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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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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베'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9.24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11] 동굴집에서 사는 사람25

 

바위 중간쯤 나무들이 있는 곳에 동굴집이 숨어있다.

동굴집에서 바라본 세상.

이마에 땀방울이 솟고 숨이 차오를 무렵 동굴집 마당에 도착한다. 산으로 보면 9부 능선 쯤 될까? 집이 이고 있는 큰 바위 바로 위가 정상이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헌데 기대(?)는 순식간에 절반 이상 무너지고 만다. 동굴집이라고 해서 컴컴한 동굴에서 짐승 가죽을 두르고 토끼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을 만날 줄 알았더니, 내가 만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바위를 벽과 지붕 삼아 지은 집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원래 있던 동굴이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반쪽만 남아서 덧대어 지은 것이란다. 그래서 동굴에 산다고 않고 동굴집에 산다고 했구나. 집안은 일반 살림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방 두 칸과 주방이 있다. 방에는 소파와 TV가 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다만 부엌은 동굴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냉장고도 있는 현대식부엌이다. 일단 원시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이 지역에는 사람이 거주하던 동굴이 50개 정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은 잦은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살았다. 동굴에서는 지금도 쇠화살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다. 4000~5000년 전 것들도 많다. 히타이트부터 로마, 비잔티움,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를 거치는 동안 계속 사람이 살아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기 때문에 굳이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동굴 하나 분양받아 볼까?

 

거대한 바위 아래 덧대어 지은 창고.

 

'동굴 사람' 슈크르 쿠르트 씨.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집 주인과 마주친다. 드디어 동굴사람을 만난 것이다. 헌데 집이 그렇듯이 사람 역시 동굴이라는 이름이 가진 기대치를 훨씬 못 미친다. 짐승 가죽을 허리에 두르고 토끼를 통째로 굽는 장면이야 벌써 포기했다고 해도, 대도시에 모셔다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있다. 이름은 슈크르 쿠르트. 1949년생이니까 만 63. 이 동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의 조상은 8세기 경 셀주크 투르크와 비잔티움 제국의 전쟁 때 동굴로 피난을 온 뒤 계속 살아왔다고 한다. 이 산악지역에 쿠르트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는데 자신이 바로 그 왕족의 후예라고 자랑한다. 이름이 쿠르트니까 그럴 듯한 얘기긴 한데, 어디 증거가 있어야지. 아무리 둘러봐도 녹슨 왕관 하나 안 보인다. 나의 의심스런 표정을 읽었나? 자신도 1년 전까지는 규축 큐르네라는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것도 직선제로 뽑힌 촌장. 마을에는 70가구 400명 정도가 산다. 말이 마을이지 이 산 전체에 깃들어 사는 인구가 그 정도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촌장의 임무 중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마을에 변고가 없나 살펴보는 것도 있단다. 이번엔 증거가 있다. 고색창연한 쌍안경을 꺼내 보여준다. 알았어요. 왕족이라는 것도 믿어드릴게요. 그는 1년 내내 동굴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는 말라티아 시내에서 살면서 1주일에 한번 씩 다니러 온다. 그의 설명으로는 애들 교육 때문에 나가서 살 수밖에 없단다.

 

방 안에는 TV, 소파, 카펫 등 있을 건 다 있다.

주방은 동굴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

재미있는 건 부인이 3명이나 된다는 사실. 이 나라는 그런 게 가능한 모양이다. 그러면 자식은? 19명이다. 10명은 딸이고 9명은 아들이란다. 그 자식들에게 낳은 손자는 28. 물론 계속 늘어나겠지. 자식 중 몇몇은 이스탄불이나 앙카라에 나가서 산다. 부인이 셋이나 된다니 부럽다고 해야 되나? 밤에는 어떻게 자느냐고 짓궂게 물었더니 대답이 명료하다.

차례대로!!!”

존경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이 동굴까지 도로가 깔리고 전기가 들어온 사연도 자랑한다.

