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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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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9.08 [사라져가는 것들 75] 외나무다리10
  2. 2008.06.23 [사라져가는 것들 64] 징검다리19
2008. 9. 8. 13:1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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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책보를 등에 비껴 메고 단단히 묶는다. 이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숨소리라도 들릴세라 까치발이 조심스럽다. 문을 열다말고 뒤를 한번 돌아본다. 동생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고르다. 오늘은 잘하면 성공할 것이란 생각에 살짝 한숨을 내쉰다. 문을 열자 밤산 꼭대기에서 기다리던 해가 쏘아낸 화살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바람에 동생이 몸을 한번 뒤척인다. 아이는 흠칫하면서 얼른 마루로 나가 문을 닫는다. 마루를 지나 토방 댓돌에 놓인 검정고무신을 꿰어 찰 때까지도 고양이걸음이다. 개수통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할머니가 그러는 아이를 보고 쓴 웃음을 깨문다. 신발을 신자마자 아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 쪽으로 달음질친다. 문만 벗어나면 무사탈출에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리 자비롭지 못하다. 아이가 사립문을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생이 쏟아지듯 튀어나온다. 동시에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절규가 함께 터진다. “오빠! 안 돼. 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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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부터 시작된 아침 행사다. 병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꽤 심각한 증세다. 일이 시작된 계기는 그랬다. 방학을 하기 전이니까 11월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전날 저녁부터 몸살에 시달렸다. 열이 오르고 목이 부었다. 하지만 학교에 빠지면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줄 아는 아이는 기어코 집을 나섰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 바람이 유난히 극성스런 아침이었다. 마당가의 감나무 빈가지가 무당 손에 잡힌 신대처럼 연신 몸을 떨었다. 문제는 마을과 학교 사이를 가로 지르는 비끄내(斜川)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리 넓은 내는 아니었지만 수량은 제법 많았다. 내를 건너는 수단이라야 윗동네의 징검다리와 마을 앞의 외나무다리가 전부였다. 시멘트다리가 그리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나마도 큰비라도 오면 떠내려가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비껴서는 것도 불가능할 만큼 좁은 다리였다. 여름엔 첨벙첨벙 그냥 건너고 한 겨울엔 얼음 위로 건너면 됐지만, 나머지 계절엔 없어서는 안 될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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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외나무다리에 다다랐을 때 주변엔 찬바람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징검다리로 건너려면 한참 걸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외나무다리를 이용한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간 모양이었다. 겁이 좀 많은 아이에게는 평소에도 무서운 다리였다. 다리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웠다. 평소에는 들어가서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는 내건만 다리를 건널 때는 물이 열 길 스무 길이라도 되는 듯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리 위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감나무 가지를 흔들고 냇둑의 미루나무까지 흔든 다음 들판을 달려온 바람은 거세게 아이 몸을 떠밀었다. 그러잖아도 전신을 태울 것 같은 열로 몸을 가누기 힘든 판에, 바람까지 불어대니 죽을 맛이었다. 중간쯤 건넜을 때였다. 갑자기 돌풍으로 변한 바람이 휘익~ 하고 아이의 몸을 때렸다. 순간 아이가 기우뚱하더니 다리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뼈까지 파고들만큼 찬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는 게 아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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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정신을 차린 건 그날 저녁이었다. 마침 지게를 지고 이른 나무를 가던 영천이 아버지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 건졌다는 것이었다. 금세 들쳐 메고 집으로 갔지만 아이는 정신을 놓은 다음이었다. 어른들은 까딱하면 황천을 건널 뻔했다고 혀를 끌끌 찼다. 무릎도 차지 않는 물에서 발버둥 한번 못 치고 죽을 뻔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동생의 그런 증세가 나타났다. 제 오빠를 잃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아이가 업혀 들어오고 어른들이 비명을 지르는 걸 지켜보면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던 모양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 오빠가 가장 귀한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걸 질색했다. 학교를 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니, 잘못하면 죽을 거라는 것이었다. 알아듣게 설득하고 어른들까지 나서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한바탕씩 홍역을 치렀다. 없으면 안 되는 외나무다리가 누구에게는 그렇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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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내가 많은 만큼 다리도 많았다. 튼튼하기로는 그나마 돌다리가 낫지만 돌이라고 어느 동네나 지천인 건 아니었다. 돌 하나 없이 모래만 있는 내나 강도 많다. 큰 돌이 없어 징검다리를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큰 다리를 놓을 역량도 안 되는 마을에서는 통나무를 반으로 켜서 나무다리를 놓았다. 제재술이 좋은 요즘이야 매끈한 다리 하나 만드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옛날에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통나무를 대충 손질해서 걸쳐놓았으니 무섭고 위태로운 건 말할 것도 없다. 널빤지를 여러 장 잇거나 작은 통나무를 겹쳐서 비교적 넓게 놓은 나무다리도 있었지만 그리 흔치 않았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어느 곳에서는 흔들흔들 춤을 추기 마련이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일쑤 내로 떨어졌다. 지게를 지고 가던 나무꾼도 모시옷에 단장을 짚은 점잖은 어르신도 눈 깜짝할 새에 강물로 곤두박질했다. 앵두꽃 피던 봄날에 담봇짐을 쌌던 순이가 추석이라고 ‘삐딱구두’ 신고 돌아오다 곤두박질친 이야기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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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높지 않으니 떨어져도 다칠 일은 없지만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여름엔 옷을 훌훌 털어 입고 가면 되지만 겨울에는 얘기가 달랐다. 