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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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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이 아시아 땅이다.

톱카프 궁전의 제4정원으로 가는 길은 문이 따로 없다. 보석박물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느닷없이 시야가 탁 트인다. 오른 쪽으로는 마르마라 해협이 검푸른 색깔로 누워있고 앞으로는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왼쪽으로 조금 돌리면 보스포루스 해협의 들머리가 보이고 좀 더 왼쪽에는 유럽 땅인 신시가지와 골든혼이 있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바쁘게 또는 한가롭게 흘러 다닌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나는 유리 안에 갇힌 억만금짜리 보석보다 이런 풍경 앞에서 훨씬 행복하다. 이곳이야말로 톱카프 풍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술탄과 그의 가족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몰래 감춰두고 자신들만 야금야금 즐긴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었던 셈이다. 술탄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꽃밭을 가꿨다. 특히 아흐메트 3세 때는 튤립을 많이 심어서 튤립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바람을 타기 시작한 튤립은 튤립시대’(1718~1730)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열풍을 불러왔다. 튤립에 흠뻑 빠진 아흐메트 3세는 이 꽃을 즐길 수 있는 잔치를 자주 열었다. 톱카프 궁전과 정원에서는 밤낮으로 연회가 벌여졌다. 이스탄불 시내도 튤립 천지였다. 새봄의 첫 대보름에는 튤립축제가 열렸다. 술탄과 귀족들은 비단을 드리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오가며 튤립의 정취를 즐겼다.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이었을까. 게다가 전쟁도 없는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그림자 없는 빛이 어디 있던가.

 

 

제4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신나게 놀았으니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건 당연한 이치.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나무꾼처럼, 아차! 싶어 곳간 바닥을 긁어보지만 쌀 한 톨 나올 리 있나. 애먼 백성 허리만 더욱 구부러질 뿐이었다. 원성이 높아지자 참견꾼 예니체리(앞에서 다 배운 것들이다)가 가만있을 리 있나. 1730년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다. 꽃과 사랑에 빠졌던 튤립술탄야흐메트 3세는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나고 튤립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꽃이든 사람이든 적당히 사랑하고 볼 일이다. 튤립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냐고? 설마! 우리는 튤립파동(Tulip mania)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야한다. 이야기는 무대를 네덜란드로 옮기면서 터키의 튤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탄불에 와 있던 네덜란드 대사가 튤립을 가져간 게 화근이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사재기가 난무할 정도로 튤립의 인기가 치솟았다. 튤립은 단기간에 번식이 어렵기 때문에 늘 품귀였고 가격은 그만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미래 어느 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고판다고 계약하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꽃은 꽃일 뿐. 16372월을 정점으로 튤립 가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팔겠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사겠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른바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튤립 값은 X값이 됐고 파산자가 속출했다. 이 튤립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 됐다고 한다. 꽃 하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나는 지금 그런 역사적 파동을 잉태한 현장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튤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거나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나 같으면 기념으로라도 튤립을 심겠다. 아픈 역사야말로 교훈의 어머니 아니던가.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카페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파라솔 아래서 식사와 음료를 즐기고 있다. 언뜻 봐도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자가 앉을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술탄이 즐기던 비밀의 정원에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 그것만으로도 폼 좀 나겠지. 물론 부자들 얘기다. 내려가서 구경이라도 할까 하다가 조금 구차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세월을 듬뿍 머금은 바다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시간을 오르내린다. 골든혼 쪽을 바라보다보니 느닷없이 역사의 한 자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저쯤이 바로 배가 산으로 올라간 곳이겠구나. 배가 산으로 올라가다니, 느닷없이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이왕 역사의 현장에 왔으니 그 얘기를 좀 풀어놓고 가자. 그 일이 일어난 건 1453422일이었다. 그 즈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비잔티움을 함락하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헝가리 출신의 대포 제조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거대한 대포로 연일 두드려 봤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잠깐, 이 우르반이란 인물이 누구던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포를 팔러갔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자 메흐메드 2세를 찾아와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무기상들의 손에 달린 것인가.

 

가운데로 뻗어나간 바다가 보스포루스 해렵. 왼쪽 하얀 배가 진행하는 방향이 골든혼.

