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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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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탁심 광장.

트램에다가 빵을 파는 아저씨까지 마구 얽혀있다.

한 여름의 군밤장수.

나는 지금 이스티크랄 거리의 시작점인 탁심 광장으로 가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퇴근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거리에는 오가는 차들과 인파가 정신없이 얽혀있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이스탄불 최고의 번화가다.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신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등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금각만이라고도 불리는 골든혼을 건너면 바로 신시가지에 닿는다. 여기도 유럽에 속한다. 이곳에서 보스포루스대교를 건너면 아시아 땅이다. 신시가지라고는 하지만 구시가지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시가지가 조성된 건 제법 오래 전이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제노바 상인이 자치권을 쥔 칼라타 지구였으며 거리의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 인근은 페라 지구였다. 지금은 베이오울르라고도 부른다. 탁심 광장에서 튜넬까지 1km가 조금 넘는 이스티크랄 거리를 걷기로 한다. 초입부터 넘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거리를 걷는 것 같다. 거리 한 가운데로는 노면전차, 즉 트램(트란바이)이 지나다닌다. 물론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보행자들에게 전혀 위험요소가 되지 않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매달려 가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적, 동네에 자동차만 나타났다하면 쫓아가 매달리던 생각이 난다. 어른들은 성화를 부렸지만 얼마나 재미있던지. 개구쟁이들의 장난기는 동서나 고금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거리는 트램 외에 일반 차량은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보행자 천국이라고 부른다.

 

인파로 가득 찬 이스티그랄 거리.

반은 벗어버린 여자도 있고.

전신을 감싼 여자도 있다.

거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섞여있다. 서양인과 동양인, 백인과 흑인, 내국인과 관광객. 거의 벗다시피 한 서양 여자와 온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무슬림도 재미있는 대비를 연출한다. 이스탄불이 국제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 거리에서는 무엇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다. 상업지구인지라 은행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명품 숍이나 화장품 가게도 즐비하다. 패스트푸드점, CD 판매점, 빵집, 피자가게. 입구에는 노점상들도 포진하고 있는데 역시 군밤장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더운 여름에 군밤을 팔고 사먹는 사람들은 또 뭐람. 돈두르마나 하나씩 먹으면 딱 좋을 것 같구먼. 한쪽에는 전단지 돌리는 청년도 있다. 얼른 돌리고 갈 심산인지 내게도 한 장 쥐어주길래 들여다보니 피자 할인문구가 들어있다. 곳곳에 좌판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은 것이 복권을 파는 노점이다. 장사가 제법 잘된다. 이 나라 사람들도 복권에 희망을 파종하는구나. 하긴 복권 없는 나라가 어디 그리 흔하랴. 모래 위의 집처럼 금방 무너질 꿈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조그만 함지 같은 곳에 생수를 대여섯 병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가 보인다. 저 노인은 또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더위에 저리 나와 앉아있는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내 어머니의 얼굴과 오버랩 된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이라 갈증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얼른 한 병을 손에 쥐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드린다. 오늘 가지고 나온 물을 모두 팔아도 내가 드린 돈만큼은 안 될 것 같다. 내 작은 돈이 저 노인의 한 끼 식사에 도움이 되기를.

트램에 매달려 가는 개구쟁이들. 

수박에 새긴 인물상.

