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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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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욀뤼데니즈 해변의 패러글라이딩 착륙장. 모래와 잔디밭이라 안전하다.


그녀를 만나다

바바산에서 내려와 헥토르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그녀가 있다. 누구? 헥토르 에이전시에 일한다는 한국인 아가씨.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가출한 여동생을 타향에서 우연히 만난 듯 반갑다. 하지만 그녀는 7년 만에 만나는 오라비나 지을 법한 감동적인 표정을 보고서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하도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이곳이 서울인지 머나먼 이국 땅인지 헷갈리는 것 같다. ‘아니, 또 저런 감동 과잉형 인간이야?’ 하는 표정까지 살짝 내비친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나도 아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녀가 터키, 그중에서도 페티예에 정착한 건 3년 전. 여행을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소개하겠지만 코디네이터 엄상욱 씨도 그렇게 무작정 눌러앉은 케이스다. 그럼 나도 이참에…? 아무튼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왔다가 패러글라이딩 회사의 직원이 된 셈이다. 엄청난 용기다. 고국에는 가족도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건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헥토르 입장으로 보면 낮잠을 자다가 홍시 하나가 벌린 입으로 떨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 그녀가 큰 도움이 됐을 건 안 봐도 비디오고.

다시 한번 미스터 헥토르를 소개합니다!! 그는 끝내 패러글라이딩 값을 받지 않았다.

하필 이 동네에 정착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대답이 간단하다. “여기가 가장 따뜻해서요” 삶이 무척 추웠던 모양이다. 터키말은 전혀 몰랐는데 살면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녀 역시 헥토르가 한국인들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수수료를 포기하고 한국 청년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한단다. 그렇구나. 최소한 동포 말은 믿어야지.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며 떠난 딸이 느닷없이 낯선 땅, 그것도 시골 한구석에 틀어박혔을 때 부모 심정은 어땠을까.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친구 딸들은 다 시집을 가는데 넌 뭐하느냐고 하세요. 그러다가도, 거기에 자리나 잘 잡아놓으라고….” 그녀의 부모님 속내도 좀 복잡한 게 틀림없다. 이곳에 계속 있을 거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 “여기가 속 편해요” 그렇지 뭐, 속 편하면 곳이 고향인 게지. 살던 땅으로 돌아간다고 누가 정착자금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까 헥토르에게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몇 가지를 물어본다. 욀뤼데니즈에는 패러글라이딩 사업을 하는 업체가 9개 있다고 한다. 5개는 고정적으로 성업 중이고 나머지 4개는 ‘생겼다 망했다 이름을 바꿔서 다시 시작했다’의 반복이란다.

욀뤼데니즈 해변.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잔잔하다.

가까이 가보면 모래가 아니라 이런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해변을 거닐다


바바산에 길을 닦고 패러글라이딩의 기반을 마련한 건 관공서였다고 한다. 물론 입장료를 받고 관광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한국인마다 신기하다는 듯 반복하는 질문에 약간 짜증나는 기색도 없진 않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극구사양이다. 조금 조르면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손사래를 친다. 실력부족인가? 터키사람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말이 통하는 한국인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다니.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겠지. 그거야말로 존중받아야할 프라이버시. 몰래 한 장 찍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깨끗하게 포기한다. 헥토르는 다큐팀의 패러글라이딩 비용을 끝내 안 받는다. 인터뷰에 응해주고 여기저기 안내도 하고 직원들 일당도 나갔을 텐데. 고마운 일이다. 설령 고도의 장삿속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고마운 걸 ‘속 보인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헥토르의 사업이 번창해서 한국 청년들에게 좀 더 많이 베풀기를 기원하면서 끝내 이름을 묻지 못한 그녀와도 작별을 한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욀뤼데니즈 해변을 탐색해볼 차례. 얼마나 아름다우면 지중해 최고의 해변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을까. 헌데 여기도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에구, 어디 가나 그놈의 돈.

해변에 세워둔 구조물 사이로 지나가는 배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산, 바다, 숨은 배...

