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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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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샤클르켄트 협곡의 바위들. 저 틈으로 길이 있다.

멀리서 본 협곡. 두 개의 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산이 갈라져 협곡이 생겼다.

 

샤클르켄트 계곡으로

페티예에서 카쉬(Kaş)로 가는 길에는 트레킹의 명소 샤클르켄트(Saklikent) 계곡이 있다. 도시를 탈출한 버스는 신나게 시골길을 달린다. 버스를 운전하는 하산도 한적한 도로로 나오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휘파람이라도 나올 것처럼 밝은 표정이다. 하산은 결혼을 몇 달 앞둔 예비신랑이다.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늘 휴대전화를 끼고 산다. 이스탄불에 있는 약혼녀와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다. 믿음 씨는 그런 하산을 자꾸 놀린다. “너 그러다가 나중에 큰 문제 생긴다여행객을 태우고 며칠씩 돌아다니다 보면 아내와 떨어져 있는 날이 많을 텐데, 결혼한 뒤에도 지금처럼 전화를 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긁힐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산은 그런 말에 꿈쩍도 않고 틈만 나면 애인과 통화를 한다. 사람에게 적절치 않은 표현일지 몰라도, 이 청년은 갓 잡아 올린 꽁치처럼 날렵하고 싱싱하다. 성격도 깔끔해서 늘 하얀 셔츠를 입고 차도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해 놓는다. 늦은 저녁에 일행을 내려주고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아침에 약속시간이 되면 정확히 버스를 대기시킨다. 운전사들이 먹고 자는 숙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긴 여행을 하다보면 불편하거나 불쾌할 일도 생길 텐데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집 규수인지 시집 한 번 잘 가는 셈이다.

협곡에 들어가기 전 상가. 냇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다리. 저곳은 수심이 무척 깊다.

길 옆에는 올리브나무와 옥수수밭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곳곳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관광입국을 실현하기 위해 온 나라에 삽을 들이댄 것 같다. 그래도 제발 마구잡이 개발은 하지 말기를. 자연의 선물은 한번 망가뜨리면 억만금으로도 되사기 어려운 법이니. 집집마다 심은 석류나무들이 농익은 여인네의 가슴 같은 탐스런 열매를 매달고 있다. 조금 더 달리자 드디어 샤클르켄트. 페티예에서 남동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페티예 여행자들이 꼭 들러 가는 코스기도 하다. 샤클르켄트 협곡은 황소처럼 길게 누운 타우르스 산맥이 중간에 뚝 끊어지면서 생겨났다. 마치 누가 거대한 칼로 내리친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전설이나 신화 몇 개쯤은 품고 있을 법하다. ‘옛날에 옛날에 하늘에서 큰 칼을 가진 장군이 내려와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산이 쫙 갈라지면서 그 자리에 알 하나가…' 하지만 그런 전설이나 신화를 얘기하는 사람도 써놓은 곳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옛날 리키아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 살던 시절에는 분명 전설이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튀르크인들이 들어와 살다 보니 전설조차 땅속에 묻혀버린 게 아닐까. 낯선 땅에 정착해서 삶터를 일구는 사람들에게 남의 전설 보다는 한 끼의 밥에 더 관심이 갈 수도 있을 테니.

깊은 곳은 물이 퍼렇지만 우윳빛이 섞여있다.

협곡으로 들어가다

계곡에서 나온 물은 인근의 큰 하천인 에센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협곡의 길이는 총 18km. 수량은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갈수기인 여름에는 물이 거의 없고 가을부터 불어나기 시작해서 많을 때는 사람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다. 그래서 수량이 많을 때나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혼자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도 한다. 잘 알다시피, 계곡 트레킹은 물속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옷을 입어야 한다. 춥지 않은 계절엔 짧은 반바지가 좋다. 신발은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된 샌들이 좋은데, 만약 준비가 안됐으면 근처 가게나 식당에서 유료로 빌릴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긴 바지 등산복에 여행 내내 신고 다닌 간이샌들을 신고 들어가기로 한다. 엄상욱 씨는 그런 복장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싸구려 샌들임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란) 고개를 흔들지만, 무식과 깡다구로 뭉쳐진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리고 만다. 정 안되면 맨발로 걸으면 되지. 여름의 끝인데도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수량이 제법 많고 우유처럼 뿌옇다. 석회질이 많이 섞여서 그런 게 아닐까. 저런 물은 미끄럽기 쉬운데. 그래도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야.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전의를 불태워본다.

곳곳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저 다리를 내려서면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가 시작된다.

