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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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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여행'에 해당되는 글 7

  1. 2012.11.26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3] 주산지10
  2. 2012.11.19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2] 주왕산13
2012. 11. 26. 08:4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첫 주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계절적 차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김기덕이 섰던 자리

 

새벽, 누군가 서성거리는 것 같아 후다닥 창문을 엽니다. 하지만 창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새 계절을 마중하느라 분주한 나무들과 미명 속을 몰려다니는 안개가 전부입니다. 안개는 대보름 밤의 들개 떼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이 문을 두드려 살얼음처럼 얇은 잠을 들춰낸 모양입니다. 옅은 어둠과 안개가 얽혀있는 풍경은 백룡과 흑룡이 뒤엉켜 싸웠다는 신화적 무게를 은닉하고 있습니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섭니다.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안개는 가끔 사람을 홀리기도 합니다.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겁니다. 밤새 추위에 떤 낡은 차는 두어 번 쿨럭거리다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립니다. 오늘은 새벽안개를 포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천천히 달리다 보니 눈앞의 풍경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겹쳐집니다. 남한강이었을 겁니다. 지금보다 조금 늦은 초겨울이었던 것 같고요. 세상은 물론, 잠과의 불화가 극에 달할 만큼 심신이 피폐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날도 밤새 뒤척거리다가 끝내 몸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헌데,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입을 딱 벌리고 말았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이란. 강가는 안개 군단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장수들은 호령을 하고 군사들은 기치창검 정연하게 진군 중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장한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을 놓았습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저는 병사들을 헤치고 더듬거리며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엔 안개군단의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강은 훈련된 보충병들을 쉬지 않고 배출했습니다. 아예 세상을 점령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안개는 제가 머물던 숙소도 강가의 키 큰 미루나무도 삼켜 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나를 만난 건 그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이 사라진 공간,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안개가 데려다준 본질의 였습니다. 그 순간, 세상의 시간은 온전히 저 하나만을 위해 열려 있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내, 즉 객관화된 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작은 난관 앞에서도 쉽게 절망하는 사내, 자주 남을 탓하는 사내, 세상은커녕 사람 하나 안아주지 못하는 사내. 하지만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치이고 다치고 아파도 늘 웃어야 하는 사내.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오래 전 울음을 잃어버렸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절실한 건 화해였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그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도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길고 긴 미로에서 길을 찾은 그 새벽은 안개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시간 안개 속을 달리는 건 저 혼자뿐입니다. 당신도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단어를 실감해본 적 있나요? 지금 이 길이 딱 그렇습니다. 얼마나 돌고 도는지, 얼마나 오르내리는지, 핸들을 잡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갑니다. 지금 가는 길은 비교적 얌전한 편인데도 그렇습니다. 청송이란 곳이 그렇습니다. 청송을 말 그대로 풀면 푸른() ()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지명중에 가장 멋진 이름입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세계란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선계(仙界)를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땅인 것은 확실합니다. 숲은 울창하고 골은 깊으며 물은 달고 맑습니다. 오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바람 한 자락까지 청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길을 달려 저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주산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주차를 한 뒤 언덕길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작은 호수가 보입니다.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합니다. 해 뜨기 전에 사진 몇 장을 찍어두려는 요량에서입니다. 이곳에 당신이 함께 왔다면 약간 실망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미적거리다 고개를 끄떡거리겠지요. 호수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작고, 저수지라고 부르기에는 인정머리 없어 보이고, 못이라고 하기에는 깔본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바로 이 주산지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꽁지 빠진 장닭마냥 추레한 얼굴이군요. 물이 많이 빠진데다 그 씩씩하던 왕버들이 지쳐 보이기 때문일까요? 앞서 걷던 여자가 여지없이 의문을 드러냅니다.

애개개! 여기가 거기 맞아? 영화하고는 영 다르잖아. 이렇게 조그맣지 않았는데?”

함께 가던 남자가 모든 걸 모든 것 이해한다는 듯 대답합니다.

그게 바로 영화 만드는 기술이야.”

