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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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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한 ‘Simit Saray’.

카페 Simit Saray에 진열된 아침식사.

아침 식사를 위해 찾아간 곳은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한적한 골목. ‘Simit Saray’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너무 일러서일까, 주인의 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양에서 진출한 떼도둑이라도 든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 판이니 음식준비가 제대로 돼 있을 턱이 있나. 사실 나는 아침식사가 그리 당기는 편도 아니다. 어디 가서 밤새 고아놓은 해장국 한 그릇 먹는다면 몰라도. 비행기에서 새벽에 먹은 기내식이 아직도 위장에서 저항군처럼 버티고 있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실내를 벗어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순간, 이건 또 무슨 징조? 난데없이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이 내내 무겁더라니. 이스탄불은 비가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라 당황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하다. 우리 땅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온 터라 하늘에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긴 내가 뭐라 한들 눈 하나 꿈쩍 안 하겠지만.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딱딱한 빵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시미트란다. 한국말로 하면 깨빵이라고 훌리아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 그래서 가게 이름이 Simit Saray였구나. 몇 조각 떼먹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있을 때 먹어두라는 내 여행수칙이 깨지는 순간이다.

 

 

Simit Saray에서 빵을 파는 아가씨.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실내에도 손님이 여럿 앉아있다. , 이곳도 아침식사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홍콩이나 중국의 대도시에서 보았던 아침식사 대열이 생각난다. 문을 나서려는데 빵을 파는 아가씨가 자꾸 흘끔거리며 나를 훔쳐본다. 역시 내가 한 인물 하지? 헌데 자세히 보니 시선이 꽂힌 곳은 내가 아니라 카메라다. 그럼 그렇지. 수줍어하는 모습이 예쁘다. 터키 아가씨들 예쁜 거 한 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쉽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어도 돼요?” 물으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린다. 영어는 못 알아듣지만 너 하는 짓 보니 무슨 소린지 알만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려나 땡큐다. 사진을 찍고 나니 얼른 보여 달란다. 수줍은 척 하면서도 할 건 다한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Good”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내겐 그대가 Good이야. 식사를 마친 뒤 히포드롬(Hipodrome) 광장 쪽으로 걷는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하지만 우산은 캐리어에 들어있어 꺼낼 수 없다. 뭐 어때. 가끔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괜찮지. 어릴 적엔 매번 맞고 다녔는걸. 비를 무서워하지 않기는 길 위에서 뒹구는 고양이나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지나가는 트램도 마찬가지다. 이번 이스탄불 탐색은 히포드롬에서 시작해서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순으로 잡았다. 년에 혼자 돌아봤을 때와 똑같다.

  새벽 거리를 오가는 트램.

 

히포드롬에서 '깨빵' 시미트를 파는 청년.

9개월 만에 다시 찾은 이 위대한 유산들 앞에서 난 또 무엇을 배워야할까. 조금 고민스럽다. 그때 느닷없이 떠오르는 경구.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라. 모든 사물은 다른 각도로 볼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그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되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스쳐간 곳들 중에는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많으랴. 놓치고 지나간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으랴. 비에 젖은 바닥에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본질을 보려 애쓰리라.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전쟁 전인 1901년 오스만의 34대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기증했다는 육각정앞에 서 있는데 저만치 재미있는 모습의 청년 하나가 눈에 띈다. 키가 훌쭉하게 큰 청년이 꽤 높이 쌓은 무언가를 머리에 인 채 걸어오고 있다. 재주도 좋지. 멀리서 봤을 때 꽤 높이 쌓은 무엇이던 그것은 눈앞에 오면서 도넛으로 쌓은 탑이 된다. 재미있어서 사진을 몇 장 찍는데 그가 내 앞에 와서 선다. ! 탑은 도넛이 아니라 조금 전 카페에서 아침으로 먹은 깨빵, 시미트. 그러니까 이 청년은 탑처럼 쌓은 시미트를 이고 아침 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1개에 1리라, 1달러를 내면 3개를 준단다. 이거 미안해서 어쩐담. 사진을 찍었으니 몇 개 사주는 게 예의일 텐데 조금 전에 먹고 왔으니. 청년은 살 기색이 없는 걸 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른 손님에게로 간다. 비가 내리는 히포드롬은 맑은 날과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지 않아서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광장을 오간다.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가 기증했다는 정자.