이곳도 예외 없이 입장료를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절벽 옆으로 나무다리가 이어진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사람, 트레킹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연신 엇갈린다. 조금 더 올라가니 매점이 나온다. 거길 지나자 냇물이 기세 좋게 흐른다. 저 내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량은 걱정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입구에는가이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협곡에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라고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바지를 둥둥 걷어붙이고 물에 발을 살짝 넣어보니 냉기가 짜르르 흐른다. 온 몸의 세포들이 움찔, 아우성친다. 하지만 물이 차다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 저벅저벅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느닷없이 청년 하나가 나타나더니 뒤를 따라온다. 딱 보니 동네청년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부유해 보이는 유럽인도 많은데 하필 왜 나를 따라오지? 그가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 약간의 무안과 약간의 뻔뻔함을 적절히 버무린 미소도 가끔 버무려 넣는다. 영어도 제법 한다. “100m쯤 올라가면 폭포가 있는데 풍경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 카메라는 얼마냐?” 여보게 청년, 나도 자네처럼 관광지에서 자랐다네. 거기서 세상의 쓴 맛을 배운 대신 함부로 호주머니를 열지 않는 법도 알게 되었지. 선수끼리는 이러는 게 아니네.

 

트레킹의 시작. 저 물을 건너는 게 첫 시험이다.

나를 따라온 동네 청년

청년은 관광객을 안내해주고 푼돈을 챙기는 걸 취미 겸 업으로 하는 게 틀림없다. 특별히 안내가 필요한 곳도 아닌데 장사가 될까? 아무튼 자네는 사람 잘못 골랐네 그려. 선구안을 좀 길러야지. 돈 많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을 잡아야지, 하필 나처럼 젊고(?) 튼튼한데다 돈까지 없는 최악의 카드를 선택하다니. 이번에도 카메라가 문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큰 카메라를 가졌으니 푼돈 정도야 쉽사리 내놓지 않으랴,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린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그대의 선택일 뿐. 난 그가 뭐라고 하던 묵묵부답으로 걸음을 재게 놀린다. 물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차고 더 탁하고 더 깊다. 느닷없는 냉기는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금씩 깊어지니까 약간의 공포감마저 인다. 하지만 맞은편에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왜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는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을까. 수량 등을 감안한 물리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처음에 쉽지 않은 고비를 넘기게 해서 경각심을 북돋워줄 생각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버릴 옷, 처음부터 젖게 만들어 옷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하려 했는지도.

우윳빛 물이 쏟아지는 계곡. 이 곳을 지나가면 검은 빛 물이 흐른다.

아무튼 수량이 많을 때나 비가 오는 날은 함부로 뛰어들 건 아닌 것 같다. 트레킹도 좋지만 목숨을 걸 필요야 있나.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따라오던 청년은, 내가 반응이 없자 몇 번 아쉬운 눈초리를 던지더니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다. 몇 리라라도 쥐어줄 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호주머니를 열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지갑은 편하지 않다. 지금의 내가 그런 처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겐 동정심마저도 사치가 될 때가 많다. 유료화장실을 안 가려고 소변조차 참는 게 여행자다. 동정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특이한 건 터키를 돌아다니는 내내 거지를 못 봤다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장애인도 저울로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거나 엽서라도 들고 나와 팔지, 그냥 적선해 달라는 경우는 없었다. 우연히 내 눈에만 띄지 않은 걸까. 아니면 거지가 없을 정도로 나누는 사회가 된 걸까. 청년도 가버렸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곡탐험이다. 처음 깊은 물을 건너고 나니 그 다음엔 수월한 코스가 이어진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길을 헤치면서 걸어가다 보니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진다. 빛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본다. 황금색 햇살이 연신 쏟아져 내리는데 그 끝은 어디쯤인지 아득하다.

하늘에서는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들어온다.

위기의 순간을 맞다

바닥엔 시커먼 진흙이 깔려있어서 물은 탄광촌의 그것처럼 시커멓다. 물과 대조적으로 바위는 하얀 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바위 군데군데에 낙서를 해놓거나 진흙 손도장을 찍어 놔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냥 보기만 하면 어디 부러지나? 그 중에 한자로 써놓은 낙서가 있길래,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 봤더니 다행히 간자체가 섞였다. 먼 이국 땅에 가죽 대신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중국인이 다녀간 모양이다. 제발 세계 어느 곳의 유물에서도 한글로 된 이름 석 자는 볼 수 없기를. 앞으로 나갈수록 오가는 사람이 적어진다. 처음에는 다큐팀 카메라맨도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꽤 오래 함께 걷던 K도 중간에 돌아갔다. 이젠 우락부락한 청년들만 씩씩한 걸음으로 오고간다. 으슥한 곳을 지날 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홀로 걷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저 젊은이들 중에 누군가가 안 좋은 마음을 갖고 달려들면 나는 속수무책이다. 빈 몸으로도 힘겨운 길을 카메라 장비가 든 배낭을 메고 땀에 절어 걸어가는 자그마한 동양인 사내.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드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혹시 다른 마음을 먹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른 시선을 비킨다. ,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허약하구나. 두려움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거늘.

