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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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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화'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6.02 [사라져가는 것들 61] 국민교육헌장9
2008. 6. 2. 14:2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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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가 슬그머니 친구들의 대열에서 빠진다.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 멀어지자 아이는 바다 쪽을 향해 걷는다. “오늘은 예쁜 조개껍데기를 혼자 다 주워야지” 아이의 발걸음이 가볍다. 요즘 아이의 반은 환경미화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다. 아이 반뿐 아니라 전교생이 그렇다. 1등을 하면 푸짐한 상을 주겠다는 교장선생님의 약속이 있어서 그런지 열기가 제법 뜨겁다. 담임선생님은 이번 환경미화에서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젊은 여자선생님이라 욕심이 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일 양초로 복도바닥을 문질러 광을 내고 유리를 잡티하나 없이 닦고 교실 뒷벽에 붙일 게시물을 만드느라 바쁘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이 만들고 있는 ‘국민교육헌장판’은 이번 환경미화에서 최고의 작품이 될 게 틀림없었다. 선생님은 국민교육헌장을 정성스레 써서 커다란 베니어판에 붙였다. 그리고 양쪽 여백에 봉황을 마주보도록 그려 넣고 그 그림 위에 조개껍질을 붙여나갔다. 조개껍질을 다 붙이면 예쁘게 색을 입히고 그 위에 니스 칠을 해서 교실 뒤에 걸어놓을 거라고 했다. 환경미화 전교 1등은 따 논 당상인 셈이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즘 아이들은 대체 어느 고릿적 얘기냐고 하겠지만, 그걸 줄줄 외우는 게 의무였던 시절도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이 선을 보인 것은 1968년12월5일이었다. 당시 이 나라의 절대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윤리와 정신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393자로 된 헌장을 제정 공포했다.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기 위한 국민의 생활규범과 실천적 행동강령을 담은 일종의 '장전'인 셈이었다. 일제시대 ‘교육칙어’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랑이와 맞장 뜰 정도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국민교육헌장 따위에 목숨을 걸 일이야 있겠는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국회 상임위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본회의에 상정됐을 땐 만장일치로 통과했다고 한다. 문제는 공포되는 데 그친 게 아니라는 데 있었다. 교과서마다 첫 페이지에 헌장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출간된 서적과 음반 등에도 국민교육헌장이 인쇄됐다.


선생님들은 학생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도록 다그쳤다. 당시의 교육지침이 그랬다. 교사들의 평가점수를 좌우하는 지표였는지는 모르지만 유난히 혹독한 선생님들이 있었다. 자신 앞에서 달달달 외운 아이들만 집에 갈 수 있도록 했다.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아이는 어두워질 때까지 시달리기도 했다. 개중에는 ‘죽어도’ 외우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집에 가면 학생이 아닌 ‘노동력’의 하나가 되어 일을 하다가 저녁 한 술 먹고 곯아떨어지기 바쁜 아이들, 지능이 약간 떨어져서 한글 깨우치기도 급급한 아이들에게는 구구단보다 훨씬 어려운 게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의 나열일 뿐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게 무엇이며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우는’ 게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뜻을 모르는 문장을 달달 외우는 건 고역이었다. 다 외웠다고 생각해도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몸은 얼어붙고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래기 일쑤였다. 선생님의 시작소리에 따라 반 아이 전체가 헌장을 외우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건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외워댄 국민교육헌장은 자신도 모르게 심신에 각인됐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성인이 되어 타자나 컴퓨터를 배울 때, 자신도 모르게 국민교육헌장을 자판에 쳐대는 스스로를 보고 쓴웃음을 짓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문’ 다음으로 자동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이다. 처음 국민교육헌장이 교과서에 실렸을 땐 끝머리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라고 표기돼 있었다. 박정희라는 이름은 대통령의 친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대통령 박정희’가 빠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걸 세상에 공포한 사람은 세상을 뜨고, 헌장은 갈수록 존재하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결국 세월의 뒷골목을 쓸쓸히 배회하다가 문민정부라 불렀던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군사권위주의의 잔재’라는 오명을 쓴 채 공식 폐지됐다.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이 국민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걸 외우던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씁쓸한 추억이 더 많이 묻어 있는 ‘잊혀져가는’ 존재일 뿐이다.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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