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우연히 머물게 된 마을의 모스크와 첨탑.
식물학대? 조롱박에 새겨진 이니셜이 재미있다.
시골동네를 혼자 거닐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큐팀의 일정을 체크해보니 울트라마라톤 참가 선수들 인터뷰가 잡혔다고 한다. 울트라마라톤은 2000년 전 리키아의 도시들을 달리는 것인데 그 거리가 무려 240km, 정식마라톤의 6배에 가깝다. 공식명칭은 리키안웨이 마라톤. 올해가 2회째다.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니 그때나 만나볼 생각으로 다큐팀과 따로 움직이기로 한다.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은데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혼자 걷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행과 헤어진 곳은 ‘유령도시’ 카야쾨이로 들어가기 전의 조그만 마을. 마라톤 출발지가 그 근처다. 동네 이름은 KÖI MUHTARLIGI(?) 이 이름을 100% 장담하지 못하는 건 말이 통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돌무시(Dolmus, 미니버스) 정류장의 간판을 베꼈기 때문이다. 터키의 시골동네는 우리의 시골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마치, 아주 오래된 면소재지쯤 거니는 것 같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잘 가꿔놓은 화단. 한쪽에는 조롱박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그 중 하나에 누군가 ‘G‧S’라고 큼직하게 새겨놓은 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심은 사람이 ‘이건 내거야’ 하는 뜻에서 이니셜을 새겨놓은 것일까? 한쪽에서는 석류가 익어간다. 터키, 지중해 쪽을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과일 중 하나가 석류다. 시장에서는 빨갛게 벌어진 석류를 즉석에서 주스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마을 곳곳에 석류가 지천이었다. 이발소 앞의 평상? 손님이 없을 때 이발사가 쉬는 곳인 듯.
아주 작은 동네 이발소.
터키 글자 한번 배워볼까요?
글자는 영어 알파벳과 비슷하고 어순은 우리말과 같아서 한국인도 배우기 쉽다고 한다.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로 현지에서 합류한 엄상욱 씨 말에 따르면, 빠른 사람은 3개월이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다고 한다. 자모체계는 자음 21개와 모음 8개, 모두 29개로 이뤄져 있는데, 순서는 알파벳과 똑 같고 발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중간 중간에 Ç Ü Ö 등이 추가돼 있다. 영어와 비슷한 단어들도 많다. 예를 들면 은행이라는 단어 bank는 ‘banka’로 쓰고 ‘반카’로 읽는다. 느닷없는 터키어 공부는 이쯤 하고, ‘BERBER’라 썼든 barber’라 썼든 내가 서 있는 곳이 이발소 앞인 것만은 틀림없다. 손님은 단 둘.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지고 수염이 탐스러운 이발사는 꼬마아이의 머리를 깎고 있다.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서 이발소 안의 풍경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의자도 사람도 우리의 옛 모습과 비슷하다. 아이의 찡그린 표정도 어찌 그리 정겨운지. 마치 거울 속에 있는 어릴 적 나를 만나는 것 같다. 키가 작은 저 아이의 엉덩이 아래에는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지 않을까? 혹시 머리에 땜빵(기계충 자국)은 없을까? 괜스레 머릿속에 온갖 그림을 그려본다.
저 개에게 심한 위협을 당했다. 저만치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어디 가나 개조심!!
기웃기웃 들여다보다 소파에 앉아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친다. 쉽게 웃어주는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엄숙한 표정에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네 이놈, 거기서 뭐하는 게냐?’ 하는 얼굴. 그러고 보니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노인들의 표정은 좀 무겁다. 석관이 있던 거리에서 마주친 노인들도 정물화속 인물 같았다. 격동의 시절을 살아온 우리네 노인들처럼, 삶의 핍박이 표정마저 빼앗아간 것일까. 이발소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작정 같은 건 없다. 그저 두 다리를 내비게이션 삼아 걸을 뿐. 마을 한 가운데로 난 길을 지나가는데 커다란 철대문 안쪽에서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있다. 집에서 타고 나온 자전거는 곁에 자빠트려 두었다. 도와주려고 가까이 가는 순간,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린다. 헛걸음!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간 소녀는 금방 돌아온다. 손에는 달걀이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다. 이번엔 문을 여는데 애 좀 먹는다. 한손에 달걀을 들었으니 놓을 수도 없고. 얼른 뛰어가 문을 밀어준다. 문이 쉽게 열린 건 좋았는데, 그 대가로 나는 위기에 직면한다. 저만치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바람처럼 달려온다. 낯선 사람이 제 어린 주인을 해치는 줄 안 모양이다. 헉!! 이 먼 곳까지 와서 개한테 물려죽는구나.