본격적으로 트레킹 코스에 접어들었다. 검은 물이 흐른다.

나름대로 수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궁핍한 처지가 되니 의심부터 하려드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읽는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 길이 많이 험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간에 돌아선다. 나도 진퇴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어느 책에선가 샤클르켄트 협곡을 끝까지 가봤다는 한국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 때문에 더욱 오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18km를 끝까지 가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는 데까지는 가봐야 할 것 아닌가.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겠다는 욕심도 한몫을 했다. 가도 가도 비슷한 길의 연속이다. 위기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한 순간 몸이 허청, 기울더니 깊은 웅덩이에 쑥 빠지고 만다. 물이 탁하기 때문에 깊고 얕은 걸 구분할 수 없던 게 화근이었다. 급하게 균형을 잡는 바람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옷은 몽땅 젖었다. 속옷까지 물들이는 흙탕물의 축축한 감촉. 그 와중에도 카메라를 보호하려는 본능은 두 손은 높이 치켜들게 만들었다. 허리 가까이까지 차는 물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허둥대는 사내.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스운 꼴이다.

하얀 바위에 써놓은 낙서와 손 도장. 한자 이름이 눈에 띈다.

여음곡(女陰谷)’에서 돌아서다

길이 이곳밖에 없을까? 웅덩이를 빠져나와 차분하게 살펴보니 바위 뒤쪽으로 샛길이 있다. 그럼 그렇지. 마음이 흐트러지니 쓸데없이 허둥대다 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왕 옷도 버렸는데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절경을 구경할지 알아? 혹시나 혹시나여태껏 걸어온 인생길과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너무도 닮았다. 길은 갈수록 험해진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물을 피해 돌아가다 또 한 번 아뜩한 일이 생긴다. 뭔가 적으려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첩이 사려졌다. 조금 전까지 메모를 하고 꽂아두었는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행 내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수첩. 내 여행의 전부가 사라진 것이다. 어디쯤에서 흘린 걸까? 물에 떠내려갔거나 진흙에 묻혀버린 건 아닐까? 다스리기 힘든 공포가 머리를 타고 내려와 등골을 지나 발끝까지 훑는다. 세상이 다 아득하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지난 며칠이 고스란히 지워지는 것이다. 기록하는 걸 낙으로 삼는 자가 기록할 기회를 잃는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절감한다. 차라리 지갑을 잊어버리는 게 낫지.

마지막으로 돌아서며 '여음곡'이라 이름 붙여준 거대한 바위.

허둥지둥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아무리 둘러봐도 수첩은 없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 조급해도 안 된다. 높은 바위를 낑낑거리며 넘어왔던 기억이 나서 그곳을 다시 힘들게 올라간다. ! 있다. 내 수첩이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도 만난 듯 부둥켜안는다. 남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내겐 둘도 없는 환희의 순간이다. 온 몸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이젠 정말 내려가야겠다. 시간도 꽤 흘렀고, 무엇보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또 미친병이 발동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 될까? 마음 약한 나는, 고집스런 또 다른 나에게 두 손을 들고 만다. 없는 힘까지 끌어내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번엔 수첩을 꼭꼭 여며둔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 멈춘다. 바위 사이로 좁은 틈이 있긴 한데, 아무리 봐도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바위들로 구성된 골짜기의 구조가 참 특이하게 생겼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 골짜기는 오늘부터 여음곡(女陰谷)’이야. 그럴 듯하다.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거의 다 내려올 무렵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행과 만난다. 초로의 한 사내가 내 얼굴을 유심하게 보더니 느닷없이 곤니찌와를 외친다. 곤니찌와? 이 시간에 무슨 곤니찌와야, 그리고 난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고생 끝이라 그랬을까, 돌아오는 길은 이렇게 평탄했다.