우르반이 만든 이 대포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고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 7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비잔티움의 군사들은 무너진 성벽을 보강했다. 시시포스 돌 굴리듯 결과 없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메흐메드 2세로서는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육지 쪽으로 돌아가자니 2, 3중 성벽이 걸리고 바닷길을 뚫자니 골든혼에 쳐놓은 쇠사슬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게 바로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 술탄의 생각이었는지 부하 중에 그런 용감무식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니까. 술탄의 군대는 어둠을 틈 타 기름이 칠해진 둥근 통나무를 바닥에 깐 다음, 72척의 배를 밀고 산을 넘었다. 병사들은 죽을 노릇이었겠지만 보기에는 장관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흔적이 모두 지워졌지만, 대략적으로 복기해보면 갈라타탑 동편의 톱하네에서 골든혼의 카슴파샤까지 배를 옮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비잔티움 병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하룻밤 사이에 적의 배들이 코앞까지 들어오다니. 그렇다고 바로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함락된 것은 아니다. 늙은 사자처럼 갈기가 부서지고 발톱은 빠졌어도, 비잔티움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나 더 지난 528일 밤, 드디어 메흐메트 2세는 16만 대군에게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새 이어진 공방전 끝에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노천카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날 밤을 새워 1200년 제국의 수도를 지킨 병사는 7,000여명에 불과했다. 1453529일 화요일. 로마의 적통을 이은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은 이렇게 마지막 숨결을 놓았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1, 마침 동로마 제국을 일으킨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말을 꺼낸 김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가자. 그도 처음부터 잘 나가던 술탄은 아니었다. 아버지 무라드 2세가 갑작스레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바람에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됐다. 하지만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느닷없이 왕을 다시 하겠다며 아들을 내쫓았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 조상들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했다.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내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왕궁으로 말을 달려 왕관을 머리에 썼다. 아버지의 조기교육으로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일찌감치 터득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술탄을 꼽으라면 대부분 쉴레이만을 들지만 나는 메흐메드 2세를 앞세운다. 이 이슬람의 술탄에게 점수를 가장 후하게 주는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도 있지만, 이교도인 기독교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와 예술이 밥 먹여주느냐는 수장이야말로 성군이 되기에는 애당초 글러먹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성소피아 성당의 유물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메흐메드 2세 덕분이란 사실에 늘 감동할 수밖에 없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메흐메드 2세의 이야기가 길어지니 슬슬 지루하겠지만, 딱 한 가지만 더하고 가자. 게다가 이건 드라큘라 얘기다. ? 느닷없이 웬 납량특집?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역사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다. 드라큘은 또는 악마라는 뜻을 가진 루마니아 말이다. 1431~1476 사이에 살았던 드라큘라의 원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다. 그는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계승자였다. 그의 이름이 드라큘라로 알려진 건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유럽 용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큘라는 (드라큘)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메흐메트 2세와 인연이 많다. 소년시절을 인질로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그는 왕위에서 추방됐다가 복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두 번째 권력을 장악한 뒤 오스만제국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자 메흐메드 2세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온다. 드라큘라는 게릴라전으로 여러 번 대군을 물리친다. 그는 1462년 동생에 의해 또 한 번 추방당했다가 1476년에 복위하지만 곧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결론적으로 드라큘라는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가 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그는 잔인한 처형 방법 때문에 많은 원성을 들었다. 특히 나무를 깎아 만든 날카롭고 긴 꼬챙이로 산 사람의 몸통을 꿰뚫는 것을 가장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 포로가 꼬챙이에 꿰어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말로 체페슈는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결국 드라큘라라는 이름과 피를 즐기던 괴벽이 합쳐져 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1897)의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은 역사 얘기가 너무 길었나? 돗자리 말 듯 상념을 둘둘 말아들고 궁전을 나온다. 관람객은 여전히 정원 곳곳을 그득 채우고 있다. 그들이 타고 온 유람선은 오늘 밤 이스탄불에서 머무나 보다.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만난 훌리아에게 궁금하던 걸 묻는다.

오늘은 저렇게 차도르 입은 사람들이 많지? 전부 터키 사람들이예요?”

