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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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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2.24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7] 아! 매창①
2012. 12. 24.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매창의 묘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니,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군요. 이번에 빠진 늪은 너무 깊어,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백하고 싶어도 고백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절망이란 말조차 사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녀의 무덤으로 향하는 걸음은 열병으로 달뜬 아이처럼 허정거립니다. 쓸쓸한 사랑이 묻힌 무덤에도 가을빛은 명주실처럼 풀어져 내립니다. 잔디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한 여름 그 창대 같던 날카로움이 누그러져 있습니다. 햇살은 무슨 말인가 전하려는 듯 자꾸 주변을 맴돌지만 둔감한 저로서는 요령부득일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매창입니다. 그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시조 한 수를 소개합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를 다른 말로 하면 배꽃 비입니다. 심술궂은 바람에 배꽃이 펄펄 날리는 어느 봄날. 시를 읊조리며 눈을 감고 있으면 수백 년 전의 풍경 하나가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꽃비 아래에 서서 이별하는 연인. 시간은 무심해서 봄날의 꽃비는 순식간에 가을의 낙엽으로 바뀝니다. 달리는 건 시간뿐이 아닙니다. 그리운 마음에도 날개가 있어 천리의 공간을 뛰어 넘습니다. 하지만 몸은 늘 그 자리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사랑의 덧없음으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입니다. <이화우>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절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조를 지은 이가 바로 제가 서 있는 무덤의 주인 매창입니다. 절절한 시에 왜 사연이 없겠습니까. 지금부터 서른여덟 해를 살얼음 딛듯 살다 간 한 여인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매창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제 짧은 지식 안의 매창은 <이화우>라는 시조를 지은 조선의 기생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그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천향(天香)이라는 자() 와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가진.‘이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여인에게 하늘 향기라는 자와 매화가 어른거리는 창이라는 호가 있었다고? 궁금증에 그냥 지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이 어떤 시대입니까. 가부장 중심의 견고한 틀 속에서 여성이 이름을 쓸 기회란 없었습니다. 사회활동은 극도로 제한돼서, 집 안에서 일하고 후대(後代)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 요구받았습니다. 비록 기생이라는 예외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시를 쓰고 호를 내세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궁금증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다 보니 결국 이 쓸쓸한 무덤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매창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절대 사치스런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류시인이라고 말하고 보니 허난설헌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지요.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상당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선 한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매창이 1573년에서 1610년까지 38년을 살았고 허난설헌은 1563년에서 1589까지 27년을 살았습니다. 허난설헌이 10살 많았던 셈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허균이라는 당대의 풍운아가 그녀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이고 매창은 허균과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습니다. 또 비운의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점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천출의 기생과 사대부가의 여인, 그 점은 두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는 걸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겠지요. 그리고 보니 또 하나의 여류시인 황진이가 생각나는군요. 매창과는 기생과 시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황진이는 생몰(生沒) 연대가 불분명하고 매창은 분명한 족적이 기록돼 있습니다. 저는 조선중기가 부럽습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경직 속에서도 뛰어난 여류시인들을 셋이나 배출한 시대. 허난설헌, 매창, 황진이 셋을 일러 조선 3대 여류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얘기가 또 옆길로 샜군요.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라는 이의 서녀로 태어났습니다. 아전이란 직업도 대우 받기 어려운 시대에 서녀, 즉 천출로 태어났으니 굴곡은 예고돼 있던 셈입니다. 계생(癸生) 혹은 계랑(癸娘, 桂娘)이라 불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지만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굴레가 그녀를 자연스럽게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겠지요. 불우한 삶을 산 천재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영특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그녀는 열여섯이란 나이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립니다.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으니 기생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겠지요. 요즘말로 데뷔를 하자마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멀리서 시인 묵객들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하니 짐작이 갑니다. 그 시대라고 왜 질퍽거리는술꾼들이 없었겠습니까? 점잖은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도 술에 취하면 일쑤 미친개가 되는 족속들이 있지요. 그런 정황을 그리듯 전해주는 시가 있습니다. 증취객(贈醉客)이라는 오언절구인데요.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신석정 역)

 

조금 전까지 문학이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하던 자가 치마를 들추고 옷고름을 풀려하니, 신분상 내칠 수도 없고 어쩌겠습니까. 어르고 달랠 수밖에. 시야말로 가장 품위 있는 거절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뛰어나다 한들 시골 관아에 속한 기생, 그렇고 그렇게 한 평생 살다갔으면 후세의 입에 오르내릴 일 없었으련만, 그녀에게도 결정적인 사랑이 찾아오고 맙니다. 사랑은 행복을 향한 찬가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전주이기도 하지요. 매창의 사랑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생이 된지 2,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한양에서 유희경(劉希慶)이라는 이가 부안까지 놀러옵니다. 호는 촌은(村隱), 한양에서 이름 깨나 날리는 문인이었다고 하지요. 아니,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이와 함께 그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습니다. 매창처럼 천민이었다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종7품의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핍박 받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서자였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매창보다는 스물여덟 살 많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훗날 유희경의 증손이 간행한 <촌은집>에는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계생을 만나자 비로소 파계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튀었던 게지요. 촌음은 매창을 만난 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贈癸娘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한성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허경진 역)

