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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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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14. 14:30 사라져가는 것들

내원동 전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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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마을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럼, 전기 없는 마을은 아십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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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 되면서,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청송 주왕산에 전기와 전화가 없는 내원마을이라고 있는데 들어본 적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내원마을이라고 있었는데'라는 과거형으로 물었어야 했다. 내원마을, 혹은 내원동은 더 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리거나 '감호소' 가 있는 곳 정도로 기억되는 경북 청송, 그 중에서도 주왕산 속살 깊은 곳에 수백 년 터 잡고 살아온 동네가 내원마을이었다. 한때는 '무릉도원'이라고까지 불리던 그 곳은 머지않아 전설로만 기억될 것이다. 해발 500m 높이에 있고 전기·전화는 물론 수도도 없던 곳. 그 내원마을이 이제 사라져가는 대상이 아니라 잊혀져가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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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라고 한다.(200년 전이란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기 시작했다. 한 때 양조장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으며 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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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70가구 500여명까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벼농사·담배농사·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를 팔 수 없게 됐고,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결국 작년(2006년)에 6가구 20여 명이 마을을 떠났고 올해는 마지막 3가구가 떠남으로써 마을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오래 전 폐교된 주왕산초등학교 내원분교와 찻집 내원산방이 남아있지만 그것도 곧 헐릴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이 철거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수질보호다. 즉‘국립공원 한가운데서 일부 주민이 관광객을 상대로 무허가 음식점과 민박업을 하는 바람에 주방천의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안내판에서 지워진 내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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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원마을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모든 안내판에서 내원동이란 이름이 사라져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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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건 말건 대전사를 지나 시루봉, 학소대 등 기암괴석과 제1, 제2, 제3폭포를 거쳐 올라가는 길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가을은 초겨울의 홍시처럼 터질 듯 무르익어 있었다. 손에 쥐면 붉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단풍과, 바위 사이를 돌고 도는 물은 어떤 탄성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제3폭포를 지나고 무지개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을 잃었다. 지도를 준비하지 못한 까닭에 두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막막해지고 만 것이다. 다시 3폭포 쪽으로 돌아가서 안내판을 이 잡듯 뒤져봤지만 내원마을 가는 길을 표시한 곳은 없었다.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듯 철저하게 지워버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내원마을이 있던 곳' 정도로 표기해도 될 것을. 다시 두 갈래길 앞으로 가서 이정표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내원동이란 희미한 글자를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 지웠다고 지웠는데 흔적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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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발견이 화근이었다. 오른쪽의 평탄한 길을 버리고, 이정표의 숨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왼쪽의 험한 길을 택했다. 희미한 길의 흔적은 계곡을 타고 마냥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허덕허덕 올라갔지만, 제3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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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들었던 내원마을은 한시간을 올라가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산 속이라고 해도, 벼농사까지 지었다는 마을을 이렇게 좁고 험한 길로 다녔을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결국은 정상 부근까지 올라갔다. 허기와 낙망으로 길가 바위에 주저앉아 있는데, 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부부를 만났다. 마을은커녕 아무것도 없다는 게 그들의 대답이었다. 마침 그들이 갖고 있던 지도에서 내원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버리고 올라온 길로 가는 것이 옳았다. 안내판에서 마을을 지워버린 발상도 한심했지만, 애당초 지도 한 장 준비하지 않은 내 불찰이 더 문제였다. 원위치로 내려와 내원마을로 가는 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걸음을 3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저만치 내원분교가 보였다.