아뇨. 터키 사람들은 저렇게 안 입어요. 두바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그렇구나. 저들 역시 유람선의 승객인 모양이다. 복잡한 톱카프 궁전에서 나오니 세상이 전부 한가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인연이 안 닿았던 곳이다. 톱카프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지간한 명소는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모여 있다는 점도 이스탄불 관광의 장점이다. 먼저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 있는 개인 환전소에서 돈을 바꾼다. 대도시는 유로화가 통용되지만 지방에는 터키 리라가 필요한 곳이 많다. 환전은 유로화나 달러 모두 가능한데, 한꺼번에 100달러 이상이 돼야 바꿔준다고 한다. 별 이상한 원칙이 다 있네. 환전해주는 돈의 배분도 자기들 입맛대로다. 예를 들면 50리라 두 장, 5리라 몇 장주는 대로 받아야한다. 한국에서 환전을 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리라화를 바꿀만한 곳이 거의 없다. 아무튼 실탄도 장전했으니 장 구경을 해보자.

 

그랜드 바자르 입구.

바자르 안에는 이런 골목이 65개나 있다.

 

 

바자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의미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식량을 교환하던 곳이 바자르의 원조인 셈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그랜드라는 단어답게 담과 문, 지붕을 완벽하게 갖춘 거대한 옥내(屋內)시장이다. 바자르 입구에서 고색창연한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문장 안에 창이나 도끼도 있고 저울도 보이고복잡해 보이는 게 사연이 많을 것 같다. 그 밑에는 KAPALIÇARSI라고 쓰여 있고 또 옆으로 1461이라는 숫자가 있다. 맨 아래에서 드디어 GRAND BAZAAR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원래의 바자르 건물은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워졌는데 메흐메드 2세가 1461년에 확장했다고 한다. 1461이라는 숫자가 바로 그 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1701년과 1894, 1954년 등 네 차례나 큰 불이 났지만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3700m²의 면적에 65개의 골목과 4,000개의 점포가 들어선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한지 골목 하나 삐끗 잘못 들어서면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바자르 내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 등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모두 27개의 문이 있는데 밤에 문을 잠그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다. 바자르 입구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진열된 상품도 가지각색이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펫, 가죽제품, 수공예품, 각종 그릇, 동으로 만든 찻잔, 가죽의류, 모피류, 액자에 든 그림, 로쿰이라 부르는 터키 과자에구, 숨 차라. 차라리 없는 걸 찾는 게 낫지.

 

그랜드 바자르 안의 보석가게.

그랜드 바자르에서 파는 각종 그릇들.

가장 많은 건 역시 보석가게. 온갖 귀금속이 조명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크고 작은 금팔찌들을 수백 개 진열해놓은 가게 앞에서는, 보석에 별 관심이 없는 나까지 황홀해진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자랑거리가 카펫. 카펫의 발상지는 페르시아가 아닌 터키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목민들이 이동식 천막을 칠 때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여성 동행자와 함께 보석가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한국말로 소리친다.

아주머니, 많이 싸요.”

아주머니? No! 아가씨!!”

내가 농담으로 받자 연신 아가씨? 아가씨?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이 아저씨, 결국 수정안을 내놓는다.

언니!! 많이 싸요.”

흐흐, 참말로. 웃어야겠지? 우리말이 튀어나오는 걸 거 보니 한국 사람도 많이 찾아오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랜드 바자르야말로 외국인들에겐 필수 관광코스 중 하나다. 이곳은 흥정도 가능하다. 하긴 시장에서 흥정 빼놓으면 무슨 재미. 닳고 닳은 상인들에게 관광객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겠지만, 어차피 깎을 걸 감안하고 부르는 값이니 밀당’(밀고 당긴다는 뜻을 모르는 분은 없지요?)의 재미를 즐겨볼만 하다. 시간과 노력에 따라 엄청 깎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 맛을 못 보고 말았다. 살 물건이 있어야지. 나 같은 여행자야말로 각 나라 시장의 입구마다 공적이라는 수배 전단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카메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로쿰 가게 사장님(?)

한글로 쓰여진 '착한 가게'

이런 친구가 왜 안 나타나나 했다. 터키 전통과자인 로쿰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내 카메라에 시선을 들이민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물건 팔 생각을 분실한 지 오래다.

“Oh, canon! canon! My camera is Sony. Your camera is wonderful.”

