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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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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계다리'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6.29 [사라져가는 것들 115] 홍교(虹橋)14
2009. 6. 29. 09:26 사라져가는 것들

소설 태백산맥을 처음 읽던 시절, 주인공들이 웃고 절규하고 피비린내 나게 싸우던 벌교는 내 안에서 하나의 성(城)이 되었다. 실재하는 곳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어느 땐 가상의 공간에서처럼 내 마음대로 성을 쌓고 무너뜨리고 직접 그 시대를 뛰어다녔다. 세월이 가도 가슴 속의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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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내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했던 것이다. (중략)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태백산맥 1권 145~14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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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를 직접 찾아간 것은 책을 만난 지 꽤 오래 뒤였던지라, 내 안에 있던 성도 어느 정도 퇴락해 있었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내가 쌓은 성이 다르다고 해서 새삼 실망하거나 특별히 흥분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군더더기는 깎여나가고 고갱이만 남은 감흥이 요란하지 않게 가슴에 요동치고 있었다. 소화다리, 홍교(횡계다리, 횡게다리, 횡갯다리), 중도방죽, 현부자집, 금융조합, 김법우집…. 세월 따라 퇴색되거나 이름이 바뀌긴 했어도, 그 시절의 많은 것들이 남아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한과 눈물을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홍교는 아주 오랜 시간 시선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 홍교야 말로 벌교의 대표적 상징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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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걸음을 멈추고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심코 성냥개비를 던지다보니 횡계다리 중간쯤에 서 있었다. 성냥개비가 가벼운 몸피를 날리며 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리 아래는 밀물이 져오고 있었다. ‘밀물은 신(神)의 날숨이고 썰물은 신의 들숨이다’ 하는 손승호의 시 구절인지 낙서인지가 떠올랐다. ‘신의 날숨이 멈추는 횡계다리 위에 서면 나는 내 생명의 잉태를 본다’ (중략) 그는 용케도 밀물이 횡계다리 언저리에 멈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횡계다리 위에 서면 생명의 잉태’ 어쩌고 적은 것이다.                                                                                            태백산맥 2권 287페이지

횡계다리 위에 쌀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것은 모두 스물일곱가마니였는데, 다리 위에 쌓여 있어서 그런지 그 형체는 유별나게 높고 크게 드러나 보였다. 그 쌀가마니들을 제일 먼저 본 것은 김범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어젯밤에 총성이 울리고 있는 동안에 그 쌀가마니들이 다리 위에 쌓이고 있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백산맥 4권 17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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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홍교 위에 섰을 때, 이데올로기의 경계인일 수밖에 없었던 김범우의 뒷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마음의 성에서는 수십 번 그려보고 지웠던 모습…. 염상진을 비롯한 빨치산이 굶주리는 소작인들을 위해 부잣집을 털어 쌓아놓았다던 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를 잡다가 다리쉼을 하려는지 잠시 올라온 백로 하나만 먼 바다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시대의 갈등과 아픔이 돌 틈 어디엔가 성성한 통곡으로 배어 있음을. 홍교보다는 무지개다리나 횡계다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다리. 그 다리 위에 서서 바람이 전하는 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여봤다. 홍교라는 이름의 홍(虹)자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즉, 다리 밑을 무지개처럼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돌다리를 홍교라고 한다. 아치교‧홍예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국내에도 여러 곳에 홍교가 있다. 그 중에도 강진 병영 홍교나 여수 흥국사 홍교 등이 유명하다. 벌교에서 지척지간에 있는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도 홍교의 하나다. 1963년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벌교 홍교는 국내에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지금도 사용하는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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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로 용머리가 보인다.

홍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그 자리에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벌교(筏橋)라는 지명도 따지고 보면 뗏목(筏) 다리(橋)에서 한자음을 빌어 만든 것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맨 먼저 다리를 놓게 된 것은 1718년(조선 숙종 44)이라고 한다.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이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뗏목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1728년(영조 4년)에 이 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다리가 떠내려가 버렸다. 그 다음해 선암사 주지 호암화상(護岩和尙)이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 인가에 나다니면서 염불이나 설법을 하고 시주하는 물건을 얻어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홍교를 놓기 시작해서 6년 뒤인 1734(영조10년)에 완공 했다고 한다. 3년 뒤인 1737년에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가 만들어졌다. 근래에는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했는데 홍예의 밑 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이 때 콘크리트 다리 난간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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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길이가 80m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32m만 남아있다. 무지개모양으로 휘어진 다리 천장 한 가운데에는 용머리(이무기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있다. 이처럼 다리 천장에 동물이나 도깨비의 모양을 새겨 놓는 것은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전에는 용의 코끝에 풍경을 달아놓아 방울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다리 밑에는 하류에서 올라온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밀물 때에는 다리 대부분이 잠기고 썰물 때에는 밑바닥이 거의 드러난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하천은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민들은 이 다리에게 60년마다 회갑잔치를 해준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1959년에 6주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순천 쪽으로 가는 외곽도로에서 읍내 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끝머리에서 '벌교 홍교 중수비군'을 볼 수 있다. 모두 5기의 비석이 있는데, 그동안 홍교를 수리한 내력과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읽어 내리기 어려울 만큼 마모가 심하다. 다리 끝에서 만나는 동네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들도 간판들도 대부분 지난 세월을 그대로 이고 지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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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를 수리한 내역과 참여자를 기록한 중수비군

한 때는 일제 수탈의 관문이었던 곳. 좌측 세력과 우측 세력이 교대로 주인이 되었던 곳. 벌교는 소설 속에 현실이 현실 위에 소설이 순간순간 겹쳐지는 곳이다. 그만큼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조차도 허무할 뿐이다. 같은 민족의 목숨을 담보로 지켜야했던 가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설령 어느 한 쪽이 승리했다고 하여, 그 전리품이 민중들에게 행복이나 희망이 되었을까. 바람만 오가는 홍교를 천천히 걷는다. 그 사이에 다리를 지나간 건 바쁜 걸음의 아가씨 하나와 게을러 보이는 백로 한 마리가 전부다. 홍교를 ‘사라져가는 것들’의 목록에 넣는 데는 망설임도 있었다. 튼튼한 돌다리고 또 보존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긴 세월을 견뎌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다리의 돌 틈 어디엔가 남아있을 시대의 질곡, 그것이 남긴 의미가 자꾸 퇴색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리의 외형 역시 자료사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둥근 홍예만 예전의 것이고 나머지는 시대 자체가 모호하다. 덧대어 있는 콘크리트 다리는 의족을 한 듯 어색하다. 앞으로 또 어찌 변할지 모른다. 이 시대의 눈으로 기록하고 전하는 이유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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