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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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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1.16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 15] 카쉬의 옛 거리에서32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골목길 카페

사람은 없고 게으른 고양이만

흡연 삼매경에 빠진 그녀 

배에서 내리자마자 카쉬 탐색에 나선다. 이곳은 작은 도시고 유적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돌아봐도 걸어서 3~4시간이면 족하다. 일행이 목표로 잡은 곳은 구시가지. 구시가지라고 해서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자그마한 골목에 전통가옥과 기념품가게,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서울의 인사동쯤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여름이 지나서인지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끊겼다. 시끌벅적 호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좌판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소풍 간 날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하다.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여행이란 완급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달려가서 봐야 할 것도 있지만, 음미하듯 느껴야 할 것들이 있다. 관광과 여행이 다른 점이 그것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 보면 한국인의 고질인 우르르병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깃발을 따라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우르르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과정의 반복. 그러고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이런 곳을 다녀왔구나. 어느 땐 그놈의 우르르병 때문에 볼 일도 제대로 못 보고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해프닝도 벌어진단다. 가이드 역시 고객이 원하는 빡빡한 일정을 채우려면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우르르 끌고 다음 행선지로 떠날 수밖에. 본전 생각이 나서 그럴까. 그러려면 왜 떠나는 것일까. 집에서 달력사진이나 보고 있는 게 훨씬 경제적일 텐데.

흡연 삼매경에 빠진 아가씨. 너무 멀리서 잡았나?

아름다운 집도 있고

잡설이 길어졌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거늘. 골목을 걸어 올라가다 2층집의 발코니에서 흡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한다. 일행의 눈길이 힐끔힐끔 그곳으로 향한다. 그저 사내들이란. 그러는 너는? 사실 그만큼 매혹적이다. 터키인들은 담배를 무척 즐긴다. 믿음 씨도 버스가 서면 달려 내려가 담배부터 빼문다. 터키의 흡연자는 대부분 체인 스모커다. 세계 7위의 담배소비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흡연에 대한 터부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흡연천국이다. 실내는 물론 정류장이나 공원에서조차 쫓겨 다녀야하는 대한민국의 흡연자들이 부러워할만 하다.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23년 터키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여권(女權) 신장이 이뤄지면서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게 됐다. 한 때는 흡연 여부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흡연은 우리처럼 은밀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지만 터키에서는 별 차별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당당해 보인다. 골목의 총 길이는 150m 정도? 카펫을 비롯한 기념품 가게들이 주종을 차지하고 있다. 골목의 끝 무렵에서 우뚝 솟은 리키아 석관을 만난다. 거리 한복판에 이런 석관이 있다니. 지금까지 본 석관 중에서 가장 우람하고 완벽한 모습이다.

고대 석관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년-처녀들.

리키아 석관에 새겨진 고대 문자.

또 하나의 리키아 석관

아가씨의 저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런데 석관보다 먼저 눈길이 가는 풍경이 있다. 석관과 그 옆 거대한 나무에 눕다시피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 청춘남녀. 남자 둘에 여자가 하나다. 이들은 아예 전용 카펫을 깔아놓고 한낮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들은 먼 길을 찾아와서 봐야 하는 이 고대 유적이 동네 청년들에게는 그저 으슥함이 보장되는 휴식처에 불과한 모양이다. 아가씨는 무척 매력적이다. 이 동네는 미인들만 사나? 아랍풍의 푸른색 상하의에 포인트를 줘서 염색한 머리,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 어깨에는 문신까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여인? 옛날, 미국 드라마 중에 내 사랑 지니인가? 하는 게 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연상되기도 한다. 촬영팀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나누는 걸까. 근처 상가에서 일한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휴식처로 바뀐 이 석관은 BC 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단 위에 석관을 얹은 전형적인 리키아 양식인데 기단 부분에 리키아 글씨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관 상단의 둥근 부분에는 네 마리의 사자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아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나도 석관 옆 나무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해가 건물 뒤로 숨는 기색이더니 골목에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카펫도 있고 방석도 있고 옷도 있어요.

골목은 조용하다.

