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훈장'에 해당되는 글 1

  1. 2011.01.24 [사라져가는 것들 156] 서당3
2011. 1. 24. 08:30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서당을 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허가를 받아야하는 것도 아니니 서당이라는 이름에 인색할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그리 부른 걸 모면 대충 짐작이 가시지요?
이제야 말이지만, 사실 글방이란 이름조차 조금 과분한 형편이었습니다.
남의 집 사랑방에 아이들 서넛 불러놓고 반은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에 반만 공부라고 했으니 이름에 매달릴 처지는 아니었지요.
그래도 훈장과 학동이 있었으니 서당의 요건을 갖춘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분, 윤 주사라고 부르던 훈장님도(사실, 그가 주사가 된 건 글줄깨나 읽을 줄 안다고 누가 장난삼아 부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훈장이라는 호칭이 썩 어울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뜨내기나 다름없는 이였습니다.
그의 직업은 근동 최고의 부자라고 소문난 장 부자네 집 집사였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왔는데, 장 부자가 두 말없이 들어앉혔다고 하지요.
집사라는 이름으로 그가 하는 일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외모도 깎아놓은 밤톨 같고 언변도 참기름에 밥 말아먹은 듯 매끄러운지라 남의집살이를 하기에는 아깝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에 말 못할 사연 가슴에 품고 떠도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이 윤 주사가 어느 날 학교에 못 간 아이들 서넛을 불러 모아놓고 하늘 천 따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바깥사랑채가 안채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 부자네 집에 누가될 일은 없었습니다.
장 부자가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특별히 까탈을 부렸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은 일약 ‘글방’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가마니치고, 가끔 막걸리 내기 고스톱이라도 치던 동네 머슴들만 입이 대여섯 발은 나왔다지요.
서당은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삼국시대까지 닫는, 전통적인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원래는 사족(士族)들이 자식을 집에서 가르치기 위해 독선생을 불러 모신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이왕 가르치는 거 이웃 집 아이들(그것도 양반집 자제쯤 돼야 자격이 있었겠지만) 몇 명 모아서 함께 가르치다 보니 글방 형태를 갖추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커지게 되면서 훗날에는 제법 학교 규모를 갖춘 서당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훈장이 직접 연 서당도 있었습니다.
글 좀 읽었다는 양반 끝물이 벼슬길은 멀고 나이는 먹고 하니 소일거리 삼아, 아니면 입에 풀칠이라도 해볼까 하여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경우가 바로 그것이지요.
또 “우리 동네 아이들도 까막눈을 면하게 해보자”는 거룩한 뜻에서, 마을 사람끼리 돈을 걷어서 훈장을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쩌다 보니 얘기가 옆길로 샜습니다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기만 해도 이 땅에서 서당은 이미 거의 사라진 뒤였습니다.
가난하고 힘들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어지간하면 초등학교 정도는 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동네든 그 ‘어지간만’에도 못 들어가는 아이들이 꼭 있었습니다.
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농사를 돕거나 남의 집 꼴머슴을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
설령 입학이란 걸해도 결국 중동무이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바로, 낮에는 집사 밤에는 훈장인 윤 주사의 학동들이 되었습니다.
아홉 살 먹은 아이도 있었고 열 예닐곱 짜리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제멋대로 글방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형편에 훈장이라고 선생님 대우를 제대로 받을 턱이 있었나요.
원래 전통적인 서당에서는 훈장과 그 가족의 생활비를 학부형이 부담하는 것은 물론,
봄과 가을이면 곡식을 걷어서 수업료로 냈다고 합니다.
독신인 훈장에게는 식사나 세탁도 주선해주었고요.
하지만 윤 주사는 쌀 한 톨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 말로 야학 자원봉사를 했던 셈이지요.
물론, 그런 환경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대충 가르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훗날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윤 주사의 실력(?)이나 열정이 동네 사람들이 짐작하는 수준을 훨씬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글방은 신기하기도 하고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초저녁에 근처를 지나다 보면, 글 읽는 소리가 무논에 개구리 합창처럼 어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하늘 천 따 지~’ 정도일 때는 어깻짓으로 장단을 맞추며 지나가기도 하지만, 조금 진도가 나가서 ‘엎드러질 전(顚)’이나 ‘자빠질 패(沛) 같은 글자들이 나오면 괜히 기가 죽어서 걸음을 재촉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기껏 ‘철수야, 영희야~ 나하고 놀자’나 배우는 주제에 어디 감당할만한 깜냥이 돼야지요.
학교도 안 가고 들로 산으로 다니다가 저녁에 한문을 배우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저도 그래보겠다고 부모님을 졸랐다가 경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공부는 갈수록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달라졌습니다.
동문선습이니 명심보감이니 하는 데까지 나가면 이미 다른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윤 주사가 통감이나 소학, 더 나아가서 사서오경 같은 높은 수준의 글을 가르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설령 윤 주사에게 그런 실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그런 정도의 글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배운 글이 세상을 향한 눈을 뜨는 데는 약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에 제대로 다녔던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지 못했지만, 글방에 다녔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도시로 나가고는 했습니다.
그 중에는 훗날 양복 입고 자가용 몰고 나타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글방에서 배운 글월 덕분이었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살얼음 같은 세상을 한발 한발 걷는 데 힘이 됐던 건 분명할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서당에 입학하는 날은 훈장에게 술이나 고기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책을 한 권 뗄 때도 떡을 한 시루해서 자랑삼아 돌렸다고 하고요.
하지만 납의집살이를 하는 훈장, 그리고 머슴살이하는 학동들이 다니는 그 글방에서 술이나 떡이 나왔다는 얘기는 끝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날갯죽지에 힘이 오른 새들이 둥지를 떠나듯, 아이들이 사랑방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서 글방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땐 이미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훈장선생님, 윤 주사도 그 무렵 그 마을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 훗날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가 언제 어떤 계기로 마을을 떠났는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뒤, 아주 빠른 속도로 글방도 훈장도 학동도 옛날이야기가 되어갔습니다.
훗날 고향을 찾아가 장 부자네 사랑방 근처를 어슬렁거려봤지만, 서당의 흔적은커녕 구부정하게 늙은 소나무조차 모르쇠를 할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은 하늘 천 따아 지~ 소리가 자꾸 발길을 잡아 다녔습니다.
어쩌면 개구리들의 합창소리였을지도 모르지요.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기차가 국토를 달리는 시대에, 천자문이나 읊조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