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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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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5. 08:43 백두산을 가다

 

통화로 가는 길, 저녁 무렵의 농촌 풍경. 대부분의 사진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찍었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사진을 못 찍은데 대한 변명입니다 ㅠㅠ)

 

냉장고 없는 호텔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이 뿌려주신 비를 흠뻑 맞은 채 버스에 올라 통화(通化, 퉁화)로 향합니다. 통화는 길림성에 있는, 백두산으로 가기 위해 들러야하는 관문 도시입니다. 서파코스를 택한 사람들은 전날 저녁 보통 이곳에서 숙식을 하게 됩니다. 아예 백두산 아랫마을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예고에 의하면 시내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마사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전신마사지냐 발 마사지냐의 선택을 놓고 격론이 오간 끝에 저의 강력한주장에 의해 발마사지로 통일하기로 합니다. 분위기를 깰까봐 혼자 안 한다고 버틸 수는 없지만, 조상들의 피와 눈물이 배인 이 곳에서 벌거벗은 몸을 타국의 여인들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참 까다로운 여행객입니다.

모를 심을 때 우리처럼 한 줄로 서서 심는 게 아니라, 영역을 정해놓고 각자 심는 게 이채로웠습니다.

마사지를 받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좀 수상합니다. 간판에 그렇게 썼으니 호텔은 확실한데 사람 기척은 별로 없고 로비도 컴컴합니다. 이거 혹시 유령호텔 아냐? 천장을 올려다보니 샹들리에라는 게 매달려 있긴 한데, 불을 켠 것인지 외부의 불빛을 반사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둡습니다. 고급호텔이 아니란 얘기도 미리 들었고 또 제 자신이 거친 음식과 잠자리를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습니다.(본전 생각이 났다는 얘깁니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얘기는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서도 불이란 불은 다 켜봤지만 밝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데 눈이 아니라 더듬이를 사용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라도 한 자루 가져올 걸. 결정적인 사건은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찾다가 일어났습니다. 냉장고가 있음직한 여닫이문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습니다. 분명히 소형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두리번거려 보니 페트병에 담긴 물이 미지근하게 몸을 데운 체 TV 옆에 놓여있습니다. , 냉장고 없는 호텔이라니. ‘범국가적인 전기 절약에 동참하기 위해 TV도 안 켜고 간단하게 샤워만 한 채 침대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건 인색해도 침대는 운동장만큼 넓었습니다. 친구들 불러다 족구나 한 판 할까 싶을 정도로.

그 유명한 화장실
냉장고 없는 호텔 얘기가 나온 김에, 제가 본 중국인들의 문화나 습성에 대해 몇 가지 얘기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며칠 다녀왔다고 문화와 습성 운운이냐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저 주마간산으로 훑어본 것만 전할 뿐이지요. 물론,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또 하나, 분명이 밝혀두지만 중국이나 중국인들을 흉보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좀 다르다고 남의 나라 흉이나 보는 사람은 여행객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휴게소 옆의 화장실. 이곳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오물이 뒤에 보이는 밭으로 바로 흘러들어갑니다. 차마 내부는 찍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여러 번 들어서 새로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중국, 특히 이번에 다녀온 동북부에는 고속도로에도 휴게소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현대식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제가 만난 휴게소는 대개 음식점 하나 달랑 있고 마당보다 조금 큰 주차장이 전부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은? 밥을 사먹지 않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신축건물 자체를 통째로 잠가버린 곳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장날.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화려했습니다.

첫 번째 만났던 화장실을 소개합니다. 버스가 선 주차장 가에 작은 화장실이 하나 있어서 우르르 몰려갔는데, 황당한 상황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들어가는 길부터오물이 산재해 있어 마치 지뢰지대를 통과하는 기분입니다. 내부는 우리나라 60년대쯤의 화장실과 비슷합니다. 변기(?)2개인데 가운데를 뻥 뚫어 놓은 게 전부. 소변기가 따로 없다보니 바닥은 이미 물바다, 아니 오줌바다입니다. 가운데에 칸막이라고 해놓긴 했는데 워낙 낮아서 옆에서 볼 일 보는 사람이 다 보입니다. 그나마 남녀가 구분돼 있는 게 다행입니다. 떨어진 오물을 가두는 탱크는 따로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커다란 독 같은 걸 묻었지요. 대소변은 그냥 밭으로 흘러가게 돼 있습니다. 개가 아닌, 닭 몇 마리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역시 장날 풍경입니다.

