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춘포'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9.22 [사라져가는 것들 77] 춘포(春布)길쌈13
2008. 9. 22. 10:26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쎄… 요새는 몸이 아파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화기를 타고 오는 노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단박에 거절해야 된다는 생각과, 그러면 안 된다는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낯선 사람과의 침묵을 먼저 못 견뎌한 건 노인이다. “잠깐 기다려 봐유“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뜨겁지만, 끝까지 버텨보기로 한다. 잠시 뒤 전화기 안으로 바깥노인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노인은 의외로 선선하다. 무슨무슨 책을 쓰는 누구누군데 찾아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춘포짜기를 만나기 위한 첫발을 그렇게 떼었다. 더 늦기 전에 찾아봐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에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춘포는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명주실을 날실로, 모시를 씨실로 하여 짜는 천을 말한다. 올이 가늘고 빛이 고운 덕에 예로부터 잠자리 날개로 불리기도 했다. 통풍성과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번 지으면 평생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노란 빛깔을 띠는데, 이는 치자로 물을 들이기 때문이다. 주로 봄에 입기 때문에 춘포라고 불렀다. 오로지 청양지역에서만 이 춘포를 짰는데, 그나마 이젠 단 한 집안만 남아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양군 운곡면 후덕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5호 백순기 할머니(82세)가 사는 동네다. 그 동네를 찾은 건 늦여름 햇살의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8월말이었다. 청양은 평야지대인 예산과 홍성, 그리고 공주와 보령에 둘러 쌓여있지만 충청도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 오지다. 하지만 후덕리는, 그 이름 때문인지 한 눈에도 후덕해 보이는 들을 끼고 있다.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듯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길을 묻기도 쉽지 않다. 마을에 도착해 몇 집을 기웃거리다 결국 전화를 건다. 파란담장집이라고 해서 둘러보니 바로 눈앞에 두고 헤매고 있었다. 마당에서 허리가 바짝 구부러진 바깥노인 한 분이 깻단을 나르다가 반갑게 맞는다. 이상준(82세) 할아버지다. 노인의 미소가 천진불처럼 푸근하다. 다짜고짜 대문 안으로 끌더니 손에 잡히는 방석을 하나 집어던지며 앉으란다. 엉덩이를 채 붙이기도 전에 노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 그리웠음에 틀림없다. 이야기는 대동아전쟁 때 관동군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대목부터 시작된다. 신의주를 거쳐 봉천까지 끌려갔었다고 한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평생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 공덕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진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금 있으려니 할머니 한 분이 안채에서 나오더니, 미처 이쪽까지 건너오지 못하고 토방 의자에 않는다. 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춘포를 짜는 백순기 할머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동갑내기 두 노인은 금슬이 무척 좋아 보인다. 할머니가 이쪽에 대고 큰 소리로 묻는다. “시골늙은이 뭐 볼 게 있다고 찾아온대유?” 대답 역시 자연스럽게 큰 소리가 된다. “여쭤 볼 게 있어서요. 서울에서는 할머니가 유명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섬돌 위에 앉는다. 신산했을 삶이 깊은 주름으로 새겨져 있다. 할머니는 곁에 앉아서도 별 말이 없다. 모든 말을 할아버지가 대신한다. 인터뷰고 뭐고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듣고 싶었던 사연이 모두 들어있다. 백순기 할머니는 열아홉에 혼인을 했다. 인연이 그랬던지 처녀 적부터 길쌈을 배웠다고 한다. 시집을 오자마자 춘포를 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따져도 63년이다. 집안으로 보면 4대째 춘포를 짠다고 한다. 둘째며느리에게 물려준다니 5대째로 이어지는 셈이다. 지금 쓰고 있는 베틀도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수줍게 고백한다. “10년 전에 살짝 풍을 맞았슈. 그래서 이젠 베틀 앞에 앉아도 전처럼 일을 못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부는 춘포 짜는데 필요한 모든 걸 자급자족한다. 아직도 1300평의 밭에 모시농사를 짓고 명주실을 뽑기 위한 누에도 직접 친다. 할아버지는 전만큼 많이는 못한다고 한숨이다. 스스로의 몸을 건사하기도 힘겨워 보이는 노인들이 농사를 짓다니…. 누에를 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걸 농촌출신들은 안다. “평생 베틀 앞에 앉은 죄지….” 할머니는 베틀과 함께 해온 삶을 한탄처럼 말하지만, 원망이나 회한보다는 그리움이 더 많이 묻어나온다. 초점 없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멀리 둔 시선에는 무상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득하다. 젊어서는 3~4일이면 춘포를 한필씩 짜냈다는데 이제는 베틀 앞에 앉기도 힘들어졌으니. 할아버지가 방으로 잠깐 들어오라고 하더니 이것저것 주섬주섬 내놓는다. 그동안 신문과 잡지에 났던 춘포에 관한 자료, 각종 경진대회에서 받은 상장과 표창장, 춘포로 지은 옷 등이 끝없이 쏟아진다. 춘포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이상준 할아버지의 모친이자 백순기 할머니의 시어머니인 양이석씨부터이다. 고(故) 양이석씨는 춘포짜기 초대 기능보유자였다. 백순기 할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았고, 이 기능이 둘째며느리인 김희순(52세)씨에게로 넘겨졌다. 대전에 사는 김씨는 춘포짜기 기능전수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베틀 앞에 앉으라고 권한다. 할머니는 먼저 춘포로 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사진을 찍어야하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몸이 불편한 노인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묵지근해진다. 한쪽 손이 불편하니 옷고름 매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지만 가슴에 얹힌 바윗돌은 여전히 천근이다. 할아버지는 연신 괜찮다며 되레 민망한 표정이다. 할머니가 베틀에 앉아 느린 손으로 춘포를 짜는 내내 경건한 마음으로 셔터를 누른다. 춘포를 짜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복잡하다. 뚝배기에 누에고치를 넣고 끓이면 고치가 풀어지면서 명주실이 나온다. 그 것을 왕채(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을 감는 기구)를 이용해 얼레에 감는다. 그 다음 딴 틀에 매고 도투마리(날실을 감는 틀)에 감는다. 이때 치자물을 들이고 풀을 먹인다. 감아진 토투마리를 베틀에 올려놓고 잉아(베틀의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 올리도록 맨 굵은 실)를 건다. 이렇게 완성된 베틀에 모시실(씨실)과 명주실(날실)을 사용하여 천을 짠다. 실을 뽑고 길쌈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기구만도 20가지가 넘는다니 절대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베틀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실을 잣는 물레질까지 시연해 보인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까지 참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사실 춘포짜기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백순기 할머니의 며느리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삶의 방편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업으로 하는 춘포짜기는 백순기 할머니가 마지막이란 이야기가 된다. 조선 후기에 시작되어, 1940년경부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청양 춘포. 한때 운곡에서는 집집마다 춘포를 짰다고 한다. 춘포 메고 장에 갔다가 술독에 빠져 마누라에게 경을 친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상준 할아버지는 엊그제 일인 양 헐헐 웃는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하나 둘 베틀에서 내려오더니 이제는 아무도 안한다고 한숨이다.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춘포 짜는 걸 배우려 하지 않는다. 별의별 옷감이 쏟아지는 시대에, 춘포가 각광받을 만한 게 아니란 건 분명하다. 그래도 사라져가는 것들 앞에 서면 피붙이와 이별을 하는 듯 가슴이 저리다. 금방 배달될 테니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고 가라는 걸, 다음 일정을 핑계로 부득부득 길을 나서면서도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이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