코리언이란 말에 더욱 반가운 표정이 된 이 아저씨, “아프다, 아프다를 연발한다. 아프다고? 당신 아픈 걸 왜 내게 말해. 나도 여기저기 아파 죽겠거든. 그런데 얼굴엔 아픈 기색이 조금도 없다. 가만, 아프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예쁘다구나. 어디선가 한국인을 만나 한마디 배운 말이 예쁘다인데, 그걸 아프다로 기억한 모양이었다. 이런 때 그냥 지나가면 안 되지. 저만치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예쁘다라는 발음을 확실히 교육시킨다. 그리고 아저씨. 그건 인사가 아니라 ‘pretty’‘beautiful’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거든요. 한국식 인사는 안녕하세요라고 해요. 앞으로 곤니찌와 같은 천박한 말은 쓰지 말고 안녕하세요라는 우아한 말만 쓰세요. 알았지요? 에구, 오지랖도 넓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뛰다시피 협곡을 빠져나온다. 출발지점까지 오니 일행들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걷다가 돌아간 K를 빼고는 협곡을 제대로 들어간 사람이 없단다. 난 다들 따라오는 줄 알았지. 그렇다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담.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홀로 걷는 길.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고 섭섭했던 마음을 싹 지워버린다. 이래봬도 난, 당신들이 못 본 거 다 보고 온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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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 화요장터 들어가는 길. 관광 삼아 나온 외국인들도 많다.

화요장터 초입.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나와 있다.

거대한 규모
에 놀라다

927일 화요일. 지중해는 아직 여름의 잔양(殘陽) 아래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서울은 지금쯤 가을 기운이 완연할 텐데. 쏟아지는 햇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대지에 박힌다. 오늘은 페티예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신세진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다. 며칠 지나면서 다큐팀 스텝들과 제법 친해졌다. 작업과 행동반경이 다르다고 오고가는 정이 없으랴. “저희 때문에 깊이 봐야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 기특한 인사를 해주는 젊은 친구도 있다. “책을 쓰시게 되면 저를 주인공으로 해주세요. 감자튀김 좋아하는 투덜이PD." 이런 인사도 한다. 그럼, 그럼.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있나.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의 한국인 우대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 사람들은 한 달에 1, 2달러만 내면 장기체류비자를 내줘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거지요이거 제법 쓸 만한 정보다. 하긴 부자에게 이 나라는 천국이다. ”휴양지 호텔은 하루 숙식비가 80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해요. 그것만 내면 세끼 식사는 물론 술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거든요유럽인들 중에는 호텔서 꼼짝 않고 먹고 마시고 수영을 하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래, 돈만 있으면 어딘들 천국이 아니더냐.

고추도 각양각색

옥수수를 보니 고향생각이

가지도 가지각색.

오늘의 종착지인 카쉬까지 가기 전에 몇 가운데 들러야 한다. 맨 먼저 들를 곳은 페티예 화요장터. 매일 열리는 바자르와 달리 말 그대로 화요일마다 열리는 장이다. 우리의 5일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장터는 수량이 제법 많은 큰 내를 낀 넓은 공터에 펼쳐져 있다. 우리네 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상상 밖으로 크다. 터키인,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간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한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포장이 쳐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와 있다. 물건의 양과 종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입구 쪽에는 채소와 과일 등이 주로 진열돼 있다. 사과복숭아자두수박토마토멜론에구, 숨차다. 따뜻한 기후,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여름 과일, 가을 과일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일은 모두 다 있어서 정겹기까지 하다. 채소도 마찬가지. 마늘감자양파배추고추호박강낭콩오이상추김장을 담가도 되겠다. 상추를 보니 느닷없이 삼겹살 생각이 나고 호박을 보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고추의 모양도 각양각색, 가지의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덩어리 치즈와 가루 치즈.

올리브 파는 아저씨.

치즈와 올리브 가게에서


조금 안쪽엔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덩어리로 된 것도 있고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큰 놈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치즈의 세계에도 양반 상놈이 있는지 고급치즈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놓았다. 그래야 잘 보관된단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장터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 생긴 것만 조금 다르지 고향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아따, 그러지 말고 일루 점 와봐. 싸게 줄 테니께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워매, 뭐가 요래 비싸대유. 좀만 깎아줘유물건 값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터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뭔가 적고 있으니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동네도 별 살 것도 없이 사돈 따라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돋보기가 없는 게 한이라는 듯, 내 수첩에 코를 박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이 글씨 아세요?” “……????”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놈의 호기심이 죄지 아저씨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정말 사돈을 만난 건지 장터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다에 빠진 아저씨들도 있다. 옆집 강아지 새끼 몇 마리 낳은 얘기까지 해야 길을 비켜줄 모양이다. 그렇다고 큰 소리 치거나 짜증내는 사람은 없다.

곡물 파는 아저씨. 전형적인 튀르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 보고 "챔피언"이란다.