욀뤼데니즈는 ‘죽음의 바다’ ‘고요한 바다’ 라는 뜻이다. 물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 나온다는 잔혹동화 같은 얘기는 아니고, 죽은 듯 잔잔한 바다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말 잔잔하긴 하다. ‘X물에도 파도가 친다’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한 호수도 기본적인 물결이 있는 법인데. 파랑보다는 초록에 가까운 바다는 한없이 투명해서 속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2km 정도 길게 뻗은 백사장에는 아직도 피서객들이 많다. 눕고 엎드리고 뒤집고, 오븐 속의 생선처럼 몸을 태우기에 여념이 없다. 물이 깊지 않아서인지 노인들도 많다. 그나저나 이렇게 살만 태우고 놀면 소는 누가 키우나. 일중독자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사장은 모래가 아닌 작은 돌들로 이뤄졌다. 엄격한 의미에서 백사장이 아니라 백석장(白石場)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고운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이 생각난다. 비가 많았던 지난여름엔 얼마나 썰렁했던지.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기 어렵겠지. 백사장을 지나 블루 라군(blue lagoon) 쪽으로 향한다. 라군은 모래언덕 등에 의해 바다와 격리된 호소(湖沼)를 말한다. 일반 호수와 다른 건 지하에서 해수가 스며들거나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가 있어 염분농도가 높다. 일종의 바다호수인 셈이다. 이쪽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다호수' 블루 라군.

해먹을 흔들어 주는 아빠. 잠이 들어도 끈은 놓지 않는다. 그게 '아비'다.

 

블루 라군을 아십니까

블루 라군 하니 ‘푸른 산호초’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블루 라군’이 생각난다. 브룩 쉴즈(Brooke Shields)의 백치미에 가까운 청순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지. 또 영화 속의 섬과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나저나 브룩 쉴즈는 지금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1965년생이니 40대 중반이 넘었고, 배우로서는 환갑이 지난 나인데….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고 있다. 이곳 역시 영화 속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답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온함을 더해준다. 해변을 벗어나 느린 걸음으로 홀로 걷다가 나무 그늘로 들어가 잠시 몸을 기댄다. 저만치 해먹에 아이를 재워놓고 흔들어주는 젊은 아빠가 보인다. 아빠는 아이가 깰까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조그만 소음에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정지된 풍경에 그 작은 그림 하나를 더하니 세상이 느닷없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욀뤼데니즈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조선소가 눈에 띄어 들러 보기로 한다. 숙박하고 있는 호텔과 멀지 않은 곳이다. 말이 조선소지 노천에서 목선을 만드는 곳이다. 목선이지만 건조 중인 배는 제법 커서 30m는 충분히 될 것 같다. 골조를 세우고 송판을 배의 모양에 따라 곡선으로 만들어 붙이는 방식이다. 그 큰 배에 단 두 명이 달라붙어서 망치질을 하고 있다. 쯧쯧, 저 배는 언제나 바다로 나가볼까.

이 큰 목선에 두어 명이 올라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저 배는 언제나 물 구경을 해보나.

터키는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조선산업 역시 원시적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중해를 품에 안고 천하를 오시했지만,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튀르크족이 이 땅을 정복한 뒤에는 배고 바다고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페티예의 조선소는 이 동네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한다. 그래봐야 가내공업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3곳뿐이다. 우리가 들른 곳이 그나마 가장 규모가 크고, 다른 두 곳은 배를 만들기보다는 수리하는 정도다. 부자들은 배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배를 만드는 나무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온다. 잠시 뒤 쉬는 시간인지 목재를 자르고 켜던 인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는다. 배 위에서 망치질을 하던 사람들도 내려와 합류한다. 예외 없이 차이를 마신다. 앞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터키사람들의 차이 사랑은 유별나다. 차이가 없는 터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루의 시작도 끝도 차이와 함께한다. 보통 하루에 10잔 이상, 많이 마시는 사람은 20잔까지 마신단다. 한 시간에 한 잔씩 마신다고 하면, 차를 마시기 위해 네 시간만 자야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직접 끓이기도 하고 주문해서 마시기도 하는데 가격은 비교적 싼 편이다. 그래도 500원씩만 쳐도 하루 20잔 이상을 마시면 살림이 거덜 날 판이다. 그래서인지 여럿이 모인 곳에는 대개 차이를 끓일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다.

