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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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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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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카펫수선 아저씨. “훌리아! 톱카프 궁전에 가면 예니체리 나무라고 있다거든? 관계자에게 물어봐서라도 꼭 좀 찾아줘요.”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에 훌리아에게 신신 당부했다. 그녀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훌리아와는 그새 제법 가까워져서 반은 내 개인 가이드가 돼버렸다. 역시 나는 사람 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시라. ‘여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그녀도 예니체리는 알지만 예니체리 나무는 처음 들어본단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확인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예니체리 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일단 들어가 보면 감이 잡히겠지. 톱카프 궁전 앞에는 오늘따라 이상스러울 만큼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카펫 수선하는 아저씨가 근사해 보이길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눈길 한 번 주더니 말없이 바느질만 한다. 터키 사람이라고 모두 상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그래도 특별히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땐 그냥 찍으면 된다. 몇 마디 나눠볼까 하다가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가 있길래 부리나케 쫓아간다. 현장에서는 혼자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일단 매표소를 통과할 때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톱카프 궁전 앞의 기념품 가게. 1472년 착공해서 1478년 준공. 1856년 돌마바흐체가 지어질 때까지 3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 총 면적 70만m². 이런 이력을 가진 톱카프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아마 다섯 번 쯤은 와야 제대로 봤다고 큰소리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달쯤 머물면서 이 궁전만 연구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대문에 해당하는 커다란 문만 해도 세 개, 넓은 정원만 해도 네 곳이나 된다.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체하고 말 건 당연지사. 그래도 일단은 들어가 봐야 곰을 잡든 법을 잡든 하겠지. 첫 번째 문(황제의 문)을 지나면 제1 정원이 나온다. 흔히 예니체리 정원 혹은 예니체리 마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예니체리가 뭔지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하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터키 역사서를 읽다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유난히 가슴을 헤집었을 뿐이다.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긴장할 건 없다. 다 듣고 나면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예니’는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체리’는 그 달콤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병사’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병사’가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때 만들어진 술탄 직할의 직업군인을 바로 예니체리라고 한다. 전쟁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해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정예군으로 싸웠다. 톱카프 궁전의 첫번 째 문. 예니체리의 시작과 끝은 영광보다는 슬픔의 역사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잡힌 아이들과 점령지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 소년들로 주축을 이뤘다. 전쟁터에서 졸지에 부모와 헤어진 것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 낯선 땅으로 보내진 아이들.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늘. 이렇게 이스탄불로 데려온 아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일반 가정으로 보내 투르크 말과 이슬람에 관한 일상을 배우게 했다. 그 후 재능 있는 아이들은 궁정 일을 배우게 하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훈련부대'로 보냈다. 그곳에서 환관들의 감독 아래 6년 이상 엄격한 훈련과 무기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면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부대는 몽골군과 비슷하게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됐다. 재미있는 것은 부대 용어가 주방과 관련돼 있다는 것.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으로 불렀다. 부대장은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 소대 깃발에는 커다란 솥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깃발에 그려진 솥은 큰 상징성을 갖게 된다.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솥을 뒤집어엎었다. 거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듯, 뭔가 요구하는 도구로 솥을 활용한 셈이다. 그들은 특별한 군복을 입고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다른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콧수염 외에 다른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또한 영외 거주는 물론 초기에는 결혼도 금지했다. 예니체리 정원. 예니체리는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능력도 탁월했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6세기. 숫자도 1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여기까지였다. 뭐든지 문제는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 영향력은 커지고 늘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다 보니 자꾸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됐다. 또 초기와 달리 세습체제로 바뀐 것도 권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눈을 돌린 게 바로 정치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그 괴물의 입에 통째로 머리를 넣었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점차 이익집단화 돼갔다. 그에 비례해서 전투력은 약화됐다. 싸움판에서도 펑펑 나가떨어졌다. 배는 나오고 싸움은 못하는 일종의 괴물군대가 된 것이다. 그럴수록 무도함은 하늘을 찔러 술탄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결국 17세기부터는 끄떡하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살해하거나 자신들 입맛대로 갈아치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이 바로 마흐무트 2세. 참다못한 그는 예니체리를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했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니체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탕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뻔한 결말로 갈 차례. 톱카프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해 6월 14일과 15일 예니체리 반란군은 술탄의 군대에 밀려 자신들의 막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술탄은 막사에 포격을 명령했다. 15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반란군 막사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대부분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새삼스레 교훈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시신(혹은 머리라고도 한다)을 어느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예니체리 나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나무를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떠나, 아비규환 속에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들에게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영혼 중 하나가 내게 손짓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예니체리 나무는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훌리아가 괜히 미안해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 자르는 나무’가 있대요. 물 대신 피를 먹여 키웠다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됐어요. 이젠 포기할래.” 호러물이 그리워서 예니체리 나무를 찾은 건 아니라네. 병사들이 훈련을 했을 법한 마당에는 잔디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월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이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저들 중 하나겠지. 예니체리 광장의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 이레네.