올리브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점잖게 생긴 주인이 쓰레받기 같은 걸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주문에 따라 올리브를 담아주는 것이다. 올리브도 종류가 무지하게 많다. 수확한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우리의 장아찌처럼, 소금이나 레몬으로 간을 해서 시장에 낸다. 맛을 본다는 핑계로 먹어 보지 않으면 장터가 아니지. 살 것도 아니면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본다. 우웩!! 역시 짜다. 호텔서 한번 당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이 선천성 기억상실증이란. 이번엔 곡물 파는 아저씨 가게. 여기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있다. 명색이 촌놈인데도 아는 건 쌀달랑 하나? 아니다. 고춧가루도 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이 전형적인 터키사람이다. 그 옛날 몽골초원에 살던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나면서 적당히 피를 섞은 뒤, 아나톨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얼굴 아닐까? 아주머니는 남편 보고 챔피언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무슨 챔피언이란 걸까? 무얼 잘하면 마누라한테 저런 소리 듣고 살까? “어이구, 이 화상아. 잘할 생각 접어두고 허구헌날 싸돌아댕기지나 말어.“ 왜 요즘 환청이 이렇게 자주 들릴까?

엄마를 조르더니 도넛 하나 얻었다. 그러나 또 조를 태세.

멜론을 준 아저씨.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요?

멜론을 얻어먹다


근처 가게에서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대여섯 살 쯤 된 아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 저 녀석 봐라. 안 먹어도 퉁퉁 불어있구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이의 손에 큼직한 도넛이 쥐어진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먼 길,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면 풀빵도 먹고 싶고 사탕도 먹고 싶고그냥 돌아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당신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측은하고도 야속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가 손자의 군것질거리와 바꿀 수 있는 건 눈물밖에 없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그 속죄 언제나 다 하고 이 소풍을 마칠 수 있을까. 그렇게 혼을 내려놓고 서 있는 나를 과일가게 아저씨가 부른다. 아이 손에 들린 도넛이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멜론 한 조각을 쑹덩 잘라서 손에 쥐어준다. 아무래도 멜론을 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동양에서 온 거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하긴 여행 내내 수염 한번 깎은 적 없고, 걸친 옷이라 봐야 추레하기 그지없으니, 그렇게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인사 하나는 제대로 차려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요? 멜론을 우물거리며 과일채소전을 벗어난다.

전통과자 5상자를 사면 1상자는 거저 준단다.

빗자루. 참 곱게도 엮어놨다.

빵장수 아저씨.

세제설탕휴지치약칫솔생활필수품 가게를 거쳐, 젤리에 가까운 터키 전통과자를 파는 곳을 지난다. 다섯 상자를 사면 한 상자는 공짜로 준단다. 그래도 전 안사요. 어느 집 앞에는 곱게 짠 빗자루들을 세워놓았다. 옛날 우리네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겼다. 솜씨도 좋지. 너무 고와서 방을 쓸기에는 아까울 것 같다. 좀약이나 바퀴벌레 약을 파는, 70년대가 생각나게 하는 난전도 있다. 그럼 그렇지, 왜 없겠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빵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움이 울컥 솟는다. 어릴 적 풀빵이나 호떡을 팔던 아저씨를 만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산품공예품 가게들이다. 가방 가게에는 물건도 다양하게 많고 다른 곳보다 손님도 많다. 터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죽공예가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신발가게도 샌들부터 운동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갖춰놓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쳐 공예품가계로 들어가 본다. 부채나 보석함 등 온갖 공예품들이 그걸 만들었을 사람의 정교한 솜씨를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품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각종 등()이나 터키 특산물인 물담배 파이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내가 들어서자 종업원 청년의 눈은 카메라에 가서 꽂혀버린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눈치다.

각종 유리공예품들.

공예품 가게의 사장님.

공예품 가게의 사장과 종업원


자꾸 와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찍어볼래?” 하며 손에 쥐어줬더니 입이 쭈욱 찢어지면서 카메라를 들고 온갖 폼을 잡는다. 찍힐 놈이 폼을 잡아야지 왜 네가 폼을 잡니? 또 다른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제 동료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걸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한 방 찍어보자 이거지? 그래, 카메라 든 친구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나도 덥석 어깨동무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야. 잠시 뒤 들려오는 셔터소리. 뒤에 조명이 너무 강해서 분명 시커멓게 나왔을 거다. 아무렴 어떠랴. 그런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자니, 카메라를 내게 넘겨준 청년이 곁에 와서 들여다본다.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정말 못 말린다. “, 이 글자 알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제 팔을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인다. 일본어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친구 생각으로는 같은 동양인이고 글자가 낯설긴 마찬가지니 같은 나라 말인 줄 알았나보다. “그건 일본 글씨야. 난 한국 사람이거든. 코리아라고 들어는 봤나?” 영어와 한글로 코리아라고 써주니 뭘 좀 알아들었는지 수첩에다 자기들 말로 코리아라고 써준다. 에구, 귀여운 것. 앞으로는 한국을 많이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문신은 지우고 한국 만세!’ 이런 걸로 새로 새겨봐.

