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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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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8 [사라져가는 것들 130] 펌프10
2010. 1. 18. 08:44 사라져가는 것들
저는 지금도 펌프보다는 뽐뿌라고 불러야 제 맛이 납니다.
펌프라는 말이 어떻게 뽐뿌가 되었는지 몰라서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어릴 적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불렀다고 해서는 더욱 아닙니다.
억지 같겠지만, 뽐뿌라고 발음해야 뭔가 힘이 좀 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대지 깊숙한 곳에서 생명수를 불러내는 도구쯤 되려면 힘이 좀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제가 사랑하는 건 물을 길어 올리는 도구, 즉 펌프의 실체지 이름 따위는 아닙니다.
펌프는 ‘기억창고’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추억들을 퍼내어 햇빛 아래 널어놓는 마술 같은 존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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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 하면 한 여름에 옷을 훌훌 벗고, 등목 하던 기억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겨울 풍경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려웠던 추억이 더 뼛속깊이 고갱이로 박히는 모양이지요?
겨울아침이면 물을 데워서 펌프를 녹이는 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전날 밤에 펌프 안에 고여 있는 물을 빼내면 얼 일이 없지만, 그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통째로 얼어버린 날은 팔팔 끓는 물을 몇 바가지 부어야 물을 펌프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았다고 고역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펌프질을 할라치면 손이 쇠 손잡이에 쩍쩍 달라붙고는 했지요.
제 어머니 말씀대로 ‘징그럽게도 춥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다행이 물이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고생은 끝납니다.
지구가 가슴에 품었던 물인지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그 물을 받아서 세수도 하고 밥도 짓고 걸레도 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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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얕은 지식으로 펌프가 어찌 물을 끌어올리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기압의 차이를 이용해서 유체를 이동시키는 원리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펌프 안에는 바깥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고무 패킹(packing)이 있습니다.
펌프질을 하면 관에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그 아래에 있던 물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펌프를 설치하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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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맥이 흐르는 곳까지 관을 박거나, 기존의 우물에 관을 넣고 뚜껑을 덮는 방식이지요.
지하수 사정이 안 좋은 동네는 샘도 관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맥을 찾거나 펌프를 설치하는 일이야말로 전문가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집에 펌프를 박는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을 갈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지요.
어찌어찌 설치한다고 해도 속을 썩이는 펌프가 없지 않았습니다.
한번 쓰고 나면 물이 저절로 빠지는 것도 많았는데, 그런 땐 마중물을 부어줘야 했습니다.
마중물을 붓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면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의 물과 만나는 느낌이 전해져옵니다.
웃물이 관을 타고 내려가서 아랫물을 데려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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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펌프에 매달려 놀았습니다.

땅속에서 퍼 올리는 물은 냉장고에 보관한 것만큼이나 시원했지요.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기도 하고, 아예 큰 ‘다라’에 받아놓고 철퍽거리기도 했습니다.
한손으로 펌프질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 구멍을 막았다가 물을 받아먹는 재주쯤은 누구든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른들도 웃통을 훌훌 벗고 펌프 앞에 엎드려 등목을 하고는 했지요.
어푸! 어푸! 쏟아지는 비명에 펌프질은 더욱 신명이 붙었습니다.
먼 길을 다녀온 아버지는 마루에 앉자마자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펌프질을 한참 해서 관에 고였던 물을 빼낸 다음 한 바가지 떠다 드리지요.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불러내지 않으면, 미지근하거나 녹 냄새가 나기도 하니까요.
“어이, 시원하다” 한마디로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 이유 없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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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시골동네를 지나다, 어느 집 마당에서 녹슬어 가는 펌프를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쿨럭 쿨럭 해소기침이나 쏟아낼 뿐입니다.
저 깊은 곳에서 땀으로 길어내던 생명력, 그 물이 그립습니다.
발가벗고 깔깔거리던 여름날뿐 아니라 손이 쩍쩍 달라붙던 한 겨울의 풍경마저 애틋해지는 건, 나이 먹는 탓만은 아니겠지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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