그들이 말하는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입니다. 영화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의 물안개는 기대만큼 짙지 않습니다. 약간 실망스럽지만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미농지처럼 엷은 햇살이 먼 숲 사이로 비껴들면서 안개가 수면 위를 유영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 실망스러울지라도 제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1721년에 축조된 길이 200m, 너비 100m의 작은 호수,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는 이곳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했던 왕버들 근처에 삼각대를 세웁니다. 지금은 삐걱거리는 문도, 물 위에 뜬 절도, 떠나거나 돌아올 사람도 없습니다. 한 때 스물 세 그루나 됐다는 왕버들은 한살이를 마치고 고목이 됐거나 수세(樹勢)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아직 저만치에서 주춤거리고 있어서 주산지의 자랑거리인 단풍은 보기 어렵습니다. 1~2주 더 지나야 물안개도 살을 붙이고 나뭇잎도 물이 들 것 같습니다. ‘감독 김기덕의 눈으로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일면식도 없는 그를 생각합니다. 그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 있다면 영화겠지요. 그는 만들고나는 보는사람이지만. 저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게다가 예술가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이라면 손방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을 정도로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도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심리를 궁금해 합니다. 그를 말할 때 곧잘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동반되고는 합니다. 그러면서 그 언저리에 초등학교 학력(1년쯤 다녔다는 이름 없는 신학교까지도 생략하고 싶어 합니다.)이나 성장과정을 배치합니다. 저는 그의 콤플렉스가 과연 그런 환경이 만들어낸 건지 궁금합니다. 아니, 정말 그가 콤플렉스 덩어리인지 의심합니다.

 

<파란 대문> 등의 작업을 함께했던 촬영감독 서정민은 김기덕을 일러 신인 감독이었지만 두려움이 없고 대담했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밀고 나가는 뚝심이 대단하다.”고 했다지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쩌면 김기덕에게 콤플렉스는 존재했되 콤플렉스 따위에 시달린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궤적을 살짝 엿보며 혼자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파리로 건너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닭을 먹으며 버텼다는 강단, 듣도 보도 못한 화가가 되어 유랑 전시까지 했다는 두꺼운 낯, 귀국 후 느닷없이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한 가락 하는 영화감독이 되는 그를, 콤플렉스 덩어리로 규정짓기에는 조금 석연찮습니다. 하긴 그런 뚝심 역시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저돌성일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콤플렉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요. 콤플렉스가 그의 독특한 세계를 일궜다면, 그건 약점이 아니라 삶을 키우는 자양분이었을 테니까요.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작용한 콤플렉스는 더 이상 콤플렉스라고 부르면 안되겠지요. 사실 제가 결론 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김기덕이 업보라는 돌을 지고 산을 기어올랐듯, 콤플렉스의 무게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오래 천착해보는 것뿐입니다. '콤플렉스야말로 그대를 키우는 에너지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놔두는 것도 지혜겠지요. 생각을 접은 뒤 부지런히 셔터를 누릅니다. 가을을 맞으러 새벽을 달려온 사람들이 분주히 오갑니다. 저는 당신에게 이곳 풍경을 전해줄 생각에 가슴이 뜁니다.

 

 

소로 돌아오는 길, 어느 과수원 길거리 판매대 옆에 차를 세웁니다. 사과 향에 취해 실컷 행복을 누려놓고 맨손으로 가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의 첫 손님인 모양입니다. 아주머니가 사과 하나를 앞치마에 쓱쓱 문지르더니 불쑥 내밉니다. 보통은 칼로 깎아서 한 조각 권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건네주니 무람없고 좋습니다. 망설임 없이 덥석 베어 뭅니다. 와삭!! 하는 소리가 대기를 관통하는 순간, 날카로운 희열이 온몸을 감쌉니다. 나뭇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는 고승의 경지는 분명 아닌데, 느닷없이 찾아온 이 환희는 무엇일까요. 제 안의 근심과 오욕이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에 놀라 몽땅 도망친 모양입니다. 생각을 탈탈 털어내고 사과에 탐닉합니다. 김기덕이 여전히 파열을 꿈꿔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영화를 100개쯤 만들고, 10년 내리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독식한다고 제게 뭐 그리 대단한 의미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만은 와삭, 하는 경쾌음과 입안에 고이는 달콤한 맛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걸요.