내 카메라에 '눈독'을 들였던 청년. 잘 생겼다.

공예품 가게 사장의 이름은 야곱이이라는 장돌뱅이다. 가게 규모가 하도 커서 말뚝 박고 장사하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매일 매일 장 따라 옮겨 다닌단다. 그는 다큐팀이 자기네 가게를 들러준 걸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코리언이라니까 곧바로 “Brother”가 터져 나오면서 특유의 잃어버린 형제를 상봉한표정을 짓는다. 이런 식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러 번 겪어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야곱은 한국인에 대한 우의로 스텝들이 산 기념품 값을 끝내 받지 않는다. 가게를 나오는데 사진을 찍었던 청년이 따라 나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Nice Korea”를 연발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어 문신은 지워. 터키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국인들을 환대할까. 진심일까? 장담하건대 진심이다. 어딜 가나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시라고 부르는 터키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두 나라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인연의 뿌리를 찾자면 제법 아득한 과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리 땅이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 돌궐족은 튀르크제국을 세워 몽골 땅을 호령했다. 그때 튀르크 제국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수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튀르크의 무한 카간이 사망했을 때는 고구려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신발 가게.

한국인을 형제로 부르는 이유

고려 때에는 튀르크계의 일족인 위구르족이 개경에서 살기도 했다. 그때 지어진 야한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과 터키가 진짜 피를 나눈건 물론 6.25전쟁 때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1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는 유엔군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돌궐의 후예들은 백병전에 특히 능해서 일당백의 위용을 보였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터키군 1여단은 예상을 깨고 전멸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착검을 한 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을 맞아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터키군은 한국전을 통해 750여명이 전사했고 3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키인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코레 가지라고 부른다. 코레 가지들은 한국을 조국이라는 뜻의 바탄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뜻의 코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악기점 주인 아저씨.

타국에서 희생한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데, 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고마워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자신이 없다. 터키는 멀리 있는 그렇고 그런 나라일 뿐이고,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행 내내 환대를 해주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2002년에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더욱 감격한 건 한국과 치른 3, 4위전이었다. 한국인 응원단이 펼친 터키국기, 그리고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박수에 그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들이 바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형제의 나라는 다시 한 번 뼛속 깊이 다시 각인됐다. 우연이었든, 의도한 일이었든 경기에 지면서도 박수를 쳐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변하지 않는 우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니.

아으, 셔!!! 석류 주스를 짜고 있다.

즉석에서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원탁 위에 진열된 것들이 바로 새총이다.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공예품 가게를 나와 옷 시장 입구에서 전통악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Happy birthday”를 연주하며 유혹한다. 에이, 아저씨 사람 보실 줄 모르네. 살 사람을 꼬여야지요. 악기 이름은 듀라’. 박수까지 치며 함께 놀다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뜬다. 천변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우리가 장터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듯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다. 석류주스를 갈아 파는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신 음식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저만치 도망가는 나지만 예쁜 색깔이 자꾸 유혹한다. 혹시 달콤하지 않을까? 그래, 도전!!! 내 인생에서 혹시역시로 바뀌지 않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울면서 석류주스를 마셨다. 무려 3리라나 투자하고서. 장터 날머리에서 트럭을 세워두고 나무로 공예품을 깎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수저머리빗홍두깨참 솜씨도 좋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새총. 어릴 적엔 겨울마다 저걸 들고 들이고 산이고 얼마나 쏘아 다녔던지. 터키 아이들도 저걸 갖고 노는구나. 동질성은 곳곳에 숨어있다. 이제 장구경도 끝났고 페티예를 떠날 시간이다. 안녕! 페티예. 3일 동안 행복했어.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처음 읽는 분은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에게해. 바다의 깊이에 따라 색깔이 다양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하다


비행장의 가로등들이 조금씩 존재를 지워가더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점령한다. 시간은 늙은 개처럼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데 공항 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경우는 없는 법. 어느덧 0820, 보드룸(bodrum)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이 다 차고 출발 예정시간 0840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을 안한다. 50분이 지나도 안내방송 한마디 없다. 그러다가 아홉시가 조금 넘으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활주로도 이 시간은 러시아워인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날아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보드롬이다. 잠시 뒤 수런수런 하더니 기내식이 나온다. 국제선에서 먹은 게 아직도 뱃속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 여행자의 수칙,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둬라에 충실해야 한다. 살찌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채운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 지중해를 따라 가는 내내 이런 도시와 함께한다.


