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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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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5.05 [사라져가는 것들 57] 흙집8
2008. 5. 5. 13:1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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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마당으로 이어지는 끈을 더듬어가다 보면,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어느 날은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환한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날의 기억이 그렇다. 내리꽂히는 햇살 아래서 묵묵히 일하던 아버지의 등과 그 등을 타고 흐르던 땀이 화인(火印)처럼 선명하게 가슴에 찍혀있다. 이미 40년 전 일이다. 그 해 늦은 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손수 집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살고 있던 집이 워낙 낡았기 때문에 새집이 급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겠다고 공표한 건 뜻밖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 당신의 삶은 손에 흙을 묻히거나 논밭에 나가 일을 하는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도회지 직장인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부터는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날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아버지가 손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하거나 위대한 도전이었다. 훗날 든 생각이긴 하지만, 삶의 가치와 방향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그때, 어쩌면 그게 당신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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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을 지으려면 먼저 살던 집부터 비워야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임시 거처로 삼을만한 방을 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두막 같은 임시 주거시설을 만들어 기거했다. 인부 하나 사지 않고 가족끼리 집을 짓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축포나 테이프를 자르는 기념식 같은 건 없었지만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아버지가 지으려는 집은 요즘 흔히 짓는 황토집과는 달랐다. 다른 재료로 집의 골격을 대부분 만들고 흙으로 마무리하거나, 중간중간 통나무를 넣고 흙을 다지며 쌓아나가는 게 요즘의 건축법이라면, 아버지는 흙벽돌을 찍어서 쌓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 아버지만 특별히 그리 지었던 게 아니라 당시의 흙집은 대부분 그랬다. 그 밖에 나무를 엮어 넣고 흙을 바르는 식으로 짓는 방식도 있었다. 그렇게 흙과 나무만 쓰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집이어야 훗날 수명을 다했을 때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아버지는 황토를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시골이라고 아무 곳에나 황토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꽤 먼 곳까지 왕복해야 했다. 유일한 운반수단은 지게였다. 지게질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처음 지게를 질 때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땀이 나면 쓰린 것은 물론 어깨의 피부가 벗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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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같이 집짓는 주변을 맴돌았다. 거들만한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거친 호흡과 쓰라린 어깨가 어린 내 가슴에도 진한 통증으로 전이되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고행자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힘과 열정을 모두 쏟아 붓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치를 물어보려는 게 아니었을지. 황토가 어느 정도 쌓이자 볏짚을 썰어 넣고 개어 나무틀로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늘어놓은 벽돌들이 몸을 말려 어느 정도 단단해질 무렵 일은 터졌다. 그 해는 유난히 비가 크고 잦았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벽돌은 무르고 깨지기 시작했다. 쓸만한 비닐 한 장 없던 시절이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멍석이나 돗자리로 덮어봤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비가 아버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날이 들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황토를 퍼 나르고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고비를 넘긴 끝에 집을 지을만한 벽돌이 모두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벽돌이 마르는 동안 목재를 다듬어 대들보와 석가래를 준비하고 문틀도 손수 짰다. 그리고 드디어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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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시간을 타고앉아 조금씩 높아져갔다. 문틀을 고정시키고 다시 벽돌을 쌓고…. 결국 대들보와 석가래, 지붕을 올리는 일과 구들을 놓는 일만 남의 손을 빌리고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 해결했다. 초여름에 시작한 일은 지붕을 올리기 맞춤하게 가을에 끝났다. 지붕을 올리던 날 조촐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치 외에도 내 기억에는 또 하나의 풍경이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가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집 뒤편으로 갔다. 어느 땐 꽤 오래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 모퉁이를 돌며 자신이 지은 집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미진 곳에 서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구겨 넣으려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요즘엔 ‘웰빙’이란 이름으로 돈 좀 가진 사람들이 황토집을 짓지만, 그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짓는 게 흙집이었다. 돈이 들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흙이었기 때문이다. 흙벽돌집은 생각보다 꽤 튼튼하다. 또 단열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방안의 온기를 오래 유지해준다. 흙벽은 집안이 축축한 날은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해지면 내뿜는 가습기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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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집’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부터 한 5년 전쯤이다. 고향을 다녀온 동생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줬다. 그 흙집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가끔 고향에 들렀지만 산소만 다녀오고, 전에 살던 집터를 의식적으로 피하고는 했다. 기억 속에 행복보다는 아픔이 더 많이 깃들여져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내 가족들의 삶과 꿈이 연탄재처럼 부서져 굴러다니는 걸 보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리고 흙으로 지은 그 집이 수십 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물론 아직도 사람이 쓰고 있더란 것이다. 흙으로 지은 집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집을 지은 사람의 육신은 지하에서 벌써 흙으로 돌아갔을 텐데…. 동생의 전언을 들은 뒤로도 몇 년째 미루기만 하다가 작년에는 큰 맘 먹고 그 곳에 가보았다. 하지만 기회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 않는 법. 내가 갔을 땐 이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여기던가 저기던가, 집터를 확인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흙으로 지은 집이니 흙으로 돌아갔으리라 믿으며, 쓸쓸히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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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니 경상도니 돌아다니면서 가끔 흙집을 만난다. 세월을 못 이겨 대부분은 무너져가거나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집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유년의 마당에 빛바랜 사진처럼 자리 잡고 있는, 그 날의 햇살과 아버지 등에 흐르던 땀이 자꾸 어른거리는 까닭에….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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