐승을 보고 온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직장동료들과 동해안으로 워크숍을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미시령옛길을 기억해내는 순간 모두가 신이 났지요.
오가는 차로 가로 가득했던 길은 왕조가 버리고 간 옛 수도처럼 쓸쓸했습니다.
덕분에 느긋함과 게으름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휘파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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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정상에 올라서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짙은 구름은 여전히 달려와 반기고, 그 속에 잠겨 있는 휴게소도 옛 모습으로 손짓했습니다.
눈물이 찔끔 솟을 만큼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터널이 개통된 뒤에는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하던 무심한 사람인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다람쥐가 숨겨둔 도토리 찾아먹 듯, 추억을 하나씩 꺼내들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휴게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어났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눈보다 몸이 먼저 감지했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문 거야 그러려니 했지만,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큰 식당을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있었는데 손에는 파리채 하나만 달랑 쥐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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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건 화장실을 가다가 본 풍경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게 텅 비어서 폐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각종 젓갈을 진열했던 냉장고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특산물을 팔던 가게는 할 일 없는 선반만 남았습니다.
감자수제비, 우동, 해물라면… 분식점의 조리기구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탁자와 여기저기 올라선 의자들은 더 이상 음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웅변하고 있었고요.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은 건물 밖이라고 다를 게 없었습니다.
나무 기둥과 계단은 삐걱삐걱 비명이라도 지를 듯 낡았고, 지붕 역시 손을 보지 못한 지 오래인 것 같았습니다.
뒤로 돌아가 보니 더욱 참혹했습니다.
사람 손길이 닿은 지 오래인 듯, 곳곳이 잡초가 무성했고, 한 때 화려함을 자랑했던 많은 것들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외출중’이라는 팻말이 걸린 ‘만남의 집’ 녹슨 자물쇠는 주인이 영원히 외출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한 때 화려했던 것들이 안개 속에서 하릴없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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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터널이 뚫린 게 2006년5월이니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젊고 화려했던 휴게소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어 있다니….
‘빠르고 편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절감했습니다.
내려가던 중에 울산바위가 코앞에 보이는 길에서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울산바위를 모르는 분들은 없겠지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던 그 울산바위.
뭐랄까, 집 채? 어림도 없지요.
마치 커다란 산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은 위용을 자랑하던 그 울산바위도 터널이 생긴 뒤 쓸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앞에 서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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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바람이나 새들만 넘는 고개, 미시령.
그 곳에 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람결에 전하는 부탁이 고작이었습니다.
‘동해에 갈 사람은 구경삼아서라도, 운전이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미시령 옛길로 가 보세요. 그리고 정상에 도착하면 꼭 휴게소에 들르세요. 화장실만 가지 말고 차라도 한 잔 사드세요. 밥을 먹으면 더욱 좋겠지요. 혹시 알아요? 그렇게 해서 그 추억의 장소가 조금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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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12. 09:1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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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문제였어…. 작살질이라면 똥을 누다가도 뛰어나가는 영표 형의 작살만큼이나 날카로운 햇살. 아이는 걸어가면서도 자신이 더위를 먹는 바람에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나와 면사무소 옆 비석거리를 지날 때, 평소처럼 집으로 갔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장터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장터입구에서 만난 동네사람, 풍월아저씨를 만났을 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풍월아저씨가 “석두 아니냐?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는 게냐?”하고 물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개백정과 눈을 마주친 똥개마냥 꼬리를 말고 비실비실 비켜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지 않았던가. 햇살을 한 아름 등에 진 풍월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재촉할 때까지 아이는 그냥 그러고 있었다. 아니, 돌아서야 한다고 잠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훑었다. 엄마…. 