나무를 곡선형태로 만들어 붙이는 형식으로 배를 짓는다.

수리를 위해 대기 중인 배들.


터키인들의 차이 사랑


어느 동네를 가든지 차이를 파는 차이하네(Cayhane)나 차이에비(Cayevi)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심에서도 야외 찻집인 차이 바흐체시(Cay bahcesi)가 곳곳에 있다. 일터에서도 어김없이 차이를 마시는데, 쉬기 위해 차이를 마시는 게 아니라 차이를 마시기 위해 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터키의 차이는 19세기 후반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전해져 왔다고 한다. 차이라는 말은 중국의 차(茶)에서 왔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녹차가 발효되면 우롱차가 되고 거기서 발효가 더 진행되면 차이가 된다. 차이를 더 발효시키면 홍차가 된다. 그래서 차이는 엷은 홍차 맛이 난다. 기호에 따라서 설탕을 적당히 넣어서 마시면 된다. 난데없이 차이 얘기가 길어졌지만 터키를 이야기할 때 차이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차이와 비슷한 것으로 짜이가 있다. 인도나 네팔 등에서 마시는 밀크티를 말한다. 그 동네 발음이 ‘짜이’에 가깝다는 것이지 이것도 ‘차이’가 원음이다. 이름이나 뿌리는 같지만 제조법은 많이 다르다. 냄비나 주전자에 소량의 물로 홍차를 끓여낸 뒤 우유를 부어 장시간 우린다. 이후, 설탕을 넣어 맛내기를 한다. 우유가 들어가는 게 차이와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짜이를 파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차이 한 잔 하실까요. 저 붉은 색의 유혹이란.

조선소 인부들의 휴식시간. 자세히 보면 모두 차이를 들고 있다.

차이를 마시던 인부들이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시커먼 차이 주전자에서 한잔을 따라준다. 잔은 자신이 마시던 걸 물에 대충 헹군 것이다. 사양을 미덕으로 삼는 한민족의 후예답게 손사래를 몇 번 쳤지만, 인심을 미덕으로 삼는 튀르크족의 후예답게 쉽사리 물러날 자세가 아니다. 터키 말을 알아야 구체적으로 사양이라도 하지. 물론 내가 차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니, 그 맛에 은근히 반해서 휴게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 때도 난 차이를 마시곤 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도 커피 옆에는 늘 차이 주전자가 놓여있기 마련인데 난 망설임 없이 차이를 선택한다. 사양한 것은 물론 체면 때문이다. 길바닥 체질인 내가 언제 찬밥 더운밥 가렸던가. 못이기는 체 홀짝거리며 한잔을 마셨더니 이 남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른 또 한잔을 따라준다. 어라? 이러다가 차이로 배를 채우겠네. 얼른 입에 털어놓고 늙은 노새처럼 헤벌떡 웃으며 잔을 넘긴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이다. 그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는다. 원래 터키인들은 잔이 차면 곧바로 채워주는 것이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나처럼 헤프게 웃지 말고 차 스푼을 찻잔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된다.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보지 않는 이유

나뭇잎을 뜯어먹는 개. 저렇게 키우면 사료값 안 들어서 좋겠다.

아무튼 이렇게 타인에 대해 별 경계도 없고 인심도 좋은 게 바로 터키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언가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이 아니었던가.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나눔의 인심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산업화 현대화 도시화라는 ‘화’자 돌림의 괴물들이 온 국토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아무데나 주저앉는 바람에 톱밥이니 흙이니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데 바닥에 사지를 펴고 늘어져 있던 큰 개도 느릿느릿 따라 일어난다. 이 나라의 동물들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천국이 따로 없다. 나를 전송이라도 하려고 일어난 줄 알았더니 커다란 화분에 가서 간식이라도 먹듯, 나뭇잎을 아작아작 뜯어먹는다. 이 동네 개들은 밥 대신 잎을 먹고 사나? 그럼 신선개? 밥값은 따로 안 들어서 좋겠다. 한국에서는 헛소리 하는 사람에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고 하는데.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빙 돌린다. 그러면서 "problem"이란다. 머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아무리 봐도 미친개는 아닌 듯한데…. 에이, 아저씨, 전요…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가 더 의심스러워요. 호기심 많은 이곳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 하고 있으면 와서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거리낌 없이 씨익~ 웃는다.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 넘어진 배를 보았다. 홀로 넘어진 배는 홀로 일어서지 못한다.

