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동 전설을 아십니까?
"내원마을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럼, 전기 없는 마을은 아십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 면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 되면서,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청송 주왕산에 전기와 전화가 없는 내원마을이라고 있는데 들어본 적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내원마을이라고 있었는데'라는 과거형으로 물었어야 했다. 내원마을, 혹은 내원동은 더 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리거나 '감호소' 가 있는 곳 정도로 기억되는 경북 청송, 그 중에서도 주왕산 속살 깊은 곳에 수백 년 터 잡고 살아온 동네가 내원마을이었다. 한때는 '무릉도원'이라고까지 불리던 그 곳은 머지않아 전설로만 기억될 것이다. 해발 500m 높이에 있고 전기·전화는 물론 수도도 없던 곳. 그 내원마을이 이제 사라져가는 대상이 아니라 잊혀져가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내원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라고 한다.(200년 전이란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기 시작했다. 한 때 양조장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으며 많을 때는 70가구 500여명까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벼농사·담배농사·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를 팔 수 없게 됐고,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결국 작년(2006년)에 6가구 20여 명이 마을을 떠났고 올해는 마지막 3가구가 떠남으로써 마을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오래 전 폐교된 주왕산초등학교 내원분교와 찻집 내원산방이 남아있지만 그것도 곧 헐릴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이 철거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수질보호다. 즉‘국립공원 한가운데서 일부 주민이 관광객을 상대로 무허가 음식점과 민박업을 하는 바람에 주방천의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안내판에서 지워진 내원동
주왕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원마을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모든 안내판에서 내원동이란 이름이 사라져버렸 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건 말건 대전사를 지나 시루봉, 학소대 등 기암괴석과 제1, 제2, 제3폭포를 거쳐 올라가는 길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가을은 초겨울의 홍시처럼 터질 듯 무르익어 있었다. 손에 쥐면 붉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단풍과, 바위 사이를 돌고 도는 물은 어떤 탄성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제3폭포를 지나고 무지개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을 잃었다. 지도를 준비하지 못한 까닭에 두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막막해지고 만 것이다. 다시 3폭포 쪽으로 돌아가서 안내판을 이 잡듯 뒤져봤지만 내원마을 가는 길을 표시한 곳은 없었다.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듯 철저하게 지워버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내원마을이 있던 곳' 정도로 표기해도 될 것을. 다시 두 갈래길 앞으로 가서 이정표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내원동이란 희미한 글자를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 지웠다고 지웠는데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발견이 화근이었다. 오른쪽의 평탄한 길을 버리고, 이정표의 숨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왼쪽의 험한 길을 택했다. 희미한 길의 흔적은 계곡을 타고 마냥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허덕허덕 올라갔지만, 제3폭포 에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들었던 내원마을은 한시간을 올라가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산 속이라고 해도, 벼농사까지 지었다는 마을을 이렇게 좁고 험한 길로 다녔을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결국은 정상 부근까지 올라갔다. 허기와 낙망으로 길가 바위에 주저앉아 있는데, 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부부를 만났다. 마을은커녕 아무것도 없다는 게 그들의 대답이었다. 마침 그들이 갖고 있던 지도에서 내원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버리고 올라온 길로 가는 것이 옳았다. 안내판에서 마을을 지워버린 발상도 한심했지만, 애당초 지도 한 장 준비하지 않은 내 불찰이 더 문제였다. 원위치로 내려와 내원마을로 가는 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걸음을 3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저만치 내원분교가 보였다.
억새만 하얗게 울고 있더라
내원마을은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었을 곳이 자꾸 지워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집터나 논밭이었던 곳에는 늦가을 억새들만 어깨를 비비며 서걱서걱 울고 있었다. 골짜기이긴 하지만, 포근하게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은 인간이 깃 들여 살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민, 내원산방의 이상해씨(44)는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뒤를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 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차나 음식도 못 팔게 하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단풍철이 지나면 이 집도 철거한답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은 막막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황금빛으로 농익은 햇살이 내원분교의 교실 안팎을 덧칠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한 칸 짜리 교실로 들어가니 풍금 두 대와 낡은 난로, 손바닥만한 책걸상 몇 개와 칠판 같은 것들이, 아이들 대신 지난 세월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폭포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원산방 뒤를 하릴없이 걸었다. 바람에 더욱 서러운 억새의 울음에 귀를 기울여봤지만, 아무 것도 해독할 수 없었다. 억새 밭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돌담들이 보였다. 저 안에 집이 있었을 것이고, 그 안에는 호롱
불·촛불을 밝히던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발걸음은 냇가로 향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떠나야 했던 것이겠지. 환경과 인간의 악연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일까. 공존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버들치인 듯 싶은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학교 코밑에 있는 냇가로 몰려들었겠지. 풍덩풍덩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았으리라. 냇가에 세워져있는 간판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1970년 3월2일 설립하여 1980년3월1일 폐교까지 총 78의 학생을 배출…' 78명의 물고기 잡던 아이들의 고향은 사라졌다. 자의로 떠난 사람들이야 그럴 만한 궁량이 있었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상실할 나이가 돼서 떠나야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몇 푼 주어졌을 보상금이 산을 내려가는 순간 얼마나 초라해졌을 지는 너무 뻔하고. 혹시, 회색의 도시에 잉여인간으로 흘러들어 유령처럼 떠도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