이쯤에서 히포드롬을 소개하고 가야 예의겠지? 히포드롬은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과 나란히 배치돼 있는 로마시대의 유산이다. 훗날 지어진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지만 히포드롬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쓴다. 뜻은 말 운동장이란다. 말 운동장? 그럼 경마장? 말이 끄는 전차경주장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길이 130m, 너비 450m의 말굽모양으로 40열의 객석에 10만 명까지 수용했다는 굉장한 규모의 광장이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주요 국가 행사는 여기서 치러졌다. 또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도 열렸다. 광장에는 갖가지 유물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 뱀의 기둥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는 기구한 운명들이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지금 높이의 세 배인 60m였고 무게도 800t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세 도막으로 나눠 윗부분만 가져왔다. 이산가족이 아니라 이산 몸통이 돼버린 셈이다. 뱀 기둥도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았다. 내 눈에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흉물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광장 자체가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제4차 십자군은 히포드롬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가톨릭)의 군사가 또 다른 기독교(정교회)의 나라를 철저하게 유린한 것이었다. 그 뒤로 광장에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신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쓰는 걸일까.

 

 

히포드롬 주변의 카페.

나는 이 히포드롬에 서면 각종 사연을 지닌 유적들보다는 사람 이야기가 먼저 난다. 특히 심약한 범부에서 위대한 황제가 된 한 남자, 그리고 매춘부에서 황후가 되어 위대한 황제를 만든 여자. 이왕 왔으니 그들을 잠깐 만나고 가자. 10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정도는 기본 예의다. 그렇다고 절대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니 긴장할 건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1.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잃어버렸던 로마의 영토를 회복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황제의 이름이다. 그가 황제가 되는 자체에 우여곡절 있었다.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는 그의 외삼촌이다. 트라키아의 가난한 농민출신이었던 유스티누스는 말 그대로 ()’으로 군에 입대했다. 밥이라도 실컷 먹으려고 병졸이 된, 내 땅의 옛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서 멈출 사람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피눈물 나게 노력했던지 황실 경비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518년에 황제가 되었다. 공부할 틈이 없어 까막눈이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던 황제는 누이의 아들인 사바티우스를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나라 일을 맡긴다. 또 제법 일을 꼼꼼하게 한다 싶으니 양자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외삼촌이자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 이름까지 바꾼 유스티니아누스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해 황제의 길을 열어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런 과정을 거쳐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배우자 테오도라를 만나면서 또 한 번 바뀐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남자에 달렸다고? 테오도라는 그걸 뒤집어서 남자 팔자가 여자에 달렸다는 걸 증명한다. 그녀는 원래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에서 곰을 관리하던(말을 관리했다는 설도 있다) 사내의 딸이었다. 신분으로 보면 바닥 중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기 뿐 아니라 검투사나 맹수들의 싸움, 연극, 서커스가 열렸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들의 사육사가 필요했던 건 당연한 일. 가설이긴 하지만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는 여인들은 화류계에도 몸을 담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도 그 중 하나였지 않을까. 소속이 어디였든 그녀는 유명한 매춘부 혹은 무희였다고 전해진다. 매춘부니 집창촌이니 자꾸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되는데. 이러다가 점잖은 독자 다 떨어지겠네. 그래도 전할 건 전해야지.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히포드롬 광장을 누비던 그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그쪽 생활을 청산하고 양모를 짜서 생계를 꾸리는 요조숙녀로 변신하더라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걸까? 크게 될 사람은 그렇게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법. 유스티니아누스가 조신한 여자테오도라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남자, 즉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자의 미모와 정숙함에 반해서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하단에 새겨진 부조들.