그래, 엄마가 죽어가고 있잖아. 엄마라는 이름은 아이의 모든 힘줄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장터거리를 가로질렀다. 장터가 끝난 모퉁이에 그 집이 있었다. 장날이면 성시를 이루는 그 집, 평일의 한낮에는 적막만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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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손을 눈 위에 가리고 턱없이 높게 매달린 간판을 올려봤다. 말이 간판이지 양철판에 삐뚤빼뚤 써 갈긴 글씨 세자가 전부였다. 해당옥. 미닫이문 유리창에도 국밥, 탁주, 안주일체, 외상사절 등의 글씨가 들쭉날쭉한 씌어 있었다. 하지만 허술하다고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장날이면 떠돌이 장돌뱅이서부터 쓸데없이 친구를 따라 장 구경나선 농투성이까지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한다는 게 해당옥이었다. 사람들은 해당옥보다는 설화네라고 불렀다. 주인의 이름이 설화인 모양이었다. 국밥도 팔고 술도 파는 집이었다. 장날이야 국밥집에 가까웠지만, 평소에는 간단하게 막걸리 한 두 사발로 목만 축이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선술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구색 갖춘 안주에 색시들이 권주가로 동백아가씨나 댄서의 순정을 불러대는 비석거리의 삼월옥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한참 서 있었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여름이면 늘 활짝 열어 부치고 주렴이 대신하는 미닫이문도 꽁꽁 닫혔다. 아이는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말 저 곳에 아버지가 있을까? 있다면 대체 저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따라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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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무너질 것처럼 허름한 그 집이, 아이에게는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 다가서서 문을 두드릴 수도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햇볕 아래 오래 서 있어서일까. 열에 들뜬 엄마의 신음이 이명처럼 아이의 귓전에 맴돌았다. 엄마는 지금 아프다. 한 여름이 무색할 만큼 기침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에 가끔 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모양이었지만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어제 저녁에는 엄마가 위험한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기어 다니다시피 아이의 저녁밥을 차려준 뒤 자리에 누웠는데, 한밤중에 열이 치솟고 기침이 쏟아지더니 결국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잠시 뒤에는 온 몸에서 기운을 놓아버렸다. 아이는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뭘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엉엉 울며 발만 구르던 아이가 이웃집으로 달려갔다. 잠자리에 든 명구할머니의 손을 끌어당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다행히 엄마가 정신을 되찾은 뒤였다. 명구할머니는 먼 친척이었다.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없는 엄마가 유일하게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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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구할머니를 본 엄마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렀다. 얼굴은 여전히 파리했고 숨결은 미약했다. 끊어질듯 이어질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가 벌을 받는 거쥬. 지은 죄가 많어놓으니. 얼른 가야는디, 저것이 눈에 밟혀서….”
“자네가 뭔 죄를 졌다는 겨. 집안 핏줄 찾어다 대를 이은 것두 죄여? 그나저나 이 사람이 워찌 이리 무심할 수가 있는겨. 마누라가 숨이 넘어가는디두…. 천벌을 받지. 천벌을…. 내일은 장터거리 쫓어가서 해당옥인지 해당환지 불을 싸지르구 말텨….”
엄마의 황급한 눈짓에 말을 중동무이한 명구할머니의 눈도 개진개진 젖어있었다. 아이는 최근 두어 달 새 벌어진 일들을 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늦은 봄부터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날 밤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단 세 식구가 살다가 한 사람, 그것도 가장이 빠져나간 집안은 공포에 가까운 적막만 맴돌았다. 아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엄마가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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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여전히 황금빛 작살을 쏘아내리고 아이는 자꾸 어지러웠다. 한참이나 서 있던 아이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길 무렵, 드르륵 소리와 함께 해당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한 여자가 나왔다. 유리창 안에서 오랫동안 아이를 바라보았던 듯 여자는 곧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넌… 누구니? 누굴 찾아온 거니?”
부드럽고 간지럽기도 한 서울 말씨가 귓전을 맴돌았다. 아이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세라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작은 소읍에는 이질적일 정도로 해끔한 얼굴이었다. 집에 누워 있는 까맣게 탄 얼굴의 엄마가 생각났다. 여자는 우물처럼 깊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이가 조금씩 발을 뒤로 뺐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와 봐”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더니 살짝 당겼다. 아이는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저항도 못하고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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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바람에도 무너질 것 같은 겉모습에 비해 술집 안은 깔끔했다. 파란색 비닐커버가 씌워진 탁자가 세 개, 그리고 나무로 짠 걸상이 두 줄씩 여섯 개. 찬장에는 노란 주전자가 네 개, 검게 빛나는 투가리들, 그리고 술잔으로 쓰이는 막사발과 그보다 작은 보시기들이 말끔하게 닦인 채 올려져 있었다. 
