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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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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5.29 [이야기가 있는 사진 16] 주말농장8
2012. 5. 29.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모처럼 길로 나서지 않은 일요일.

곧 인쇄돼 세상에 나올 여행기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외출하고 다래가을이차돌이(제 집 강아지들 이름입니다.)마저 낮잠에 빠져든 집안은 심해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한 고요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냉장고 소음? 세탁기가 혼자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떨어지는 소리? 아니면 두꺼비집? 그것도 아니라면 요즘 부쩍 늙어가는 다래가 코 고는 소리?

모두들 나는 아니라고 손을 홰홰 내젓습니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있는 뒷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살짝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 그곳에 펼쳐진 풍경이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나뉜 큰 밭에 사람들이 김을 매고 수확물을 거두고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상추쑥갓은 벌써 풍성하게 잎을 펼쳤고 고추와 토마토는 지지대를 따라 힘껏 키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게으른 밭은 아직 텅 비어 있고, 어느 밭은 통째로 비닐을 씌워놓기도 했습니다.

소음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런두런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곳에 주말농장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밤나무 산 아래에 있던 밭을 열심히 구획정리 하더니 두어 해 전부터 분양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작물이 가득 자란 밭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주말이면 늘 돌아다니고 평일은 늦은 밤에나 집으로 돌아가는 반 떠돌이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창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시골에 살다보니 누릴 수 있는 풍경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되는 이야기지만 저도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이었지요.

경기도 송추에 작은 밭을 하나 얻어놓고 주말마다 찾아갔습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그 결과를 거두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가서 직접 딴 상추쑥갓풋고추와 함께 삼겹살을 먹는 호사를 누린 친구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였습니다.

저처럼 흙에서 구르며 자란 사람들에게는 흙을 그리워하는 인자와 끝내 이별을 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밭에 가면 아이들도 아무렇게나 풀어놓았습니다.

개구리메뚜기도 잡고 밤도토리도 줍고 도랑에 들어가 저희들 맘대로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강아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힘들만큼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녀석들에게도 그 풍경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는 것 같았습니다.

 

심고 가꾸고 그 결과를 거두는 과정을 무척 좋아합니다.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줍니다.

제 손으로 뿌린 생명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나누는 대화는 저 자신을 순정(純正)의 세상으로 데려다 주고는 했습니다.

왜 내가 저걸 포기했지?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길 위의 삶을 선택하다 보니 그동안 누렸던 삶의 자락들은 뭉텅 뭉텅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추나 쑥갓과 나누는 대화를 포기한 대신 글과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도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판정 보류입니다.

삶 앞에는 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저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자.

왜 후회할 선택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다가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은 가능하면 일찍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느닷없이 다가온 텃밭의 향수도 얼른 덜어내야겠지요?

삶이 다하는 날까지 배낭을 메고 길 위를 걸어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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