그렇다고 모든 게 일사천리는 아니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귀족과 평민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콩 껍질로 이중 도배했는데 그냥 물러날 총각이 있나.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삼촌을 졸라 귀족도 하급계층과 결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한다. 일은 술술 풀려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 또 한 번 히포드롬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외삼촌과 테오도라를 만난 것에 이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찾아온 세 번째 전환점은 532년에 일어난 니카반란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전차경주팀이 2개 있었다. 지금의 인기 프로축구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져 청색당과 녹색당으로 부르게 됐다. 전차 경기의 팀들이 입는 옷 색깔에서 시작됐지만 시민들까지 두 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귀족들이 지지했고, 녹색당은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지지 세력이었다.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청색당을 지지했다. 5321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히포드롬의 전차경기에서 두 당파의 충돌이 있었는데 결국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황제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주동자 7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됐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가운데 각 당의 한 명씩이 칼을 맞고도 살아남는 일이 생겼다. 이때 민중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은 냉정하게 다시 사형을 집행해서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양당이 합세해 폭동을 일으켰다.

 

세 마리의 뱀 기둥.

3일 뒤인 113.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히포드롬에 들어서자, 폭도들은 황제를 향해 전차경주 선수들을 격려하는 응원 구호 니카!(이겨라!)’를 외쳤다. 번역하면 황제 타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겠지. 사실 이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그 시대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벼슬을 팔아 축재를 하는 매관매직을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쌓인 돈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각종 축제와 운동경기를 열어주면서 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관행을 폐지했다. 빵과 전차경주에 중독된 시민들로는 그런 황제가 '빵을 빼앗은 놈' 정도로 보일 수밖에. 밥 한 술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민초들 아니던가. 공짜로 먹고 즐기던 걸 빼앗았으니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그래도 좀 그렇다. 황제가 상대방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들여온 쇠고기를 먹고 백성 몇 사람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든가, 황제의 친인척이 물불 안 가리고 해먹다 보니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다든가, 강이란 강은 전부 파헤쳐 비만 오면 '노아의 방주'를 사겠다는 주문이 빗발친다면 몰라도 빵 좀 안 줬다고 폭동까지 일으킬 거야. 폭동은 급기야 반란으로 확대돼 폭도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다. 그게 바로 니카반란이다. 잠깐. 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왔다 갔냐 하냐고?

 

십자군이 발가벗긴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

생각보다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니카반란이 일어난 532년 전후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했고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됐다. 백제는 사비성으로 천도했다. 그런 사실을 적은 기록들이라 봐야 몇 줄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이든 서든 자세한 건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히포드롬에서 시작된 폭동은 결국 새 황제를 뽑는 데까지 이어지고 만다. 성소피아 성당도 불길에 휩싸인다. 그 소용돌이 속에 서 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래 담이 그리 크지 못한 사내였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이 담을 넘어오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황제는 어마, 뜨거라!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담 큰 마누라님, 아니 황후인 테오도라의 호통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어딜 가신다는 겝니까? 황제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 황궁입니다. 어의(御衣=황제의 옷)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없습니다. 지금 도망치면 다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겝니다.” (대부분은 내가 재구성한 문장이다. 대충 그랬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죽어도 여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혹은 마누라가 무서웠던 황제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벨리사리오스라는 장군을 불러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진압은 성공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동에 참여했던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6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히포드롬 주변에 활짝 핀 자귀나무 꽃.

폭동과 진압. 지금 내가 서 있는 히포드롬에는 핏물이 냇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황제의 기록으로 보면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인 역사다. 더구나 빵 때문에 죽었다는 건 가장 슬픈 일이다. 아무튼 니카반란 진압을 계기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결국 위대한 황제로 훗날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가 이룬 업적들을 새삼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금 나는 정의와 불의, 혹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히포드롬 이 품은 이야기를 하나 전하고 싶은 것이다. 광장을 밑천으로 미천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황후가 되고 황제의 지위를 잃을 뻔한 남편을 호통 쳐서 위대한 황제가 되게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너무 길었나? 그래도 딱 히포드롬 이야기 하나만 더. 광장의 남쪽 끝에는 흉물스런 외관을 갖고 있는 탑이 하나 서 있다. 이름도 길기도 하지.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의 탑이다. 원래 32m 높이로 쌓은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힌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제 4차 십자군의 폭거로 인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난전이 되어버린 전쟁,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처음의 뜻은 오간데 없이 같은 기독교의 나라로 쳐들어온 그들은 이 탑조차 발가벗기고 말았다. 무기를 만든다는 영분으로 탑에 있는 청동을 몽땅 떼어낸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리석만 남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의 황제, 즉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옛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히포드롬의 관광객들. .