남자들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여자 화장실 쪽에서 연이어 터지는 비명.몇몇 분은 결국 볼일을 보류하고 버스에 오르고야 맙니다. 도로를 달리는 내내 이런 화장실들과 정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나마 깨끗하게 해놓은 곳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깨끗함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화장실의 구조보다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진 우리는 깨끗이 사용하는 습관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중국에는 화장실의 청결 자체를 그리 중시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더러운 걸 버리는 곳이니 적당히 더러워도 된다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닐까요? 일반 가정집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 K는 여행 내내, “이게 바로 2% 부족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건물이나 도로는 금세 만들 수 있지만 의식이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라고, 2%를 채우려면 꽤 긴 세월이 필요할 거라고. 여행 내내 저는 고개만 끄떡거렸습니다.

창밖으로 결혼식 행렬차가 보입니다. 부자들은 저렇게 화려하게 꾸민 차를 수십대씩 동원한다고 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화장실 얘기 하나만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백두산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은 지은 지 오래지 않은 현대식 건물입니다. 하지만 소변기가 없고, 사람 수에 비해 변기 수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줄이 길게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순서가 되어 들어가 보니 역시 소변의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바닥도 바닥이고 줄도 길어서 큰일은 아예 엄두를 낼 수도 없습니다. 건물이 아깝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돕니다. 문제는 중국인들은 화장실 앞에서 줄 서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줄이 있건 없건 밀치고 쑥 들어와 그냥 볼 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래 참고 서 있던 한국인들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지요. 여자화장실은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고 합니다. 새치기로 당당하게 볼일을 본 한 여자는, 큰 소리로 밖에 있는 친구를 부르더니 인수인계를 하고 나가더랍니다. 줄을 섰던 한국인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백두산 가는 길, 휴게소 안마당에 세워져 있던 현대차.

목숨 걸고 달린다
이번 여행에서는 보너스로 제법 스릴까지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교통문화 때문이었는데요. 우선 시내에서는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습니다. 경적소리 챔피언이 되기 위해 특별 경적을 주문해서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자랑하듯 경적을 울리던 시절이 있었지요. 양보하거나 비켜주는데도 인색해보였습니다. 아참, 그 얘기 먼저 하고 가야겠네요. 중국에 처음 갔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 비싸다는 외제차,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차들이 도로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 졸부가 많다더니 사실이구나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전부 현지생산 차들이었습니다. 넓은 시장을 노리고 세계의 한다는 차들은 전부 중국에 공장을 세운 것이지요. 한국의 현대차도 제법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렇게 뭔가 허전해 보이는 3륜자동차가 꽤 많았습니다. 트럭, 승용차 할 것 없이...

이야기가 샛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정작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건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입니다. 2차선 도로에서 대부분의 차들은 1차선으로 달립니다. 그야 운전자의 취향이려니 하면 되지만 앞차를 추월 할 때가 문젭니다. 2차선, 즉 오른쪽 차선이 비었어도 거기로 안 가고 반대쪽 도로 1차선 쪽으로 건너갑니다. 문제는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차가 오는데도 과감하게 월선을 한다는 것이지요. 반대쪽 차가 거의 눈앞에 와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비키나 보자는 듯, 경적을 울리며 달립니다. 마치 치킨게임(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이론)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우연이겠지 했는데,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간이 오그라든다는 게 뭔지 실감할 수 있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중국 동북부에서(거기만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남부를 갔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습니다.) 차를 타고 갈 때, 특히 그것이 버스라면 그냥 눈을 감고 가시기 바랍니다.

 

버스 앞에 서 있는 저 당당하게 생긴 사람이 바로 '관따꺼'입니다.