케밥집 진열장의 수박 조각(彫刻)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유리창 앞에 서서 혼자 실실 웃는다. 얼굴을 새긴 주방장의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오래 이러고 있다가는 더위에 맛이 갔다는 소리를 듣기 딱 알맞겠다. 어디선가 아코디언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음악인이 곳곳에 있지만 이 아코디언 소리는 유난히 내 발목을 잡는다. 유모차를 앞에 세워둔 젊은 여자 하나가 유치원생이나 쓸법한 작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세련된 음악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불러대지? 의지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할 땐 육신이 하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 가까이 가보니 유모차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다.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6개월이나 됐을까. 다행히 무더위 속에서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천사 같은 모습에 또 마음을 뺏긴다. 대체 이 엄마는 무얼 어쩌자고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거리에 나온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란 뜻일까? 여인과 아기를 싸고 흐르던 축축한 슬픔이 내게 전이된다. 그렇다고 추하다거나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지나가도 되련만 송진이라도 밟은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배낭을 내려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내고 마침 근처에 있던 일행에게 달려가 동전을 얻어온다. 여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슬픔과 수줍음이 적절히 섞인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왕 음악을 멈췄으니 한마디 물어나 보자.

아기가 참 예뻐요. 몇 개월이나 됐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만다. 그냥 돌아서는 수밖에.

 

복권 파는 아저씨.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녀.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담는 수밖에. 저만치서 나 하는 짓을 바라보던, 그리고 동전을 빌려준 일행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그런 마음으로 제대로 된 여행자가 되겠니?’ 그런 눈초리다. 아니다. 괜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측은지심이야 말로 사람이 가진 근본 심성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여행 내내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챙긴 사람이다. 내가 특별히 갸륵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할머니의 미지근한 물을 사고 아기 엄마에게 동전을 털어준 것은 아니다. 그저 인연이 그리 이어졌을 뿐이다. 세상엔 지갑이 가난한 대신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 덕에 그나마 이 사회가 지탱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 중에서 나온다. 그는 남의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주변을 돌볼 틈이 없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한 개를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이들이다. 그야말로 용기고 사랑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 축에 끼어들기에는 반 푼어치의 자질도 없는 사람이다. 겉모습은 비슷해도 내가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다. , ‘이기(利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발이 저려서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주고 나니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 하필 이런 때 밀려오는 이 날카로운 요의(尿意)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 방광이란 녀석은 눈치가 엄청 빠르다. 내 인생 최악의 안티 세력임에 분명하다.

 

 

특별 세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곳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괜한 호기심으로 뒷골목을 흘끔거린다. 과감하게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까닭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젊은 친구 몇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뒷골목에 들어갔다가 몽땅 털릴 뻔했던 걸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고도 내 뒷골목 탐사의 열망은 가시지 않고 있다. 어느 곳을 가든 뒷골목부터 기웃거린다. 그 나라, 그 도시의 진실은 뒷골목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먹는 음식이 그 나라의 진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그리 위험한 도시는 아니다.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완벽한 곳이 어디 있으랴. 어느 여행책자에서 이스티크랄 거리에 가면 술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본 기억이 난다. 대충 더듬어 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뒷골목에는 바와 클럽이 많은데 수상한 분위기의 술집에 들어가는 건 피해야 한다. 특히 여자 손님을 끌고 가려고 하거나 여자 직원이 있는 곳은 위험하다. 터키에서는 술집에 여성들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나는 술을 마실 것도 아니고 지금은 한낮인데 뭘. 골목은 아직 조용해 보인다. 그럼 별 재미가 없다. 나를 다시 큰 거리로 끌어낸 건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소리다. 누군가 부르는 노래가 분명한데 정말 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음색이다. 저런 소리를 영혼의 울림이라고 하나? 발길은 끌려가다시피 그쪽으로 향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내면의 경고 따위는 무시한지 오래다. 길 한쪽 공터에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이스탄불에도 약장수가 있나?

 

집시 여인.