처음에는 노래의 한 대목인 줄 알았다. 어찌나 운율이 잘 맞는지. 그래, 네 카메라 소니야. 그런데 내가 언제 물어봤어? 터키 청년들은 DSLR 카메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아마 일종의 유행이 아닐까. 돈을 벌어 사고 싶은 품목 1호가 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란 상징성에서라도 그랜드 바자르는 꼭 들르고 싶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나와 궁합이 척 들어맞는 곳은 아니다. 너무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장은 말 그대로 난전이다. 시끌벅적 뒤죽박죽. 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무질서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는 곳. 터키에도 그런 시장이 많다. 서너 골목 탐색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다. 바자르 밖의 좁은 골목이 더 재미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중에 반가운 글씨를 만난다. 나자르본주나 팔찌 같은 장신구 가게 진열대에 한글로 써놓은 착한 가게’. 장삿속이긴 하겠지만 기분이 좋다. 착한 가게 맞네요. 돈 많이 버세요. 오늘 저녁엔 이스탄불을 떠나 말라티아로 간다. 돌아오는 날 반가운 해후를 위해 마음 한 자락 놓고 가야겠지.

 

 

posted by sagang

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6개의 미나레트가 모두 잡혔다.

블루모스크 입구의 'ㅅ'자 형태로 늘어진 쇠사슬.

나는 지금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혹은 술탄 아흐메트 1세 모스크앞에 서 있다. 오스만 투르크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의해 지은 모스크다. 이름이 좀 복잡한가? 그럼 잘 알려진 이름 블루모스크로 부르자. 블루모스크의 정문인 남동쪽 문을 통해 들어가려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다. 문 상단에 굵은 쇠사슬이 자 모양으로 늘어져 있다. 조금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다행이 사람 키보다 높아서 머리에 걸리는 일은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걸어놓은 쇠사슬일까? 사연이 없을 리가 없다. 이 문을 들어갈 때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술탄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술탄이라도 유일신 알라의 성전에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말을 타기는 하되 쇠사슬이 늘어진 만큼 고개를 숙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이 모스크를 지은 아흐메트 1세가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스스로 낮추고 삼가는 자세. 나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내정(內庭), 즉 안뜰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하늘이 우르르 내려앉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관람객들이 우왕좌왕 몰려다닌다. 나 역시 사진을 찍다말고 회랑으로 피해 비를 긋는다. 대체 이 비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너무 급하게 보려하지 말고 한숨 돌리라는 뜻일까. 하긴 그렇다. 먹는 것뿐 아니라 보는 것 역시 서두르면 얹히기 마련. 숨을 돌리고 나서 찾은 잠깐의 여유는 한담으로 이어진다. 먼저 명랑소녀, 아니 명랑처녀 훌리아가 바람을 잡는다.

 

블루모스크 정면.

블루모스크의 회랑들.

“(특유의 말투로) 저는 2008년 가이드 시작했는데, 실수 많이 했어요.”

쏟아지는 비에 빼앗겼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한번은 어떤 선생님(어지간하면 다 선생님이다)이 저 건물은 언제 지었냐고 물었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세요?”

그걸 어찌 알아?’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입만 바라본다.

~팔새끼라고 했어요.”(이 문장을 받아 써도 되나? 고민 고민)

? 이게 무슨 잡탕밥에 파리 낙하하는 소리? 고객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모두 허리를 꺾는다.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이었거든요.”(두 발음이 거의 차별화가 안 된다)

흐흐. 훌륭한 유머였어. 한국에서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18세기 식 농담을 한다고 몰매 맞지 않는 게 다행이겠지만, 그대는 터키인 그리고 훌리아니까.

이젯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없어요?”

한쪽에서 같이 웃고 있는 이젯의 허를 찔러본다. 하지만 이 친구 한 5분간 그저 눈만 돌리고 있다. 괜히 물었나. 한참 뒤 드디어 대어 하나 건졌다는 듯이 눈이 반짝거린다.

손님이 옷 시장 가자고 하는데, 해물탕 시장으로 잘 못 알아듣고 물고기 시장 갔어요.”

순간 주변의 공기라 싸늘해진다. 이거 웃자고 한 소리 맞아? 설마. 아무도 웃지 않는다. 이젯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진다.

 

회랑의 벽과 천장.