운전사 관따꺼의 경우
우리 일행이 탄 노란 버스의 운전사 이름은 관따꺼였습니다. 본래 이름이 관따꺼는 아니고 관() 씨 성에다 형님, 큰형이란 뜻의 따꺼(大哥)’를 붙인 것이지요. 가이드가 그리 부르라니 그러는 수밖에. 여행 내내 우리의 목숨을 책임진(가끔은 치킨게임으로 위협한), 말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말을 하고 싶어도 한국말을 모르니 할 방법이 없었겠지요. 그의 얘기를 꺼낸 것은, 그가 치킨게임의 주인공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놀라운 체력 혹은 정신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거의 쉬지 않고 운전을 하는데도 늘 꿋꿋한 표정이었습니다. 34일 동안 그가 차를 몰고 움직인 거리를 생각해보면 초인이란 단어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타고 다녔던 버스. 꽤 고급스러워 보이지요?

물어 본 건 아니지만 그가 운전하는 노란 버스는 자신의 차인 것 같았습니다. 소위 지입(일본식 한자)’방식으로 관광회사에 들어간 것이겠지요. 한번은 제가 다리를 꼬고 앉는 바람에(나쁜 습관 ㅠㅠ) 버스 안쪽 벽에 신발자국이 살짝 남았습니다. 전 모르고 있었지요. 관람을 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관따꺼가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옵니다. 제 옆에 서더니 다리를 꼬는 시늉을 해보이면서 손을 살래살래 흔듭니다. 아하! 다리 꼬고 앉지 말라는 소리구나. 눈치가 10단이다 보니 보디랭귀지쯤은 금세 알아먹지요. 그 순간 조금 으스스해졌습니다. 그는 따꺼잖아요. 홍콩산 필름 느와르를 보면 따꺼는 큰형님, 즉 조폭 두목 아닙니까. 다행히 화장실 뒤로 따라오라는 제스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차를 아꼈습니다. 가족의 생명줄일 테니까요. 여행기간 내내 차는 번쩍거릴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자동차의 증가에 따라 주유소도 크게 늘고 있었습니다.

반은 일하고 반은 놀고
중국은 지금 건설 중입니다. 특히 도로를 새로 놓거나 보수하는 현장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도로공사 현장 풍경이 우리와 다른 점은 기계보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건 반쯤은 일을 하고 반쯤은 서거나 앉아서 노닥거린다는 것입니다.

어딜 가도 이런 공사현장이 흔하게 눈에 띄었습니다.

가이드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오랜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는(물론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정해놓은 목표만 달성하면 됐기 때문에 서둘러 마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을 많이 해봐야 개인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으니 적당히 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것이지요. 중국인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만리장성을 쌓던 정신 만만디(慢慢的)’와의 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해치운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장경제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뒤에는 이 만만디 정신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콰이콰이디(快快的, 빨리빨리)정신이 빠르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제가 다닌 지역은 만만디가 남아 있었을까요. 글쎄요. 아직은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성때문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태극기와 태능불고기라는 한글간판이 반가워서 찰칵. 소위 단고기라고 부르는 보신탕집이 무척 많았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보고 느낀 것을 모두 쓰려고 하면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화장실에서 음식점에서 공공버스를 타면서, 좀 낯설고 불편했지만 그 또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모든 것이 똑같고 집에서 만큼 편안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지요. 나와 다른것은 잘못된 게아니라 잠시 불편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낯선 것과의 만남입니다. 내내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다음 회엔 정말 백두산 올라가겠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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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2. 18:3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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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오이냐! 내 새끼.
할머니, 가면 안 돼? 끝까지 거기 있어야 돼!
원, 녀석두, 걱정말래두 그러네.