 

남자 악사가 두 명, 그리고 한 여인이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 여자가 바로 집시야.” 어디선가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 건 그녀의 노래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 우리네 창과도 다르고 영혼을 두드리던 마두금의 음색과도 다르다. 한때 마음을 빼앗겼던 중국 소수민족의 노래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핏속을 흐르는 슬픔만 골라내 세상을 향해 내던지는 듯한 소리. 콰지모도가 사랑한 여인, 에스메랄다의 영혼 색깔이 저랬을까. 집시라는 족속은 원래 무당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고 땅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무리. 아득한 옛날에는 그들이 제사장이고 세상의 지배자였다. 북을 치는 손놀림이 이별을 앞둔 연인을 향한 손길처럼 부드럽고 서럽다. 길게 길러 풀어헤친 머리, 선 굵은 귀고리, 멋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은 하얀 색깔의 상의, 그리고 통 넓은 치마. 옆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CD 몇 장이 놓여 있다. 그걸 팔기 위해 노래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을 친 건 그녀의 눈을 본 순간이다. 우물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이, 어느 곳에도 초점을 두지 않은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대체 이게 뭐지? 이런 걸 무슨 느낌이라고 하지? 첫 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정상적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늪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의 소처럼 나는 혼신을 다해서 뒷걸음을 친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뒤에야 철퍼덕 주저앉는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음 한 쪽에서는 돌아가서 CD라도 사오라고 꼬드기지만 다른 한쪽은 극구 손사래를 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온 것일까.

 

갈라타 탑 갈라타 탑 앞의 여인들.

케밥 사세요. 고등어케밥!!

고등어케밥 이렇게 만듭니다.

완성 직전.

이스티크랄 거리의 끄트머리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갈라타 탑을 만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의미가 있는 곳이다. 지난해 지중해 여행의 끝을 이곳에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사실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 바로 이 갈라타 탑이다. 하지만 한참 줄을 서고 좁은 곳에 올라가 엉덩이를 비벼야 하는 과정이 끔찍하다. 뭐 그냥 지나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한번 가봤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갈라타 다리로 얼른 가고 싶다는 조급증도 한몫했다. 걸음을 재게 놀린다. 갈라타 다리를 오가는 인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낚시꾼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반짝거리는 물고기들을 건져 올린다. 잡상인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 실업자가 늘어난 건가? 이웃인 그리스의 재정파탄이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터키가 흔들린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이곳 사람들은 갈라타 다리를 백수다리라고도 부른다. 직업 없는 사람들이 새벽 다섯 시부터 나와서 낚싯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공간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도 백수들에게 낚시터를 마련해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복지가 뭐 별건가? 일단 다리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엔 벼르고 벼른 고등어케밥을 꼭 먹어볼 작정이다. 이곳은 고등어케밥의 천국이다. 다리가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맨 위가 낚시꾼들의 영토라면 1층은 고등어케밥을 위해 존재한다. 다리를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은 물론 바다에도 큰 배에서 케밥을 판다.

 

이 배에서도 고등어케밥을 판다.

저무는 이스탄불.

다리 옆은 해산물 시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해물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구경하는데도 한참 걸린다. 멀리 흑해에서 온 함시(멸치보다 조금 큰 생선으로 밀가루를 입혀 튀겨먹는다)도 보인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고등어케밥을 파는 리어카 좌판. 하얀 상의에 요리사 모자, 앞치마까지 둘러 그럴듯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고등어케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다. 대개 제대로 된, 에어컨이 나오는 음식점으로 찾아가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근사한 음식점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맥주 한잔 곁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좌판 아저씨에게 고등어케밥을 주문했더니 신이 나서 만들기 시작한다. 헌데 이것도 간단한 게 아니네? 빵을 반으로 갈라 잘 구워진 고등어를 얹고 그 위에 익힌 양파와 고추를 올리고 소스를 뿌리고 각종 채소를 얹고 다시 향신료를 뿌리고. 에구, 숨 가쁘다. 벼르고 벼르던 고등어케밥의 맛은? 그저 그랬다. 고등어의 비린 맛 때문에 거부반응이 일었다든가, 아니면 한 개쯤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든가 하는 특별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나라의 특별한 음식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니까.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은 모두 끝났다. 다시 이스탄불과 이별을 해야 한다. 갈라타 다리 위에 서서 저물어가는 도시를 바라본다. 유람선이 오가는 바다 건너 저만치에는 석양을 비껴 안은 모스크들의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건물들은 하나 둘 불을 밝혀 12시간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를 전송한다. 작년에 했던 인사를 다시 반복한다. 다시 오리라. 내 형제, 내 친구의 땅이여.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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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노면전차 트램의 외관