노인과 그런 미소를 주고받는데 마침 근처의 모스크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 전국에는 모두 7만7000여 곳의 모스크가 있기 때문에 어느 궁벽진 곳에 가도 이 소리를 피할 길은 없다. 며칠 듣다보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새벽에도 아잔소리 때문에 잠을 깨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아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일손을 멈추고 모스크로 가는 건 아니다. 하긴 하루에 다섯 번 씩 쫓아다니다가는 언제 일을 하나. 배를 만드는 인부들도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아잔소리를 듣는 순간, 믿음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터키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층에서 기도하는 게 금지돼 있다고 한다.(전 이슬람권이 그런지는 못 물어봤다) 메카를 향해 절을 할 때, 여자 뒤에 있는 남자들이 ‘나쁜 생각’을 품어 정신이 혼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 씨는 나쁜 생각이라고 표현했지만 엉큼한 생각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 이건 남녀차별이야? 여성 보호야?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들도 그런 생각을 하나. 이럭저럭 저녁 시간이 가까워온다. 시내로 보충 촬영을 나가는 다큐팀과 헤어져 지척에 있는 호텔까지 걸어간다. 페티예에서의 마지막 밤은 홀로 고적하게 보내볼 생각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유령도시' 카야쾨이

페티예로 가는 길

페티예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문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해변이 나타나고, 그 해변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늦여름의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들은 고향에 온 듯 정겹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조금 넓은 도로로 접어든다. 곳곳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짙푸른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언젠가 직접 운전해서 이 길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원지대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륙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 중간에 주유소 겸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간다. 터키의 기름 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휘발유 값을 적어놓은 입간판을 보니 리터당 3000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차는 무척 많다. 그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윈도우브러시 하나 공짜로 받은 적 없지만 괜스레 뿌듯하다. 터키인 가이드는 쓸데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볼멘소리다. 어딘들 안 그럴까.

보드롬에서 페티예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만난 비치. 9월말인데도 여름이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창밖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다. 잠시 뒤 멀리서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페티예 시내로 진입한다. 페티예는 전날 묵었던 보드롬보다 큰 도시로 인구도 5만 명이 넘는다. 물론 여름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10만 명이 넘게 북적거린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산다. 이왕 일행이 됐는데 정식 상견례 겸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K가 바람을 잡았다. 나로서야 술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호텔에 도착하니 아홉시. 부지런을 떨어야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을 거 같다. 호텔 이름은 ‘Marina Vista’. 역시 자그마한 호텔이다. 어제 묵었던 곳과 달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페티예에서는 일정이 많아 이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야외식당으로 가니 닭요리가 나온다. 뷔페식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찜닭 같기도 하고 백숙 같기도 하고…. 점심에도 닭고기를 먹었는데, 전생에 터키 쪽에 사는 닭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경구가 어디 틀려본 적 있던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닭 아니라 돌을 구워 와봐라. 내가 외면하나.

고속도로의 휴게소.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터키의 주유소. 기름값이 우리나라보다 꽤 비싸다.

술병을 전멸시키다

식사를 하는데 인근 음식점에서 느닷없이 함성이 터진다. 저 정도 함성이면 축구중계를 하는 게 틀림없다.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말 그대로 ‘광적’이다. 터키의 프로축구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고 크다. 1959년부터 리그가 시작됐고 팀은 1부 리그에 18팀, 2부에 20팀이 있다. 축구경기장은 늘 도가니처럼 뜨겁다. 열정적이고 급한 국민성이 그곳에서라고 달라지랴. 야유나 욕설이 난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명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곳곳에서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음식점마다 응원열기로 들끓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하는 팀의 깃발을 휘날리며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벌였던 그 ‘광란의 밤’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터키인 가이드 이믿음 씨 역시 축구광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축구중계를 하는 시간에 일을 하자고 하면 표정이 헐크처럼 변한다. 식사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해 본다. 호텔에서 준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이파이 표시. 우와! 고마운 것. 이것저것 체크하고 회사 일을 몇 가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시작한 김에 카톡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불러볼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거긴 새벽. 단잠을 깨울 수는 없으니 포기.