억새만 하얗게 울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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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마을은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었을 곳이 자꾸 지워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집터나 논밭이었던 곳에는 늦가을 억새들만 어깨를 비비며 서걱서걱 울고 있었다. 골짜기이긴 하지만, 포근하게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은 인간이 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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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 살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민, 내원산방의 이상해씨(44)는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뒤를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 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차나 음식도 못 팔게 하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단풍철이 지나면 이 집도 철거한답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은 막막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황금빛으로 농익은 햇살이 내원분교의 교실 안팎을 덧칠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한 칸 짜리 교실로 들어가니 풍금 두 대와 낡은 난로, 손바닥만한 책걸상 몇 개와 칠판 같은 것들이, 아이들 대신 지난 세월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폭포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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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산방 뒤를 하릴없이 걸었다. 바람에 더욱 서러운 억새의 울음에 귀를 기울여봤지만, 아무 것도 해독할 수 없었다. 억새 밭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돌담들이 보였다. 저 안에 집이 있었을 것이고, 그 안에는 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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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촛불을 밝히던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발걸음은 냇가로 향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떠나야 했던 것이겠지. 환경과 인간의 악연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일까. 공존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버들치인 듯 싶은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학교 코밑에 있는 냇가로 몰려들었겠지. 풍덩풍덩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았으리라. 냇가에 세워져있는 간판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1970년 3월2일 설립하여 1980년3월1일 폐교까지 총 78의 학생을 배출…' 78명의 물고기 잡던 아이들의 고향은 사라졌다. 자의로 떠난 사람들이야 그럴 만한 궁량이 있었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상실할 나이가 돼서 떠나야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몇 푼 주어졌을 보상금이 산을 내려가는 순간 얼마나 초라해졌을 지는 너무 뻔하고. 혹시, 회색의 도시에 잉여인간으로 흘러들어 유령처럼 떠도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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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7. 13:1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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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에 나잇살이나 짊어지고 사는 이들은 '키' 란 말을 들으면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차서 키득키득 웃거나, 늦가을 대추처럼 붉어진 얼굴로 돌아앉기도 합니다.
키가 금세 오줌싸개 어린 시절로 데려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다짐하고 잤건만 잠에서 깨어보면 요에는 커다란 지도가 하나 그려져 있었습니다.
애들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랬다는 건 아니고, 오줌싸개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그런 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아이에게 키를 씌우고 바가지를 들려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내보냅니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옆집 대문을 두드리지요.
"엄마가 소금 좀 얻어 오라구…"
잠시 후, 머리에 쓴 키 위로 타타닥!!! 쏟아지는 부지깽이 세례.
연이어 들리는 싸르륵~ 소금 뿌리는 소리.
어마 뜨거라, 도망쳐 보지만 이미 소문은 동네방네를 달음질 친 뒤고 망신은 당할 대로 당한 뒤입니다.
아이는 그 날 등굣길-하굣길 내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쥐구멍을 찾게 마련이지요.
오줌싸는 아이들에게 창피를 주어 버릇을 고쳐보려는, 일종의 어른들의 공조체제였습니다.
머리에 씌운 키가 '오줌싼 아이'라는 표식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지요.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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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만들어진 목적은 물론 다른 곳에 있지요.
키는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가지나 산죽(山竹 조릿대)으로 만듭니다.
옛날 천시 받던 고리백정들이 만들던 품목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크기나 모양은 지방이나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날개가 달린 건 거의 비슷합니다.
키를 아래위로 까불러서 콩·팥·들깨 같은 알곡을 껍질이나 잔돌과 분리시키는 것을 '키질'한다고 합니다.
막 거둬서 타작을 마친 알곡에는 검불이나 잔돌 등이 마구 섞여 있기 마련이거든요.
겉보리 쿵덕쿵덕 절구질을 해놓고 껍질을 날려버릴 때도 키질이 필요합니다.
키에 알곡을 한 바가지씩 놓고, 까불질을 하면 가벼운 껍질이나 먼지는 날아가고, 잔돌과 쭉정이는 키 앞머리로 갑니다.
그리고 필요한 알곡은 움푹 패인 뒤편으로 몰리게 되지요.
그렇다고 키질이 말처럼 만만한 건 아닙니다.
즉, 아무나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잘못하면 알곡이 주르르 떨어지거나 장단을 못 맞춰서 헛키질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키질도 제대로 하려면 오랜 세월 수련이 필요합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던가요?
젊다고 힘센 척 하고 글 좀 읽었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이 넘쳐나도, 시간이 가르치는 게 어디 한 둘이어야지요.