“1985년에 수상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실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닌데 어느 날 말라티아의 공무원들이 찾아오더라고요. 수상이 주지사에게 지시를 했다면서. 그때 길을 만들고 전기도 들어왔지요.”

다시 한 번 그 당시 이 나라의 수상에게 경의를 표한다. 짚 옆으로 아직도 깊은 굴이 있고 안쪽에 커다한 우물이 있다. 물을 한 모금 떠서 마셔보니 굉장히 시원하다.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는 동네의 먹을 것을 이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공동 냉장고였던 셈이다. 여름이면 동네 열무김치 집합소였겠는데? , 이 나라는 김치 안 먹지. 슈크르 쿠르트 씨가 밖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다렌데의 토흐맛까지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대부분 동굴을 통해서 지나가게 돼 있다고 한다.

 

동굴 내부.

동굴 안의 샘.

동굴 길. 아주 먼곳까지 뚫려있다.

 

그 길을 역사의 길이라고 부른단다. 실제로 그는 지금은 막아놓은 문을 열고 동굴로 연결된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긴 설명을 뒤로 하고 그와 작별을 한다. 문을 나서는데 그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텃밭에 있는 시금치처럼 생긴 풀을 따서 내게 내민다. 먹어보라는 뜻이겠지? 성의를 무시할 수 있나. 덥석 입에 넣고 씹어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맛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덤덤한. 속았나?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그만의 작별의식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기대했던 원시적 동굴생활은 아니지만 참 특별한 경험이었다. 너도 나도 도시로 몰려들고 한없이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게 상식인 시대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내려오는 길에 연료로 쓸 쇠똥을 말리는 노인과 마주친다. 묻지 않아도 이곳에서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깊은 주름에 까만 얼굴, 그리고 환한 웃음.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와 정말 닮았다. 말을 안 걸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저 동굴 집에 사는 쿠르트씨, 어떤 분인가요?”

저 사람? 우리하고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평범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평가다. 나는 조금 다른 주거환경에서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온 것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 노인들.점심식사 자리에서 뜻밖에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전혀 귀띔조차 없었는데 말라티아 주정부가 깜짝 선물을 준비한 셈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노인이 세 분이나 나와 있다. 이럴 수가. 가슴이 벅차 한참 말이 안 나온다. 어제 코레 가지손자와 만나면서도 이분들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세상을 뜨고 남은 분들도 모두 80세가 넘었다고 한다. 몇 년 뒤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이다. 한국 국민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여러 분들이 흘린 피 덕분에 저희 대한민국은 번영을 누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만수무강 하세요.“

노인들이 힘차게 박수를 친다. 만수무강의 뜻을 자세히 설명했더니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며 좋아들 하신다. 이분들도 자신들이 피를 흘린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는 감동으로 식사조차 제대로 못한다. 그러면서 앞 다퉈 전쟁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말라티아주에서는 241명이 참전 했는데 그중 6명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지금 참전용사회에는 회원이 31명이란다.

“19527, 배를 타고 23일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어요. 한국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일본으로 가서 보급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가는데 7일이 걸렸습니다. 첫 번째 전쟁을 치른 곳은 전곡이라는 곳이었지요. 그 다음에 군우리에 투입돼서.

 

모두 80세가 넘었다.이분은 세월 탓에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고 미안해한다. 미안하긴요. 정말 미안한 건 저희들인데요. 낯선 땅에 와서 싸워줬다고 언제 제대로 한번 챙겨드려 본 적이 있었던가요. 내 옆에 앉은 노인이 맞은편의 노인을 가리키며 아직도 어깨에 총탄이 박혀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분이 경험담을 이어간다. 자신들은 가는 도중에 배 안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런데도 배는 계속 한국을 향해서 갔고 휴전협정이 맺어진 한참 뒤인 1954년까지 머물다 귀국했다고 한다. 이분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한 분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한 분이 중간에 끼어들기도 하고. 유치원생이 따로 없다. 이거 순서를 정해 드릴 수도 없고 난감한데. 훌리아는 밥도 못 먹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통역을 하느라 바쁘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잊는 건 아닐까. 이분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가슴에 두고 사는데, 당사자인 우리는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가뭇가뭇 잊어버리고 산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억할 건 기억해야 한다. 머나먼 나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 15,000명을 파병해 3,200명이 죽거나 다친 사람들. ‘코레 가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을 바탄(조국),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 부르는 사람들. 이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머리 검은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시장에 진열된 살구.