트램의 객차 내부. 느린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트램을 타다

모두들 조금씩 상기된 얼굴로 트램에 오른다. 터키 여행 내내 버스만 타고 다녔으니 다른 탈것이 신기할 법도 하다. 트램은 노면전차 또는 시가(市街)전차라고 부르는데 도로 위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동차를 말한다. 하지만 믿음 씨는 트램이란 단어를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터키에서는 트램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 있는 이건 뭔데? 그야 전철이란 뜻의 트란바이(tranvay)라고 하지요. 그럼 기차는? 그건 트렌(tren)이고요. 한국의 터키 관련 책자에는 모두 트램이나 트렘으로 썼던데? 그게 잘못된 거라니까요.(버럭!!) 그려, 그려. 누가 뭐라고 했남? 아무렴, 여기 사는 네가 맞겠지. 두 손을 들고 가만 생각해보니 트램이란 단어 자체가 국제적 통용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터키에 와서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트램은 주로 유럽에서 운행되는데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세계 약 50나라의 400개 정도 도시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189812월 서울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처음 개통돼 1968년까지 운행되던 노면전차가 바로 트램이다. 터키에서 트램이라는 단어를 낯설어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차라고 하는데 외국인이 와서 트램이라고 하면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아무튼 믿음 씨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트램으로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믿음 씨 배신해서 미안해요.

안탈리아의 상징, 이블리 미나레트.

이블리 미나레트 근처에 있는 시계탑.

트램의 운임은 1~1.5리라. 돈은 차 안에서 받는다. 안탈리아는 해발 35m의 석회석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지하철을 놓을 수 없다. 트램의 외부에는 광고가 붙어 있고 객차에는 나무의자를 놓았다. 쌩쌩 달리며 사람을 위협하는 병기가 아닌, 사람에 맞춰 움직이는 친구 같은 존재라는 느낌에 정이 간다. 트램이 천천히 해변을 따라 달린다. 모처럼 느린 속도가 주는 안도감을 만끽한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꼭 봐야할 것을 놓치고 마는지도. 트램이 일행을 내려놓은 곳은 이블리 미나레트와 시계탑을 볼 수 있는 광장. 이블리 미나레트는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높이 38m. 안탈리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미나레트는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모스크, 즉 이슬람사원에 세운 첨탑을 말한다. 이블리는 ’ ‘홈이 파인이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미나레트의 외벽에 붉은 벽돌로 여덟 줄의 세로 홈이 파여 있다. 이블리 미나레트는 룸 셀주크의 술탄이었던 알라딘 케이쿠바드1세가 1219년에 세웠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고 이 미나레트를 세운 것이다. 안탈리아의 구시가지를 칼레이치(Kaleiçi)라고 부르는데 이블리 미나레트는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시계탑과 함께 칼레이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미나레트를 지나 마리나 항구로 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다시 한번 소개하는 유료 화장실.

유쾌 상쾌한 화장실 할아버지. 코리언이라는 말에 경례를 붙여줬다.

터키탕에 대한 오해

때가 되면 찾아오는 생리현상을 어찌하랴. 도살장 들어가는 소걸음으로 유료화장실에 들렀다가 유쾌 상쾌한 어른들을 만난다. 노인 두 분이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데 노인들이 갖기 쉬운 지치고 음울한 기색이 전혀 없다. 특히 수염을 멋지게 기른

이블리 미나레트.