Marina Vista 호텔의 수영장.

페티예에서 3일동안 묵었던 Marina Vista 호텔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준비됐다는 전갈이 온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따지고 보면 사흘밖에 안됐다) 술 욕심이라면 이태백도 울고 간다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 라크(LAKI)라는 술이 손을 자꾸 끌어당긴다.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뒤 향료를 첨가해 만든 술이다. 잔에 따르면 무색투명한데, 거기에 물을 붓는 순간 우유처럼 부옇게 변한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사자의 젖이란 뜻의 아슬란스투라고 부른다. 터키 아니면 감히 어디서 사자의 젖을 먹어보랴. 중국술이 그렇듯이 독특한 향이 있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의 젊은 친구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대부분 찡그리며 내려놓는다. 향도 향이지만 젖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내가 언제 맛보고 도수 봐가며 술을 마셨더냐. 술이라면 온갖 미련을 떠는 나, 결국 그 한 병을 혼자 몽땅 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너스로 맥주 몇 캔 추가. 이 정도면 차라리 걸신이다. 한두 명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날 사온 술병들을 대부분 자빠트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새벽 2시. 어제 잠을 설쳤으면 정신 좀 차릴 만하건만 또 일을 저질렀다. K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닷가니 ‘개닭’은 안 울 것 같다. 몇 시간이라도 자봐야지.

카야쾨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기념품가게. 산 사람은 또 저렇게 살아가는 법.

카야쾨이 마을로 올라가는 길.

카야쾨이로 가다

새벽, 알람에 의지해서 힘들게 눈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천근만근 속은 울렁울렁이다. 과음한데다 기껏해야 네 시간 밖에 못 잤으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저리 아름다운데 내 몸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뒤뚱거린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아무리 찾아봐도 해장국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나. 이것저것 챙겨들고 식탁으로 갔지만 쓰라린 뱃속은 그 무엇이라도 거부할 태세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내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한다는 자가 그리 술에 욕심을 내다니. 체력을 비축하고 시간을 잘 나눠 써야 하는 여행자에게 과음은 금물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탐할 바에야 여행자보다는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면 된다. 애당초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에 맞게 즐기면 될 터이다. 이런 땐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의 철칙을 배신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야외식당은 바다에 이어 테라스처럼 만들어놓아서 풍광이 그만이다. 지중해의 아침은 괜히 배신감을 느낄 만큼 아름답다. 곤두박질친 햇살이 자맥질을 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비늘들을 잔뜩 건져 올린다. 그 사이로 날렵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지중해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돌집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꽤 높은 건물이었던 듯.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카야쾨이(Kayaköi)로 향한다. 일명 ‘유령도시(ghost town)’로 불리는 이곳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주민들이 떠난 뒤 폐허가 된 마을, 사람 대신 빈집을 지키는 돌덩이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곳. 카야쾨이의 슬픈 사연을 말하려면, 거창하게도 세계1차 대전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잠시 다리쉼 하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보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터키의 주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한쪽에서 구경하다 떡이나 얻어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쇠약해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의 선택은 엉뚱하게도 독일 쪽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게 어디 한 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의 패망과 함께 사돈 따라 장에 갔던 터키 역시 집도 절도 잃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떼같은 젊은이들 수십만 명을 잃은 채…. 결국 패망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게 바로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고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반도만 달랑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실질적 주권조차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마을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교회로 가는 길.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이 대목에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맹한 돌궐의 후예 튀르크족이 아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분노는 곧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된다. 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다. 조금 복잡해지니까 이 ‘위대한 독재자’를 해부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자. 저항이 만만치 않자 연합국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세브르조약을 파기하고 터키의 요구를 반영한 로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923년 7월4일 새 조약은 체결됐지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도 이날 시작된다.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연합국은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스탄불이 있는 유럽 쪽 영토를 포기하고 에게해 섬들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탄불을 갖는 대신 인근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할 것인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고심 끝에 섬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터키 연안의 모든 섬들은 그리스 영토가 된다. 곧 이어 그리스 땅에 살던 터키인은 터키로, 터키 땅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진다. 터키에 살고 있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강제로 터키를 떠나야 했고, 그리스에 있던 40만 명의 터키인이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1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교회의 내부.