터키를 아십니까?

비행기는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한다. 맑은 하늘 덕분에 아나톨리아반도의 생생한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와 집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넓은 평야와 도시들이 스쳐 지나고. 짙푸른 바다도 간간히 동행한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긴 세월을 실타래 풀 듯 한 가닥씩 풀어본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터키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터키? 거기가 아시안가? 유럽인가? 여하튼, 축구는 좀 하더라고. 전에 한일월드컵 때 4강전에서 우리나라를 이겼잖아.” ‘축구는 좀 하는정도가 아니다. 축구광(?)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축구 열기 정도는 새발 의 피. 혹은 어떤 사람은 터키? 잘 알지. 6.25때 우리나라에 파병했던 나라잖아? 그 친구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한다던데크게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얘기는 더 이상 진전을 못 보기 마련이다.

보드롬의 바다. 실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얀 포말을 그리는 건 쾌속선.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터키의 10%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혼재된 땅,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가야 터키의 실체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터키는 동서양의 역사를 한 공간에 켜켜이 담고 있는 떡시루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을까. 유럽을 중심으로 기술된(혹은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적 안목 없이 배운 탓이다. 로마하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만 기억하도록 공부한 우리에게,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부르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지금의 터키였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게 로마 역사의 종지부라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에도 동로마가 1000년간이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비잔티움제국라는 이름의 포장에 가둬 그곳에서 로마의 이름을  탈색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유럽의 한 페이지는 상실됐다지우개로 역사를 바꾸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7대교회가 깃들었던,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땅이라는 사실도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기억할 뿐이다.

뱀처럼 흐르는 보드롬의 수로들.

차차 설명하겠지만, 현재 터키라는 국명으로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이 곳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인종이 거쳐 가고 숱하게 많은 국가가 명멸했다.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신석기 주거지 차탈화위크,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 중 하나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트로이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등에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이 된다는 미다스왕의 프리기아왕국도 이곳에 있었고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될 때까지 이 땅에서 성쇠를 거듭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터키를 가야한다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로 보면 문화재급이다.

보드롬공항. 한 여름이면 이곳이 미어진단다.


보드롬공항에 도착하다

맛있는 음식도 단번에 먹으면 체하는 법. 멀고 먼 나라의 역사공부를 어찌 하루아침에 다 하랴. 785000로 남한면적의 7.8배에 달하는 이 땅, 한 때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품었던 이 땅이 간직한 긴 얘기는 조금씩 나눠서 소화할 일이다. 기내식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입이 떡떡 벌어진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렇게 징그럽게 파란 바다가! 저것이 바로 터키블루의 실체? 투명한 잉크를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쪽빛 바다가 한없이 달려 나가고 그 위에서는 작은 배들이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홀한 그림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수로들은 환영이라도 본 듯 현실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한다. 1030. 보드롬 공항은 비교적 한산하다. 아직 태양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토해내고 있지만 휴가철 피크가 지났기 때문이리라. 짐을 찾은 뒤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와 합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을 태우고 다닐 버스다.

올리브나무. 지중해 지역은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올리브 열매들. 언뜻 보면 대추처럼 생겼는데 서서히 자색으로 익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릉이나 산마다 낮게 엎드린 낯선 나무들이었다. “사막지대인가?” 누군가 터트린 혼잣말을 터키인 가이드이드가 냉큼 수정해준다. 모두 올리브나무란다. 에게해와 지중해는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가이드는 올리브의 효용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터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60, 여자는 65세라는데 지중해 쪽에 사는 남자들은 100세 이상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그게 다 올리브 덕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보통 200~300년을 산단다. 수확은 보통 3월과 9~10월 두 번씩 한다. 수확철에는 터키 동부 사람들이 품을 팔려고 몰려온다. 하도 좋다고 강조하길래, 호텔에서 여러 번 절인 올리브에 도전해봤는데 내 입에는 영 아니었다. 얼마나 짠지. 그냥 명대로 살다 가는 수밖에.

언덕 위의 하얀 집들. 파란 하늘-바다와 어울려 환상적 풍경을 연출한다.

올리브나무도 나무지만 단연코 눈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하얀 집들이었다. 집들은 주로 언덕에 터를 잡았는데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얗게 칠했다. 바다와 나무만 빼놓고 어딜 둘러봐도 하얀색이다. 하얀색도 어울려 있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곳 페인트 장사들은 간편해서 좋겠다. 하얀 페인트만 팔아도 되니. 처음엔 보기 좋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고 검은 색은 흡수하고.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이 그제야 떠오른다. 대부분 여름별장용 빌라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보드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날 같지 않다고 슬그머니 한탄이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은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유럽의 침실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을까. 인구 3만의 작은 도시가 여름만 되면 6만 명을 웃도는 인파가 북적거린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별장이든 터키인 고유주택이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언덕위의 하얀집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다.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보드롬 시내의 풍경.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보드롬성.

