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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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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장독대'에 해당되는 글 1

  1. 2007.04.09 [사라져가는 것들2] 장독대3
2007. 4. 9. 18:58 사라져가는 것들

한 가족이 세워놓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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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난 뒤, 뒤란 우물 곁 장독대에 놓여진 독들은 더욱 빛이 났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장독대에 가서 살았다. 이른 아침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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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을 머리에 쓰고 밭으로 나가기 전에도, 하루종일 뙤약볕에 시달리고 해거름에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장독대를 먼저 찾았다. 그리고는 티베트 사람들이 마니차(法輪-불경이 새겨진 불구. 안에 경문이 들어 있는데 마니차가 한 번 돌아갈 때마다 경을 한 번 읽은 것이라고 한다)를 돌리듯 독들을 정성스레 닦았다.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 경건해 보여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징징거리며 달려들기 힘들었다. 독들은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한숨이 깊고 길어질수록 반짝거리며 빛났다. 지금도 시골마을을 지나다 장독대를 보면 거기 어머니가 서 있는 듯하여, 눈을 자꾸 비비고는 한다.

#2 그런 노래가 있었다.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이 노래가 나오기 전이지만, 태자리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날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질구레한 세간을 실은 손바닥만한 트럭에 어머니가 타고 먼저 떠난 뒤 할머니와 나, 동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도 그 날은 아무 말 없이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따라 내쳐 걷기만 했다. 우리 가족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명원네 대모가 항아리를 하나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도 대모의 머리에도 선택받지 못한 독과 항아리들은 버림을 받았다. 대모가 머리에 인 항아리는 할머니, 어머니가 아끼던 것들 중 하나였다. 쏟아진 햇살은 항아리 위에서 연신 자반뒤집기를 했다. 나는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다. 우리 가족이 남기고 떠난 장독 뒤에 옆집 아이 순이가 숨어서 보고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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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아리가 닳도록 닦던 어머니나, 항아리를 이고 먼길을 걸어간 어른들 심정의 한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내가 깨달은 장독의 의미는, 한 집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그 구성원들이 세워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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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었다. 비록 경제적 곤궁과 뺨을 할퀴어대는 세월의 삭풍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지라도, 유리왕자의 '부러진 단검'처럼, 품고 가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장독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회색 빛 도시에서 장독대를 가진 집도 별로 없거니와, 길 떠난 가장의 안전을 기원하며 장독대를 닦는 아낙 역시 없다. 요즘의 며느리들에게 장독대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이다. 김치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다.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된장과 고추장은 세월이 가도 그 환한 빛을 잃지 않는다. 양조간장은 언제 먹어도 입에 붙을 듯 달다. 그럴 뿐이다. 새삼 슬퍼할 일은 아니다. 세월에 쫓기어 꼬리를 말고 사라진 게 어디 장독대뿐이랴. 하지만 난 매일 궁금하다. 우리가 아울러 잃어버린 정과 사랑은 지금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까.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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