 

그러고 보니 과수원집 아주머니는 제 외숙모를 닮았습니다. 잘 마른 삭정이처럼 기름기 없는 얼굴에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그분을 봅니다. 그런 끌림이 있어 이곳에 차를 세우게 된 걸까요. 외삼촌댁에는 사과나무 몇 그루가 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제가 가면 갈무리해뒀던 사과를 앞치마에 정성스럽게 닦아 내밀었습니다. 그해에 딴 사과 중에 가장 실한 것이겠지요. 외숙모의 앞치마를 지나온 사과는 마당가의 샐비어꽃처럼 붉었고 갓 벌어진 석류알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전문 과수원이 아닌지라 작고 볼품없었지만 제 기억 속의 어떤 사과보다 예쁘고 맛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사과를 능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참동안 사과와 능금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면 외숙모가 준 사과는 능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깨어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날들 위를 걸어왔지만, 그 흔한 사랑이 나만 외면한다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랑은 늘 제 주변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주 잊었습니다.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부드럽게 안아주던 햇살 한 자락도 누군가의 사랑이라는 것을. 오래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의 주머니, 그 안쪽 아디엔가 헌책처럼 던져두었던 사랑들을 꺼내 사과 무더기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이렇게 많은 돌봄 속에 살았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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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9. 08:55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첫 주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계절적 차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내원마을에 서다

 

들판을 달려온 길은 산의 늑골 사이로 고단한 몸을 뉩니다. 여름과 가을을 양손에 쥐고 있는 산은 여전히 푸르고 헌헌(軒軒)합니다. 천천히 걷다보니 조금 불편했던 마음은 다림질을 한 듯 활짝 펴집니다. 대전사(大典寺)에는 눈길 한번 흘끗 주고 내처 지나온 참입니다. 이 절집 역시 새 건물을 세우느라 진흙구덩이에 구른 강아지 꼴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 땅의 절들은 언제부터 새집 짓기 경연대회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좀 있다는 산마다 망치소리로 몸살을 앓습니다. 저를 정녕 불편하게 하는 것은, 대개 부처를 위한 집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모퉁이를 하나 도니 속세는 저만치 아득하고 길은 흔연하게 펼쳐집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래킹이나 산책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편안한 걸음입니다. 이런 길은 중턱까지 이어집니다.

 

급수대

당신은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 저는 청송 주왕산(周王山)을 오르는 중입니다. 주왕산은 단풍이 무척 고운 산이지요. 아직은 일러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게 서 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대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취해버린 미당(未堂), 그 경지를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저는 터벅터벅 걸음을 뗄 뿐입니다. 사실은 일부러 조금 빠른 계절을 택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단풍철에는 말 그대로 나무 반(), 사람 반이기입니다. 단풍이 없다고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내려 보는 이가 있으면 그야말로 헛눈을 가졌음을 한탄해야 합니다. 맨 먼저 시선을 잡는 건 급수대라고 이름 붙인 거대한 바위입니다. 721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왕산은 어느 산 못 않게 자랑거리가 많은 산입니다. 특히 전설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마다 동굴마다 얽혀있는 전설이 얼마나 자주 발걸음을 잡는지요. 물론 급수대에도 전설은 있습니다. 신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린 김주원(金周元)이란 왕족이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해서 대궐을 세운 게 바로 저 거대한 바위 위였던 모양입니다. 게서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썼다고 해서 급수대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입니다. 바위 위의 성이라. 그림은 그럴 듯한데 현실감은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전설이겠지요.

 

자하성. 내 눈엔 그냥 너덜겅이다.

길가의 꽃에도 마음을 얹어보고 주방천 맑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도 놀다 보니 걸음은 자꾸 더뎌집니다. 주왕이 쌓았다는 자하성(紫霞城)이 또 옷깃을 당깁니다. 자하성. 이름이 제법 멋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올려보고 둘러봐도 제 눈에는 한때 30 리나 됐다는 성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깨진 바위가 흘러내리는 돌내(石川), 즉 너덜겅에 성이라는 이름만 붙인 것만 같습니다. 제가 또 이렇습니다. 전설은 그저 전설이라고 해놓고 따지려 드는 건 뭔지. 주왕이 대체 누구길래 이 명산의 주인이 됐는지 궁금할 법도 합니다.

