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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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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우연히 머물게 된 마을의 모스크와 첨탑.

식물학대? 조롱박에 새겨진 이니셜이 재미있다.


시골동네를 혼자 거닐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큐팀의 일정을 체크해보니 울트라마라톤 참가 선수들 인터뷰가 잡혔다고 한다. 울트라마라톤은 2000년 전 리키아의 도시들을 달리는 것인데 그 거리가 무려 240km, 정식마라톤의 6배에 가깝다. 공식명칭은 리키안웨이 마라톤. 올해가 2회째다.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니 그때나 만나볼 생각으로 다큐팀과 따로 움직이기로 한다.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은데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혼자 걷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행과 헤어진 곳은 유령도시카야쾨이로 들어가기 전의 조그만 마을. 마라톤 출발지가 그 근처다. 동네 이름은 KÖI MUHTARLIGI(?) 이 이름을 100% 장담하지 못하는 건 말이 통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돌무시(Dolmus, 미니버스) 정류장의 간판을 베꼈기 때문이다. 터키의 시골동네는 우리의 시골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마치, 아주 오래된 면소재지쯤 거니는 것 같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잘 가꿔놓은 화단. 한쪽에는 조롱박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그 중 하나에 누군가 ‘GS’라고 큼직하게 새겨놓은 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심은 사람이 이건 내거야하는 뜻에서 이니셜을 새겨놓은 것일까? 한쪽에서는 석류가 익어간다. 터키, 지중해 쪽을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과일 중 하나가 석류다. 시장에서는 빨갛게 벌어진 석류를 즉석에서 주스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마을 곳곳에 석류가 지천이었다.

이발소 앞의 평상? 손님이 없을 때 이발사가 쉬는 곳인 듯.

조롱박과 석류를 구경하다보니 ‘BERBER’이라고 세로로 써놓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발소라는 말 ‘barber’의 터키식 표기인 모양이다. 아니면 barber의 오기(誤記)일 수도. 터키는 라틴문자를 빌려서 만든 문자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한다. 과거 튀르크 제국 시대에 세워진 오르혼(Orkhon) 비문을 보면 자체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지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문자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면 글자까지 조국을 잃는 것이다. 그 뒤 튀르크인들은 오랫동안 아랍 문자를 빌려서 자신들의 말을 적었다. 하지만 배우기가 무척 어려울 뿐 아니라 악센트가 거의 없는 터키말의 특징을 표현하는 데는 2%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터키의 아버지 아타 튀르크, 즉 무스타마 케말이 등장한다. 터키공화국이 건립될 당시, 인구의 90% 가까이는 문맹이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케말은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한다. 우리의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위대한 통치자(혹은 독재자)들은 백성을 위하는 것부터가 남다르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케말 정부는 1928년 새로운 문자를 발표한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글자를 가르쳤고 온 국민이 익힐 수 있도록 교육했다. 새 문자는 배우기가 쉬워서 요즘은 문맹률이 거의 0수준이라고 한다.

아주 작은 동네 이발소.


터키 글자 한번 배워볼까요?

글자는 영어 알파벳과 비슷하고 어순은 우리말과 같아서 한국인도 배우기 쉽다고 한다.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로 현지에서 합류한 엄상욱 씨 말에 따르면, 빠른 사람은 3개월이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다고 한다. 자모체계는 자음 21개와 모음 8, 모두 29개로 이뤄져 있는데, 순서는 알파벳과 똑 같고 발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중간 중간에 Ç Ü Ö 등이 추가돼 있다. 영어와 비슷한 단어들도 많다. 예를 들면 은행이라는 단어 bank‘banka’로 쓰고 반카로 읽는다. 느닷없는 터키어 공부는 이쯤 하고, ‘BERBER’라 썼든 barber’라 썼든 내가 서 있는 곳이 이발소 앞인 것만은 틀림없다. 손님은 단 둘.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지고 수염이 탐스러운 이발사는 꼬마아이의 머리를 깎고 있다.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서 이발소 안의 풍경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의자도 사람도 우리의 옛 모습과 비슷하다. 아이의 찡그린 표정도 어찌 그리 정겨운지. 마치 거울 속에 있는 어릴 적 나를 만나는 것 같다. 키가 작은 저 아이의 엉덩이 아래에는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지 않을까? 혹시 머리에 땜빵(기계충 자국)은 없을까? 괜스레 머릿속에 온갖 그림을 그려본다.