가만? 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잖아.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황당하고 오래 기억에 남았겠어. 나는 안 그런가? 미국 사람이 milk라고 하면 미역으로 들리더라. 내가 가이드였다면 우유 먹고 싶다고 하는데 미역줄기 사다 줬을 거 아닌가. 그래, 뭐든지 상대방 입장으로도 생각해봐야지. 사해동포라는 말도 있는데. 그제야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이젯의 표정이 더욱 우울해진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위로도 할 겸 이젯을 불러서 부탁을 하나 한다.

지금 한국에는 비가 안 와서 큰일이거든요. 농사지은 게 다 타고 있어요. 이젯이 이 비를 한국에도 좀 오라고 기도해줘요. 여긴 모스크고 이젯은 무슬림이잖아요. 내가 부탁드리는 것보다 훨씬 잘 들어줄 것 같아서.”

그가 기도를 해줬는지는 모른다. 착한 사람이니까 해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 빗물을 매개로 400,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빗물은 흐르고 스며들어 저 땅 밑 어디엔가 자취를 묻었을 옛사람에게 동양에서 온 한 사내의 뜻을 전하고 있을지도. 400년 전이라고 하니까 느닷없이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내 왼쪽은 히포드롬이고 오른쪽은 성소피아 성당인데 그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블루모스크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블루모스크 내부의 샹들리에.

블루모스크의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들.비잔티움 제국 시절에는 지금의 블루모스크 자리에 황제의 궁전과 히포드롬의 관중석이 있었다고 한다. ! 왠지 전차경주를 했다는 광장에 관중석이 없다는 게 궁금하긴 하더라.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는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블루모스크를 세우기로 결정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들의 저택을 구입하고 터를 닦는 일이었다. 비잔티움의 옛 궁전 일부는 그대로 모스크의 기초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건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잔티움 궁전의 기초 위에 오스만의 모스크가 들어선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도 곳곳에 있는 그리스 신전에서 기둥뿌리를 뽑아오지 않았던가.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되어 이복형의 반란 등 숱한 도전을 극복하고 24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다스렸던 아흐메트 1. 그는 무슨 심정으로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을까. 대개는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성전을 지어보겠다는 인간적 욕망으로 해석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신 알라를 통해 제국을 부흥시켜보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제국을 물려받았을 때 오스만은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든 뒤였다.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쓴 맛을 보고 그때까지 무시하던 오스트리아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치욕스런 현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 지은 게 이 거대한 건축물 아닐까.

양쪽의 육중한 기둥들이 '코끼리 다리'다.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입장할 때 보자기 치마를 입혀준다.

이 블루모스크는 박제로 걸어둔 문화재가 아니다. 지금도 현역 이슬람사원으로 숱한 무슬림이 찾아온다. 그래서 성소피아 성당과 달리 입구에서 신발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들어가야 한다. 또 짧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여성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해서 내쫓지 않으려 나름대로 준비를 해 놨다. 입구에서 한 여자가 파란 보자기를 둘러 입혀 들여보낸다. 줄줄이 서서 임시치마를 입는 모습 역시 장관이다. 적당히 할 것이지. 계속 그 모습을 찍다가 결국 눈총을 한 방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한손에 신발을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죽어라 셔터를 누르는 꼴이라니.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모스크 특유의 위용은 여전하다. 전에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천장의 문양들만 눈에 보이더니 이번엔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5m짜리 기둥을 흔히 코끼리 다리라고 부른다. 성소피아 성당은 두꺼운 벽으로 돔의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했는데 비해서, 블루모스크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세계의 작은 돔이 받치고 또 이 돔들을 그보다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다. 그렇게 하중을 분산시킨 뒤 결정적으로 네 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받쳐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위대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일까. 워낙 거대한 건물들이다 보니, 언뜻 보면 규모나 높이 등이 비슷해 보여 그 궁금증은 더 한다.

 

 

여성 전용 예배공간.

