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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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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3.23 [사라져가는 것들 134] 영도다리10
2010. 3. 23. 09:0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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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백화점 때문입니다.”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풍덩 빠져있는 내게, 청년 하나가 다가와 화두 같은 한 마디를 던진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청년이 아퀴라도 짓겠다는 듯 반복한다. 이번엔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다. 마치 은퇴 성명을 발표하는 늙은 정객 같은 표정이다.
“저 백화점 때문이라니까요? 저게 완공되면 교통량이 훨씬 많아질 것이고, 결국 이 다리로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철거하는 겁니다.”
아! 그런 뜻이었나? 청년의 날선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공사 중인 건물 하나가 손가락 끝에 올라서 있다. 낡은 다리와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거대한 건물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자, 그제야 청년의 시선이 바다 쪽으로 향한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뭘 적고 있으니 언론사에서 취재라도 나온 줄 알았나보다. 설마 백화점 하나 짓기 위해 멀쩡한 다리를 철거하랴. 시간 탓일 것이다. 시간이 날라다 준, 폭주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어느 구조물도 영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년의 눈빛에서 이 다리에 애착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읽는다.

*영도다리를 찾아간 건 2009년 11월초였는데, 당시의 정황을 살리기 위해 그 시점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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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다리 끝으로 나와 천천히 걷는다. 입구에 새겨진 ‘影島大橋(영도대교)’라는 글씨가 음울한 모습으로 동공에 얹힌다. 언제부터 대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영도다리다. 그것도 ‘영돗따리’ 정도는 발음해 줘야 제 맛이 난다. 75년을 꿋꿋하게 버텨온 저 영도다리가 세상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차량 통행이 중지된 왕복 4차선의 다리는 공원으로 변신이라도 한 듯,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지역 주민도 있고 일부러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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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판을 들어올린 영도다리(자료사진)

어떤 중년 사내는 난간에 기대어 시선을 바다에 끝없이 담그고 있고, 어떤 노인은 동행한 젊은이들에게 연신 무언가 설명한다.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느리게 혹은 빠르게 지나다닌다. 영도다리 밑으로도 배가 오간다. 위에서 보니 마치 다리가 배를 낳는 것 같다. 배가 지날 때마다 늦가을 햇살이 만들어낸 물비늘들이 자반 뒤집듯 몸을 뒤챈다. 활기찬 바다와 달리, 다리는 이별의 예감으로 쓸쓸하다. 난간에는 숱한 낙서들이 새겨져 있다. 낙서도 시간이 낳은 것이다. 다리 아래 저만치에는 허름한 집들이 여전히 점집 간판을 내걸고 있다. 궁합, 작명, 이사, 방위, 가출… 영도다리와 한 시대를 공유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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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14.6m. 너비 18m. 부산시청 남쪽에서 부산항 앞 섬인 영도의 북서단 연결. 1931년 착공해서 1934년 3월 준공. 영도다리의 간단한 이력이다. 이 다리가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건 배가 지나갈 때 상판을 들어 올리는 개폐교(開閉橋)였기 때문이다. 다리가 들려지면 그 사이로 배들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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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녔다. 다리가 들려지는 장관을 보기 위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개통하던 날은 6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 명이었다.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다리 하나 준공하는데 그만한 인파가 몰렸으니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다리가 들리는 오전10시와 오후4시에는 지나가는 차나 보행자들이 기다리다 지켜보고는 했다. 하지만 그 좋은 구경거리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산업화ㆍ도시화는 교통량의 폭증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영도다리라고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결국 개폐를 중단하기로 하고 1966년 8월 31일 오후 5시 마지막으로 다리를 들어올렸다. 준공된 지 32년만이었다. 다리 위에 부설돼 있던 전차궤도 역시 폐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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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의 이력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굳이 ‘사라져가는 것들’ 목록에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온갖 사연을 간직한 다리가 전국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영도다리의 진정한 의미는 이 땅 백성이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데 있다. 일제 때는 이 다리 밑으로 수탈품을 실은 배들이 지나다녔다. 시민들과 함께 해방의 감격도 맛보았다. 무엇보다도, 6.25라는 동족전쟁을 빼놓고 영도다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부산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재회의 장소로 정해둔 곳이 바로 영도다리였다. 그 여파로 생겨난 것들이 바로 영도다리 밑의 점집들이었다. 헤어진 가족의 소식을 듣기위해, 전쟁터로 나간 자식의 생사를 묻기 위해, 지푸라기 잡던 심정으로 찾았던 곳이다.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끼고 있는 영도다리 주변은 늘 북새통을 이뤘을 것이다. 피란민은 끊일 새 없이 들어오고 땅덩어리는 늘어날 줄 모르고. 헤어진 가족을 찾아야지, 먹을 걸 해결해야지…. 잠자리인들 마땅했을까. 남의 집 처마 밑에라도 깃들면 좋았겠지만, 다리 밑이나 백사장인들 마다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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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후략)

입에 풀칠을 하는 것과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늘 발등의 불이었을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좌판을 벌인 이든, 부두에서 지게를 지는 이든, 온몸을 누르는 삶의 무게는 천근보다 무거웠으리라. 그때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가 바로 현인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한겨울, 바람 차가운 흥남부두를 떠나야 했던 한 사내. 아내인지 동생인지, 혹은 애인인지… 북새통 속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시작한 피란살이는 고달프고 서러울 수밖에. 늦은 밤, 소주 한잔으로 팍팍한 속을 달래며 영도다리를 바라보면, 꿈결인 것처럼 고향의 그 초승달이 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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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물의 영도다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 자리에 21세기형 새 다리가 세워진다. 그동안 논란도 많았다. 70년 넘는 세월을 넘어오는 동안 철거 위기도 숱하게 겪었다. 그때마다 시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학계나 문화재 전문가는 물론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다리의 생사를 놓고 숱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철거하되 원래 영도다리의 의미를 최대한 ‘복원’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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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새 다리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으로 2009년 7월 27일부터 차량 통행을 중단하고 임시다리로 우회시키기 시작했다. 해체가 완료되면 곧바로 복원 작업에 들어가 2012년 6월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새 영도다리는 왕복 4차로에서 6차로로 넓어지고 다리 밑으로 통행하는 선박이 대형화 된 것에 맞춰 상판이 현재보다 조금 높아진다. 또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도개식(跳開式)으로 설계했다. 물론 상판을 들어 올리고 배가 지나다닌다고 해서 과거의 영도다리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배인 세월과 애환까지 물려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나는 영도다리가 절망의 세월을 눈물로 견뎌낸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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