노인은 코리아에서 왔다는 말에 멋지게 경례까지 붙여준다. 이분들도 혹시 참전용사인 코레 가지’? 그렇지만 화장실 요금은 절대 깎아주지 않는다. 활짝 웃으며 헤어진 뒤 본격적인 이블리 미나레트 탐색에 나선다. 당연한 일이지만 미나레트 옆에는 모스크가 있다. 원래 그리스정교회 성당이었다는 바로 그 모스크다. 안을 들여다보니 청년 하나가 창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약간은 어두운 실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과 실루엣에 가까운 청년의 모습이 경건함을 넘어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 풍경이 날아갈 것 같아서 자꾸 망설인다. 모스크 앞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는데 옛날에는 신학교였다고 한다. 쇼핑몰이 되어버린 신학교.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희극이라고 해야 하나. 세월의 짓궂은 장난이겠지. 미나레트에서 시계탑 쪽으로 가다보면 옛 터키 목욕탕인 하맘을 개조한 도자기 가계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못 찾았기보다는 일행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찾을 기회를 놓쳤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은 혼자나, 혹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친구와 단출하게 다니는 게 좋다. 외로움을 충분한 탐색으로 바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블리 미나레트 옆의 모스크 내부.

슬그머니 내 사진도 하나 끼워넣고.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긴 수염과 까맣게 탄 얼굴이 특징이다. 클릭 절대 금지.

이왕 하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터키탕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터키에 간다니까 은근한 목소리로 다녀와서 재밌는 얘기어쩌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 대체 뭘 기대하고 하는 소릴까. 아직도 터키탕에 대한 오해가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터키에는 당연히 터키탕이 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엉뚱한 오해속의 터키탕은 없다. ‘하맘(Hamam)’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전통의 목욕탕이 있을 뿐이다. 아직도 터키탕과, 매춘을 연상시키는 증기탕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터키탕은 일부가 상상하는 것처럼 야한 곳이 절대 아니다. 어쩌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그렇게 음습한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여기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오랜 동안 터키탕에 오명을 씌웠던 증기탕(1996년에 이름이 바뀌었다)은 일본에서 온 퇴폐문화라고 한다. 남성이 탕에 들어가면 지목된 여성이 따라 들어가 목욕과 사우나·마사지 등을 한꺼번에 서비스 하는 것은 물론 매춘까지 이어지는 곳이다. 지금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지 나는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터키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굳이 인연을 따지자면 남녀 혼욕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에도 오해가 있다. 터키에서 혼욕은 우리가 생각하는 탕 안에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작은 하맘일 경우 남녀가 시간을 나누어서 오전-오후 교대로 탕을 쓰는 걸 말한다는 것이다. 함께 목욕을 하는 온천도 있다는데, 그곳도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니 수영장이나 다름없다.

마리나 항구시장.

골목시장엔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터키탕에는 물이 없다

터키로서는 자국의 이름이 붙은 듣도 보도 못한 목욕탕 때문에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전통 문화가 외국에 가서 섹스문화로 둔갑한다면 얼마나 화가 날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9961129일자 연합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보건복지부는 29일 입법예고한 공중위생법시행령 개정안을 통해 건전한 목욕문화의 정착을 위해 터키탕업의 명칭을 증기탕업으로 변경키로 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기사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터키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정부 측에 터키탕 명칭변경을 끈질기게 요구해왔으며 특히 지난 8월 딩겔테페 대리대사가 신문 독자투고문를 통해 한국에서 터키탕은 사실상 매춘행위를 하는 장소인데 이런 목욕탕은 터키에서 유래되지 않았고 존재도 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항의했었다.’ 결국은 터키의 항의에 의해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터키탕을 증기탕으로 바꾼 것이다. 쓸데없이 목욕탕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하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터키의 목욕탕 하맘에 대해 조금 알고 가자. 물론 나는 터키에서 대중목욕탕을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고백한다. 터키탕은 로마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중동을 정복한 로마인들이 자신들 방식의 욕탕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터키탕이 됐다는 것이다. 터키탕은 증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밀실에 열기를 가득 채우는 건조욕으로 땀을 내고 나서 몸을 씻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한증막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기념품 중엔 가면도 많았다.