다른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세 마리 뱀의 기둥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나는 흉물스러운 형태의 오벨리스크 앞을 홀로 서성거린다. 역사는 미명(美名)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악명(惡名)도 기록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잠시 고뇌한다. 탑 옆에는 비 맞은 자귀나무 꽃이 탐스럽다. 여기서는 이 꽃을 무어라고 부를까. 잠시 나무에 기대어 말 없는 역사를 곱씹어본다.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히포트롬에 서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고향 떠난 오벨리스크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이스탄불을 하루 만에 돌아보겠다는 것은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주마간산으로 둘러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어쩌랴. 이번에는 신이 내게 준 시간이 그뿐인 것을. 맛보기라도 하려면 뛰듯이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세운 여행 철학과는 어긋나지만 이런 기회라도 주어졌음에 감사해야지. ! 어서 가자. 트램을 내린 술탄아흐메트 정류장에서 로마와 비잔틴 시대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히포드롬은 코앞이다. 보통은 성소피아 성당(아야소피아 박물관)에서 출발해서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자미(블루모스크), 이곳 히포드롬 순서로 돌아보게 되지만 1분이라도 아까운 나는 그 코스를 거꾸로 잡았다. 세로 500m, 가로 117m의 히포드롬은 공원이 돼 있다.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높다랗게 솟아있는 기둥. 이집트 오벨리스크(Egyptian Obelisk). 지금부터 3500년 전인 BC 16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룩소르의 라크라크 신전에 세운 2개의 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신전 이름이 어떻게 간이침대 이름 같냐. 지금 그거 신경 쓸 땐 아니지.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가져와서 지금 있는 자리에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는데, 그 상징성에 눈독을 들인 것이겠지.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한 나라의 상징물이 점령자의 욕심에 의해 제 땅을 떠난 건 마뜩치 않다.

오벨리스크 기단에 새겨진 부조.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뱀기둥.

 이 오벨리스크는 기단에 새겨진 부조로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마차 경주를 관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무지함으로 뒤덮인 내 눈에는 숱한 조각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뱀이 휘감은 듯 나선으로 된 기둥. 재료는 청동으로 보인다. 이 뱀기둥은 BC 478년 페르시아를 물리친 기념으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운 승전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제가 있던 곳에서 살 팔자가 못 됐던지 콘스탄티우스 대제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원래는 높이가 8m에 달했지만 머리 등이 파손되고 5m정도만 남아 있다. 본의 아닌 타향살이도 서러울 텐데 훼손까지 당한 걸 보니, 꿈도 의지도 사라지고 몸까지 쇠락해버린 망명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떨어져 나간 뱀 머리 가운데 하나는 이스탄불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니 이별이 멀고도 길다. 광장을 벗어나 블루모스크로 접어든다. 블루모스크, 정식 이름은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말하는데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모스크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두 단어 사이의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길게 풀어 써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지은 이슬람 사원정도가 될 것 같다.

여러 방향에서 본 블루모스크. 세번 째 사진에서 여섯개의 미나레트를 확인할 수 있다.

블루모스크에 담긴 사연

블루모스크는 1609년에 착공돼 1616년에 완공됐다. 이 사원이 유명한 것은 내부의 아름다움에 있다.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실내를 비추는데, 그 빛이 21000장의 푸른색 타일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온다. 그 때문에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보통은 맞은편의 성 소피아성당을 먼저 둘러보고 블루모스크를 보는데 거꾸로 들어가다 보니 역사를 거꾸로 걷고 있는 셈이다. 순서야 어쨌든 이 두 건물은 가까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사연을 잠깐 듣고 지나가보자. 오스만 제국의 14대 황제였던 아흐메트 1세는 성소피아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 무엇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 성당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우고 모스크로 바꾸긴 했지만 비잔티움제국이 세운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찜찜하기도 하고 열도 받았던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멋진 모스크를 하나 세우기로 한다. 결국 블루모스크라는 역작은 성소피아라는 불세출의 걸작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셈이다. “그래, 결심했어술탄은 그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가를 불러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문제는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은 그 정도 건물을 지을 형편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충성스런 건축가였던 아가, 그런 현실과 지금은 때가 아님을 간곡히 진언했지만 왕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주변 말을 안 듣고 어깃장 놓는 게 주특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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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모스크의 안뜰.