행복해 보이는 무슬림 일가족.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블루모스크의 중앙 돔의 지름은 23.5m, 높이는 43m. 그럼 성소피아 성당은? 지름이 33m에 높이가 56m. 건물 전체로 봐도 블루모스크는 길이 51m에 너비가 53m고 성소피아 성당은 길이 77m에 너비 71.7m. 앞에서 하중을 견디는 설계를 예로 들었듯이, 건축술 역시 1000년 전에 지은 성소피아 성당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애당초 무엇을 이기기 위해, 혹은 무엇보다 나은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부터가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품에 우열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그리 바람직한 것일까. 성소피아가 낫느니 블루모스크가 낫느니 하는 내 잣대 역시 무지한 장삼이사의 안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여성과 남성의 예배공간이 다르다. 블루모스크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을 2층에 배치하거나, 1층이라도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남녀차별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는 제도이기를. 밖으로 나와 카메라 메모리를 갈아 끼우다 말고,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가족에 눈을 빼앗긴다. 여자는 하얀 히잡을 쓰고 있고 남자는 평범한 차림에 배낭을 메었다. 두 세 살쯤의 아기와 예닐곱쯤 보이는 형은 아직 천진무구하다.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답답했던지 밖으로 나와 아직 비가 그치지 않은 마당을 뛰어다닌다. 괜스레 내가 나른한 행복감에 빠진다.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돌아가는 길일까. 신은 저 아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데려갈까. 블루모스크를 벗어난 뒤 광장을 가로질러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멀리서 본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 가는 길. 관광객과 상인들이 얽혀있다.

비가 그쳤다. 구름도 조금씩 벗겨져 파란색이 언뜻언뜻 드러나기 시작한다. 블루모스크에서 성소피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운동회 날처럼 인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벤치 위의 고양이들은 여전히 게으르게 누워 인종 품평회를 하고 있다. 성당 앞의 광장도 지난 가을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점상도 많아졌다. 지도나 장난감을 파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군옥수수와 밤을 파는 상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 눈에 봐도 한국인인 청년 두 명이 다가와 군밤이 든 봉투를 내밀면서 먹어보란다. 조금 전 누가 나눠준 옥수수도 영 맛이 별로여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원래 이곳 옥수수가 그런 건지 미처 익지 않은 걸 구웠는지 모르지만 물컹물컹한 게 성에 차지 않았다. 군밤이라고 특별한 게 있으려고. 그런데, 청년이여! 왜 내게 이른 호의를? 이 친구들은 대답도 하기 전에 킬킬거리며 웃는다.

맛이 없어서요.”

!! 그럼 그렇지. 맛이 없다고 그걸 내게 주나?”

그게 아니라, 성소피아 성당 앞의 군밤은 맛이 없다는 걸 고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흐흐,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그럼 못 쓰느니.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그리고 말이다. 청년들아. 우리만 속으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한국인들이 많다보니 느닷없이 마주쳐도 전혀 낯설지 않다. 아들 또래의 청년들과 자연스럽게 수다를 떤다.

 

성소피아 성당 정면.

성당 앞에서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노점상.

매표소를 지나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사각으로 움푹 파놓은 곳이 있다. 대개는 그냥 지나치는 그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돌들과 만난다. 어떤 돌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기둥의 잔해로 보이는 돌도 있다. 질서 없이 눕거나 서 있는 돌들이 지난 1500년을 이야기 해준다. 이들은 지금의 성소피아 성당 자리에 있었던 옛 성당의 잔해들이다. 저 돌들의 주인인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은 532년의 니카반란에 의해 불타버렸다. 당연히 첫 번째 성당도 있었다. 320년에 세워졌지만 404년 성난 군중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왜 성났는지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해진다. 아무튼 기구한 운명이다. 타고 세우고 타고 세우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돌들이다. 초라한 퇴역군인의 모습이지만, 지금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돌들보다 훨씬 선배들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어디에 둬야할지 조금 혼란스러워진다. 황제의 허영과 욕망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건물을 짓기 위해 510개월 4일 동안 1,000명의 목수와 1만 명의 인부가 밤잠을 못 자고 흘린 땀과 눈물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장엄한 건축물에 들어서면 내 안에 신성한 기운이 절로 깃드는 것을 느낀다. 내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알라의 이름이 적힌 원판, 그 옆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또 그 옆에 선지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적은 원판. 그렇게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타버린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의 잔해들.

성소피아 성당 내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섞여있다.