온갖 기념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 터키탕을 잠깐 들여다보고 가자. 우선 터키의 목욕탕에는 물이 없다. 사방이 온통 건조한 대리석이다. 뜨끈하게 덥혀진 대리석 방에 앉아 열기로 땀을 내고, 수건으로 때를 밀고 물을 받아 바가지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 터키 사람들이 목욕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 터키탕에서는 옷을 홀딱 벗지 않는다.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인지라 동성 간에도 중요부위는 노출하지 않는다. 괜히 한국에서처럼 속옷까지 홀라당 벗고 들어갔다가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전에 쫓겨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목욕탕에 가려면 때수건보다 수영복을 챙겨야 한다. 한 여성의 터키탕 경험담을 들어보자. 입구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고르는데 30리라면 필링(피부의 각질층을 얇게 벗겨내는 것. 남자가 할 일이야 있을까 만은)과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을 끼얹은 뒤 사우나실에서 10분 정도 몸을 불리면 때밀이가 순서가 됐다고 부른다. 중앙 홀에 있는 널찍한 대리석 평상에 천을 깔고 누우면 때밀이 아주머니가 터키식 때밀이 타월로 작업을 시작한다. 때를 다 밀면 간단한 샤워 후에 터키식 거품 마사지가 이어지고 두세 차례 물을 끼얹는 것으로 마무리. 개인적으로 샴푸하고 나오면 끝. 터키에는 동네마다 몇 백 년 묵은 터키탕도 많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들러서 이색적인 경험도 해보고 마음의 묵은 때까지 벗기고 나오는 건 어떨지.

25년동안 양탄자만 수선한 아저씨.

비록 계단에 점포를 열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어차피 터키탕 구경은 팔자에 없는 모양이니 포기하고 골목 탐색이나 열심히 하기로 한다. 조금 내려가니 온갖 기념품을 파는 골목시장이 나온다. 마리나 항구시장이다. 맨 먼저 입구에서 양탄자를 수선하는 아저씨를 만난다. 길 옆 계단에 앉아서 일하지만 당당한 풍모가 도인을 보는 것 같다. 뭐든지 한 가지 일을 지극정성으로 오래 하면 득도를 하는 모양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다. 10세부터 양탄자 수선하는 일을 해서 25년 동안 이 일만 했단다. 전 세계 어디서 만든 카펫이라도 척 보면 한 눈에 출신지를 알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터키 카펫은 두 번을 묶기 때문에 한 번만 묶는 다른 나라 카펫보다 튼튼하단다. 그런데 두 번 묶는다는 게 뭐지? 지금 수선 중인 카펫은 25년 된 것인데 이 정도면 새것 축에 들어간단다. 25년 쓴 게 새것이면 대체 얼마나 오래 쓴다는 거야.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보통은 100~200년은 써야 앤틱(antique)’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다. 오래 쓸수록 골동품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100~200년은 좀 심하다. 몇 대를 이어 쓴다는 것인지. 수선하는 사람이야 일거리가 많아 좋겠지만 새로 만드는 사람은 누구에게 판담. 쓸데없이 별 걱정을 다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좌판에 장신구를 파는 사내아이를 발견한다. 열 살쯤 됐을까? 부모를 대신해 좌판을 잠깐 봐주는 게 아니라 생업인 것 같다.

장신구를 파는 아이. 열심히 권하고 있다.

손님이 그냥 가자 실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다른 손님마저 그냥 가자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힘내라, 아이야.