경상북도 영덕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던 길, 작은 마을을 지나다 마당에 앉아 키질하는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여쭸더니, "이런 거 찍어서 뭐할라고요?" 하면서 마당가 단풍처럼 발갛게 웃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옷매무새를 다듬는 모습이 꼭 시집 온지 여드레쯤 된 새색시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키질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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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31. 19:4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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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의 심정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돈도 못 벌면서, 아침마다 구부정한 어깨로 집을 나서는 남편이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 나가는 사람의 뒷꼭지에다 비수를 들이댈 건 뭐란 말인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가장이라고 해도 그러는 게 아니다. 아, 그리고 뭐? 돈도 안 되는 거 때려치우고 단풍놀이나 가자고? 서천 쇠가 웃을 일이지. 언제부터 우리가 단풍놀이나 하고 살았다고…. 아침부터 낌새가 이상하긴 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더니 사업인지 장산지 하겠다고 지 에미를 졸라대는 큰놈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어젯밤에도 지 에미랑 뭔가 쑤근거리다 집을 나갔다. 집이라도 처분해야 할 판이니, 밑돈 대주는 게 어디 제 녀석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다른 날 같으면 밥상머리에 앉아서 옆집 강아지 새끼 낳은 얘기라도 늘어놓던 마누라가 오늘따라 주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꼬여있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문을 나서는데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그 돈도 안 되는 거 때려치우고…." 허,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마누라쟁이까지 이러는 데야 하늘이 노랗게 보일 수밖에. 고리눈을 부릅뜨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왔지만, 내내 속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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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유난히 가팔라 보인다. 담배끊은 지 여러 해 됐건만 아직도 숨이 그르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다시 내려간다고 해도 갈 곳도 없다. 죽으나 사나 내 자리는 이 공원이다. 매점에 맡겼던 장비를 찾아 설치하고 노란 완장을 찬 뒤 '사진촬영' 깃발을 내건다. 카메라가 눈앞에 보이니 울렁증이 좀 가라앉는다. 접이식 의자를 펴서 쭈그리고 앉는다. 이런 땐 담배로라도 헛헛한 속을 달랬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건강 때문이라고 했지만, 기실 담뱃값을 대기에 벅차게 된 뒤로 담배를 끊었다. 담배야말로 공휴일이 없으니 아껴 피운다고 해도 한 달에 7~8만원이 후딱 들어간다. 매점의 김씨나 가끔 들락거릴 뿐 공원에 사람은 거의 없다. 비둘기 몇 마리가 뭔가 기대하는 눈길로 주위를 맴돈다. 내 주머니에서 좁쌀이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오늘은 같이 놀아줄 흥이 안 난다. 평일이라 그런지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 하긴 사람이 있든 없든 별 상관이 없어진지 오래다. 누구 하나, 매점 옆에 앉아있는 늙은 사진사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가끔 가다 눈 어둔 시골 노인네들이 와서 기웃거려 보지만 거기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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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내 공원의 늙은 사진사로 살아온 건 아니다. 메뚜기도 오뉴월이 있었듯이 내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행복사진관' 사장이었다. 사진을 찍게 된 건 군대서부터였다.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사령부 정훈참모실 소속 사진병이 사고로 후송을 가게되면서, 사회에서 사진기 몇 번 만져봤다는 이유로 졸지에 사진병으로 차출되었다. 군의 사진병이 날마다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남는 시간은 카메라를 분석하고 찍어보는데 할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제대할 무렵에는 제법 능숙한 사진병이 되어 있었다. 제대하면 카메라와는 인연을 놓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취직자리를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고졸의 병장출신 젊은이를 쓰겠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리고 다니던 참에 모 건설회사에서 중동의 공장현장에 파견할 사진사를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운이 좋았던지 나는 바로 고용되었고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으면서 열사의 나라를 누빌 수 있었다. 