 

사람들은 그 나무들 사이를 무심히 오간다. 잔디에 앉은 연인들의 얼굴엔 행복이라고 쓰여 있다. 저들에게 그 비극의 한 자락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떤 방식이든 생명은 늘 오고가는 것을. 두 번째 문을 통과하려면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한다. 아참, 자꾸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제1정원에서 놓치지 말고 가야 할 건물이 하나 있다. 왼쪽 나무그늘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아야 이레네(Aya irene). 성소피아 성당 이전에 세워진 초창기 교회의 하나로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다.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니카의 반란’ 때 불태워져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예니체리의 무기창고로 쓰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고깔모자 기둥이 2개 우뚝 서있는 두 번째 문을 지난다. 전에는 오로지 술탄만 말을 타고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도 영화도 덧없는 것. 지금은 땀에 전 동양 사내 하나가 배낭을 메고 그 문을 지난다. 문을 나서면 바로 제2정원. 다섯 갈래의 길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붓처럼 생긴 향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제2정원에는 대형 부엌이 있다. 궁전에서 일하는 5,000명의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예니체리들은 월급과 빵을 받을 때 궁전에 왔는데 이때 모든 빵은 무게가 같아야 했다. 만약 다를 경우 빵 만드는 사람의 손목을 댕강 잘랐다고 한다. 어디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예니체리와 관련된 얘기는 왜 이리 끔찍한 게 많지?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  여기에도 ‘술탄의 여인들’이 사는 하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번엔 하렘도 꼭 돌아보고 싶었지만 역시 여의치 않다. 별도로 티켓을 끊어서 관람해야한다. 티켓이 문제가 아니라 30분마다 그룹을 지어 입장해야 한다. 그만큼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훌리아를 찾아서 물어보니 일정에 하렘 관람계획은 없다고 한다. 허탈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닐 때 가장 난감한 점이 이런 것이다. 조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포기하는 수밖에. 세 번째 문인 행복, 혹은 지복의 문을 지나 터덜터덜 제3정원으로 걸어들어간다. 오늘 관람객 정말 많다.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빽빽한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대 유람선이 들어왔단다. 바다를 낀 도시니 크루즈로 오는 관광객도 많다. 하필 그들과 톱카프 궁전에서 만난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여기가 바로 인종 전시장? 제3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오른쪽에 있는 보석박물관. 내겐 쓰린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다가 경비원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물러났던 그곳. ‘스트로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사진 좀 찍는다고 보석이 경기를 하냐?’ 어쩌고 꿍얼거린 기억이 있다. 거길 들어가기 위해 뙤약볕 아래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보석에 대한 원초적 열망일까? 아니면 남들이 서니까 얼떨결에? 보물박물관 위쪽이 바로 의상 전시실이다. 옛날에는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역대 술탄의 옷들을 전시한 곳이다. 제2정원. 톱카프 궁전의 세 번째 문. 보석박물관 앞의 긴 줄.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옷과 비슷한 터키 전통의상이 전시돼 있다는 기 록이 생각나 슬그머니 방향을 바꾼다. 고구려와 터키인의 조상 돌궐 사이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할지 알아? 마침 줄을 선 사람도 없고 한가한 편이다. 그렇다면 둘러보고 가자. 하지만 들어가서 첫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보석박물관의 ‘그’와 똑같이 생긴 경비원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온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치사해서 안 찍고 만다. 그래도 한 장 찍은 건 안 지울 거지?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나무그늘에 의지해 더위를 식힌다. 유난히 얼굴을 가린 아랍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히잡은 차라리 애교스러울 정도다. 아예 전신을 까만 통옷으로 덮은 여성들이 ‘Blackfish’처럼 정원을 유영한다. 심지어 한 여성은 까만 통가죽 옷을 입었다. 이 더운 여름에? 아주머니, 그러다 땀띠 나십니다. 평생 갇혀 살아야했던 하렘의 여인들이 오버랩 된다. 궁전에 갇혀 살든 검은 옷에 갇혀 살든 자유를 저당 잡힌 건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종교 가 어떻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헌데 좀 이상하다. 요즘 터키 여인들은 시골이나 아주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을 빼놓고는 히잡도 잘 안 쓰는데.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그나저나 그녀들이 입은 게 대체 차도른지 부르카인지 알 수 없다. 역시 책으로 배운 지식의 한계다. 무슬림 여성들의 몸을 가리는 옷이 한 가지인 줄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  고구려 벽화의 옷과 비슷하다는 투르크족의 전통 의상. 우선 여성들이 밖에 나갈 때 머리에 쓰는 가리개를 히잡이라고 한다. 스카프나 두건과 비슷한데 얼굴과 가슴까지 가리는 것도 있고 머리에만 쓰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정작 구분하기 어려운 건 머리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망토 형 통옷이다. 페르시아 말에서 온 차도르(chador)는 이란 등의 시아파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옷을 말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입는 검은 망토는 아바야(abayah)라고 부르고 아라비아반도와 베두인족 일부 여성들이 입는 옷은 부르카(burqah)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뭐가 차도르고 뭐가 부르카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또 옷의 형태까지 다른 건지 이름만 다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전에는 눈 주변에만 작은 구멍이 트여져 있거나 베일을 댔는데 요즘은 짙은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 참 아이디어다. 멋도 내고 가리겠다는 목적도 달성하고. 어떤 여성은 DSLR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자기들끼리 수다도 떤다. 그래. 다를 게 무어람. 세상도 궁금하고 멋도 부리고 싶은 똑 같은 여성이겠지.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해보니 정면에서 셔터를 누르기가 민망하다.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익명 속으로 가두는 수밖에. 일부러 역광을 안고 서서 뷰파인더 안에 그녀들을 불러낸다. 내 사진 속에서 그녀들은 검은 실루엣일 뿐이다.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일가족 중에 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불쑥 묻는다. 톱카프 궁전의 제3정원. 