내려오는 길에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주문한다. 하루가 저물 무렵 배낭을 내려놓고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제법 힘든 일이기 때문에 잠깐씩 찍는 쉼표는 달콤하기 짝이 없다. 터키의 맥주는 에페스라는 상표 하나뿐인데 내 입맛엔 잘 맞는 편이다. 하긴 맛이 없더라도 목마른 여행자에겐 감로수처럼 달 수밖에. 맥주의 이름이 된 에페스는 도시 이름이다. 성경 에배소서()’로 잘 알려진 에배소가 바로 그곳.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번 여행 코스에는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에페스는 기독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곳이다. BC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된 이 곳은 알렉산더대왕 이후 로마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면서 번창을 거듭했다. 철학과 문학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예술가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인구 25만 명의 큰 도시로 발전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도 이 곳에 함께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샀다고 전해진다. 에페스는 또 서기 53년에 바울이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연설을 하는 바람에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는 군중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지만 점차 기독교의 성지로 변해간다. 에페스가 유명하게 된 것은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맥주를 서빙하는 노인. 저 깊은 눈, 득도를 한 것 같았다.

기독교 성지 에페스

에페스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는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 독일인 수녀의 꿈속에 나타나는 경이로운 과정을 거쳐 1891년에 발견됐다. 그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떴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모마리아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을 따라 에배소로 갔으며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어쩌다가 시원한 에페스 맥주 한 잔이 성모마리아 이야기로 비약했지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노천카페에서 음료수와 맥주를 서빙하는 이는 노인이다. 70세쯤 됐을까? 마른 몸피에 하얀 수염과 눈가의 짙은 주름. 그래도 노인에겐 궁상의 기운은 전혀 없다. 당당하고 빠른 동작으로 심해어처럼 손님들 사이를 유영한다. 그와 언뜻 눈길이 스쳤는데 오래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눈이 저러할까. 일하는 노인, 아름답다. 일을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당당해서 아름답다. 맥주를 거의 마실 무렵에 다큐팀의 멤버 한 사람과 엄상욱 씨가 신발가게 앞에서 흥정을 하는 게 눈에 띈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가죽신을 이것저것 신어보고 있다. 내가 즐겨 신는 캐주얼 형태의 신들이다. 나도 반 장난삼아 한번 신어본다. 비단처럼 부드러운데다 내 발에 꼭 맞는다. 옆에서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고, 지갑을 열라고 충동질이다.

카페에서 차를 즐기는 사람들. 줄담배를 피워댄다.

리어카 노점상도 지나가고.

나는 외국에 나가서도 거의 물건을 사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산 물건이 유용하게 쓰인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덜컥 신을 사고 말았다. 엄상욱 씨를 중간에 내세워 흥정했지만 많이 깎지는 못했다. ‘거금’ 35달러가 지출됐다. 터키는 공업 수준이 그리 높지 않지만 가죽공예는 세계적 수준이라고 한다. 그 말에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마음이 느슨해졌거나. 다큐팀과 헤어진 뒤, 땅거미가 더욱더 짙어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터키는 경치 좋은 곳이나 공원에는 예외 없이 아타튀르크 동상이 서있다. 이곳도 코앞에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바다 위의 배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약간은 쓸쓸한 표정이 되어 앉아있는 내게 청년 하나가 슬며시 다가온다. 역시 시선은 사람보다 카메라로 먼저 간다. 터키의 청년들이여! 제발 카메라 좀 잊어주시게. 한참 카메라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손짓, 몸짓으로 뭐라 묻는다. 잘 못 알아듣는 표정이자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영어로 얼마 주고 샀느냐고 쓴다. 이상한 친구일세. 글씨를 쓸 줄 알면서 왜 말로는 못 물어봐? 혹시 말을 못하나? 얼마라고 가르쳐줬다니 아무소리 없이 가버린다. 싱겁기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한참 뒤 돌아오는데 손에 SLR카메라가 들려있다. 내게 오더니 그걸 자랑 하느라 침이 마른다. 어라? 이 친구 카메라를 손에 쥐니까 말 잘하네?

나를 위해 춤을 춰주던 아이.

저건 춤이지 절대 국민체조가 아니다.