천장에 그려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사람 눈에 보였든 숨어있었든 그들은 그렇게 500년 이상을 어울려 살았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정말 인간의 의지로만 이뤄졌을까. 창으로 들어온 빛이 모두를 감싸 안고 신성을 노래한다. 2층으로 올라가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바닥에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곳.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대리석 바닥을 깨고 만든 무덤이다. 무덤은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라는 이름의 성화 맞은편에 있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라는 사람이 묻혀 있었다. 그런데 황제나 정교회 수장도 아니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무덤이 어떻게 이 위대한 건축물 안에 있을까. 단돌로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사람이다. 다른 시각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약탈자이자 천하의 악인이다.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 기독교 세력이 기독교 국가를 침략해서 약탈하고 파괴한 행위는 히포드롬에서 조금 비춘 적이 있다. 베네치아 출신의 단돌로는 십자군을 부추겨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게 한다. 12044, 십자군은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엄청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한 뒤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때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3/8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눠졌던 동서교회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작품이 불타거나 약탈돼 밀반출됐다는 것.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도 저지르지 않았던 역사적 야만행위였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 성화.

메카 방향으로 향한 황금색 미흐라브.

아참, 단돌로가 죽은 이야기나 마저 해야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해인 1205년 사망했다. 그때 나이가 아흔 일곱이었다. 그 나이에 참나 같으면 조용히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겠다. 아무튼 힘이 있던 그는 성소피아 성당 내부,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곳에 묻혔다. 그럼 그걸로 끝? 아니다. 1261년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으면서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들에게 던져졌다. 개들도 자존심이 있지 그런 뼈를 먹을리가. 약탈자의 무덤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머물 기분도 아니다. 밖으로 나와 노천카페 의자에 앉아 땀을 들이며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곧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다. 일행과 합류해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간다. 도착한 곳은 ‘ETHNIC’이라는 간판이 붙은 레스토랑 겸 카페.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이젯이 메뉴설명을 한다.

오늘 소스는 거지예요.”

거지? 이게 무슨 소리지? 중국에서 거지닭은 먹어봤지만 소스가 거지라는 건 처음인데? 몇 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거지가 아닌 가지임이 밝혀진다. 에구, 저 친구 언제 한국말 다 가르치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식당은 경치도 좋고 다른 손님들도 없어 비교적 안락하다. 식사도 푸짐하고 맛이 있다. 먹고 마시니 마음이 한껏 누그러진다.

 

에피타이저 샐러드 메인 요리 '케밥'

메뉴판 속의 비빔밥. 모든 메뉴 중에 가장 비싸다.

"빨리, 빨리"를 외치던 수박 파는 청년.

후식은 바클라바(Baklava)’라는 사탕과자. 버터와 벌꿀레몬시럽의 범벅으로 말 그대로 단맛의 종결자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으니 주인이 다가와 “very very sweet”이란다 최고의 단맛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엄청 sweet”이라고 했더니 그도 엄청 sweet”이라고 따라한다. 그러면서 엄청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뭘 무슨 뜻? 당신 말대로 very very라는 뜻이지. 당신네 나라말로는 이고. 설명을 듣더니 나도 한국말 좀 안다고 으쓱거린다. 한번 해보라니까 삼성, 엘지, 현대란다. 기껏 배운 말이 그 세 단어였어? 그리고 엘지는 한국말도 아니잖아. 안되겠다. 한국어 교습 좀 하고 가야지. “내가 ‘Are you happy?’라고 하면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 해야지요?” "으음~ 엄청 happy!!” 그렇지, 그렇지. 참 말도 잘 들어. 하란다고 넙죽넙죽 따라 하냐? 결국 나는 느닷없이 생긴 제자에게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까지 완벽하게 교육했. , 그냥 이 나라에 남아서 한국어 교습이나 할까봐.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메뉴표가 보이길래 한국음식은 없나 싶어 차분차분 들여다본다. 그러다 기어이 낯익은 이름을 찾아낸다. ‘Bibimbap’ 옳지. 신선로까지는 아니어도 그 정도는 있어야지. 그런데 가격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진다. 무려 25리라. 한국 돈으로는? 환율을 700원씩만 쳐도 무려 17,500원이다. 길을 되짚어 나오다 좌판에 잘라놓고 파는 수박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는데 수박 파는 총각도 한국말로 한마디 한다. “빨리~ 빨리~” 아냐!!! 이건 아니란 말이야! 누군지 좋은 것 가르쳤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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