국내에 돌아왔을 때는 꽤 많은 돈이 모아져 있었다. 나는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사진관을 열었다.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투자했다. 사진관은 꽤 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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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 당시 이 나라의 먹고 살만한 백성들은 계기만 있으면 사진관을 드나들었다. 아이 백일 때도 돌을 맞이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뿐인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도 졸업할 때도 사진관을 찾았다. 그 아이가 커서 군대를 갈 때도 가족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머리를 깎기 전에 찍어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잡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 때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았다. 세월은 평탄을 가장하고 그렇게 흘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어느 날인가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사람보다 파리가 더 많아졌다. 처음엔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다른 사진관들도 죽을 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깨달은 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사진관에 가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사진관에서 찍던 돌사진마저도 집에서 해결했다. 자동카메라의 급속한 보급은 온 국민에게 사진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했다. 더구나 행복사진관 같은 아날로그식 사진관은 주민등록증을 처음 내는 고등학생 외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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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류에 결정적으로 기름은 끼얹은 것은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이었다. 디카가 등장하면서 사진을 찍히는 시대는 찍는 시대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광풍이었다. 젊은이들의 호주머니에는 하나같이 디카가 들어 있었다. 필름 값이 들지 않으니 아무 곳에서나 셔터를 눌렀다. 그래서 이 땅의 사진사는 모두 사라지고 사진가만 남게되었다. 전국의 행복사진관들은 초토화되고 '스튜디오'라는 세련된 이름을 가진 곳만 화려한 간판 아래 명맥을 이었다. 가게세를 내기도 힘들어졌다. 눈물을 머금고 행복사진관의 간판을 내렸다. 나는 아직 젊은 데 세상은 내가 서 있을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결혼식 일거리라도 쫓아다녔지만 날이 갈수록 그 기회마저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공원의 관광사진사였다. 그나마 관광지로 꽤 알려진 공원이라 찾아오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이 공원에서 전부터 일하던 사진사가 친구였다. 그는 평생을 이 공원에서 카메라와 함께 보냈다. 그도 한 때는 꽤 재미를 봤다. 그런 그가 아들 따라 미국으로 간다고, 선심 쓰듯 자리를 내주었다.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광사진사야말로 좋은 시절이 다 간 뒤였다. 사람들은 신발은 잊어버려도 디카를 잊고 공원에 오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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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붙이처럼 아끼던 필름카메라를 장롱에 넣어두고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다. 느낌이든 색감이든 모든 게 낯설었지만 정을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즉석에서 사진을 뽑아주면 경쟁력이 생길까 해서 포토프린터도 샀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구시대의 유물 보듯 하며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었다. 더 이상 이 나라에는 내 카메라 앞에 설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어쩌다 중년남녀를 꼬여내 카메라 앞에 세워보지만 가뭄에 콩 나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듯 했다. 아내는 내가 공원에 나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구차하게 공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내가 듣기엔 배부른 소리였다. 언제부터 그리 잘 살았다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어쩌다 집에 있으면 되레 안절부절이었다. 평생 사진만 찍어온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카메라가 목에 걸려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찍을 대상도 친구도 없지만 난 오늘도 양지바른 곳에 앉아 카메라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차피 가는 세월과 바뀌는 물정이야 어쩌겠는가. 장롱에 고이 모셔둔 내 낡은 카메라처럼, 나도 머지 않은 날에 차가운 땅에 묻히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갈 운명인 것을….

