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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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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전역'에 해당되는 글 1

  1. 2010.10.11 [사라져가는 것들 149] 스위치백21
2010. 10. 11. 08:4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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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지금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언젠가는 너희들 안에서 펄펄 뛰는 물고기처럼 살아날 것이다.” 
우리를 암기기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때, 지리 선생님만은 살아있는 지식, 아니 지혜를 가르치려고 애쓰고는 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종교에 빠진 어른들의 기대에 어긋날까봐 조급증이 난 우리에게, 예비고사에 나오지 않는 지식은 이미 썩은 동태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지리 선생님의 열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스위치백이라는 대목을 가르칠 때도 그랬다. 선생님은 유난히 그 부분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기차가 산을 넘는 원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 단원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산악지대의 교통’ 쯤을 가르칠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산악지대 사람들의 삶을 반드시 전해줘야 하는 사명이라도 띠었다는 듯, 목소리에도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평야지대에 사는 우리는 스위치백이라는 게 예비고사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 점치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리고 예비고사가 끝난 뒤 스위치백이란 단어는 각자의 뇌리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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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죽었던 단어가 뜻하지 않게 부활한 건 얼마 전이었다.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스위치백이라는 말과 느닷없이 만나게 됐고, 국내에 단 한 곳 남은 스위치백 구간이 곧 사라진다는 소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반가움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먼저 등골을 훑고 내려갔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뻥뻥 구멍을 뚫고, 산 하나 정도야 순식간에 뭉개서 길을 만드는 용감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걸 남겨뒀다니. 태백으로 달려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위치백이란, 산악지대의 경사가 심한 비탈을 기차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Z’자형으로 설계한 선로를 말한다. 여러 개의 차량이 연결된 기차는 기관차의 견인력에 한계가 생기게 되며, 기울기가 80% 이상이면 한 번에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철로를 지그재그(zigzag)로 설계해서 경사를 완만하게 한 것이 스위치백이다. 즉 열차가 톱질하듯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목적지까지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도계의 흥전역(상부역)과 나한정역(하부역)간에 이 스위치백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동백산~도계역간 16.2km의 솔안터널이 공사 중이어서 폐선이 오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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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백 구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취재를 나눠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은 나한정역부터 찾았다. 이 역도 전에는 주변에 민가들이 많아서 승객들의 발길로 분주했지만 이젠 스위치백의 반환점 역할만 하고 있다. 어렵게 찾아간 건물은 예상보다 번듯하고 깨끗하다. 역무원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데 마침 화물차 한 대가 들어온다. 그런데 먼저 보이는 건 머리인 기관차가 아니라 꼬리인 객차다. 아하! 바로 저거구나. 통리역에서 흥전역까지 간 기차가 급경사 때문에 다음 역까지 단번에 내려가지 못하고, 나한정역까지 뒷걸음질 쳐 반을 내려오고, 거기서부터 다시 앞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화물차가 뭔가 기다리는 눈치더니 여객열차가 들어온다. 이 열차는 머리부터 보인다. 화물차와 반대방향인 도계에서 들어온 것이다. 잽싸게 차를 몰아 고지대에 있는 심포리 스위치백쉼터로 달린다. 흥전역을 거쳐 오는 열차를 만나기 위해서다. 휴게소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니 씩씩거리며 열차가 달려온다. 심포리건널목을 지키는 역무원으로부터 스위치백에 얽힌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는다. 대놓고 내색은 안 하지만 그 분의 말에도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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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태백역으로 향한다. 직접 타보고 스위치백을 제대로 느껴볼 심산이다. 역무원에게 바쁜 기색으로 기차시간을 물었더니 지금 통리역으로 가면 바로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란다. 돌아오는 기차는 통리역에 서지 않으니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가란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차피 스위치백은 통리에서 도계 구간에 있으니. 역 앞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 통리역까지 달린다. 표를 끊고 역 주변을 구경하고 오니 마침 열차가 도착한다. 청량리역을 출발해서 강릉까지 가는 기차다. 객차는 거의 비어있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승객들은 기차가 스위치백을 이용하든 터널로 들어가든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사진을 제대로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는 건 나뿐이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더니 금세 고지를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사열이라도 하듯 터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이런 터널마저 뚫기 어려웠으니, 알프스 같은 곳에서 관광용 열차를 위해 쓴다는 스위치백에 의지했겠지. 창밖 까마득하게 보이는 협곡에는 옥빛을 머금은 냇물이 힘차게 흐른다. 괄콸콸 우당탕 소리가 객차 안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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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심포리역이라는 간판이 후다닥 지나간다. 심포리를 지났으니 곧 스위치백 구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방송이 뒤따른다. "우리열차는 잠시 후 흥전역에서 나한정역까지 스위치백 구간을 운행하게 됩니다…." 고도가 499m란다. 카메라에서 시작된 긴장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흐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긴장이라는 건 나 스스로 잘 안다. 항공사진, 아니 항공 비디오를 찍지 않는 한 무슨 재주로 스위치백을 담는단 말인가. 그래도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는 수밖에. 헐떡거리며 달리던 열차가 흥전역에 닿았는가 싶더니, 곧 이어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즉, 객차가 앞서고 기관차가 따라간다. 속도는 무척 느리다. 뒤로 가는 만큼 위험 요소가 많기 때문이란다. 스위치백 구간이라는 걸 모르거나, 안내방송이 없었다면 미끄러지는 줄 알고 놀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뒤로 가는 구간은 그리 길지 않다. 1.5km 정도라는데 5분 정도 걸린다. 곧 나한정역이 나타난다. 잠시 멈춰 섰던 열차가 이번엔 머리를 앞세워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력을 높여 제법 완만해진 길을 달리더니 금세 도계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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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에서 10시44분에 타서 도계에 도착한 건 11시 10분. 30분도 안 걸렸다. 도계역에서 서성거리다가 반대쪽으로 가는 11시 34분 기차를 탄다. 일요일이라서인지 서울로 가는 기차는 사람이 제법 많다. 조금 달리자 역시 스위치백 구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되짚어 가는 길도 지그재그로 경사도를 줄이는 방식에 변함이 없다. 나한정역까지 정상적으로 간 열차가 거꾸로 움직여 흥전역에 도착하더니 다시 앞으로 달린다. 태백역에 도착한 것은 12시12분. 왕복 1시간 30여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먼 길을 다녀온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전설 속에 있는 어느 곳을 다녀온 느낌이다. 고등학교 시절 지리 선생님의 말씀이 문득 가슴으로부터 서늘하게 살아난다. 1936년 영동선이 개통된 이래,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한 시절을 지고 늙어가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스위치백. 2012년이면 더 이상 그 길을 지나갈 수 없다. 일대를 리조트로 꾸며 스위치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도 있다지만, 그래봐야 그건 박제된 유물일 뿐이다. 한 시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내 작은 동공에 잠겨 오래도록 떠날 줄 모른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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