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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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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흐맛강'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9.17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10] 토흐맛강에서 보낸 한나절18

 

토흐맛 강이 있는 다렌데.

다렌데로 가는 길에 만나는 산들은 황량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이 지역엔 10년 전보다 눈()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막화는 분명 아닌데. 신기한 게 하나 있다. 아나톨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삭막한 땅 천지다. 그런데 이 나라는 7,0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대국이다. 비옥한 토지는 대체 어디에 숨겨놓은 것일까. 다렌데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 이곳은 말라티아주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읍이다. 말라티아 시내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토흐맛강 주변에 형성된 유원지 덕분. 버스에서 내리니 조그만 광장이 인파로 북적거린다. 마침 인근의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마친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활기가 넘쳐서 좋다. 동네 한 가운데로 토흐맛강이 힘차게 흐른다. 물은 석회 성분이 섞인 듯 뿌연 색을 띄고 있다. 산은 나무 한 그루 품지 못하는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올까? 아마 지하에서 솟은 물이겠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강변마을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니, 음식점 빼면 별게 없다. 커다란 모스크와 우뚝 선 미나레트가 차라리 이질적으로 보인다. 강 위엔 엄청나게 큰 수차가 돌아가고 있다. 지금은 구경거리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물방앗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밀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그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빵집이 생기고 동네 사람들은 아침마다 빵을 사러오고. 사는데 없으면 안 되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풍경으로 남거나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 사람이라고 안 그럴까.

 

토흐맛 강.

소문주 바바 사원의 미나레트.

점심식사로 나온 송어구이.

풍경이 좋은 강가에 앉았지만 내게는 어떤 음식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곳 역시 송어구이가 나온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송어요리와 다른 점은 양념을 안 하고 구웠다는 것. 아마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요리인 모양이다. 귀한 손님은 아무나 하나? 내 위장에 앉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는 꿈쩍도 안 한다. 소화제를 먹고 응급조치를 취해보지만 나아질 기색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물이나 마시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정말 걱정되는 건 체력이 급격이 떨어지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데 타격이 크다는 것. 차차 나아지겠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강 건너편에는 잘 지어진 정자들이 서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들과 소풍을 온 사람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불을 피우느라 연기와 싸우고 있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불을 피우는데 영 재주가 없는 가장도 있다. 30분 째 부채질을 하지만 여전히 연기에게 쫓겨 다니기 바쁘다. 저러다 저 가족 굶는 거 아냐? 공공기관에서 세운 정자들은 이용료를 받지 않는단다. 이곳 사람들은 좋겠다. 유원지에 돗자리 하나 까는데도 돈을 내느니 마느니 싸워야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에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코레가지의 손자와 만났다. 이름은 이 나라에 흔한 메흐메트. 15살의 고등학생이다. 물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들 중의 하나다.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온 할아버지는 18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토흐맛 강의 수차.

토흐맛 강에 소풍 나온 연인들.

한국전에 참전한 '코레가지'의 손자.

아이가 코레라는 나라를 어찌 알 것이며, 설령 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60년도 더 지난 과거에 그 나라에 가서 싸웠다는 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아이에게는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더 크다. 하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산골에서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한 촌부의 손자를 만난다는 게 우연에 기대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아이와 악수를 나누고 훌리아를 불러 통역을 부탁한다.

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우리는 영원한 형제다.”

느닷없이 형제라고 우기는 낯선 사내가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아이와 헤어져 소문주 바바 박물관으로 간다. 소문주 바바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테니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문주 바바(Somuncu Baba)는 사람의 이름이다. 투르크족의 정복 전쟁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오스만 제국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훗날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가 된 그는 긴 여행 끝에 부르사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는 빵을 구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선행이 계속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빵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보시만큼 큰 보시가 어디 있으랴. 그의 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원을 짓고 박물관을 만들었다.

 

 

소문주 바바 박물관에 전시된 빵.

소문주 바바 사원의 아름다운 뜰.