 

저 개에게 심한 위협을 당했다. 저만치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어디 가나 개조심!!

기웃기웃 들여다보다 소파에 앉아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친다. 쉽게 웃어주는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엄숙한 표정에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네 이놈, 거기서 뭐하는 게냐?’ 하는 얼굴. 그러고 보니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노인들의 표정은 좀 무겁다. 석관이 있던 거리에서 마주친 노인들도 정물화속 인물 같았다. 격동의 시절을 살아온 우리네 노인들처럼, 삶의 핍박이 표정마저 빼앗아간 것일까. 이발소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작정 같은 건 없다. 그저 두 다리를 내비게이션 삼아 걸을 뿐. 마을 한 가운데로 난 길을 지나가는데 커다란 철대문 안쪽에서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있다. 집에서 타고 나온 자전거는 곁에 자빠트려 두었다. 도와주려고 가까이 가는 순간,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린다. 헛걸음!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간 소녀는 금방 돌아온다. 손에는 달걀이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다. 이번엔 문을 여는데 애 좀 먹는다. 한손에 달걀을 들었으니 놓을 수도 없고. 얼른 뛰어가 문을 밀어준다. 문이 쉽게 열린 건 좋았는데, 그 대가로 나는 위기에 직면한다. 저만치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바람처럼 달려온다. 낯선 사람이 제 어린 주인을 해치는 줄 안 모양이다. !! 이 먼 곳까지 와서 개한테 물려죽는구나.

개에게 놀란 내게 미소를 보여주던 카페 여주인.

저 여인은 지붕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을 닫은 또 하나의 이발소.


개에게 물릴뻔한 순간

다행이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얼른 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얼마나 큰 집에서 살기에 집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나. 경황없는 중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집자리의 규모에 감탄부터 한다. 개는 아직도 대문 앞에서 컹컹 짖어대며 을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엄청나게 크고 무섭게 생겼다. 그제야 대문에 그려놓은 개 조심이라는(이라고 짐작되는) 글자가 보인다. 겁을 주려는지 개도 함께 그려놨는데 실제보다 더 무섭게 생겼다. 저게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캉갈이란 개인가? 그냥 지나갈 걸 괜히 오지랖 넓은 짓을 해가지고. 놀란 가슴을 달래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여주인이 지켜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다. 저게 무슨 뜻이지? 고소하다는? 괜찮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면 너 맘에 든다는? 그래도 그녀의 미소를 보니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된다. 몇 마디 나눠보고 싶지만 손짓 발짓만 하다 그칠 것 같아서 그만 둔다. 다시 걸음을 옮겨 돌무시 정류장에도 앉아보고 여기저기 사진도 찍는다. 지붕 위에 올라가 뭔가 일을 하는 여인의 뒤로 모스크의 첨탑이 파랗게 빛난다. 아직도 이렇게 뜨겁지만 가을이 저만치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조금씩 여물어 가고 있다.

축구공을 굴리며 친구를 찾아가는 아이.

옛날 우물에 간판과 메뉴를 달아놓은 카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들.

걸음을 옮기다가 축구공을 몰고 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씩 웃어줬지만 공에 정신이 빼앗긴 녀석은 그냥 지나간다. 짜식~ 한번만 웃어주지. 잠시 뒤 또 다른 이발소와 마주친다. 그런데 여긴 BERBER가 아니라 BARBER라고 썼다. 하지만 문을 닫은 듯 쇠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저쪽의 BERBER는 목하 성업 중인데 BARBER는 망하다니. 간판을 영어식으로 써서 그랬을까? 그럼 BERBER네 아저씨 머리는 누가 깎아주나? 나그네는 쓸데없이 궁금한 게 많다. 우물이 있던 자리를 예쁘게 꾸며놓고 간판을 세워둔 카페 앞에 이른다. 마당 그늘에는 노인들이 여럿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주사위와 말판이 보인다. , 저게 타블라스라는 게임인 모양이구나. 모두들 게임에 푹 빠져서 누가 왔는지 가는지도 모른다. 고스톱이라면 나도 한판 끼어볼 텐데. 다시 이리저리 배회한다. 평생 살면서, 아니 어른이 되어서 이런 시간을 가져본지가 언제던가. 전국을 내 집 마당처럼 쏘아 다니면서도 늘 쫓겨 다녔다. 오늘은 맘 놓고 게으름 한번 피워보자. 조금 커 보이는 슈퍼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베개만한 빵들이 진열돼 있다. 이젠 시골에서도 식사용 빵을 직접 만들지 않고 가게에서 사다먹나 보다. 물을 사러오는 사람도 많다. 터키는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 그냥 먹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밖에도 수박, 메론, 사과, 감자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슈퍼마켓.