*사진속의 인물들은 이 글의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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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24. 19:3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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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사라지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기에 그리 적절한 소재는 아니다.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맛있고 영양 많은 도시락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시락은 더 이상, 한끼를 때우기 위해 먹는 대용품이 아니다. 식도락가들의 까다로운 구미를 맞추는 데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산 사람들의 추억속에는 다른 도시락이 들어있다. 이름만 같을 뿐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도시락, 시커멓게 변한 보리밥 덩어리가 부끄러웠던 도시락,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동반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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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도시락…. 급식시대인 지금, 학교에서 도시락을 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책보다 중요한' 게 도시락이었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 도시락 검사라는 걸 했다.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혼식을 강요당하던 때였다. 눈치가 없는 부잣집 엄마들은 매일 쌀밥만 싸줬다. 보리밥을 싸가야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내 새끼 내가 잘 먹인다는데 지들이 뭐길래….' 그래서 도시락 검사시간 전에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부잣집 아이들이 가난한집 아이들에게 보리알을 빌리러 다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나눠먹던 도시락. 젓가락만 가져와 십시일반을 외치며 밥을 공출해가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도시락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그런 추억이 깃들어 있는 도시락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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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이불을 파고든지 오래건만 아이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린다. 가슴은 연신 콩닥콩닥 뛴다. 내일은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 가는 날이다. 소풍 갈 때 싸 가지고 간 적은 있지만, 평일 날 학교에 도시락을 갖고 가는 건 처음이다. 저녁을 먹은 뒤 어머니가 "내일부터 벤또를 싸주마" 했을 때, 아이는 뛸 듯이 기뻤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졸랐던가. 이젠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도시락을 펼칠 수 있다. 다른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학교 뒤뜰을 배회하거나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하릴없이 그림을 그렸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보통 2~3학년만 되면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도시락이란 언감생심 쳐다보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도시락 하나를 쌀 식량에 시래기를 넣고 죽을 쑤면 온가족이 먹을 한끼 식사가 나오는 판이었다. 도시락 대신 감자나 고구마를 싸 가는 아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것 역시 사시사철 무한정으로 있는 건 아니었다. 봄이면 하루에 두끼 먹기도 허덕거리는 집이 많은 시절이었다. 보릿고개는 늘 높았고 꺼진 배는 늘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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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이라고 다 같은 도시락은 아니었다. 번듯한 양은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지만, 어떤 애들은 집에서 쓰는 놋그릇에 밥을 싸오기도 했다. 반찬이라 봐야 대개 쉬어터진 김치나 짜디짠 장아찌가 전부였다. 새우젓을 싸오는 애들도 있었다. 그래서 김치 국물이 흘러 배어든 책은 항상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특별히 흉이 될 것도, 뭐라 타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콩장이나 멸치볶음을 싸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 정도면 고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끔 밥 위에 계란부침이 얹혀져있거나 반찬으로 장조림을 가져오는 애들은, 그야말로 부잣집 자식이었다. 그런 애들은 죄라도 진 것처럼 도시락뚜껑을 다 열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밥을 먹었다. 아무튼 이제는 아이도 '도시락 먹는 아이들'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밥을 먹을 때보다 집에 갈 때가 더 부러웠다. 빈 도시락이 담긴 책보에서 나오는 딸랑딸랑 소리는 아이에게 "배고프지? 배고프지?" 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부터는 부럽지 않게 도시락 뚜껑을 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도시락을 싸주면 어머니가 먹을 밥 한끼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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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2 하늘이 파랗다 못해 잉크 빛으로 여물어 가고 있다. 학교운동장이 유난히 시끌벅적하다. 전교생이 모여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다. 운동회를 하루 앞두고 총연습을 하는 날이다. 6학년 형들은 모두 웃통을 벗어 부치고 기마전 연습을 하고 있다. 땀에 젖은 아이들의 몸이,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을 받아 검은 보석처럼 빛난다. 3학년은 릴레이연습이 한창이다. 시골의 운동회는 근동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종일 떠들썩하게 즐기는 잔치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 2교시가 끝난 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총연습은 대부분의 절차를 운동회와 똑같이 한다. 두시간의 연습이 끝나면 바로 점심시간이다. 배가 출출한 아이들이 운동장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을 흘끔거린다. 그 곳엔 아이들의 책보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안에 도시락이 있다. 드디어 오전 연습이 끝났다는 호루라기가 울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플라타너스 밑으로 달려간다. 동작들이 잽싸다. 자신의 책보를 찾던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책보는 아무렇게나 풀러져 있고 그 안에 있어야할 도시락이 없다. 