한밤중에 뒷간 앞에서 벌어지던 풍경입니다.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건 아이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형이나 동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다가 배가 살살 아프고 뒤가 묵지근해지면 처음엔 애써 참다가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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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오줌이야 급하면 요강을 쓰거나 마루 끝에 서서 토방에 내갈기기도 하지만 어디 큰 걸 볼 때야 그럴 수 있나요.
결국 머나먼 뒷간까지 가서 볼 일을 보려면 식구 중 하나를 깨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육친이라도 자다가 난데없이 찬바람 쏘이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결국 똥이 엉치 끝에 걸리면 그제야 누군가가 따라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뒷간에 전등이 걸린 시절이 아니었으니 도착하고 나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이라면 달빛에 의지하지만, 코앞의 손가락도 안 보이는 날이면 더듬더듬 찾아들어가야 합니다.
등불이나 촛불을 들고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많거든요.
이럭저럭 옷을 내린 뒤 쪼그려 앉고 나면 밖에 사람이 서 있어도 왜 그리 무섭던지.
뒷간에 몽당 빗자루 귀신이 산다는 말도 생각나고, 손이 불쑥 나와 ‘파란종이 주랴, 빨간종이 주랴’ 한다는 이야기도 생각나고….
혹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그냥 들어가기라도 할세라, 자꾸 자꾸 말을 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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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은 요즘의 화장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처리하는 곳’이라는 목적은 똑같다고 해도 형태나 사용방법이 워낙 달라 동일시하기는 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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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라고도 많이 불렀지만 이젠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뒷간은 ‘뒤(똥)를 보는 집’ ‘뒤에 자리한 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말이 있습니다.
뒷간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사돈집은 가까우면 말썽이 나기 쉬우므로 경계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먼 것도 정도가 있지, 어느 집은 한참을 가야 뒷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집 울타리 밖에 한뎃뒷간을 짓는 것이지요.
어지간한 시골집에서는 대부분 한뎃뒷간을 뒀습니다.
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 위생상의 필요 때문에 그랬겠지만, 급할 때는 거기까지 가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행세께나 한다는 집에서는 뒷간을 이원화하기도 했지요.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 뒷간을 따로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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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뒷간의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영 뜻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정랑, 서각, 정방, 정낭, 청측, 청방, 변방, 청혼, 측간, 측실, 측청, 혼측, 혼헌, 통시, 회치실….
절에서는 근심을 푸는 곳, 혹은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우소라 부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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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요.
부잣집이나 지체 있는 집에서는 뒷간도 그럴 듯하게 지었습니다.
벽돌을 쌓거나 목재를 써서 짓고, 겉에는 회칠을 하고 문도 짱짱하게 짜서 달았지요.
반대로 서민들의 뒷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무로 기둥 네 개를 대충 세우고 거적으로 얼기설기 둘러쳐 바람만 막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나무를 써서 짓는다고 지어도 찬바람이 제 맘대로 드나드는 건 마찬가지였고요.
더구나 문은 대충 얽어매기 때문에 바람결에 홀로 춤을 추거나 장단을 맞추기 일쑤였지요.
뒷간을 잿간이나 창고와 함께 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좌변기도 조금만 더러우면 구역질을 해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만 들어도 기절할지 모르지만, 가장 재미(?) 있었던 건 두 발을 놓는 바닥이었지요.
커다란 독을 바닥에 묻고 널빤지 두 개를 가로질러 놓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물이 들어가 넘치기 일쑤고, 여름에 엉덩이 내놓고 앉아 있으려면 냄새와 쉬파리‧모기들의 무차별 공세 때문에 뒷간을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변비라도 걸려 오래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저려오는 다리와 옷에 배는 그 독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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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통농경사회에서 이 뒷간이야말로 보물창고였습니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름의 생산지가 바로 이 뒷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뒷간은 거름공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놀러 나가는 아이들에게 이르곤 했지요.
“똥은 꼭 집에 와서 싸거라”
똥은 밥이었습니다.
똥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를 먹고 살아가니 소중할 수밖에 없었지요.
오죽했으면 오밤중에 남의 집 뒷간을 뒤지는 ‘똥 도둑놈’도 있었겠습니까.
새벽녘,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요.
지금은 유기농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빼놓고는 똥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에 똥을 쓰고 싶어도 쓸 만 한 걸 구하기도 쉽지 않지요.
요즘은 시골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많이 보급되고 정화조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순회의 틀을 벗어난 땅도 자꾸 각박해진다고 합니다.
화학비료를 무더기로 주지 않고는 영 소출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세상도 갈수록 각박해진다고 하면 억지일까요.
뒷간의 풍경마저 지독하게 그리울 때가 있는 걸 보면 아주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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