뭔 잔말이 그렇게 많다냐? 그냥 지어. 특히 미나레트는 본때 있게 황금으로 떡칠 혀봐.” 그래서 할 수 없이 짓기 시작한 게 이 블루모스크다. 술탄은 기공식에 직접 나와 삽질을 하고 흙을 나를 만큼 기대가 컸단다. 쯧, 삽질 좋아하는 거 하고는그런데 특이한 건 이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6개라는 점이다. 이웃의 성소피아 성당 등 대부분의 모스크는 2~4개의 미나레트가 고작이다. 미나레트 자체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슬람 성지 메카의 모스크만 6개를 세운다고 한다. 완공 후 현장에 간 술탄이 기가 막혀 물었다. “아니, 저것이 워째서 여섯 개랴?” “아따, 시방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허신대유. 원래 여섯 개 세우라고 혔잖유?” 이렇게 어긋나게 된 사연이 있다. 물론 기록에는 없는 야사(野史). 터키어로 6알투(Altu)’, 황금은 알툰(Altun)’이다. 왕은 알툰, 즉 황금 미나레트를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건축가는 그걸 알투, 즉 여섯 개를 세우라는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건축가의 귀가 어두워서 그리 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술탄은 철없이 고집을 피우지만, 미나레트마저 황금으로 세우면 나라 곳간이 완전 바닥날 걸 염려한 건축가가 미친척하고 알툰대신 알투미나레트를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말도 있다. 술탄이 원래 여섯 개를 세우라고 해놓고 메카의 눈치를 보느라 건축가의 어두운 귀를 탓했다는 설이다.

블루모스크 내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환상적이다.

 
환상의 푸른빛을 보다

이제 블루모스크에 직접 들어가 볼 차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만찮은 위용에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지금까지 터키에서 본 건축물 중 가장 크고 당당하다. 높이 43m, 직경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을 4개의 중간 돔이 받치고 있어 무척 안정적이다. 또 그 주변으로 또 30개나 되는 작은 돔들이 배열돼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마치 크고 작은 몽골 게르들을 보는 것 같다. 본당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6개의 미나레트 앞에 서서 역사의 기록이 숨겨뒀던 뒤안길을 더듬어본다. 실내로 들어가면 감탄사는 더욱 커진다. 수없이 많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이 쳐놓은 환상적인 푸른 커튼. 아름답다. 어쩌면 이 빛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나머지 까마득한 돔형 천장이나 거대한 샹들리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밖으로 나와 잘 가꾼 정원에서 조금 전 본 걸작을 되새김질 해본 뒤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블루모스크와 성소피아 성당 사이에는 깔끔하게 단장된 광장이 있다. 그곳에는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한가한 고양이들이 햇볕을 즐기고 있다. 나도 잠시 돌 의자에 몸을 기댄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 교과서에서 시작해 숱하게 듣고 사진으로 봤던 성소피아 성당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감동스런 순간은 잠깐의 뜸을 들인 뒤 마주칠 때 더 가슴을 뛰게 하는 법이다.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의 원래 명칭은 그리스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였다. 신성한 지혜라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뒤에는 아야소피아(Ayasofya)라고 불렀다.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성당, 이슬람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사원이라고 하는데 1934년 박물관으로 지정된 뒤 공식이름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멀리서 얼핏 보면 블루모스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또 집중해서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은 사람이나 시기의 차이일까. 높이 54m, 동서 길이 77m, 남북 길이 71.7m. 정사각형의 벽 위에 지름 32.96m짜리 돔 지붕을 올린 비잔티움 시대의 대표적인 성당. 우선 외관부터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성소피아 성당도 덩치나 역사만큼 숱한 이야기와 사연을 품고 있다.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비잔티움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0년에 세운 큰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불타버리고 416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 역시 532년에 일어난 시민들의 폭동(니카의 반란)으로 불타는 비운을 맞이한다. 창녀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는 여걸 테오도라 황후 덕분에 반란을 평정한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는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견고한 성당을 짓도록 명령한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것이 동원됐다. 목수 1000 명과 노동자 21만 명이 투입됐고 최고의 건축자재를 사용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공식명칭인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써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의 회랑.

