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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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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에 해당되는 글 1

  1. 2008.12.15 [사라져가는 것들 89] 국기 하강식11
2008. 12. 15. 10:29 사라져가는 것들

소변을 보는데
국기 하강식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시작됐다
나는 지금 물건만 똑바로 쳐다본다
물건을 똑바로 세웠다
갑자기
오줌이 나오질 않는다
나는 확실한 애국잔가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끝나고 애국가도 끝났다
다시,
오줌이 줄기차게 나온다 아아, 나의 온몸은 애국투성이   
                                                               -채상근의 ‘국기 하강식’ 전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펄럭이는 국기만 봐도 오른손이 저절로 올라가고 애국가만 흘러나오면 나오던 똥도 기어들어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기식의 사전적 의미는 ‘군대나 공공 기관, 단체 따위에서 국기 또는 단체의 깃발을 내릴 때에 행하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국기 하강식은 군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온 국민의 행사였습니다.
날마다 국기 게양식과 국기 하강식이 시행됐습니다.
오후 여섯 시(혹은 다섯 시)가 되고,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온 국민은 태극기를 향해 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급한 일로 뛰어가던 사람이나 진통하는 산모를 싣고 길을 달리던 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차량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은 차량을 정지하고 앉은 채 차렷 자세를 취한다’는 지침이 있었으니까요.
끙끙 신음하던 산모가 태극기를 향해서 차렷 자세를?
하기식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제 갈 길을 가면 ‘불온한 국민’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습니다.
애국시민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온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의무적으로 한다는 것, 지금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1970~80년대에 이 땅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태극기는 우리 나라의 국기입니다.
국기라는 건 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상징이자 표식이기 때문에 그 의미만으로도 존중받아야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태극기를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고 하지요.
그런 태극기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뭐라고 할 사람은 나라를 떠나 무국적자로 살든지 해야지요.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 역시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강요된 존중은 불편과 부작용을 낳습니다.
뭐든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를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강요된 경배는 국기 하강식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신 분 없나요?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애인과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갔지요.
영화가 시작되기 전 컴컴함을 빌어 ‘오늘은 손이라도 한번 잡아봐야지’ 벼르고 있는데 갑자기 울려 퍼지는 애국가.
스크린엔 동해물과 백두산이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고 삼천리금수강산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지요.
당신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킵니다.
다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오른손은 왼쪽 가슴에 가 있고요.
애인 손을 잡아보겠다던 생각 따위는 어느새 저만치 날아간 뒤입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거룩한 자리에서 그런 ‘불온’한 생각을 하면 쓰나요.
개중에는 안 일어나고 버티는 사람도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변종바이라스라도 보듯 눈총을 쏘아대기 마련이지요.
하긴 쓸데없이 객기 한번 부려본 그 사람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 있겠습니까?
중간에 일어서자니 더 남우세스러울 것 같아 버텨보는 거지요.
무슨 고릿적 얘기를 하느냐고요?
20년도 채 안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밖에서도 이런 판이니 획일화된 교육의 장,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지요.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문 같은 걸 달달 외우는 건 기본이었지요.
그것뿐인가요.
애국가를 4절까지 못 외우면 저능아 아니면 반항아 취급 받기가 일쑤였지요.
애국가 외우는 거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
가을하늘 공활한데…’로 시작되는 3절쯤이면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가을하늘은 알겠는데 공활은 대체 무슨 소린지.
운동장에서 열리던 애국조회는 이 모든 것의 종합판이었습니다.
애국가 제창까지 마치고도, 혹시 아이들 정신자세 흐트러질까봐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교장선생님의 훈화.
작열하는 햇볕 아래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

1989년 1월이었나요.
인류가 사라지는 날까지 영원할 것 같던 국민의례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국기 하강시간마다 전국에 울려 퍼지던 라디오방송과 영화관에서의 국기에 대한 경례가 폐지됐습니다.
하기식은 공공기관과 학교의 자체방송을 통해서 실시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말이 개선이지 사실은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시간이 무섭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국기에 대한 맹세문 내용도 바뀌었더군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변경 전)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변경 후)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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