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카펫수선 아저씨. “훌리아! 톱카프 궁전에 가면 예니체리 나무라고 있다거든? 관계자에게 물어봐서라도 꼭 좀 찾아줘요.”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에 훌리아에게 신신 당부했다. 그녀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훌리아와는 그새 제법 가까워져서 반은 내 개인 가이드가 돼버렸다. 역시 나는 사람 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시라. ‘여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그녀도 예니체리는 알지만 예니체리 나무는 처음 들어본단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확인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예니체리 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일단 들어가 보면 감이 잡히겠지. 톱카프 궁전 앞에는 오늘따라 이상스러울 만큼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카펫 수선하는 아저씨가 근사해 보이길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눈길 한 번 주더니 말없이 바느질만 한다. 터키 사람이라고 모두 상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그래도 특별히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땐 그냥 찍으면 된다. 몇 마디 나눠볼까 하다가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가 있길래 부리나케 쫓아간다. 현장에서는 혼자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일단 매표소를 통과할 때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톱카프 궁전 앞의 기념품 가게. 1472년 착공해서 1478년 준공. 1856년 돌마바흐체가 지어질 때까지 3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 총 면적 70만m². 이런 이력을 가진 톱카프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아마 다섯 번 쯤은 와야 제대로 봤다고 큰소리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달쯤 머물면서 이 궁전만 연구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대문에 해당하는 커다란 문만 해도 세 개, 넓은 정원만 해도 네 곳이나 된다.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체하고 말 건 당연지사. 그래도 일단은 들어가 봐야 곰을 잡든 법을 잡든 하겠지. 첫 번째 문(황제의 문)을 지나면 제1 정원이 나온다. 흔히 예니체리 정원 혹은 예니체리 마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예니체리가 뭔지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하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터키 역사서를 읽다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유난히 가슴을 헤집었을 뿐이다.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긴장할 건 없다. 다 듣고 나면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예니’는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체리’는 그 달콤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병사’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병사’가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때 만들어진 술탄 직할의 직업군인을 바로 예니체리라고 한다. 전쟁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해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정예군으로 싸웠다. 톱카프 궁전의 첫번 째 문. 예니체리의 시작과 끝은 영광보다는 슬픔의 역사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잡힌 아이들과 점령지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 소년들로 주축을 이뤘다. 전쟁터에서 졸지에 부모와 헤어진 것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 낯선 땅으로 보내진 아이들.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늘. 이렇게 이스탄불로 데려온 아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일반 가정으로 보내 투르크 말과 이슬람에 관한 일상을 배우게 했다. 그 후 재능 있는 아이들은 궁정 일을 배우게 하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훈련부대'로 보냈다. 그곳에서 환관들의 감독 아래 6년 이상 엄격한 훈련과 무기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면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부대는 몽골군과 비슷하게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됐다. 재미있는 것은 부대 용어가 주방과 관련돼 있다는 것.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으로 불렀다. 부대장은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 소대 깃발에는 커다란 솥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깃발에 그려진 솥은 큰 상징성을 갖게 된다.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솥을 뒤집어엎었다. 거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듯, 뭔가 요구하는 도구로 솥을 활용한 셈이다. 그들은 특별한 군복을 입고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다른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콧수염 외에 다른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또한 영외 거주는 물론 초기에는 결혼도 금지했다. 예니체리 정원. 예니체리는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능력도 탁월했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6세기. 숫자도 1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여기까지였다. 뭐든지 문제는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 영향력은 커지고 늘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다 보니 자꾸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됐다. 또 초기와 달리 세습체제로 바뀐 것도 권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눈을 돌린 게 바로 정치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그 괴물의 입에 통째로 머리를 넣었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점차 이익집단화 돼갔다. 그에 비례해서 전투력은 약화됐다. 싸움판에서도 펑펑 나가떨어졌다. 배는 나오고 싸움은 못하는 일종의 괴물군대가 된 것이다. 그럴수록 무도함은 하늘을 찔러 술탄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결국 17세기부터는 끄떡하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살해하거나 자신들 입맛대로 갈아치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이 바로 마흐무트 2세. 참다못한 그는 예니체리를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했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니체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탕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뻔한 결말로 갈 차례. 톱카프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해 6월 14일과 15일 예니체리 반란군은 술탄의 군대에 밀려 자신들의 막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술탄은 막사에 포격을 명령했다. 15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반란군 막사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대부분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새삼스레 교훈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시신(혹은 머리라고도 한다)을 어느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예니체리 나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나무를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떠나, 아비규환 속에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들에게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영혼 중 하나가 내게 손짓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예니체리 나무는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훌리아가 괜히 미안해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 자르는 나무’가 있대요. 물 대신 피를 먹여 키웠다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됐어요. 이젠 포기할래.” 호러물이 그리워서 예니체리 나무를 찾은 건 아니라네. 병사들이 훈련을 했을 법한 마당에는 잔디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월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이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저들 중 하나겠지. 예니체리 광장의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 이레네. 이슬람 고유 의상을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성.
'하렘'에 해당되는 글 2건
- 2012.08.06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4] 톱카프 궁전의 간 큰 남자23
- 2012.04.09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 26] 이스탄불을 헤매다26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는 ‘땅에’라는 뜻이고 Batan은 ‘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오!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폭 70m, 높이 9m로 8만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톱카프 궁전 내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아,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즉,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제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만m²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 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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