소문주 바바 사원 내부.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이 나라, 아니 최소한 이 지역 사람들이 소문주 바바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땅에서 꽃피운 그리스-로마에 비해 문화나 인물의 빈곤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터키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는 지도 짐작이 간다. 박물관은 소문주 바바를 기리는 사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모스크는 지금까지 본 어느 사원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서 토흐맛강을 내려다보는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파란 물빛을 자랑하는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소문주 바바의 후손이 지금도 이 모스크의 이맘(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선도하는 사람)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겠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는 작지만 무척 짜임 새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소문주 바바의 유해를 안장한 목제 구조물이 있고 그 앞에서 무슬림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여인의 간절한 얼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는 건 실내에 토흐맛강의 근원이라는 수원(水源)이 있다는 것.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말 물이 흐르고 있다. 또 옆방에는 소문주 바바의 후손들을 안장한 무덤도 있다. 모스크에서 나오니 말라티아 주정부에서 토흐맛강 래프팅을 준비했다고 한다. 래프팅? 물속에 들어가는 거잖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건 아무리 재미있어도 무효. 나만 남기로 한다.

 

 

한국-터키인 혼성 래프팅 팀.

인공폭포.

내가 래프팅을 안 한다니 훌리아도 그냥 남겠단다. 오해할라.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남은 게 아니라 원래 그녀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다. 이렇게 말하면 더 변명 같은가? 래프팅 팀은 강의 상류로 올라가고 훌리아와 나는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래프팅 팀이 내려오는 걸 볼 수 있는 위치다. ! 이제 청춘(?) 남녀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에 남았으니 뭔가 비밀스런 일이라도 일어나야 되지 않을까? 훌리아가 내 곁으로 바투 당겨 앉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호오! 비밀? 좋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훌리아는 자꾸 뜸을 들인다.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러나?

그만 뜸들이고 얼른 말해봐.”

사실은요.”

, 그래. 그래.”

저 폭포짝퉁이예요.”

? 그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거야? 멋대가리 없이 험악하게 생긴 바위산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하나 있다. 소문주 바바 사원 바로 옆인데 음식점에서 바로 코앞이다. 나는 처음 보는 순간 물을 퍼 올려서 내려 보내는 가짜 폭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훌리아가 아주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듯이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난 또. 애가 순진한 거야? 키들거리고 있는데 저만치 래프팅 팀이 내려온다. 모두들 흠뻑 젖어있다. 거봐. 안 가길 잘했지.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찾아온 꼬마손님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일행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동네 아이들과 사진놀이를 하면서 논다. 너도 나도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아우성이다. 제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가져온 녀석들도 있다. 맨 처음엔 초등학교 고학년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려와 수줍게 모델 노릇을 하더니 잠시 뒤에는 수염까지 듬성듬성 난 녀석들이 와서 줄을 선다. 웬 아저씨들? 나이를 물어보니 열여덟 살이란다. 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내려온 학생들이다. 녀석들~ 아들벌도 안 되는 것들이 수염은 많아가지고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까 길에서 살구 팔던 녀석이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갓 따온 오이처럼 싱싱한 표정들이다. 방학이고 뭐고 공부에 치여서 파김치가 다 돼 있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무튼 동네 아이들 다 모였다. 하나 둘 셋 카운터에 들어갔다가 카메라 배터리 떨어졌다고 집으로 달려가는 녀석, 전화 왔다고 셔터 누르는 걸 잠깐 유예해 달라는 녀석. 가지각색이다. 아무렴 어떠랴. 행복한 시간이다. 이번엔 이 동네 사는 유치원부터 초등학생들이 다 모였다. 녀석들 줄 세우는 것도 일이다. 제대로 됐나 싶으면 딴전 피우는 놈, 저는 왜 안 찍어주느냐고 징징거리는 녀석. 얌마!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야 찍지. 그걸 못 기다리고 그냥 집으로 가는 녀석은 또 뭐람. 작은 동네에 이렇게 아이들이 북적거리니 활기가 가득하다. 이 아이들이 터키의 미래다. 사진을 다 찍고 강을 따라 가는 협곡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내가 래프팅은 싫어도 트래킹은 자신 있다.

 

동굴 수영장.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강가의 화덕.

지난해 폐티예에서 카쉬로 가던 길, 샤클르켄트 협곡에서 트래킹을 하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수첩을 잃어버렸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번엔 물속으로 가는 길이 아니니 위험할 게 없다. 경치는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답다. 길도 안전을 고려해서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노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다. 강변에는 음식을 해먹으며 쉴 수 있도록 정자를 세워두었다. 물론 이용료는 없다. 정자에는 전기 콘센트까지 달아두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화덕을 세워놓았다. 음식재료만 싸오면 한곳에서 모든 게 해결되도록 했다. 그것 뿐 아니다. 곳곳에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어놓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주민복지가 뭐 별것인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쉬게 해주는 게 최고지. 국격(國格)이 어떠니 하는 거창한 구호 한마디보다 이런 배려가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조금 내려가니 수영장이 나온다. 이곳의 물이 바로 소문주 바바 사원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천연동굴 수영장도 있는데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항상 22도라고 한다.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수영을 즐긴다.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온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잖아도 신경통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내려갈수록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5000~7000년 전에 쌓았다는 다렌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그 옛날에도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았구나. 단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여기 사람들도 좀 문제가 있다.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각자 가져가면 얼마나 좋을까.