“여기 좀 앉아봐. 아줌마가 시원한 거 가져올게.”
아이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여자는 입가에 수밀도 같은 웃음을 베문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어이, 누가 왔남? 이 더위에 뭔 낮손님이여~”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환청인가 했다. 하지만 방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의 눈에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들어왔다. 아! 아버지 구두였다. 안에서 구시렁거리며 문을 미는 기척이 들리는 순간, 아이가 후닥닥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햇살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아이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끊어진 목걸이에서 빠져나온 진주알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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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엄마가 하늘로 떠난 날 밤에 돌아왔다. 앞산에 엄마를 묻고 온 아버지가 아이를 불렀다.
“아버지하고 서울 가서 살자.”
아이는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서울이라니…. 더구나 엄마를 그렇게 만든 여자와…. 불쌍한 엄마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몸부림치면서 싫다는 아이를 끝내 못 이긴 아버지는 주소를 적은 종이 한 장과 얼마간의 돈만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해당옥 여자 사이에 얽힌 악연을 꿈결인 듯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대처로 나갔던 쟤 애비가 그년을 만났다는 겨…. 그년도 팔자가 기구혀서 그렇지. 멀쩡한 집 처녀였다는디…. 어쩌다 눈이 맞어서 저걸 낳게 된 거지. 그게, 니가 우리 명구를 낳은 해니께 10년두 훨씬 더됐구먼.”
“그런디, 워떻게 저 애가 일루…. 돌아가신 성님이 찾어갔었내비네유.”
“그랬댜, 연락이 끊어진 서방을 물어물어 찾어가 보니 그년과 살림을 차렸더랴. 애는 못 내놓겄다구 난리를 피는 걸 박 씨 집 핏줄이라고 뺏다시피 데려왔다는 겨. 그것 땜이 맨날 남의 새끼 뺏은 벌을 받는다구…. 애를 뺏긴 그년은 충청도 여기저기 술집으로 돌아댕겼다지. 석두애비가 충청도 사람인 것만 알지 어디 사는 줄은 물렀다니께. 그러다 읍내까지 굴러와서…. 석두애비는 해당옥이 그년이 차린 술집인 줄 모르구 갔다가 그만….”

긴 여름방학이 끝난 뒤, 아이는 장터거리에 가봤다. 한바탕 꿈이었던 듯 모든 게 사라진 뒤였다. 집은 비었고 해당옥 낡은 간판만 바람에 그네를 타고 있었다. 아이는, 그 여자가 한밤중에 찾아와 내가 진짜 엄마라고 울면서 손을 끌던 날, 뿌리치고 도망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멩이만 툭툭 차고 있었다. 영표 형의 작살만큼 여전히 날카로운 햇살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선술집은 원래 술청 앞에 선 채로 한 두 잔의 술을 마시고 가는 술집을 말한다. 하지만 ‘간단하게 한잔 할 수 있는 술집’의 통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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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28. 0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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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그랑~!!! 무언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방안으로 난입한다. 바닥에 낮게 깔려 유영하던 음악이 흠칫, 소스라친다. 펌프 옆 양은세숫대야가 또 발길질을 당한 모양이다.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다 말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여전히 정물처럼 굳어있다. 지긋하게 감은 눈을 한번 떠보기라도 하련만, 하늘이 무너져도 꼼짝하지 않겠다는 의지만 갑옷처럼 두르고 있을 뿐이다. 느닷없는 소음에 주춤했던 음악이 다시 조심스럽게 흐른다. 하지만 아이는 번개 다음에 올 천둥을 예감하며 지레 몸을 움츠린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다시 창호지를 뚫는다.