'바람의 언덕에 서다

보드롬에서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귬벳(Gumbet)이라는 곳. 해변을 포함한 지역 이름인지 언덕의 고유명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보드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다. 공항을 떠나 40분쯤 달려서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아! 하는 감탄사를 갈무리 하지 못한다. 둥그렇게 형성된 만()을 따라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들. 저만치에 십자군들이 세웠다는 보드롬성이 우뚝 솟아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려 깔깔거리며 자맥질을 한다. 수없이 일어났다 눕는 물비늘들이 보석처럼 황홀하다. 바다에서 올라온 한줄기 바람이 낯선 나그네를 기웃거리다 기어이 옷깃을 헤친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이 언덕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로 한다. ‘여기는 오늘부터 바람의 언덕이야제법 그럴싸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언덕 꼭대기에 허물어져 가는 둥근 건물들이 하얀 칠을 덮어쓴 채 서 있다.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들이란다. 그렇다면 풍차?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람의 언덕이라니까.

세월에 치여 이제는 쓸쓸히 스러져가는 언덕 위의 풍차들.

풍차방앗간 안쪽에서 본 하늘.

다큐팀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풍덩 빠져있는 사이에
,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풍차의 잔해가 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쏘아 다니는 체질이니. 언덕에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언덕 너머 반대쪽에도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펼쳐져 있다. 궁금했던 건물들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풍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월에 쫓겨 날개도 잃고 방앗간도 반쯤 무너져 버린 풍차들. 이제는 초라한 몸짓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풍차에게 보고 들었을 세월을 묻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언덕의 중간쯤에 낙타 두 마리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노인과 장년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부르는 소리가 헬로~’가 아니라 까메라~’. 아마도 거기 카메라 들고 설치는 놈, 이리 좀 와 봐라정도의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으로서 노인이 부르는데 안 가보면 도리가 아니지. 뛰다시피 내려가니 손짓 발짓으로 낙타를 찍으란다. 에이, 나중에 모델료 달라고 하려고?

낙타와 노인. 이 노인의 얼굴에서 고향 어른들을 보았다.

다큐팀의 여주인공을 태운 낙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노 페이~!!” 돈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찍기나 하란다. 그렇다면 사양할 내가 아니다. 카메라 셔터에서 불이 난다. 노인의 눈길이 내 카메라에 고정돼 있다. ! 혹시 내 카메라에 눈독을? 턱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역시, 세파에 닳고 닳아 의심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나그네의 억측일 뿐.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노인의 밭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피부흰 수염, 그리고 잇몸까지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 내 고향 땅의 어른들을 본다. 평생 땅을 뒤지며 농투성이로 늙어간 그들. 닮았다. 정말 닮았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말도 다른 그들이 내 땅의 그 장삼이사들과 닮아있다. 그래,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 이 노인도 낙타를 앞세워 관광객들의 푼돈이나 거두는 일이 천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 그런데 터키 말이라면 밥 줘소리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었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들은 “Where are you from”이 아닌 터키 말이 분명한데. “코리아라고 대답했더니 ! 꼬레, 꼬레하면서 반색한다. 그러더니 아예 노래 부르듯 꼬레를 반복한다. 이 아저씨, 한국을 정말 알긴 알고 이러는 거야?

벌거벗다시피 한 남녀가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여행 내내 물리도록 본 모습이다.

노인의 신명은 그게 끝이 아니다. 조금 뒤에는 아직도 바다풍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큐팀까지 불러올린다. “까메라, 까메라아예 자진모리 가락으로 넘어간다. 촬영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낙타 옆에서 진을 치고, 다큐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난생 처음 타보는 낙타 위에서 꺄아~ 꺄아~ 신이 났다. 이 정도 서비스를 하고도 정말 노 페이일까? 역시, 끝내 돈을 안 받는다. 말없이 낙타를 끄는 장년의 사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는데도. 대체 카메라의 위력이었을까? ‘꼬레의 위력이었을까? 사람들이 모여드니 또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그들이 난장 펼친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오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중년 남녀와 마주친다. 늦휴가를 온 유럽인들인 모양인데, 늦여름의 잔양이 그들의 몸을 붉게 붉게 태워놓았다. 그들과 스쳐 지난 나는 이국땅의 한낮을 허청허청 걷는다.

 

추천과 댓글을 잊지않은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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