 

까마득한 절벽에 놓인 길.

폭포 앞의 음식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넥타이처럼 좁은 길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힐끗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누가 저 길을 지나간단 말이냐. 나는 돈을 지게로 담아준다 해도 못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협곡이다. 협곡을 벗어나 균프나르라는 동네로 간다. 계곡 사이로 들어가니 바위 사이로 거대한 폭포가 굉음을 내며 쏟아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풀 한포기 깃들 여지도 없는 바위산에 어떻게 저런 폭포가 생겨났을까. 저 물 역시 지하에서 용출한 것이겠지. 폭포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단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름다운 곳은 모두 음식점이 차지했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은근히 겁이 난다.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여행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돌아다니고 사람을 더 만나는 걸 보면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것이겠지? 뭐 안 먹고 일하면 경제적인 거지. 남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염없이 폭포나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저 거대한 폭포도 내겐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없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촌로의 깊은 주름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저 기념사진 몇 장 찍을 거리에 불과하다. 먹는 것도 없이 폭포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몸에 한기가 든다. 한낮의 폭염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부탁했던 동굴 사람들의 인터뷰가 성사됐단다. 내일 새벽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배고픈 게 싹 가시며 몸에 기운이 솟아오른다.

 

균프나르 폭포.

숙소로 가는 길에 훌리아가 터키에서 운전면허 따는 법을 들려준다. 먼저 학원에 등록해서 석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비행기나 탱크 면허 따는 것도 아니고 석 달씩이나 걸린담. 2개월은 집중 교육을 받는데, 차가 고장이 날 경우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엔진구조까지 가르친단다. 모든 국민을 정비사로 만들 생각 아닐까? 그래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 각국에 취업을 시키는 거지. 물론 나 혼자만의 상상이다. 그러고 보면 장점도 꽤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가 고장 나도 보닛조차 열지 못하고 발을 구르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두 달의 공부가 끝나면 남은 1개월은 진짜 운전 연습을 한다. 필기와 기능은 우리처럼 학원에 위탁해서 시험을 본다. 시험에 합격하면 학원에서 국가에 기록을 보내고 면허증이 발급된다. 절차가 길고 복잡해서인지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적은 것 같다. 최소한 직진만 3시간짜리 초보운전자는 없을 것 같다.

 

 

동굴로 가는 길가의 양귀비꽃.

아침 다섯 시. 부랴부랴 일어나 샤워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코피는 어김없이 흐른다. 뱃속에 들어앉은 돌멩이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힘차게 숙소를 나선다. 동굴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말라티야 시내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가야 한다. 지대가 높아지면서 차도 헐떡거린다. 가드레일도 없는 절벽 길의 연속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차 안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게 돌고 또 돌아 산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래서는 위가 까마득해 언제 가나 싶더니, 이제는 저 아래가 까마득한 세상이 돼버렸다. 이 길이 생기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꽤 오래 전 동굴에 사는 가장이 수상에게 편지를 썼단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최소한 길은 뚫어줘야 할 것 아니냐고. 그 수상 착하기도 하지. 주 정부에 지시를 내려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어줬단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편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어느 지점쯤 가니 차도 주저앉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한다. 차에서 내려 보니 모든 게 저 아래 엎드려 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저절로 왕이 될 것 같다. 세상이여, 내게 경배하라! 중간 중간에 집들이 보이고 손바닥만큼 작은 밭들도 여기 저기 박혀있다. 척박한 환경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읽혀진다. 이른 아침이고 2000m가 넘는 고지대다 보니 제법 쌀쌀하다. 배낭에 넣어뒀던 점퍼를 꺼내 입는다. 엉겅퀴와 꽃양귀비가 햇살에 꽃잎을 널어놓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양귀비, 고독해 보여서 더욱 아름답다. 사람도 가끔은 그렇게 홀로 서 볼 일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대중 속에서 떠나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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