이슬람 고유 의상을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성.

 

“Where are you from? Japan? Core?” Japan 다음에 China? 라고 묻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얼른 Core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그러는 너는 어디서 왔니?” “나? 제노바” 으음, 제노바. 굉장히 멀리서 왔네? 아니지? 난 지금 이스탄불에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멀리서 온 거고 이 친구는 이웃에서 온 거지. 해외를 다니다 보면 가끔 그렇게 공간 개념을 분실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그의 아내다. 그녀는 부르카인지 챠도르인지로 전신을 완전 싸매고 있다. 예의 선글라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내게 말을 건 남편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을 했고, 부인을 따라가는 아이들 셋 역시 평범한 옷차림이다. 어찌 보면 부조화의 극치다. 제노바에도 저렇게 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무슬림이 살고 있나? 아니면 아랍의 무슬림이 제노바에 가서 임시 거주 중일까. 유럽인과 아랍인은 쉽게 구분이 가능한데 이 친구는 좀 헷갈린다. 궁금한 걸 푸는 건 나중문제고 이렇게 특이한 가족을 만났는데 그냥 말 수 있나. 얼른 사진 한 장 찍어두자. 또 다른 걸 참견하려는 사내를 불러세운다. “이 사람들 몽땅 네 가족이냐?” “응. 맞아.”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No!! 절대 안돼.”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 뭐야, 장난하는 거야? 말이나 걸지 말지. 조금 전에는 실실 웃으며 간이라도 빼줄 듯하더니, 사진을 찍는다니까 그렇게 펄펄 뛰냐? 에라이! 치사한…. 헌데 아직도 저런 남자가 있구나. 이 더운 날 통옷을 입고 버티는 아내에게 애들 셋을 혼자 맡기다니. 남자는 슬리퍼 끌고 마실 나온 사람처럼 이 참견 저 참견 다하며 지나가는데 여자는 아이들에 짐까지… 구경이고 뭐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 하긴 한국에도 저렇게 간 큰 남자들이 없지는 않더라. 남들 걱정 그만 하고, 좀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봐야지. 카메라를 바투 쥐고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돌진한다. 하나, 둘 셋…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지하저수지 예레바탄에서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땅에라는 뜻이고 Batan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70m, 높이 9m8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성소피아 성당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동네는 무엇을 지을 때마다 석재를 고대 신전에서 뽑아다 쓴 모양이다. 그러니 출신지에 따라 생김새가 모두 다를 수밖에. 이것도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해야 하나? 바깥세상은 땀을 흘릴 만큼 더운데 안으로 들어서니 으스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원하다. 조명을 받은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지하세계에서 일평생을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조금만 나가면 태양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곳의 진짜 명물은 메두사의 머리다. 맨 안쪽으로 가면 돌로 조각한 2개의 메두사 머리를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뺨을 바닥에 댄 채로, 또 하나는 아예 머리를 땅 쪽에 박은 채 서 있다. 저들은 왜 저런 모습으로 저 곳에 있는 걸까. 1984년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됐다는데, 지금도 왜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듯, 마법에 걸린 메두사의 형상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이야기만 그럴 듯하게 뒷받침해줄 뿐이다. 되짚어 나오다보니 입구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 CD와 엽서 등을 판매하고 있는데 판매대에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대여섯 개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 한글도 있다. ‘수공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것이겠지. 우와! 심봤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 한국인들이 5~6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거 좋은 일인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그녀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톱카프 궁전.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이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다. 트램이나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한다면 또 얼마나 번거로울까. 트램이 천천히 오가는 길을 따라 톱카프 궁전으로 간다. 이곳은 한 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영토로 거느리며 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의 황제들이 살던 궁전이다. 1453년 우여곡절(배를 끌고 언덕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 2. 남이 지어놓은 궁전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새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세 대륙을 지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혼으로 둘러싸여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이 자리였다. 1472년 착공해서 1478년에 준공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저 궁전이라고 불렀는데 후대로 오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름이 톱카프로 굳어졌다. 70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투르크 족 전통의 흔적이 배어 있다. 마치 유목민들이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게르를 치는 것처럼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많을 땐 이곳에 5000명 넘게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을 지나서 만나는 곳이 제1정원. 이곳은 개방 공간이다.