 

시루봉. 내 눈엔 심술 궂은 할매바위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일패도지(一敗塗地), 요동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그가 바로 주왕(周王)입니다. 쫓기던 주왕은 멀리 신라 땅 석병산(石屛山, 지금의 주왕산)으로 피신합니다. 중국에 모래알처럼 많은 게 산인데 예까지 온 게 신기합니다. 그는 협곡에 자하성이란 성을 쌓고 재기를 노립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신라에 그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나당연합에서 을()의 입장에 있던 신라는 마일성 장군이 이끄는 진압군을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킵니다.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게 되지요. 한 때 중원대륙의 주인을 꿈꿨던 그의 최후는 좀 허무합니다. 굴 입구로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다음 해 붉은 꽃을 피웠다는 데 바로 주왕산에만 핀다는 수달래입니다.

 

 

 

제1폭포 아래의 소.

전설을 머금은 풍경은 계속 이어집니다. 백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구경을 하였다는 망월대, 멀리 동해가 보인다는 왕거암. 떡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란 이름을 얻은 바위는 아무리 봐도 심술궂은 할멈처럼 생겼습니다. 거대한 바위들은 전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장군도 되고 임금도 되어 천하를 호령합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그들의 얼굴과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지금은 위안의 시간, 산속 세상은 부모 죽인 원수라도 끌어않을 듯 평화롭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제가 가진 언어의 한계에 절망합니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수사 따위는 눈에 차지 않는 듯, 형용이 닿지 않는 저만치에 서 있습니다. 아픈 아이 죽 떠먹이듯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주왕산에서는 그렇게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웃어주고 새가 말을 걷고 흐르는 물이 노래를 하는 것을 듣볼 수 있습니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청량한 기운이 가슴 가득 찰랑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3폭포 아래의 소.

주왕산 구경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폭포입니다. 세 개의 폭포는 저마다 개성을 자랑합니다. 어느 것은 우르르 쾅쾅, 바위의 견고함을 실험하고 어느 것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립니다. 사람들은 그 황홀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걸음을 빼앗깁니다. 3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느닷없이 한가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저만의 길입니다. 주 등산로가 아닌 덕분에 고적한 길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이 깨질까봐 모르는 체 하고 걷습니다. 원래는 마차까지 다니던 길이었다는데 사람이 떠나고 산짐승들이나 가끔 오가다보니 길의 영역은 갈수록 좁아집니다. 노래도 부르고 주저앉아 땀도 들이면서 30분쯤 걷고 나면 눈에 익숙한 느티나무가 나타납니다. 느티나무. 어쩐지 깊은 산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 어귀에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서서 한 여름 너른 그늘을 드리워주는 게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돌무더기가 제법 봉긋하게 쌓여있습니다. 오가며 돌을 던졌거나 일부러 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 정도면 당산나무의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당신을 더 이상 궁금하게 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아니 사람이 살던 마을의 들머리이고, 오늘 제 산행의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숲길을 지나.내원마을. 10~20년 전만 해도 전기 없는 마을로 곧잘 잡지 같은 곳에 오르내리던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줄 이 없는, 그저 흔한 산자락에 불과합니다. 좁은 길을 지나 모롱이 하나 꺾어들면 어? 이런 곳이? 할 만큼 꽤 넓은 개활지가 펼쳐집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호리병 속에 들어앉은 듯 안온한 기운이 전신을 감쌉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다른 주인이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마을 입구의 서낭당 자리.

내원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입니다. 몇몇 가족이 임진왜란 때 피난삼아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고 하지요. 많을 때는 70가구 500여명까지 모여 살았습니다. 마을에 양조장과 학교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벼농사·담배농사·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를 팔 수 없게 됐고,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결국 2006년에 6가구 20여 명이 마을을 떠났고 2007년에는 마지막 3가구가 떠났습니다. 마을이 철거된 결정적 이유는 수질보호입니다. , ‘국립공원 한가운데서 관광객을 상대로 무허가 음식점과 민박업을 하는 바람에 주방천의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들어낸 것입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음식점들이 아직도 성업 중인 게 신기합니다.