회랑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성소피아 성당이 생긴 사연

특히 목재로 지었기 때문에 화재가 잦았다는 핑계로, 고대 신전의 기둥까지 뽑아다 썼다. 이때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델피 신전의 대리석 기둥도 징발돼 머나먼 이곳으로 옮겨졌다. 황제의 성당 욕심에 나라의 기둥뿌리가 남아나지 않은 셈이다. 5322월에 착공한 성당은 510개월 만인 53712월에 완공됐다. 준공테이프를 끊고 성당에 들어서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외쳤다는 한 마디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아무튼 황제 정도 하려면 뭔가 멋있는 말 한 둘쯤은 준비하고 다니나 보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걸작을 자기 대에 완성했다는 감동에서 나온 말이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돔 양식 건축물의 백미로 꼽힌다. 중앙 내부 면적은 7000m². 엄청나게 넓다. 비잔티움 석조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이 성당은 동방 정교회 수장인 대주교가 머무는 곳으로 비잔티움 제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진, 화재 등으로 수난을 겪다가 1204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성상과 성물들이 대거 약탈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교도도 아닌 기독교도가 기독교의 상징을 턴 것이다. 결정적인 시련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에 의해 함락 당하면서 일어난다.

성소피아 성당의 내부. 숱한 샹들리에와 이슬람문자가 새겨진 원판이 눈에 띈다.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의하면 점령지에는 3일 간의 약탈이 허용된다고 한다. 당연히 성소피아 성당도 약탈 대상이 됐다. 하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점령군주 메흐메드 2세는 병사들에게 건물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이 성당에 미나레트를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 위에 회칠을 해서 가려버렸다. 비극이지만 부숴 없애지 않을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 일이다. 그렇게 회칠로 덮여졌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회반죽벽에 그려진 벽화기법)1931년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역사를 훑어봤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씩 확인할 차례. 성당은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넘쳐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와 관광객들이다. 문을 들어서니 본당 앞에 큰 회랑이 나타난다. 기도를 준비하던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본당으로 들어서는 문은 모두 9개인데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문이 황제만 드나드는 전용 문, 황제의 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황제는 간데없고 세상의 온갖 장삼이사들이 그 문을 드나든다. 물론 나도 잠시 황제가 되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선다. 황제의 문 바로 위에 모자이크화가 보인다. 성당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성화다.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천사 가브리엘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비잔티움 황제 레오 6세다.

내부 천장. 두번 째 사진 가운데 상단에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보인다.

성소피아 성당에 들어가다

그림의 내용은 황제가 예수 앞에서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황제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신권, 새삼 경외심이 든다. 오른쪽 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콘스탄티노플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다. 왼쪽은 성소피아 성당을 지은 유스티아누스 황제인데 그가 지은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봉헌이라는 단어를 입에 되뇌다 보니 서울시를 자신이 믿는 신에게 봉헌했다는 전직 시장님이 떠오른다. 원래 이렇게 봉헌들을 하는구나. 시장은커녕 통반장 할 자격도 못되는 난 뭘 봉헌하지? , 다행스럽게도 내겐 봉헌 받을 신이 없구나. 본당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거대한 돔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 숱한 샹들리에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종교와 상관없이 온몸은 성스러움으로 충만해진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충동이 든다. 중앙 돔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자가 크게 새겨진 원판이 시선을 잡는다. 무하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란다. 직경이 7.5m나 된다는 이 글씨 판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달필로 손꼽힌다는데 이 까막눈이 제대로 알아볼 수나 있나. 금색으로 치장한 이슬람교 예배의 표상 마흐라브(Mihrab)는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데 이는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당 내부 모습.