그의 직업은 웨이터

그래, 그걸로 사진 열심 찍어. 남의 카메라 부러워할 거 없잖아. 자랑이 끝났는지 또 아무 말 없이 가더니 이번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데려온다. 자기가 일하는 음식점의 요리사란다. 자기는 웨이터고. “I’m waiter!!!” 눈이 별처럼 빛난다. 자신의 직업에 저 정도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쯤 돌아갔으면 아름다움만 남았으련만, 사진을 한번 찍어보겠단다. 그것도 내 카메라로. 그러라고 넘겨줬더니, !! 사진 실력이 엉망이다. 구도고 뭐고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기력을 셔터 누르는데 쓰고 말았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청년이 돌아가고 난 뒤 슬그머니 사진을 지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예쁜 아이 하나가 지나간다.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했더니 새침한 얼굴로 그냥 지나간다. 에구, 민망해라. 아는 척 좀 해주지. 그런데 그 상황은 순간적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저만치 가던 아이가 돌아서 오더니 내게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조금 불쌍해 보였나? 반갑고 예뻐서 껴안아주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유아 희롱죄로 걸릴까봐)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이걸 어쩐담. 이 녀석, 온갖 예쁜 동작을 다 보여주며 춤을 춘다. 이게 웬 떡? 카메라 셔터는 혹사를 당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서서 박수를 친다. 저만치 갔던 아이의 부모도 돌아와 웃고. 이건 선물이다. 터키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

이제 어둠은 제법 짙어져 나무그늘 아래 머물던 빛을 거의 지웠다. 다큐팀은 어디로 갔는지 기척도 없다. 나는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에 또 다른 동상처럼 앉아 바다위의 배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이제 바다로 떠나고 싶은 열망을 잠시 접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상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타튀르크. 같은 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독재자를 생각한다. 아타튀르크 이야기를 모두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에 대해 겉핥기로라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독재자와 이 나라의 독재자가 어떻게 달랐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아타튀르크의 본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다. 아타튀르크는 아버지라는 뜻의 ‘ata'와 터키인이라는 의미의 ’tüurk'의 합성어다. 즉 터키인의 아버지, 국부(國父)를 뜻한다. 그밖에도 그는 케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냥 아타튀르크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케말은 1881년 지금은 그리스 땅이 된 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케말이라는 이름은 중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지어줬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완벽하다’, 케말은 성숙하다라는 뜻이다. 케말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군사 중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스탄불의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적 군인의 뜻을 품고 정통코스를 밟은 셈이다. 이 땅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아타튀르크를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아타튀르크이시다.

케말을 민족적 영웅으로 만든 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갈리폴리 전투다. 영국 연방군과 프랑스군 20만 명이 독일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로 상륙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군의 숫자는 불과 14000. 시쳇말로 새 발의 피였다. 하지만 사령관 케말은 군대를 갈리폴리 반대쪽의 차나칼레에 주둔시키고 연합군을 공격했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접전 끝에 케말은 결국 연합국 함대가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2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케말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오스만 제국이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게 되자, 터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전쟁을 벌인 끝에 1923년 드디어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다. 그는 공화국이 창건된 1923년부터 세상을 뜬 1938년까지 15년간 초대 대통령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그동안 한 일은 일일이 손꼽기 어려울 정도다.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이끌어나가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긍지를 한껏 높였다. 또 새로운 문자를 도입해서 보급함으로써 문맹률을 제로에 가깝게 낮췄다. 이슬람 최상의 지도자를 나타내는 칼리프제를 폐지한 것은 물론 교육제도 개혁, 서양력 도입, 여성 참정권 부여, 라틴 숫자 도입 등이 모두 그의 시대에 이뤄졌다.

어두워져 가는 거리. 동상의 실루엣이 장엄하다.


그런 개혁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거의 전권을 휘둘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세월이 흘러도 독재자로 불리고 아타튀르크는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남아 있을까? 나 역시 그 정답을 아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행적이나 개혁 과정을 되짚어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했고 문화적 소양을 갖췄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바탕에 순수한 애국심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타튀르크주의라고 불리는 케말리즘은 터키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덕목이다. 세상을 뜬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아타튀르크는 민중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해마다 그가 숨을 거둔 1110일 오전 95분이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린다. 모든 차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그의 초상화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빠짐없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대도시의 큰 거리 대부분은 아타튀르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타튀르크, 이 위대한 독재자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그런 국부를 모셨던 터키가 부러웠다. 국민소득이 낮아도 삶의 만족도가 높은 건, 아타튀르크라는 영웅을 가졌다는 자부심도 한 몫을 하는 건 아닐까.

불을 밝힌 부두의 유람선.

영웅전을 쓸 게 아닌 바에야 남의 나라 국부 얘기가 더 길어지면 재미없을 터. 남은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자. 그나저나 나는 지금 지치고 배고프다. 다큐팀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완전히 어둠의 그물 속에 갇혀버렸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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