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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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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7.12 [사라져가는 것들 142] 선술집*6
2010. 7. 12. 09:1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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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문제였어…. 작살질이라면 똥을 누다가도 뛰어나가는 영표 형의 작살만큼이나 날카로운 햇살. 아이는 걸어가면서도 자신이 더위를 먹는 바람에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나와 면사무소 옆 비석거리를 지날 때, 평소처럼 집으로 갔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장터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장터입구에서 만난 동네사람, 풍월아저씨를 만났을 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풍월아저씨가 “석두 아니냐?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는 게냐?”하고 물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개백정과 눈을 마주친 똥개마냥 꼬리를 말고 비실비실 비켜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지 않았던가. 햇살을 한 아름 등에 진 풍월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재촉할 때까지 아이는 그냥 그러고 있었다. 아니, 돌아서야 한다고 잠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훑었다. 엄마…. 그래, 엄마가 죽어가고 있잖아. 엄마라는 이름은 아이의 모든 힘줄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장터거리를 가로질렀다. 장터가 끝난 모퉁이에 그 집이 있었다. 장날이면 성시를 이루는 그 집, 평일의 한낮에는 적막만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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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손을 눈 위에 가리고 턱없이 높게 매달린 간판을 올려봤다. 말이 간판이지 양철판에 삐뚤빼뚤 써 갈긴 글씨 세자가 전부였다. 해당옥. 미닫이문 유리창에도 국밥, 탁주, 안주일체, 외상사절 등의 글씨가 들쭉날쭉한 씌어 있었다. 하지만 허술하다고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장날이면 떠돌이 장돌뱅이서부터 쓸데없이 친구를 따라 장 구경나선 농투성이까지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한다는 게 해당옥이었다. 사람들은 해당옥보다는 설화네라고 불렀다. 주인의 이름이 설화인 모양이었다. 국밥도 팔고 술도 파는 집이었다. 장날이야 국밥집에 가까웠지만, 평소에는 간단하게 막걸리 한 두 사발로 목만 축이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선술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구색 갖춘 안주에 색시들이 권주가로 동백아가씨나 댄서의 순정을 불러대는 비석거리의 삼월옥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한참 서 있었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여름이면 늘 활짝 열어 부치고 주렴이 대신하는 미닫이문도 꽁꽁 닫혔다. 아이는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말 저 곳에 아버지가 있을까? 있다면 대체 저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따라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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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무너질 것처럼 허름한 그 집이, 아이에게는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 다가서서 문을 두드릴 수도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햇볕 아래 오래 서 있어서일까. 열에 들뜬 엄마의 신음이 이명처럼 아이의 귓전에 맴돌았다. 엄마는 지금 아프다. 한 여름이 무색할 만큼 기침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에 가끔 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모양이었지만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어제 저녁에는 엄마가 위험한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기어 다니다시피 아이의 저녁밥을 차려준 뒤 자리에 누웠는데, 한밤중에 열이 치솟고 기침이 쏟아지더니 결국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잠시 뒤에는 온 몸에서 기운을 놓아버렸다. 아이는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뭘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엉엉 울며 발만 구르던 아이가 이웃집으로 달려갔다. 잠자리에 든 명구할머니의 손을 끌어당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다행히 엄마가 정신을 되찾은 뒤였다. 명구할머니는 먼 친척이었다.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없는 엄마가 유일하게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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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구할머니를 본 엄마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렀다. 얼굴은 여전히 파리했고 숨결은 미약했다. 끊어질듯 이어질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가 벌을 받는 거쥬. 지은 죄가 많어놓으니. 얼른 가야는디, 저것이 눈에 밟혀서….”
“자네가 뭔 죄를 졌다는 겨. 집안 핏줄 찾어다 대를 이은 것두 죄여? 그나저나 이 사람이 워찌 이리 무심할 수가 있는겨. 마누라가 숨이 넘어가는디두…. 천벌을 받지. 천벌을…. 내일은 장터거리 쫓어가서 해당옥인지 해당환지 불을 싸지르구 말텨….”