손가락을 꼽는 정도의 셈법으로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각자 제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그들은 그리스국민, 터키국민이라는 이름의 ‘국민’이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연인이었다. 누대로 살아왔으며 낳고 자란 땅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가가 뭐 해준 게 있다고 태를 묻은 땅을 떠나라는 것인지. 그들은 울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다. 노인도 아이도 예외 없이 그 행렬 속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폐허가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카야쾨이다. 고증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서는 BC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5천년이나 이어온 마을이다. 터키니 그리스니 하는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사라지기 전, 1922년까지는 3000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2개의 교회와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 가서 살아야 할 나라, 그리스 말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뒤 아주 오랫동안, 카야쾨이 출신의 그리스 노인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땐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했던가. 죽기 전에 낳고 자란 땅을 보고 싶었겠지.

부천에서 온 아가씨. 혼자 여행하는 용기가 아름다워 오래 바라보았다.

용감한 그녀를 만나다

차가 카야쾨이로 들어서면서, 원(怨)이 응결된 곳 특유의 음산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비탈 가득 회색빛 빈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다. 그들은 애당초 왜 넓은 땅을 두고 저 비탈에 집을 지었을까. 유령마을 입구에 두어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와 머플러 등을 판다. 남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자리가 있어 이들은 먹고사는구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석조주택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돌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페티예대지진도 견뎠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어? 동양인 여자다. 우리 일행은 아닌데, 누구지? 도시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동양인을 이 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아니, 동양인이 아니라 분명 한국인이다. 아, 핏줄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직감을 믿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이리 신기할 데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 골짜기에 와 있다니. 한OO. 26세. 부천 거주.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모두 해외여행에 쓰기로 했단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터키였다. 그래, 잘했네. 세상이 학교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시간은 집 안에도 저만한 나무들을 키워놓았다.

돌담을 뚫고 자란 무화과나무.

혼자 다니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원래는 일행이 있었단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서 만나 같이 떠났는데 몇 곳을 거쳐 오면서 각자 다니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버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외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씁쓸달콤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17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 앞에서 서울에서 온 남자와 부천에서 온 여자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긴 얘기를 나눈다. 내 나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만났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 인연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돌담 사이 오솔길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평생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길. 또 홀로 되어 언덕을 오른다. 깃대가 우뚝 솟은 저 건물은 학교였을까? 아니면 촌장이 살던 집? 공회당? 혼자 걸으며 상상 속에 빠진다. 작은 집도 있고 제법 큰 집도 있다. 저쪽, 아슬아슬한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저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빈 집은 슬픔이다. 슬픔만 차 있는 게 싫었던 걸까. 시간은 집 안 곳곳에 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심어 키워냈다. 방이었던 곳에서도 부엌이었던 곳에서도 홀로 열려 익어가는 무화과들, 강제로 떠나야했던 그리스인들의 눈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도마뱀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들이 마을의 주인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눈에 띈 식물. 에델바이스인 줄 알았다.

난 유령을 만나고 온 걸까?

내친 김에 마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곳곳에서 낯선 식물들을 만난다. 에델바이스 같기도 한 이 식물의 이름은 무얼까? 어느 집 벽에서 놀던 무지갯빛 도마뱀이 낯선 나그네를 향해 잔뜩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마을의 주인이구나. 너희들은 강제로 쫓겨나지 말고 오래 오래 이곳을 지키렴. 옛날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을 골목길. 이제는 오솔길이 되어 나그네의 허허로운 발길 아래 게으르게 누워 있다.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다. 이리 저리 둘러보지만 잔뜩 야윈 내 그림자만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문득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다. 원래 이곳이 세상이었거늘. 뒤따라 올라왔던 사람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나 보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듯 낯설다. 그 낯선 이름이 유령처럼 웅웅웅 울며 빈집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온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렵다. 그대로 돌 위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목욕이라도 한 듯 땀에 젖었다. 과음과 수면부족 때문이겠지? 아니, 그게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정말 저곳에서 유령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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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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