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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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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9 [사라져가는 것들 94] 화로16
2009. 1. 19. 09:46 사라져가는 것들

겨울 저녁, 할머니는 끼니를 건너뛰는 한이 있어도 거르지 않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화롯불을 챙기는 일이었다. 군불을 때고 나면, 낮 동안 제 역할 다 하고 시나브로 사그라진 화로를 내다가 불땀 좋은 숯을 담는다. 화로에 벌건 숯을 담는 것도 나름 요령이 있다. 담기 전에 화로바닥에 어느 정도의 재를 남겨둬야 한다. 또 다 담은 뒤에도 맨 위에 약간의 재를 올려 꾹꾹 눌러줘야 한다. 그래야 재가 보온역할을 해서 불씨가 새벽까지 살아남는다. 할머니는 이 과정을 날마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했다. 정안수를 떠놓고 치성을 들이 듯 경건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불을 담은 화로가 방으로 들어가면 방안의 공기는 금세 술렁거리면서 따뜻해졌다. 할머니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화로를 챙기는 것은 당신의 큰 아들, 즉 내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는 가장이 바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준비해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들어오면 할머니는 인두로 화로를 뒤져 불땀을 일으키고 거기에 걸쇠를 걸쳐놓았다. 그리고는 미리 끓여두었던 된장찌개를 올렸다. 찌개는 금세 보글보글 끓었다. 구수한 냄새가 방안에 그득해지면 할머니는 아랫목에 묻어뒀던 밥을 꺼내 저녁상을 차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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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를 위해서라도 겨울밤엔 군불을 때야했다. 하지만 불을 지핀다고 무조건 화로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솔잎이나 가랑잎으로도 밥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 재로 화로를 채웠다가는 금세 온기를 잃었다. 화력으로야 장작이 최고였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겐 그것 역시 그림의 떡이기 일쑤였다. 가으내 야산을 뒤져 화목을 모아 봐도, 긴긴 겨울을 나기엔 턱도 없었다. 그래서 산이 없는 집들은 겨울마다 고민이었다. 화로의 역할은 방을 덥히고 찌개를 데우는데 그치지 않았다. 바느질에도 화로는 필요했다. 아낙네들은 화롯가에 앉아서 동정을 달고 적당히 달궈진 인두로 다림질을 했다. 할머니는 가끔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줬다. 옛날 옛날에~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의 눈망울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옛날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런 날은 뭔가 보너스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살강 밑에 묻어뒀던 밤이 나오기도 하고, 밥 늘려먹는다고 평소에는 손도 못 대게 하던 고구마가 나오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가래떡이나 딱딱하게 굳은 인절미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이런 것들이 화로에 들어갔다 나오면 최고의 군것질거리가 됐다.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맛있는 음식…. 밤은 황홀하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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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노인들은 보통 사랑방에서 거주했다. 사랑방에도 화로는 필수품이었다. 화롯가에는 불을 다루는 화젓가락, 다독이는 인두, 물주전자는 물론 노인들이 즐기는 엽초쌈지와 장죽이 함께 했다. 물론 재떨이도 필수품이었다. 노인들은 가늘게 썬 황초를 쌈지에서 꺼내어 장죽에 조곤조곤 재어 넣고 화롯불의 재를 살짝 걷어낸 뒤 양쪽 볼이 움쭉움쭉 패일만큼 뻑뻑 빨아 불을 붙였다. 그러다 다 태우고 재만 남으면 놋쇠재떨이에 장죽을 땅땅 두드리고는 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이놈들아! 나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존재를 과시하듯 우렁찼다. 사랑방에 객이라도 있는 날은 노변정담(爐邊情談=화롯가에 둘러앉아서 주고받는 이야기)이 낭자했다. 농사 이야기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안채에서 내온 막걸리라도 한 순배 돌면 육자배기 한 자락이 쏟아지기도 했다. 화로는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니었다. 한 집안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성냥이 없었을 때는 불씨를 보관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주부들은 밤새 지킨 화로 불씨를 아궁이로 옮기며 하루를 시작했다. 불씨를 꺼트리면 칠칠맞은 여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화로는 그렇게 따뜻한 불씨를 품어 안고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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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의 역사를 헤아리다 보면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 시대에는 주거지의 한 가운데 땅을 오목하게 파고 굵직한 돌을 둘러놓은 다음 불을 피웠다. 모닥불 수준의 화로였다. 이게 좀 더 발달해서 테두리에 진흙을 바르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동식 화로가 생겼을 것이다. 화로를 만드는 재료도 다양했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혹은 빈부에 따라 여러 가지 재질을 써서 만들었다. 흙으로 구워서 만든 질화로가 있었는가 하면, 좀 더 고급스럽게 만든 사기화로도 있었다. 돌을 깎고 다듬어서 만든 돌화로도 많이 쓰였고 양반이나 부잣집에서는 무쇠나 놋쇠 등의 금속화로를 사용했다. 그 중에서 가장 고급으로 친 건 백동(구리와 니켈의 합금)화로였다. 돌화로 중에는 곱돌로 만든 화로가 인기가 있었다. 곱돌은 무척 단단해서 정으로 쫄 때 남다른 정성이 필요했다. 표면에 윤기가 있고 감촉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열 보존이 잘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크기나 모양도 다양했다. 아름드리나 되는 큰 화로부터 지름이 한 뼘도 채 안 되는 작은 것까지 있었다. 보통 둥글게 만들었지만 네모꼴, 여섯모꼴, 여덟모꼴, 열두모꼴 등 다양한 모양이 있었다. 또 외형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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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가 무대에서 서서히 퇴장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부터였다. 성냥이 대중화 되고 연탄과 석유 등 화석연료가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헐벗은 산을 푸르게 가꾸자’는 녹화사업으로 나무연료를 쓰기 힘들게 되면서 화로를 채울만한 숯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화로는 새로 등장하는 각종 난방 기구에 자리를 물려줬다. 특히 1970년대 초 농촌지역까지 전기가 보급되면서 그나마 보기 쉽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퇴역한 화로는 하나 둘 엿장수에게 팔려가거나 골동품 가게의 선반에나 올라앉게 되었다. 요즘은 음식점 간판의 ‘화로구이’라는 단어에서 그 자취를 떠올릴 뿐이다. 무릇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화로 역시 함께 데리고 떠난 게 있다. 화롯가에서 쌓던 훈훈한 정과 가족의 화목이 화로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요즘도 날씨가 추워지고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면 뭔가 잊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게 된다. 화롯가에서 보글보글 끓던 된장찌개. 밤‧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나누던 정담,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 그렇게 가슴 따뜻해지는 풍경들이 떠난 자리에는 컴퓨터게임과 화려한 네온사인, 잠시도 멈추지 않는 아귀다툼이 있을 뿐이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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