보석이라고 내놓은 것들이라 봐야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절실함이 눅진눅진 달라붙어 있다. 간이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다가 누가 물건을 들여다보면 눈을 반짝이면서 달려간다. 목걸이를 걸어줘 보기도 하고, 어울릴만한 걸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 온 손님은 살 듯 살 듯 하다가 그냥 가버린다. 아이는 상심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시선을 허공에 묻는다.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와 한참 흥정을 하더니 그냥 돌아선다. 아이가 좌판에 얼굴을 묻는다. 우는 걸까? 꼭 쥔 작은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사연으로 이 골목에 좌판을 펼쳤을까. 장사를 하던 부모님이 병이라도 난 것일까?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저렇게 절실한 몸짓을 하는 것일까. 와르르 무너지려는 가슴을 추스르며 돌아선다. 조금 더 내려가다 장신구 틈에 숨어있는 남색 돌들에게 발길을 잡힌다. 눈동자처럼 생긴 흰 돌이 남색 돌 안에 박혀 있다. , 저게 굿 럭(Good Luck)’이구나. 굿 럭을 지니고 다니면 그 눈이 악귀를 다 지켜보기 때문에 나쁜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다고 한다. 터키 사람들은 그 영험함을 굳게 믿어서 테이블보에서부터 그릇까지 굿 럭의 문양을 곳곳에 새겨놓는다. 또 가게나 집, 관공서 등 출입문이 있는 곳에는 대개 하나씩 매달려 있다. 마음이 넉넉한 터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 굿 럭을 달아주고 행운을 빌어준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것이 바로 굿 럭.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장수. 온갖 쇼를 한다.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골목이 거의 끝나고 마리나 항구에 다다를 무렵 한 무리의 동양인들을 만난다. 안탈리아는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그동안 스쳐온 도시와 다르게 동양인들이 꽤 많다. 중국인도 있고 일본인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인들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 한국인이다. 그 느낌을 믿고 한 마디 던져본다. “안녕하세요?” 길을 가던 그들이 그제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역시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피가 피를 당기는 법. 그쯤 되면 길거리 수다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들 일행은 뉴욕에서 왔다고 한다. 터키 땅에서 뉴욕 교포들을 만난 셈이다. 반가워라. 터키에 와서, 타큐팀을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또 헤어져야 한다. 그들과 작별하고 해변을 걷는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다. 그동안 보드롬이나 페티예, 카쉬에서 워낙 아름다운 바다를 많이 봤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리나 항구는 안탈리아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2세기부터 지중해를 오가던 배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정거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콘얄트 해변 쪽에 새로운 항구가 생겨 고유의 기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안탈리아의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1980년대 복원돼서 유럽연합이 주는 황금사과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항구는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하다.

까마득한 성벽.

오스만 시대에 지은 오래된 집들.

늑골이 드러났지만 정겹다.

거의 몸을 비비 듯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낯설고 익숙한목소리가 들린다.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어라? 이게 웬 쫀득? 돌아보니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한국말로 우리를 부른다. 저 사람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딘가 표가 난다는 건데, 그게 뭘까. 그나저나 한국말로 아이스크림을 팔 정도면 이 동네는 정말 한국인이 많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스크림은 쫀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찰떡처럼 생겼다.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신나는 몸짓으로 아이스크림을 늘렸다 줄였다 온갖 쇼를 한다. (귀국한 뒤 인사동에서도 아이스크림을 파는 터키 사람을 봤지만 쇼를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로 보면 찹쌀떡쇼쯤 되겠다. 항구 구경을 건성건성 마치고 다시 옛시가지 쪽으로 길을 잡는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성곽의 가파른 길을 헐떡거리며 오른다. 옛날, 배를 타고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일 테다. 원래 칼레이치는 성내(城內)라는 뜻으로 항구를 둘러싼 4.5km의 성벽 전체를 걸어서 돌 수 있다고 한다. 성곽을 지나고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을 지나니 오래된 집들이 나온다. 오스만 시대의 전통가옥들이다. 늙은 말의 잔등이처럼 헐벗었거나, 늑골을 다 드러낸 집들도 있지만 내 눈엔 그래서 더욱 정겹다. 해가 잠자리를 찾는 듯,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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