기쁘고 또 무거운 마음으로 참전용사들과 작별한다. 뙤약볕 아래에 미동도 없이 서서 손을 흔드는 노인들에게 나 역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꾸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젠 다시 만나지 못하리. 오후에는 말라티아 구리시장에 들렀다. 물론 구리제품만 파는 건 아니고 우리의 오일장과 비슷한 재래시장이다. 시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역시 살구와 체리. 조금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발걸음을 멈춘다. 구두 수선가게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 어떻게 한꺼번에 모여 있을 수가 있지? 서울역 뒤 염천교에 구둣방들이 줄지어 있는 것은 봤지만 수선가게들이 한꺼번에 있는 건 처음 본다.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자 일을 하던 사람이나 놀고 있던 사람이나 웬 구경거리냐는 듯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조금 당황스러운데? 내가 구경하는 거야, 이 사람들이 날 구경하는 거야. 젊은이도 있고 나이 지긋한 사람도 있는데 공통점은 앞에 재봉틀을 하나씩 끼고 있다는 것. 카메라를 피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두 활짝 웃어준다. 모델 출신들인가? 골고루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짓을 한다. 바쁜데 왜 부르는 거야. 그래도 뭐가 있을지 모르니 안 가볼 수 없지. 이 친구가 나를 수선가게로 안으로 잡아끈다. 안은 제법 넓고 여러 가지 기계들이 있다. 간단한 수선집들이 아니었구나.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신발을 하나 들고 기계 앞에 서더니 작업을 시작한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 자신이 작업하는 걸 찍으라는 거구나. 전에 어떤 사진쟁이가 와서 연출을 시켰던 게 들림 없다.

 

한 곳에 모여있는 신발수선집들.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누가 뒤에서 툭툭 친다. 이번엔 나이 지긋한 사람이다. 이 가게의 사장쯤 되는 모양이다. 손짓 발짓을 보니 저 녀석을 찍어봐야 별 볼일 없을 테니, 차라리 자기를 찍으란다. 이 동네 사람들. 사진 찍히는 거 정말 좋아하네. 시간이 없어서 대충 몇 장 찍고 도망치듯 나오려니까 청년이 마구 소리치며 따라 나온다. 말은 몰라도 뜻은 금세 알아차린다.

묘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어디 가?!!!”

바빠서 너하고만 노닥거리고 있을 수는 없거든. 미안해. 손님도 없고 심심했던 구둣방 아저씨들, 허겁지겁 뛰어가는 동양인을 보고 가만히 있을 턱이 있나.

헤이~ 재키 찬!!”

재키 찬이라면 영화배우 성룡(청룽)을 말하는 거잖아. 내가 배우처럼 잘 생긴 건 사실이지만, 중국인처럼 보였다는 건 별론데? 약간 목소리를 높여서 한마디 던진다.

재키 찬 죽었어!!!”

멀쩡하게 살아있는 재키 찬 씨, 미안해요. 나도 잠깐 화가 나서 그런 거지 진심은 아니었어요. 내가 당신 영화 얼마나 좋아하는데.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어느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뭐지? 뭐지?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니 커피 가게다. 원두커피를 직접 가루로 만들어서 봉지에 담아 팔고 있다. 커피를 끓이는 도구들도 진열돼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구나.

 

커피 가게. 가루커피를 담아서 판다.

수작업으로 그릇을 만들고 있다.