“한겨울에 엠벵(염병)을 하다가 고꾸라져 뒈질 것들. 방구석에 쳐 박혀서 그놈의 축음긴지 귀신단진지 끼고 있으면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엄마다. 레퍼토리도 평소와 다름없다. 조금 있으면 “귀신은 저것들 안 잡아가고….” 가 이어질 것이다. 아이가 미닫이방문을 열고 나선다. 생선을 담았던 커다란 다라를 펌프 옆에 던져놓다시피 한 엄마가, 오늘은 뭔가 보여주겠다는 듯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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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에 금세 울음이 질척하게 고인다. 또 넘어진 모양이다. 옷이 젖고 여기 저기 오물도 묻어있다. 큰 아들을 잃은 뒤부터 생긴 증상이다. 걸핏하면 자빠지고 다쳐서 들어온다. 하긴 곳곳이 빙판인 겨울에, 생선다라를 이고 얇은 고무신 하나에 의지해서 이 골목 저 골목 헤집고 다닌다는 게 보통 위험한 일인가. 아이가 터질 듯한 울음을 베물고 주삣주삣 다가서보지만, 엄마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더니 작심이라도 한 듯 쪽마루에 엉덩이를 철퍼덕 내려놓는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악다구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넋두리로 바뀐다.
“부모 복 없는 년이 서방 복은 있을라구. 새끼까지 잡아먹고 살아보겄다고 이러고 댕기는디 서방이란 화상은 쳐백혀서 벤또벤인지 모짜린지나 끼고 사니…. 나 같으면 마누라 고생헌다구 이미자라도 한번 틀어주것다….”
사설조로 늘어지는 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날 거 같다. 엄마가 치마말기로 코를 휑 풀면서 부엌으로 들어갈 때까지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다. 음악은 언제부터인가 꺼져있다. 아버지는 전축 앞에서 바다처럼 깊어진 눈을 껌벅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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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원래 그렇게 악다구니 전문가는 아니었다. 아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아버지에게도 그랬다. 가난한 살림에도 늘 뭔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거지가 입은 비단옷처럼, 단칸집에 과분하기 짝이 없는 전축이 들어선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 사랑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도 지금하고는 달랐다. 가끔 외출도 하고 번역 일을 맡아오기도 했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곰살맞았다. 어쩌다 일보다는 전축을 더 사랑하는 남편을 흉보는 사람이 있으면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런 소리 다신 허지 말어. 저이가 이북에서 천석꾼의 아들이었다구. 일본 가서 대학까장 나온 인떼루… 뭐, 거시기구. 그러니 전축 아니라 뭔들 아쉬웠겄어. 워낙 음악을 좋아하니께. 내 고생? 아, 갠찮다잖여. 저이가 나 같은 무식쟁이 만나서 고생인 거지. 뭐? 배운 사람이 막일 같은 거 하먼 쓰겄어? 어떻게 만나긴 뭐… 영천시장 국밥집서 일할 때 자주 오는 바람에… 그냥 지극정성으로 대하다보니…. 저이가 능력이 웂어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니라니께. 난 갠차너. 목이 부러져두. 음악 아니라 날라리를 불어두 나 좋으면 그만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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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끔찍한 일은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 일어났다. 저녁 늦게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마중 나갔던 형이 어두운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형은 겨우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형은 집안의 별이고 꿈이었다. 공부는 늘 1등이었고, 길을 가다가던 사람들마다 돌아볼 정도로 잘생겼었다. 우물처럼 깊게 고였던 슬픔이 조금 걷힌 뒤 둘러본 집안에는, 예전의 그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방안에 틀어박혀 음악만 들었다. 어머니는 실성한 것처럼 떠돌았다. 집에서는 늘 소리를 지르고 악다구니를 썼다. 가족들 간의 대화는 끊겼다. 아버지의 눈은 날이 갈수록 소를 닮아갔다. 진짜 소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전축과 함께 방 한쪽에서 정물이 되어갔다. 엄마는 그걸 더 못 견뎌 했다. 지아비의 행복을 위해 무리해서 샀던 전축이, 불행을 가져온 원흉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땐 전축을 몽땅 부숴버리겠다고 달려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전축은 진공관식으로 그때만 해도 이미 꽤 낡은 것이었는데, 훗날 나온 보급형 오디오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러잖아도 좁은 방안을 차지하고 앉은 전축은, 아버지 이외의 가족에게는 하루 이틀 묵고 떠날 손님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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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음악을 듣는 절차는 종교행사를 보는 듯 자못 경건했다. 전축에 전원을 넣기 전에, 밤새 별 일 없이 잘 있었느냐는 표정으로 찬찬히 살피는 게 맨 먼저 하는 일이었다. 마치 이북에 두고 내려왔다는 자식들과 상봉이라도 한 듯 안타까움과 온기가 가득 담긴 눈길이었다. 다음에는 꽤 긴 시간을 들여 그날 들을 LP를 골랐다.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LP라야 기껏 수십 장에 불과한 판에, 거기서 고른들 뭐 대단한 게 있으랴. 하지만 아버지는 처음 그들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늘 기대에 찬 눈초리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씩 들여다보았다. 표정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어느 땐 혀를 끌끌 차거나 한숨을 쉬었지만, 어느 땐 어? 내게 이런 음악도 있었나? 하는 듯이 신이 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사람 대신 전축이나 LP와 날마다 대화를 나눈 것인지도 모른다. 판을 다 고르고 나면 먼지라도 묻지 않았을까 찬찬히 들여다본 뒤, 전축의 전원을 넣었다. 무엇 하나 후딱 진행되는 건 없었다. 