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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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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5.17 [사라져가는 것들 138] 하눌타리3
2010. 5. 17. 09:1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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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때처럼, 온몸에 고집스레 들러붙는 겨울을 떨쳐버리려 남녘땅으로 도망쳤던 어느 이른 봄이었나봅니다.
그 때 비가 왔는지, 아니면 오다가 그쳤는지, 그 순간이 지난 뒤 내리기 시작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습니다.
손이라도 닿을 듯 낮게 가라앉았던 하늘만 뇌리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온기와 멀어진 지 꽤 오래인 듯, 썰렁하기 그지없는 어느 폐가 옆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애당초 사람의 자취를 몰랐던 곳보다, 사람이 살다 떠난 곳은 훨씬 더 눈물겹습니다.
역마살을 천형처럼 등에 지고 이 땅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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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런 곳을 지날 때마다 발목에 납덩이 하나쯤 더 붙인 듯 허둥거립니다.
서설(序說)이 너무 길어 ‘새살’이 되고 말았네요.
아무튼, 텅 빈 눈길로 그 집 옆을 지나다 돌담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 무엇을 보았습니다.
저게 설마… 하눌타리?
하도 오랜만에 보는지라 금방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른 달려가 보니 아, 역시 하눌타리였습니다.
여름부터 매달려 가을햇살에 몸을 익히고 바람과 비와 눈을 맞으며 겨울을 났을 열매들.
이파리들과는 오래전에 이별을 하고 실낱처럼 여윈 줄기에 몸을 맡긴 채 오가는 바람에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은 썩고 어느 것은 그런대로 제 모습을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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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
근사한 이름이지요?
하늘타리라고도 부르지만 표준말은 하눌타리로 되어있습니다.
하눌타리든 하늘타리든, 어디 열매나 식물 이름에 ‘하늘’이 들어간 게 그리 흔한가요?
어쩌다가 하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 확실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늘다래’라는 말이 어원이란 말도 있고 한자 ‘천원자(天圓子)’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 좋은 하눌타리를 볼 때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슬그머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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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겉만 번지르르 하고 실속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하눌타리는 사실 그 화려한 외양에 비해서 그리 사랑 받는 열매는 아닙니다.
그래서 과루등ㆍ하늘수박ㆍ천선지루 등 그럴싸한 이름을 많이 갖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개수박ㆍ쥐참외 등으로 더 자주 불리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 하눌타리를 보면서 실속 없이 군침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 배고프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오렌지색으로 익어갈 무렵에는, 꼭 잘 익은 과일에 못지않게 먹음직스럽거든요.
동네의 못된 개구쟁이들은 이 하눌타리로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참왼지 하눌타린지 잘 구분이 안 되는 꼬맹이들을 데려다 먹어보라고 꾀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하지요.
그렇게 생으로 먹을 만 한 게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비위 약한 사람들은 토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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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는 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요.
산기슭이나 밭둑 같은 인가 근처에 자생하는데,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오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담장에 담쟁이 대용으로 심기도 했지요.
여러해살이이고 번식력이 좋기 때문에 한번 심어놓으면 해마다 알아서 담을 감싸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눌타리와 수세미오이가 주렁주렁 열려 키를 재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암수딴그루인데 7~8월의 뙤약볕 아래서 하얀 꽃을 피워냅니다.
꽃받침과 화관은 각각 5개로 나눠지고 화관의 각 조각은 다시 실처럼 갈래갈래 갈라집니다.
어찌 보면 천사의 옷깃처럼 아름답고, 어찌 보면 빗질 안한 여자의 머리처럼 헝클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잎은 어긋나고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집니다.
10월쯤이면 열매가 익어 오렌지색을 자랑하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제 어릴 적 보던 것은 주먹만 하게 둥근 것이었는데, 남쪽에서 본 것은 타원형으로 조금 길쭉했습니다.
다 익은 것은 속까지 노란색으로 변하고 박씨처럼 생긴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뿌리는 고구마처럼 굵고 길게 자라는데, 전에는 기근이 들면 이 뿌리를 우려내어 먹었다고 합니다.

제가 앞에서 하눌타리를 ‘이름과 겉만 번지르르 하다’고 하찮은 듯 말했지요?
그런데 어쩌면 그 말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선배에게 하눌타리 얘기를 했더니, 대뜸 반색을 하는 겁니다.
“나 어렸을 때는 그것 따다가 한약방에 주면 돈을 줬다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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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는 한방에서는 버릴 게 별로 없는 꽤 중요한 약재로 칩니다.
열매는 화상이나 동상을 치료하는데 쓰고 거담ㆍ진해제로 이용합니다.
열매 삶은 물로 술을 담가 마시면 통증 완화에 좋다고 합니다.
또 뿌리는 녹말을 채취하여 찜질약으로 이용하거나 강장ㆍ해열ㆍ거담제로 씁니다.
잎 역시 더위를 먹고 열이 나는데 특효약이라고 합니다.
하눌타리가 약재로 쓰이는 것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지요.
하눌타리는 담을 없애는 데 효험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담에 걸렸는데도 그걸 모르고 벽에 걸어두기만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집에 놀러왔던 사람이 벽에 걸린 하눌타리를 보고는 “담을 앓으면서도 왜 저 하눌타리를 걸어놓기만 하는 거요?” 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이게 담을 치료하는 데 쓰는 물건이란 말이요?” 하더랍니다.
이때부터 어떤 물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쓸 곳에 쓰지 않을 때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 라고 했답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旬五志)’에 실려 있는 이야깁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느끼는 거지만, 쉽사리 예단하고 무시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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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눌타리라는 이름조차 낯선 젊은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돌담이나 나무에, 탯줄처럼 이어진 줄기에 매달려 바람 따라 그네를 타던 열매들.
누가 특별히 챙겨준 적 한번 없지만, 그들은 늘 그 자리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산 사람들에게는, 열매로서가 아니라 추억으로 뼈마디마다 각인되어 있겠지요.
남녘 어느 동네에서 홀로 빈집을 지키던 하눌타리 몇 개를 보고, 그렇게도 반가워했던 이유도 그것일 테고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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