슈퍼마켓의 베개만한 빵들.


슈퍼에서 만난 소녀

목이 마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소녀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부모님 대신 가게를 지키는 것 같다. 아이가 참 예쁘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상냥하게 웃는다. 귀여운 것. 이 정도면 OK라는 뜻. 찰칵! 셔터를 누르는데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살짝 웃어준다. 심봤다!!! 소녀와 눈인사를 하고 나와 가게 맞은 편, 길 건너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한참 뒤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동네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심 가득한 눈길로 나를 흘끔거린다. 심지어 아이들은 내 곁을 뱅뱅 돈다. 소문이 났는지 일부러 구경삼아 나와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느닷없이 나타난 작달막한(그렇다고 그들이 큰 건 아니지만) 동양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동네에 앉아있는 걸 처음 보는 모양이다. 양 손에 생수통을 들고 가던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이가 거의 빠져서 입이 동굴처럼 컴컴하다. 내 할아버지를 먼 나라 땅에서 만난 기분이다. 이번엔 서양인이 지나간다. 그도 눈웃음을 짓는다. 에라, 이런 땐 무조건 “Hi”. 그도 “Hi”로 대답한다. 나그네끼리 인사쯤이야 인색할 게 뭐 있으랴. 마음이 넉넉해진다.

 

슈퍼마켓의 예쁜 소녀.

어차피 줄 것도 없는데 구경거리 좀 된들 어떠랴.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 많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예쁜 아가씨 둘이 힐끗 힐끗 쳐다보며 가길래 손을 흔들어줬더니 웃음이 구슬처럼 쏟아져 길 위에 구른다. 그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깔깔거릴 나이긴 하다. 이 동네 괜찮은데 눌러 살까? 잠시 뒤 아이 아버지, 즉 슈퍼의 사장이 돌아온다. 이 친구는 내가 좀 구체적으로 이상한 모양이다. 자기 가게 앞에 앉아서 수첩에 연신 뭔가 적지를 않나,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질 않나. ‘저놈이 대체 누구지? 세무서에서 나왔나? 애들 시켜서 확 묻어버려?’ 그의 복잡한 머릿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사실 그는 순둥이처럼 생겼다. 그래서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인데도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곁으로 오더니 수첩을 들여다본다. “Do you know Korea?”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돌아오는 건 어색한 표정뿐이다. 영어가 금시초문인지 코리아가 초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양쪽 모두일 것이라고 짐작만 해본다. 터키에 와서 코리아라는 단어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하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한글이라고 알 턱이 있나. 수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뭐 이런 글씨가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떠날 때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 자전거를 타고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저씨의 순박한 미소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상태에서 착한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겉보리 훔쳐 먹은 말처럼 잇몸까지 보여주며 히히힝~ 웃어주는 수밖에. 그제야 그도 경계를 풀고 미소를 베어 문다. 얼굴 가득 순박이라고 씌어있다. 어쩌면 이 미소를 보기 위해 이 동네를 서성거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잃어버린 웃음. 그렇지만 그는 웃음 정도로는 확신이 안 서는지 뭉그적거리고 서서 탐색을 계속한다. 세무서에서 보낸 간첩 아니라니까요. 에구, 답답해라. 당신의 딸이 예쁘니까 좋은 얘기만 써줄게요. 아참, 내겐 무기가 있지. “아저씨, 가게 앞에 가서 서보세요. 사진 멋있게 찍어줄게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손짓 발짓이다. 그래도 뜻은 금세 통한다. 얼른 가게 앞으로 가서 선다. 하지만 표정은 밀랍인형처럼 굳어있다. 그래도 기념으로 찰칵!!!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진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긴, 피곤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고 저녁 무렵인데도 ISO를 안 높였으니 흔들릴 만도 하다. 주소를 모르니 어차피 보내줄 수도 없지만, 성의껏 포즈를 잡아준 아저씨에게 미안하다. (미안해요, 슈퍼아저씨!) 어느덧 석양이 산마루에 걸린다. 이제 돌아갈 시간. 오랜 시간 신세를 진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자전거를 세워놓고 놀던 아이가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근처에 있던 동네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배웅을 한다. 나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마치 명예주민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나 정말 여기서 살까봐.