행복한 시간을 조금씩 쪼개먹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스위치를 올렸다. 자신이 전원을 넣어주는 순간, 전축에 피가 돌고 기지개를 켠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 서서히 깨어난 전축이 딸꾹질을 하거나, 몸을 부르르 떨면 아버지의 얼굴의 화색이 짙어졌다. 그제야 골라놓은 판을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손잡이를 들었다.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바늘을 놓는 적이 없었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는 곳을 한눈에 포착하여 단번에 올려놓았다. 마치 짐승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놓는 최고 경지의 도살자처럼 경쾌하고 정확했다. 아이는 훗날 아버지를 흉내내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말았다. 앞 순서 음악의 끝머리가 뜬금없이 나오거나 들으려는 노래가 제법 흘러간 뒤였다.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에 의해 바늘과 LP가 조우하고, 트랙을 찾아가는 지지직~ 소리가 잠시 흐르면 검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서 잠자던 음악이 부스스 눈을 떴다. 아버지의 얼굴에, 아주 엷은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전축이 오래 돼서, 아니면 세월이 LP에 낸 생채기 때문에 잡음이 섞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새 LP를 기대할 수 없는 탓도 있지만, 당신은 잡음 속에서도 진짜 음을 골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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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우화(羽化)를 기다리는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던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건 봄이 익어터질 무렵이었다. 그해에도 마당 한켠에 빨간 사루비아꽃이 각혈처럼 피어났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아버지가 당황한 얼굴로 뭔가 감추고 있었다. 뭐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며칠 뒤 아버지의 비밀을 알아내고 말았다. 아버지가 변소에 간 사이에 찾아낸 수건에는 붉은 피가 꽃처럼 배어있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피였다. 아이는, 당신이 언제부턴가 나비가 될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과 이별하고 훨훨 날아갈 준비를. 아이는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미농지처럼 바래갔다. 전축이 들려주는 소리는 갈수록 무겁고 슬픈 음색을 띠었다. 봄이 되면서 엄마의 집을 나서는 시간은 더 빨라졌고 돌아오는 시간은 계속 늦어졌다. 결국 아버지는 봄과 여름 사이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마른가지처럼 엷어진 몸피 하나가 전축 앞에 엎드려 있었다. 손에는 LP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엄마는 끝내 울지 않았다. 대신 동네 아저씨 몇몇이 아버지를 묻고 온 날 실신하듯 앓아누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고 다리가 퉁퉁 부어도 장사를 쉬지 않던 그녀였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내팽개쳐진 생선다라는, 마루 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부엌에라도 들여놓으려고 꺼내던 아이가 다라 안에서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한눈에 LP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기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막상 모습을 보인 건 이미자도 문주란도 아니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라는 글씨를 한자 한자 들여다보던 아이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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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14. 08:5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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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에서 곤을동을 만난 건 뜻밖의 일이었다. 다른 일로 제주도에 간 김에, 올레길을 한 구간이라도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곳을 찾았던 날이었다. 곤을동. 제주 섬 어느 곳이 안 그럴까 만은, 참으로 아름다운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제주시 화북1동. 오현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소나무가 서 있는 비석거리가 있는데, 그곳에서 왼쪽 길로 100m 정도 내려가면 별도봉 해안을 만나게 된다. 세상만물이 겨우내 꽁꽁 싸매뒀던 그리움을 수줍게 피워내는 초봄이었다. 처음엔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다리쉼이나 할 겸 두리번거린 것이었는데, 거기서 곤을동의 슬픈 역사를 만나고 말았다. ‘4.3마을’이라는 조그만 안내팻말을 봤을 때만해도 ‘제주도니까…’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씩 더 올라갈수록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자꾸 발걸음을 당겼다. 돌담을 통해 나눠진 영역의 생김새를 볼 때 집터임이 분명한데, 사람의 온기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공간. 뭍이라면 사람이 깃들여 살기에는 그리 적절치 안은 척박한 입지였다. 하지만 이곳은 열악한 환경을 딛고라도 사람들이 살아야 했던 섬. 절벽에 가까운 언덕이지만 긴 세월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곳곳에 있었다. 돌담은 바다 가까이까지 어깨를 겯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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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단 밑에는 입산자 색출 때문에 종종 마을에 나타나던 함덕지서 순경 두 명과 창 끝이 검게 그슬린 대창을 든 대동청년단 청년 예닐곱 명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뒤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군인들이 이열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 중에서]