터키하면 차이, 즉 진한 홍차를 떠올리기 쉬운데 커피야 말로 터키 사람들이 애호하는 차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터키 커피 이야기를 좀 하고 갈까. 터키 커피는 곱게 빻은 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작은 잔에 따른 다음 위에 뜬 액체만 마신다. 바닥에 남은 가루로는 점을 치기도 한다. 터키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6세기부터 커피를 즐겼다. 커피를 터키어로 카프베라고 하는데 커피를 마시는 장소 역시 카프베라고 부른다. 1544년 이스탄불에 문을 연 카프베가 바로 오늘날 보통명사로 굳어진 카페의 원조가 되었다. 터키 사람들이 얼마나 커피를 즐겼으면 금지령까지 내렸을까. 마약이나 술도 아닌데. 금지령이 내린 이유는, 종교적 차원에서 커피의 흥분작용을 경계한 것도 있지만 카프베가 정치적으로 불온분자의 온상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라트 4세 때인 1633년의 금지령은 계엄령보다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오스만 제국령 내의 모든 카프베가 폐쇄됐고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커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금지령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터키 사람들이 특히 즐긴 것은 커피 자체보다는 카프베라는 휴식 장소였다. 그곳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지식인, 시인 등이 모이는 카프베, 예니체리의 카프베, 신비주의자들의 카프베 등으로 분화되어 각각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의 카프베 수는 16세기 말 600개를 넘었다고 한다.

 

 

대장간의 다정한 형제.

새로 사귄 친구 세레프.

커피가게 구경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구리시장을 돌아본다. 허름한 가게에서 각종 구리 그릇이 만들어져 나온다. 컵 같은 소품에서부터 주전자, 커다란 물통까지 턱턱 만들어낸다. 장인들은 모두 노인이다. 이곳 젊은이들도 이런 궂은일은 배우려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는 결국 맥이 끊기겠지. 노인 둘이 벌겋게 달군 쇠에 메질을 하며 낫을 만드는 대장간을 구경하다가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 늙수그레한 사진사 하나가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길래 말을 걸었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한다. 이스탄불에서 온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프리랜서로 잡지와 계약해서 사진을 찍어 보낸단다. ? 내가 하고 싶은 일이잖아. 느닷없이 솟아오른 동료애에 손을 맞잡고 한참 흔든다. 헌데, 이 사람 동양인 하면 전부 일본인인줄 아나보다. 몇 마디 아는 일본말로 연신 뭐라고 한다.

난 한국 사람이라니까. 이제 일본말 잊어버리고 한국말을 배워요.”, 머리 아파요. 이 나이에 어떻게 남의 나라 말을 배워.”

오케이, 오케이. 그럼 내가 터키 말을 배우지 뭐.”

나이를 물어봤더니 59세란다. 무슨 50대가 이렇게 늙었어? 나는 아저씨벌인 줄 알았네. 객지 벗은 15년까지 맞먹어도 된대. 우린 지금부터 친구야. OK? 유쾌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시장바닥을 누빈다. 그렇게 이 지구에는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긴다. 그의 이름은 'Seref'. 새로 사귄 친구 두 명 때문에 구리시장이 잠시 시끄러워진다.

 

 

시장에 있는 솜틀집.

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들.

나는 장터만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다. 솔직히 말하면 반 미친놈이 된다. 어쩌면 내 전생이 장돌뱅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시장에는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도 많다. 솜틀가게 앞에서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는데 한 사내가 서서 내 카메라와 자기를 번갈아 가리킨다. 사진 찍어달라는 거지요? 오케이, 오케이. 얼마든지.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이번엔 친구를 데려온다. 둘이 같이 찍어달라는 얘기다. 내가 좀 이상하게 생겼나? 아니면 재미있게? 길을 지나다 보면 말을 붙이고 같이 놀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실실 웃으며 걸어 다녀서 그러는 건가? 여행이 행복해서 그래요. 이번엔 가족과 서 있던 여인 하나가 계속 나를 주시하더니 눈길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메르하바를 외친다. 사양할 리 없지. 나도 즉각 메르하바. , 말라티아. 정말 마음에 드는 도시다. 떠나기 싫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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