 

미소로 정을 나눈 슈퍼마켓 사장님. 피곤이 극에 달해 사진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일행과 합류해서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마을 쪽으로 시선이 간다. 이 작은 동네에서 보낸 한 나절이 화석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시간은 어찌 그리 느릿느릿 흐르던지, 그곳에서는 하루가 48시간은 될 것 같았다. 이 글을 읽은 분 중에 터키 카야쾨이에 가셨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서 EKiZLER MARKET라는 간판을 보시거든 꼭 들어가 보시길. 간판 끝에 적힌 TEL 618 0106 같은 숫자는 신경 쓰지 마시길. 가게 안에 예쁜 소녀가 앉아있거든, 어느 늦여름 날 다녀간 동양인 하나 기억하느냐고 물어봐 주시길. 고개를 끄떡이거든, 그 사내가 두고 떠난 영혼 한 자락 아직 잘 있느냐고 물어나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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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유령도시' 카야쾨이

페티예로 가는 길

페티예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문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해변이 나타나고, 그 해변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늦여름의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들은 고향에 온 듯 정겹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조금 넓은 도로로 접어든다. 곳곳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짙푸른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언젠가 직접 운전해서 이 길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원지대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륙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 중간에 주유소 겸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간다. 터키의 기름 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휘발유 값을 적어놓은 입간판을 보니 리터당 3000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차는 무척 많다. 그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윈도우브러시 하나 공짜로 받은 적 없지만 괜스레 뿌듯하다. 터키인 가이드는 쓸데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볼멘소리다. 어딘들 안 그럴까.

보드롬에서 페티예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만난 비치. 9월말인데도 여름이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창밖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다. 잠시 뒤 멀리서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페티예 시내로 진입한다. 페티예는 전날 묵었던 보드롬보다 큰 도시로 인구도 5만 명이 넘는다. 물론 여름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10만 명이 넘게 북적거린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산다. 이왕 일행이 됐는데 정식 상견례 겸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K가 바람을 잡았다. 나로서야 술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호텔에 도착하니 아홉시. 부지런을 떨어야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을 거 같다. 호텔 이름은 ‘Marina Vista’. 역시 자그마한 호텔이다. 어제 묵었던 곳과 달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페티예에서는 일정이 많아 이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야외식당으로 가니 닭요리가 나온다. 뷔페식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찜닭 같기도 하고 백숙 같기도 하고…. 점심에도 닭고기를 먹었는데, 전생에 터키 쪽에 사는 닭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경구가 어디 틀려본 적 있던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닭 아니라 돌을 구워 와봐라. 내가 외면하나.

고속도로의 휴게소.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터키의 주유소. 기름값이 우리나라보다 꽤 비싸다.

술병을 전멸시키다

식사를 하는데 인근 음식점에서 느닷없이 함성이 터진다. 저 정도 함성이면 축구중계를 하는 게 틀림없다.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말 그대로 ‘광적’이다. 터키의 프로축구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고 크다. 1959년부터 리그가 시작됐고 팀은 1부 리그에 18팀, 2부에 20팀이 있다. 축구경기장은 늘 도가니처럼 뜨겁다. 열정적이고 급한 국민성이 그곳에서라고 달라지랴. 야유나 욕설이 난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명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곳곳에서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음식점마다 응원열기로 들끓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하는 팀의 깃발을 휘날리며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벌였던 그 ‘광란의 밤’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터키인 가이드 이믿음 씨 역시 축구광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축구중계를 하는 시간에 일을 하자고 하면 표정이 헐크처럼 변한다. 식사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해 본다. 호텔에서 준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이파이 표시. 우와! 고마운 것. 이것저것 체크하고 회사 일을 몇 가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시작한 김에 카톡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불러볼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거긴 새벽. 단잠을 깨울 수는 없으니 포기.