결국 나는 그날 올레길의 초입에서 멈추고 말았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발길을 잡고 놓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려는 생각에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가니, 역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었다. 금세 목이라도 조일 것 같은 전율을 등에 지고, 그곳에 적힌 내용을 단숨에 읽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에서 곤을동의 비극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4․3유적지 곤을동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 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뎃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6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에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뎃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분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모살불’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서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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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순이삼촌’ 중에서]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한 마을이 그렇게 고스란히 지워졌구나. 이방인도 아닌 한 핏줄로 태어난 사람들의 손에 의해, 1세기나 2세기 전도 아닌 1949년에…. 그 비극의 안쪽에 나라가 죽고 살만한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었든, 아니면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들 간의 싸움이었든, 한 마을을 통째로 없앤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같은 무지한 ‘일반인’들은 4․3이라고 하면 그저 ‘좌우익의 충돌이 빚은 현대사의 운명적 비극’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가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가슴 저린 통증의 일단을 눈치 채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 역시 대단한 실감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비극이 낳은 참혹한 결과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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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순이삼촌’ 중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역사는 이른바 '4.3 사건'이라고 규정짓는다. 하지만 그 규정은 불길을 잠시 멈춘 휴화산처럼 아직도 ‘변신 중‘이다. 명칭도 4.3 사태, 4.3 사건, 4.3 민중 항쟁 등으로 시절이나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왔다. 아예 장식을 떼어버리고 4․3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4․3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책 몇 권을 쓴대도 부족하겠지만, 지난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즉, 본질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었다. 위원회는 4․3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를 2만500명~3만 명으로 잠정 추정하였다.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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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순이삼촌’ 중에서]

올레길을 통째로 포기하고 ‘사라져버린’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잔인한 가정이지만,  비극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 생각 없이 쉬어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입간판의 설명대로 세 마을이 나란히 있던 가운데로 냇물이 두 갈래로 나눠 흐르고 있었다. 마을과 바다는 그리 넓지 않은 모래밭을 경계로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냇물은 금세 바닷물과 만나 어우러졌다. 그 시절 마을에 살았을 어느 영감님을 흉내라도 내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돌담 사이를 내려갔다. 구름 사이에서 잠깐 잠깐 얼굴을 내미는 햇살은, 학예회의 아이들처럼 우쭐거리는 풀과 나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돌담 사이에 핀 꽃들은, 이 동네에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살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 천진한 얼굴을 자꾸 디밀었다. 아, 그 아이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귀청을 찢는 총소리와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그리고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을 연기. 돌아오지 않는 할아비, 아비, 삼촌…. 어린 누이의 숨죽인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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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곤을동. 터를 일군지 700년이 넘도록 평화스럽게 살았다는 마을. 그 마을이 있었던 곳과 바다가 만나는 사이에는 까맣게 타버린 모래와 미처 부서지지 못한 자갈들, 설움을 결핵처럼 가슴에 품은 바위가 신음을 삼키며 누워있었다. 그리고 누구의 도끼질에 깨어졌는지 모를 조각난 비문 하나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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