겨울이라고 내내 물이 얼어있는 것은 아니니 찬물에 옷이 흠뻑 젖을 때가 많았다. 허우적거리며 탈출 해봐도 옷은 꾸닥꾸닥 굳어가지 몸은 얼어붙지…. 섶다리나 징검다리가 그렇듯 외나무다리도 질서와 기다림을 가르쳐주는 존재였다. 저쪽에서 어른이나 여자, 아이가 건너오면 기다렸다가 건너는 게 예의였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볼상놈’으로 따돌림 받기 일쑤였다. 기다림의 가치를 안다는 건 세상살이에 얼마나 도움이 되던지. 동네에 따라서는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걸 해결해보려고 궁리 끝에 ‘비켠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가운데쯤에 다리 한 칸을 덧붙여 잠시 비켜설 수 있게 만든 다리였다. 외나무다리가 있던 풍경, 가만히 떠올려 보면 가슴 한 편에 갈무리해뒀던 아픔과 웃음이 함께 걸어 나온다. 깊은 골을 지나다 외롭게 서 있는 외나무다리를 만나면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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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23. 11:05 사라져가는 것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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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에 생겨난 마을은, 어느 곳이나 비슷비슷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마을 뒤로 나지막한 산들이 어깨를 겯고 달리고, 앞으로는 작든 크든 내(川) 한 줄기가 구비구비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산자락을 따라서, 산을 닮아 둥글둥글한 초가집들이 점-점-점 들어서 있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형성되려면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강 또는 내였다. 물이 흘러야 논밭을 적시어 농사를 짓고 물고기도 잡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 앞을 흐르는 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징검다리였다. 큰 강에는 나룻배나 줄배가 오가고 다리를 놓기도 했지만, 그리 깊지 않은 내에는 대부분 징검다리가 놓아졌다. 징검다리는 돌을 사람의 보폭에 맞게 듬성듬성 놓아 내를 건널 수 있게 한 가장 원시적인 다리형태다. 과거에는 이 징검다리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왕래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요소였다. 마을사람들이 장에라도 가려면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냇물이 나누어놓은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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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징검다리가 영구적인 다리는 아니었다. 큰물이 한번 지나고 나면 돌이 저만치 휩쓸려 내려가거나 위치가 들쑥날쑥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물이 빠진 뒤에는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여 징검다리를 보수했다. 아침에 학교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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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나 장에 나가는 어른들이 건너야 할 다리기 때문에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이나 내는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였다. 특히 여름이면 종일 물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내의 수심이 일정한 게 아니라 둠벙처럼 꽤 깊은 곳도 있고 넓고 얕게 흐르는 곳도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곳에서 물장구도 치고 자맥질도 했다. 또 수초 사이에 손을 넣어 물고기를 잡았다. 손이 빠른 아이들은 금세 한 꿰미를 잡아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집에서 고추장을 훔쳐다가 매운탕을 끓이기도 했다. 또 아예 내를 막아 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통째로 잡기도 했다. 그 작업은 꽤‘대공사’였기 때문에 날을 잡아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물속에서 놀다가 지치거나 추워지면 징검다리 위에 나란히 앉아 옥수수서리·수박서리 모의를 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단련된 징검다리는 검게 빛났으며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 무척 따뜻했다.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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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나 내가 젖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늘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큰 비라도 내리면 강과 내는 악마로 돌변했다. 시뻘건 흙탕물은 세상을 모두 삼킬 듯 쿵쾅거리며 대지를 달렸다. 논둑을 무너뜨려 애써 가꾼 벼를 휩쓸고 지나는가 하면, 다 익은 과일이나 돼지 같은 가축들을 쓸어 가기도 했다. 물은 가끔 사람도 꿀꺽 삼켰다. 특히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산에 나무가 별로 없던 시절, 집중호우가 내리면 냇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났다. 비가 많이 올 땐 선생님들이 하교를 못하게 통제하지만 몰래 빠져나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에 물이 불어있어도 매일 다니던 길이니, 아이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간당간당 머리만 남은 징검다리에 올라서고는 했다. 그러다 수위가 더 상승하고, 중간쯤에서 어지러워진 아이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 비명도 못 지르고 빨려 들어갔다. 물이 빠진 다음 수십 리 떨어진 하류 쪽에서 몰라보게 변해버린 시신을 건지기도 하지만 영영 찾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유령처럼 냇둑을 헤매는 그 집 부모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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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의 내와 징검다리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더욱 짙어지기 마련이다. 봄이면 수양버들 긴 머리 풀어 내리고 여름엔 아이들의 함성이 병아리 솔개처럼 솟아오르던, 그리고 가을이면 떨어진 나뭇잎이 맴돌이하며 흐르던 고향의 내. 겨울에 냇물이 얼고 그 위에 눈이 내리면 까맣게 도드라진 징검다리는 얼마나 아름답던지. 하지만 이제 진정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사라졌다. 청계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구경삼아 건너볼 뿐이다. 설령 남아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다니기 위한 징검다리는 아니다. 깊은 산골에도 번듯한 시멘트다리가 놓여지고 그 위로 차가 씽씽 달린다. 그 맑던 물도 악취를 풍기며 흐른다. 작은 내들까지 시멘트로 발라놓는 바람에 물은 관 속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물장구를 치거나 징검다리 위에 벌거벗고 앉아 깔깔거리던 아이들도 사라졌다. 누구말대로,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은 찾아보지 말고 가슴 속에 묻는 게 나을지 모른다. 수레바퀴처럼 건조하게 돌아가는 도회지의 삶 속에서, 어릴 적 향수를 에너지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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