마흐라브 옆에는 설교단인 밈베르(Mimber)가 있고 왼쪽은 술탄이 앉던 자리가 있다. 천장에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쏟아지는 빗살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별 사전 지식 없이 이 글을 읽는 분은 이 친구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대체 기독교 성지에 간 거야, 이슬람 성지에 가 있는 거야한 마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슬람 술탄 얘기를 하다 느닷없이 아기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튀어나오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난 두 눈으로 본 대로 전할뿐이다. 현장에 있는 사람도 정신없을 정도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상징물들이 혼재돼 있다사람에 따라서는 정체성을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엉덩이를 조금씩 좁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촌로들처럼 보기 좋다. 칼을 맞대고 싸우던 종교 간에 이런 공존도 가능하구나낯선 자각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강제로 지워지는 게 인류가 남긴 궤적 아니었던가. 그런데 난 두 개의 종교가 한 공간에서 기나긴 세월을 동거해온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하긴, 문제는 신의 뜻 보다는 해석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신은 애당초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그래서 신(어느 쪽이라고 규정할 건 없다)은 이런 공존의 현장을 남겨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날을 새우고, 나와 다른 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건 아닐까. 이교도의 상징물을 차지하고도 예술품들을 파괴하지 않고 미래의 어느 날을 열어뒀던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게 새삼스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땀 흘리는 기둥에 붙어 있는 동판. 저 구멍에 엄지를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경사로 바닥의 돌은 세월을 흠뻑 머금고 있다.

모자이크화가 주는 감동

인간이 반드시 파괴적이고 잔인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가슴은 더 없이 포근해진다. 감동은 감동, 탐색은 탐색!! 2층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입구 쪽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떡이라도 나눠주나? 비집고 들어가 본다. 떡은 없고 그 유명한 땀 흘리는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 땀을 흘린다고? 하긴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도 있고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어대는 나무도 있다는데 기둥이 땀 좀 흘린다고 흉 될 건 없을 게다. 기둥에는 구멍이 뚫린 동판이 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동판의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씩 돌린다. 완전히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세상에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줄이 길어질 수밖에. 줄에는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소망을 빌기 위해 어두운 통로를 한 바퀴 도는 사람들을 봤는데. 소망을 이루겠다는 마음은 어디든 다르지 않구나. 돌부처 앞에서 손금이 닳도록 무언가 간구하던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오버랩 된다. 나도 잠깐 망설인다. 줄을 섰다가 한 바퀴 돌려? 에라, 나 같은 속물이야 기껏 복권 어쩌고 할 텐데, 그냥 팔자대로 살다 가자. 그 시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지. 1층 탐색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간다. 회랑의 왼쪽 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2층은 여성들이 예배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벽화. 가운데가 예수, 왼쪽이 성모 마리아, 오른쪽이 세례 요한이다.

성소피아 성당의 외부.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닌 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로 만들어 놨다. 조금 어두컴컴한 길은 붉은 조명을 받아 약간의 으스스한 느낌과 경외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돌로 된 바닥은 시간을 흠뻑 머금어 반질반질 빛을 발한다. 2층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것은 모자이크화다. ‘천국의 문이라 이름 붙은 대리석 문을 지나면 익히 보고 들은 모자이크화가 기다리고 있다. 가운데 예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 그리고 왼쪽에 성모 마리아가 있는 그림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회칠을 하고 벗기는 과정에 겪었던 시련 때문인지 상당 부분 훼손돼 있다. 그 상처가 있어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해 보인다. 모자이크화에 시간이 남긴 이야기가 얹힌 셈이다. 이밖에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엄마, 이쪽으로 와봐!” “어이구, 다리 아퍼 죽겄다중간 중간에 우리말도 제법 많이 들린다. 이스탄불에서 한국인과 부딪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1, 2층을 한 바퀴 돌고 났더니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온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밖으로 나와 뜰에 잠시 앉는다.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른다. 이런 작품을 남긴 옛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긴다. 메두사의 머리로 유명한 지하궁전으로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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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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