개에게 놀란 내게 미소를 보여주던 카페 여주인. 저 여인은 지붕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을 닫은 또 하나의 이발소.
개에게 물릴뻔한 순간
다행이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얼른 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얼마나 큰 집에서 살기에 집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나. 경황없는 중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집자리의 규모에 감탄부터 한다. 개는 아직도 대문 앞에서 컹컹 짖어대며 ‘적’을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엄청나게 크고 무섭게 생겼다. 그제야 대문에 그려놓은 ‘개 조심’이라는(이라고 짐작되는) 글자가 보인다. 겁을 주려는지 개도 함께 그려놨는데 실제보다 더 무섭게 생겼다. 저게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캉갈이란 개인가? 그냥 지나갈 걸 괜히 오지랖 넓은 짓을 해가지고. 놀란 가슴을 달래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여주인이 지켜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다. 저게 무슨 뜻이지? 고소하다는? 괜찮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면 너 맘에 든다는? 그래도 그녀의 미소를 보니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된다. 몇 마디 나눠보고 싶지만 손짓 발짓만 하다 그칠 것 같아서 그만 둔다. 다시 걸음을 옮겨 돌무시 정류장에도 앉아보고 여기저기 사진도 찍는다. 지붕 위에 올라가 뭔가 일을 하는 여인의 뒤로 모스크의 첨탑이 파랗게 빛난다. 아직도 이렇게 뜨겁지만 가을이 저만치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조금씩 여물어 가고 있다.
축구공을 굴리며 친구를 찾아가는 아이. 옛날 우물에 간판과 메뉴를 달아놓은 카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들.
내가 오래 머물렀던 슈퍼마켓. 슈퍼마켓의 베개만한 빵들.
슈퍼에서 만난 소녀
목이 마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소녀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부모님 대신 가게를 지키는 것 같다. 아이가 참 예쁘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상냥하게 웃는다. 귀여운 것. 이 정도면 OK라는 뜻. 찰칵! 셔터를 누르는데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살짝 웃어준다. 심봤다!!! 소녀와 눈인사를 하고 나와 가게 맞은 편, 길 건너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한참 뒤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동네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심 가득한 눈길로 나를 흘끔거린다. 심지어 아이들은 내 곁을 뱅뱅 돈다. 소문이 났는지 일부러 구경삼아 나와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느닷없이 나타난 작달막한(그렇다고 그들이 큰 건 아니지만) 동양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동네에 앉아있는 걸 처음 보는 모양이다. 양 손에 생수통을 들고 가던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이가 거의 빠져서 입이 동굴처럼 컴컴하다. 내 할아버지를 먼 나라 땅에서 만난 기분이다. 이번엔 서양인이 지나간다. 그도 눈웃음을 짓는다. 에라, 이런 땐 무조건 “Hi”다. 그도 “Hi”로 대답한다. 나그네끼리 인사쯤이야 인색할 게 뭐 있으랴. 마음이 넉넉해진다.
슈퍼마켓의 예쁜 소녀.
내가 떠날 때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 자전거를 타고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저씨의 순박한 미소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상태에서 착한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겉보리 훔쳐 먹은 말처럼 잇몸까지 보여주며 히히힝~ 웃어주는 수밖에. 그제야 그도 경계를 풀고 미소를 베어 문다. 얼굴 가득 ‘순박’이라고 씌어있다. 어쩌면 이 미소를 보기 위해 이 동네를 서성거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잃어버린 웃음. 그렇지만 그는 웃음 정도로는 확신이 안 서는지 뭉그적거리고 서서 탐색을 계속한다. 세무서에서 보낸 간첩 아니라니까요. 에구, 답답해라. 당신의 딸이 예쁘니까 좋은 얘기만 써줄게요. 아참, 내겐 무기가 있지. “아저씨, 가게 앞에 가서 서보세요. 사진 멋있게 찍어줄게” 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손짓 발짓이다. 그래도 뜻은 금세 통한다. 얼른 가게 앞으로 가서 선다. 하지만 표정은 밀랍인형처럼 굳어있다. 그래도 기념으로 찰칵!!!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진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긴, 피곤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고 저녁 무렵인데도 ISO를 안 높였으니 흔들릴 만도 하다. 주소를 모르니 어차피 보내줄 수도 없지만, 성의껏 포즈를 잡아준 아저씨에게 미안하다. (미안해요, 슈퍼아저씨!) 어느덧 석양이 산마루에 걸린다. 이제 돌아갈 시간. 오랜 시간 신세를 진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자전거를 세워놓고 놀던 아이가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근처에 있던 동네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배웅을 한다. 나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마치 명예주민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나 정말 여기서 살까봐.
미소로 정을 나눈 슈퍼마켓 사장님. 피곤이 극에 달해 사진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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