 

마을은 간데없고 목책만.

200711월 처음 내원마을을 찾아갔을 때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원마을은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었을 곳이 자꾸 지워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집터나 논밭이었던 곳에는 늦가을 억새들만 어깨를 비비며 서걱서걱 울고 있었다. 골짜기이긴 하지만, 포근하게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은 인간이 깃들여 살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민, 내원산방의 이상해씨(44)는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뒤를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 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차나 음식도 못 팔게 하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단풍철이 지나면 이 집도 철거한답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은 막막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황금빛으로 농익은 햇살이 내원분교의 교실 안팎을 덧칠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한 칸짜리 교실로 들어가니 풍금 두 대와 낡은 난로, 손바닥만 한 책걸상 몇 개와 칠판 같은 것들이, 아이들 대신 지난 세월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폭포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276P

 

2007 내원마을 모습. 내원분교와 내원산방이 보인다.

2012년. 마을은 숲이 되었다.

제가 다녀온 다음 달인 200712월 내원분교와 내원산방도 헐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811월에 찾아갔을 때 내원마을은 완전히 낯선 곳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선이 제대로 가 닿기도 전에 신음부터 터진다. 이럴 수가……! 아무 것도 없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찻집 내원산방이 있던 자리, 흰 개가 해바라기를 하던 곳에는 억새들이 무성하게 키를 재고 있다. 새로 둘러친 목책만이 이곳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걸 강변하고 있다. ‘환경저해시설 철거 안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때 수백 명이 깃들어 살던 동네라는 게 상상조차 안 될 것 같다.

                                      <월간 에세이 20101월호(통권 273)> 66~67P

 

억새 사이로 오솔길은 남고.

지금은 201210. 4년 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젠 뭐라고 쓸지 제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사실은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라지고 숲이 돌아온 것이 아득한 날의 전설처럼 멀어 보입니다. 마을도 집도 살던 이들도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듭니다.

 

이제 어둠이 밀려온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그리고 내원산방과 흰 개가 있던 자리, 아니 있었다고 짐작 되는 자리에 서서 망연한 눈길을 던집니다. 목책마저 없었다면 여느 산자락과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에게 내줬던 고토(古土)를 초목이 완벽하게 회수한 것입니다. 걸음을 천천히 옮겨 억새의 땅으로 가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나무들이 저렇게 빨리 영토를 넓히는 데도, 한 때 사람의 밭이었던 억새의 영역엔 잡목 하나 얼씬하지 못합니다. 먼저 차지한 게 임자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억새들은 시간을 베고 게으르게 잠들어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은데 나그네의 안달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바람이 돌아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산중에는 흔전만전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나눠쓰던 시간은 나무와 풀과 새와 냇물의 소유가 돼버렸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오고 가는 것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내려오는 길은 컴컴했다.

억새들의 긴 잠에 지쳐 냇물 한가운데 너럭바위에 철퍼덕 몸을 맡깁니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새 주인인 초목의 영토가 마주 보이는 곳입니다. 이젠, 이곳의 절대자가 망각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을 줍고 물고기를 잡던 78(내원분교 졸업생 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든, 마지막 주민들이 몇 푼 쥐어진 보상금을 까먹고 도시의 잉여인간으로 떠돌든 누구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자의 뜻에 기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가을이 깊을수록 햇빛은 떡가루처럼 곱게 부서지고 냇물은 묵()빛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물고기들은 살을 찌우고 계절을 포식한 새들의 울음은 윤택해질 것입니다. 나무들은 잎을 떠나보내고 긴 잠을 청할 것입니다. 순환과 순리 앞에 덧없는 미련과 인연을 내려놓습니다. 초가을이 깊숙이 들어앉은 풍경화 속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저도 어느덧 그 그림 속으로 녹아듭니다. 풍경인 제가 풍경이 된 저를 바라봅니다. 살풀이굿이라도 치른 듯, ‘가 없는 풍경 속에서 가없는 자유를 만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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