엄마의 황급한 눈짓에 말을 중동무이한 명구할머니의 눈도 개진개진 젖어있었다. 아이는 최근 두어 달 새 벌어진 일들을 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늦은 봄부터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날 밤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단 세 식구가 살다가 한 사람, 그것도 가장이 빠져나간 집안은 공포에 가까운 적막만 맴돌았다. 아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엄마가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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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여전히 황금빛 작살을 쏘아내리고 아이는 자꾸 어지러웠다. 한참이나 서 있던 아이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길 무렵, 드르륵 소리와 함께 해당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한 여자가 나왔다. 유리창 안에서 오랫동안 아이를 바라보았던 듯 여자는 곧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넌… 누구니? 누굴 찾아온 거니?”
부드럽고 간지럽기도 한 서울 말씨가 귓전을 맴돌았다. 아이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세라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작은 소읍에는 이질적일 정도로 해끔한 얼굴이었다. 집에 누워 있는 까맣게 탄 얼굴의 엄마가 생각났다. 여자는 우물처럼 깊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이가 조금씩 발을 뒤로 뺐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와 봐”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더니 살짝 당겼다. 아이는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저항도 못하고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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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바람에도 무너질 것 같은 겉모습에 비해 술집 안은 깔끔했다. 파란색 비닐커버가 씌워진 탁자가 세 개, 그리고 나무로 짠 걸상이 두 줄씩 여섯 개. 찬장에는 노란 주전자가 네 개, 검게 빛나는 투가리들, 그리고 술잔으로 쓰이는 막사발과 그보다 작은 보시기들이 말끔하게 닦인 채 올려져 있었다. 
“여기 좀 앉아봐. 아줌마가 시원한 거 가져올게.”
아이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여자는 입가에 수밀도 같은 웃음을 베문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어이, 누가 왔남? 이 더위에 뭔 낮손님이여~”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환청인가 했다. 하지만 방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의 눈에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들어왔다. 아! 아버지 구두였다. 안에서 구시렁거리며 문을 미는 기척이 들리는 순간, 아이가 후닥닥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햇살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아이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끊어진 목걸이에서 빠져나온 진주알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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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엄마가 하늘로 떠난 날 밤에 돌아왔다. 앞산에 엄마를 묻고 온 아버지가 아이를 불렀다.
“아버지하고 서울 가서 살자.”
아이는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서울이라니…. 더구나 엄마를 그렇게 만든 여자와…. 불쌍한 엄마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몸부림치면서 싫다는 아이를 끝내 못 이긴 아버지는 주소를 적은 종이 한 장과 얼마간의 돈만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해당옥 여자 사이에 얽힌 악연을 꿈결인 듯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대처로 나갔던 쟤 애비가 그년을 만났다는 겨…. 그년도 팔자가 기구혀서 그렇지. 멀쩡한 집 처녀였다는디…. 어쩌다 눈이 맞어서 저걸 낳게 된 거지. 그게, 니가 우리 명구를 낳은 해니께 10년두 훨씬 더됐구먼.”
“그런디, 워떻게 저 애가 일루…. 돌아가신 성님이 찾어갔었내비네유.”
“그랬댜, 연락이 끊어진 서방을 물어물어 찾어가 보니 그년과 살림을 차렸더랴. 애는 못 내놓겄다구 난리를 피는 걸 박 씨 집 핏줄이라고 뺏다시피 데려왔다는 겨. 그것 땜이 맨날 남의 새끼 뺏은 벌을 받는다구…. 애를 뺏긴 그년은 충청도 여기저기 술집으로 돌아댕겼다지. 석두애비가 충청도 사람인 것만 알지 어디 사는 줄은 물렀다니께. 그러다 읍내까지 굴러와서…. 석두애비는 해당옥이 그년이 차린 술집인 줄 모르구 갔다가 그만….”

긴 여름방학이 끝난 뒤, 아이는 장터거리에 가봤다. 한바탕 꿈이었던 듯 모든 게 사라진 뒤였다. 집은 비었고 해당옥 낡은 간판만 바람에 그네를 타고 있었다. 아이는, 그 여자가 한밤중에 찾아와 내가 진짜 엄마라고 울면서 손을 끌던 날, 뿌리치고 도망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멩이만 툭툭 차고 있었다. 영표 형의 작살만큼 여전히 날카로운 햇살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선술집은 원래 술청 앞에 선 채로 한 두 잔의 술을 마시고 가는 술집을 말한다. 하지만 ‘간단하게 한잔 할 수 있는 술집’의 통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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