톱카프 궁전 내부

톱카프 궁전을 거닐다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다시 걸음을 옮겨 지복의 문을 지나니 제3 정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황제 알현실이 있다. 오스만의 황제들은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고 외교사절도 이 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호박만한 금덩이라도 전시돼 있나? 얼른 쫓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가 바로 보물 전시실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이후 약탈을 당할 일이 없었던 터키는 각종 유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세계 최대의 에머랄드로 장식된 단검, 황금 의자, 보석이 촘촘히 박힌 주전자, 86캐럴짜리 다이아몬드 등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온갖 보물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조품이 아니고 전부 진품이라니 그 가치가 얼마며 이만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던 황제의 권세는 대체 얼마만큼 컸던 것인지. 문제는 워낙 보석이 많으니 어지간한 건 그저 돌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든 내가 들어서면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광을 시작하더니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셔터를 누르려는데, 병아리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내 팔을 잡는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셔터 소리에 보석이 경기라도 일으킨다더냐? 워낙 보석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데다가 박절한 경비원의 눈초리가 싫어 건성으로 돌고 그냥 나온다. 3 정원을 벗어나니 제4 정원이 이어진다. 이곳은 황제와 가족들의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는데 왜 이곳에 궁전을 지었을지 바로 알아차릴 만큼 전망이 좋다.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이 코앞에 있다.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세 갈래로 나눠진 바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에미뇌뉘 선착장에 이르자 해협을 오가는 유람선과 광장을 오가는 인파, 그리고 해변에서 낚시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늦여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철없는 강아지처럼 길 위를 뒹굴뒹굴 구른다. ! 옷 버린다. 그 모습이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조금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이곳은 두 개의 해협과 하나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 전 다녀온 톱카프 궁전이 있는 쪽, 즉 오른 쪽은 마르마라해이고 앞으로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흑해로 연결된다. 그리고 저만치 갈라타 다리가 보이는 왼쪽으로는 골든혼이라는 바다의 지류가 뻗어있다. 굳이 말로 된 지도를 그리는 이유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히기 위해서다. 이스탄불은 이렇게 바다에 의해 크게 세 쪽으로 나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 속한 구시가지, 그리고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다음이 아시아다. 지금까지 봐온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 지하궁전, 톱카프 궁전 등 대부분의 이름 있는 유적은 구시가지에 있고, 구시가지에서 골든혼 위의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신시가지가 시작된다. 신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야 아시아에 닿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시가지에서 직접 배를 타고 아시아로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무슨 도시가 이렇게 복잡한지 원. 갈라타 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다리는 아래 위 모두 인파로 북적거린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갈라타 탑에서 본 이스탄불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탑 아래에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 역시 이스탄불 전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겠지. 꽁무니에 서서 한 참 지난 다음에야 입구의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11층 높이의 이 탑은 10층까지만 엘리베이터가 가고 맨 위층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10층은 전망대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 들어서 있다. 발코니 난간에 서면 누구나 아! 하는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이스탄불 시내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 조금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 저곳은 골든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보스포러스 해협 저기 어디에서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들어갔다지. 하지만 지금은 산도 언덕도 흔적조차 없다. 대신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등 조금 전에 다녀왔던 건물들도 저만치서 손을 흔든다. 우리의 남산타워처럼 최고의 전망대다. 문제는 난간이 너무 좁고 관람객은 너무 많다는 것. 줄을 서서 천천히 도는 게 아니라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이 마구 섞여서 엉덩이를 비비고 새치기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친 몸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얼른 다시 내려온다. 갈라타 탑을 빠져나와 광장의 벤치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스탄불에서, 아니 터키에서 내 공식 일정은 끝났다. 이젠 공항으로 가야한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허전함과 안도감이 전신을 엄습한다. 게 바로 시원섭섭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정말 여기서 끝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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