Marina Vista 호텔의 수영장.

페티예에서 3일동안 묵었던 Marina Vista 호텔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준비됐다는 전갈이 온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따지고 보면 사흘밖에 안됐다) 술 욕심이라면 이태백도 울고 간다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 라크(LAKI)라는 술이 손을 자꾸 끌어당긴다.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뒤 향료를 첨가해 만든 술이다. 잔에 따르면 무색투명한데, 거기에 물을 붓는 순간 우유처럼 부옇게 변한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사자의 젖이란 뜻의 아슬란스투라고 부른다. 터키 아니면 감히 어디서 사자의 젖을 먹어보랴. 중국술이 그렇듯이 독특한 향이 있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의 젊은 친구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대부분 찡그리며 내려놓는다. 향도 향이지만 젖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내가 언제 맛보고 도수 봐가며 술을 마셨더냐. 술이라면 온갖 미련을 떠는 나, 결국 그 한 병을 혼자 몽땅 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너스로 맥주 몇 캔 추가. 이 정도면 차라리 걸신이다. 한두 명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날 사온 술병들을 대부분 자빠트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새벽 2시. 어제 잠을 설쳤으면 정신 좀 차릴 만하건만 또 일을 저질렀다. K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닷가니 ‘개닭’은 안 울 것 같다. 몇 시간이라도 자봐야지.

카야쾨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기념품가게. 산 사람은 또 저렇게 살아가는 법.

카야쾨이 마을로 올라가는 길.

카야쾨이로 가다

새벽, 알람에 의지해서 힘들게 눈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천근만근 속은 울렁울렁이다. 과음한데다 기껏해야 네 시간 밖에 못 잤으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저리 아름다운데 내 몸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뒤뚱거린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아무리 찾아봐도 해장국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나. 이것저것 챙겨들고 식탁으로 갔지만 쓰라린 뱃속은 그 무엇이라도 거부할 태세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내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한다는 자가 그리 술에 욕심을 내다니. 체력을 비축하고 시간을 잘 나눠 써야 하는 여행자에게 과음은 금물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탐할 바에야 여행자보다는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면 된다. 애당초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에 맞게 즐기면 될 터이다. 이런 땐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의 철칙을 배신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야외식당은 바다에 이어 테라스처럼 만들어놓아서 풍광이 그만이다. 지중해의 아침은 괜히 배신감을 느낄 만큼 아름답다. 곤두박질친 햇살이 자맥질을 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비늘들을 잔뜩 건져 올린다. 그 사이로 날렵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지중해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돌집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꽤 높은 건물이었던 듯.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카야쾨이(Kayaköi)로 향한다. 일명 ‘유령도시(ghost town)’로 불리는 이곳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주민들이 떠난 뒤 폐허가 된 마을, 사람 대신 빈집을 지키는 돌덩이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곳. 카야쾨이의 슬픈 사연을 말하려면, 거창하게도 세계1차 대전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잠시 다리쉼 하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보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터키의 주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한쪽에서 구경하다 떡이나 얻어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쇠약해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의 선택은 엉뚱하게도 독일 쪽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게 어디 한 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의 패망과 함께 사돈 따라 장에 갔던 터키 역시 집도 절도 잃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떼같은 젊은이들 수십만 명을 잃은 채…. 결국 패망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게 바로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고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반도만 달랑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실질적 주권조차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마을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교회로 가는 길.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이 대목에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맹한 돌궐의 후예 튀르크족이 아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분노는 곧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된다. 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다. 조금 복잡해지니까 이 ‘위대한 독재자’를 해부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자. 저항이 만만치 않자 연합국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세브르조약을 파기하고 터키의 요구를 반영한 로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923년 7월4일 새 조약은 체결됐지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도 이날 시작된다.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연합국은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스탄불이 있는 유럽 쪽 영토를 포기하고 에게해 섬들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탄불을 갖는 대신 인근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할 것인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고심 끝에 섬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터키 연안의 모든 섬들은 그리스 영토가 된다. 곧 이어 그리스 땅에 살던 터키인은 터키로, 터키 땅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진다. 터키에 살고 있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강제로 터키를 떠나야 했고, 그리스에 있던 40만 명의 터키인이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1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교회의 내부.