운동회 연습을 하는 동안 누군가 실례한 것이다. 담장이 없는 학교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아이의 울음보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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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3 4교시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신경은 온통 난로로 쏠리기 시작한다. 난로에는 도시락이 탑처럼 쌓여져 있다. 3교시 쉬는 시간에 올려놓은 것들이다. 아이는 도시락을 다른 아이들 것보다 아래에 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도시락은 아래에 놓을수록 따끈해진다. 적당히 물을 뿌린 뒤 난로 위에 올려놓으면 뚜껑을 열었을 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면서 새로 한 밥처럼 맛있다. 가끔 부수입으로 누룽지도 얻어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난로의 면적은 뻔하고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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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락은 많다보니 아래를 차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거지반 주먹쯤 쓴다는 녀석들이 아래를 차지하고, 그 다음은 그 똘마니들이 차지하기 일쑤다. 선생님에게 몇 번 혼나기도 했지만 영 고쳐지지 않는다. 어느 녀석이 반찬 통을 안 꺼내고 도시락을 올려놓았는지 반찬냄새가 교실에 가득하다. 그 냄새가 아이들의 목젖을 더욱 자극한다. 선생님도 더 이상 수업을 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종도 안 쳤는데 수업을 끝낸다. 아마 선생님 도시락도 교무실 난로 위에서 따끈따끈하게 데워지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나가기도 전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제 도시락을 찾아낸다. 여기저기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흥겹다. 몇몇 애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화장실에 가는 척,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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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4 중학교의 첫 소풍날이다. 어제 밤까지 비가 내렸는데, 아침엔 말짱하게 개어 온 세상이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 가볍고 상쾌하다. 봄꽃들이 소풍길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2, 3학년은 좀 멀리 가기도 하지만 1학년은 보통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저수지가 목적지다. 소풍이라는 게 뭐 특별할 것도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대개 점심시간이 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락시간을 갖고 적당히 놀다가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러니 소풍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점심시간이다. 아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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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밥 먹을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선생님의 몇 가지 주의사항이 끝나고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친한 아이들끼리 옹기종기 둘러앉아 도시락뚜껑을 연다. 다른 아이들이야 음료수에 과자에 과일까지 이것저것 싸온 눈치지만 아이에게는 김밥만으로도 충분한 별식이다. 김밥을 급하게 몇 개 집어먹던 아이의 한순간 멈춘다. 읍내에서 사는 아이들의 김밥이 이상하다. 자고로 김밥이란 김에 밥을 싼 것이어야 하거늘, 김밥 속에 밥뿐 아니라 온갖 것들이 들어있다. 언뜻 봐도 대충 내용물을 짐작할 수 있다. 계란부침, 소시지, 시금치, 당근…. 언제 김밥이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한 두 명이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 산골에서만 살아온 아이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김밥이다. 아이가 도시락 뚜껑을 슬그머니 닫고 돌아앉는다. 숲 속에서 새 한 마리가 높이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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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17. 19:1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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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괘종시계의 태엽만큼은 반드시 당신이 직접 감았습니다.
세월의 채찍질에 지칠 법도 하건만, 평생 그렇게 사랑한 손자들에게도 '태엽권'을 넘겨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시계부랄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질 만 하면, 받침대를 놓고 올라가 꼼꼼하게 태엽을 감았습니다.
뭔가 뻑뻑한 느낌이 들면 기름을 쳐주는 일도 잊지 않았고요.
시계는 할아버지의 유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쌀 섬을 배에 싣고 강경에 가서 사온 거라고 했습니다.
시계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는 얼마나 신기했던지 동네사람은 물론, 근동사람이 차례로 구경을 왔더랍니다.
우스개 소리겠지만, 시계를 보겠다는 일념에 멀리서 주먹밥을 싸들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지요.

그 시계를 사온 뒤 몇 년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어느 날 전답을 처분하더니 뭉칫돈을 싸들고 집을 떠났답니다.
간도라고도 하고 아오지탄광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북선(北鮮)'을 유랑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지요.
할아버지가 돌아온 건 삼팔선이란 게 생길 무렵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돈을 벌었는지 독립운동이라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집에 도착했을 땐 '거지꼴'이었습니다.
삼팔선에서 모든 걸 빼앗겼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답니다.
할아버지는 바로 자리에 누운 뒤 종내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지요.
할아버지가 떠나고 난 집에는 빚과 괘종시계만 남았습니다.
그 많던 땅문서는 차용증서로 바뀌어 있었고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그런 남편이 몹시도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의 유일한 유물인 괘종시계를 끔찍하게 아꼈습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떠난 이가 남긴 시간만큼은 계속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할머니가 떠난 뒤 시계에 태엽을 감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박제가 되어 시계 대신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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