 

선녀가 떨쳐입고. 한 여인에 대한 찬사가 하늘에 닿습니다.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으며 꿈같은 열흘을 보냅니다. 내소사도 함께 거닐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달콤한 사랑은 짧고 쓰디쓴 이별은 길기 마련.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갈 날이 닥칩니다. 매창으로서야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첫사랑인데 어찌 그리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잡을 도리도 없었습니다.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게 되고, 그는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갑니다. 재회의 기약이 더욱 멀어진 것이지요. 유희경이 떠나고 지은 시조가 바로 첫머리에 소개한 <이화우>입니다. 그 구구절절한 정한이 긴 세월을 타고 넘어 바늘 끝처럼 서늘합니다. 홀로 남은 매창은 몸져눕습니다. 천리밖에 있는 한 남자를 모질게도 그리워한 것이지요. 그때 지은 시들은 그 자체로 눈물입니다.

 

自恨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허경진 역)

 

 

유희경도 어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매창을 생각하며 이런 시를 남깁니다.

 

懷癸娘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허경진 역)

 

그들의 그리움은 길고 깊었습니다. 무도한 적들이 국토를 유린한 7년간의 전쟁. 세상은 황폐하고 어수선했습니다. 10년 동안 유희경을 그리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 이귀(李貴)가 나타났으나, 그들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한 줄만 걸치고 가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남자를 향한 매창의 사랑이니까요. 하지만 허균과의 만남은 그냥 건너뛰기 어렵겠군요. 매창의 길지 않은 삶 중에 그가 차지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으니까요. 당대의 문호 중 하나였던 허균과 매창은 요즘 말로 플라토닉사랑을 합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썼다는 허균에게는 참 특별한 일입니다. 해운판관으로 1601년 부안에 들렀던 허균, 그때 남긴 조관기행에는 매창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들였는데, 이는 곤란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황해도사로 있을 때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았다 해서 파직까지 당한 그였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시골 기생 치마끈 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으련만 매창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혹자는 매창이 김제군수 이귀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기생을 두고 의리를 지켰다. 글쎄요. 저는 차라리 허균의 그릇이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비록 기생이지만 여자보다는 문우(文友)로 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래서 허균을 더욱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허균은 매창에게 이런 편지도 보냅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이어질 수 있었겠소. (후략)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과는 별도로 이들의 우정도 가슴에 닿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종말을 향해 달립니다. 유희경과 매창은 이별을 한 뒤 한 번도 못 만났을까요? 정설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그리움에 견디다 못한 매창은 어느 날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섭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한양. 관에 소속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기생이 먼 길을 떠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그가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현감을 구워삶았든, 돌아와 치도곤을 당했든.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간 한양에서도 매창은 정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유희경은 그때까지도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결국 쓰러질 듯 허기진 사랑만 안고 부안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설령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녀의 사랑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전하고 싶었겠지요.

 

정설에 의하면 그들은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입니다. 헤어진 지 15년 만에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15년이란 기나긴 공백이 필요했을까요? 물론 유희경에게 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10년 만에 만난 유희경은 시를 논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노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갑니다. 매창으로는 눈물로 얼룩진 세월이 허무하고, 끝없는 사랑이 애통할 일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조선시대 관기는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양반도 아닌 유희경의 입장에서 매창을 소실로 맞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하지만 유희경이 그렇게 곤궁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史實)을 아는 저로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소실까지는 아니라도 오고가는 것조차 그리 힘들었을까요. 매창은 유희경이 떠난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3년 뒤 그예 세상을 떠납니다. 1610.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이었습니다. 기다림조차 빼앗긴 사람에게, 생명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허허로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유희경이 다녀가지 않았다면 그리 쉽사리 스러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열여덟에 만난 한 남자를 잊지 못해 스무 해 가까이 가슴앓이를 하다 세상을 뜬 여인.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슬픈 사랑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매창의 죽음을 듣고 유희경이 부안으로 달려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느 이름 없는 자는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적었습니다. “매창의 부음은 촌은에게 전해진다. 촌은은 망연자실 허공만 바라본다.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유희경이 부안에 도착해 처음 맞이한 것은 그리운 매창이 아니었다. 매창은 이미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매창이 남긴 육필(肉筆) 시 한구절만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지나가듯 덧붙입니다. 누군가 사랑의 결말을 찰지게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유희경이 달려온 게 사실이라면, 그는 왜 그녀가 죽기 전에 올 수 없었을까요? 그녀를 사랑하는 후인(後人)은 그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와 따져 물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은 늘 그렇게 조금씩의 어긋남으로 후세에 이야기 한 자락을 남기는 것이니. 참 심술스런 이름입니다. 사랑은.

 

유희경과 매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하지만 매창에 대한 뭇 사람들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사랑 역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숨어 있어서 더욱 슬픈 사랑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뤄둡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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