손가락을 꼽는 정도의 셈법으로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각자 제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그들은 그리스국민, 터키국민이라는 이름의 ‘국민’이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연인이었다. 누대로 살아왔으며 낳고 자란 땅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가가 뭐 해준 게 있다고 태를 묻은 땅을 떠나라는 것인지. 그들은 울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다. 노인도 아이도 예외 없이 그 행렬 속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폐허가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카야쾨이다. 고증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서는 BC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5천년이나 이어온 마을이다. 터키니 그리스니 하는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사라지기 전, 1922년까지는 3000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2개의 교회와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 가서 살아야 할 나라, 그리스 말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뒤 아주 오랫동안, 카야쾨이 출신의 그리스 노인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땐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했던가. 죽기 전에 낳고 자란 땅을 보고 싶었겠지.

부천에서 온 아가씨. 혼자 여행하는 용기가 아름다워 오래 바라보았다.

용감한 그녀를 만나다

차가 카야쾨이로 들어서면서, 원(怨)이 응결된 곳 특유의 음산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비탈 가득 회색빛 빈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다. 그들은 애당초 왜 넓은 땅을 두고 저 비탈에 집을 지었을까. 유령마을 입구에 두어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와 머플러 등을 판다. 남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자리가 있어 이들은 먹고사는구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석조주택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돌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페티예대지진도 견뎠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어? 동양인 여자다. 우리 일행은 아닌데, 누구지? 도시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동양인을 이 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아니, 동양인이 아니라 분명 한국인이다. 아, 핏줄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직감을 믿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이리 신기할 데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 골짜기에 와 있다니. 한OO. 26세. 부천 거주.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모두 해외여행에 쓰기로 했단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터키였다. 그래, 잘했네. 세상이 학교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시간은 집 안에도 저만한 나무들을 키워놓았다.

돌담을 뚫고 자란 무화과나무.

혼자 다니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원래는 일행이 있었단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서 만나 같이 떠났는데 몇 곳을 거쳐 오면서 각자 다니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버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외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씁쓸달콤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17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 앞에서 서울에서 온 남자와 부천에서 온 여자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긴 얘기를 나눈다. 내 나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만났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 인연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돌담 사이 오솔길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평생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길. 또 홀로 되어 언덕을 오른다. 깃대가 우뚝 솟은 저 건물은 학교였을까? 아니면 촌장이 살던 집? 공회당? 혼자 걸으며 상상 속에 빠진다. 작은 집도 있고 제법 큰 집도 있다. 저쪽, 아슬아슬한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저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빈 집은 슬픔이다. 슬픔만 차 있는 게 싫었던 걸까. 시간은 집 안 곳곳에 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심어 키워냈다. 방이었던 곳에서도 부엌이었던 곳에서도 홀로 열려 익어가는 무화과들, 강제로 떠나야했던 그리스인들의 눈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도마뱀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들이 마을의 주인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눈에 띈 식물. 에델바이스인 줄 알았다.

난 유령을 만나고 온 걸까?

내친 김에 마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곳곳에서 낯선 식물들을 만난다. 에델바이스 같기도 한 이 식물의 이름은 무얼까? 어느 집 벽에서 놀던 무지갯빛 도마뱀이 낯선 나그네를 향해 잔뜩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마을의 주인이구나. 너희들은 강제로 쫓겨나지 말고 오래 오래 이곳을 지키렴. 옛날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을 골목길. 이제는 오솔길이 되어 나그네의 허허로운 발길 아래 게으르게 누워 있다.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다. 이리 저리 둘러보지만 잔뜩 야윈 내 그림자만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문득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다. 원래 이곳이 세상이었거늘. 뒤따라 올라왔던 사람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나 보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듯 낯설다. 그 낯선 이름이 유령처럼 웅웅웅 울며 빈집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온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렵다. 그대로 돌 위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목욕이라도 한 듯 땀에 젖었다. 과음과 수면부족 때문이겠지? 아니, 그게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정말 저곳에서 유령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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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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