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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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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 화요장터 들어가는 길. 관광 삼아 나온 외국인들도 많다.

화요장터 초입.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나와 있다.

거대한 규모
에 놀라다

927일 화요일. 지중해는 아직 여름의 잔양(殘陽) 아래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서울은 지금쯤 가을 기운이 완연할 텐데. 쏟아지는 햇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대지에 박힌다. 오늘은 페티예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신세진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다. 며칠 지나면서 다큐팀 스텝들과 제법 친해졌다. 작업과 행동반경이 다르다고 오고가는 정이 없으랴. “저희 때문에 깊이 봐야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 기특한 인사를 해주는 젊은 친구도 있다. “책을 쓰시게 되면 저를 주인공으로 해주세요. 감자튀김 좋아하는 투덜이PD." 이런 인사도 한다. 그럼, 그럼.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있나.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의 한국인 우대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 사람들은 한 달에 1, 2달러만 내면 장기체류비자를 내줘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거지요이거 제법 쓸 만한 정보다. 하긴 부자에게 이 나라는 천국이다. ”휴양지 호텔은 하루 숙식비가 80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해요. 그것만 내면 세끼 식사는 물론 술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거든요유럽인들 중에는 호텔서 꼼짝 않고 먹고 마시고 수영을 하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래, 돈만 있으면 어딘들 천국이 아니더냐.

고추도 각양각색

옥수수를 보니 고향생각이

가지도 가지각색.

오늘의 종착지인 카쉬까지 가기 전에 몇 가운데 들러야 한다. 맨 먼저 들를 곳은 페티예 화요장터. 매일 열리는 바자르와 달리 말 그대로 화요일마다 열리는 장이다. 우리의 5일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장터는 수량이 제법 많은 큰 내를 낀 넓은 공터에 펼쳐져 있다. 우리네 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상상 밖으로 크다. 터키인,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간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한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포장이 쳐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와 있다. 물건의 양과 종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입구 쪽에는 채소와 과일 등이 주로 진열돼 있다. 사과복숭아자두수박토마토멜론에구, 숨차다. 따뜻한 기후,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여름 과일, 가을 과일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일은 모두 다 있어서 정겹기까지 하다. 채소도 마찬가지. 마늘감자양파배추고추호박강낭콩오이상추김장을 담가도 되겠다. 상추를 보니 느닷없이 삼겹살 생각이 나고 호박을 보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고추의 모양도 각양각색, 가지의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덩어리 치즈와 가루 치즈.

올리브 파는 아저씨.

치즈와 올리브 가게에서


조금 안쪽엔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덩어리로 된 것도 있고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큰 놈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치즈의 세계에도 양반 상놈이 있는지 고급치즈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놓았다. 그래야 잘 보관된단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장터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 생긴 것만 조금 다르지 고향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아따, 그러지 말고 일루 점 와봐. 싸게 줄 테니께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워매, 뭐가 요래 비싸대유. 좀만 깎아줘유물건 값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터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뭔가 적고 있으니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동네도 별 살 것도 없이 사돈 따라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돋보기가 없는 게 한이라는 듯, 내 수첩에 코를 박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이 글씨 아세요?” “……????”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놈의 호기심이 죄지 아저씨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정말 사돈을 만난 건지 장터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다에 빠진 아저씨들도 있다. 옆집 강아지 새끼 몇 마리 낳은 얘기까지 해야 길을 비켜줄 모양이다. 그렇다고 큰 소리 치거나 짜증내는 사람은 없다.

곡물 파는 아저씨. 전형적인 튀르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 보고 "챔피언"이란다.

올리브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점잖게 생긴 주인이 쓰레받기 같은 걸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주문에 따라 올리브를 담아주는 것이다. 올리브도 종류가 무지하게 많다. 수확한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우리의 장아찌처럼, 소금이나 레몬으로 간을 해서 시장에 낸다. 맛을 본다는 핑계로 먹어 보지 않으면 장터가 아니지. 살 것도 아니면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본다. 우웩!! 역시 짜다. 호텔서 한번 당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이 선천성 기억상실증이란. 이번엔 곡물 파는 아저씨 가게. 여기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있다. 명색이 촌놈인데도 아는 건 쌀달랑 하나? 아니다. 고춧가루도 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이 전형적인 터키사람이다. 그 옛날 몽골초원에 살던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나면서 적당히 피를 섞은 뒤, 아나톨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얼굴 아닐까? 아주머니는 남편 보고 챔피언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무슨 챔피언이란 걸까? 무얼 잘하면 마누라한테 저런 소리 듣고 살까? “어이구, 이 화상아. 잘할 생각 접어두고 허구헌날 싸돌아댕기지나 말어.“ 왜 요즘 환청이 이렇게 자주 들릴까?

엄마를 조르더니 도넛 하나 얻었다. 그러나 또 조를 태세.

멜론을 준 아저씨.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요?

멜론을 얻어먹다


근처 가게에서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대여섯 살 쯤 된 아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 저 녀석 봐라. 안 먹어도 퉁퉁 불어있구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이의 손에 큼직한 도넛이 쥐어진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먼 길,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면 풀빵도 먹고 싶고 사탕도 먹고 싶고그냥 돌아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당신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측은하고도 야속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가 손자의 군것질거리와 바꿀 수 있는 건 눈물밖에 없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그 속죄 언제나 다 하고 이 소풍을 마칠 수 있을까. 그렇게 혼을 내려놓고 서 있는 나를 과일가게 아저씨가 부른다. 아이 손에 들린 도넛이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멜론 한 조각을 쑹덩 잘라서 손에 쥐어준다. 아무래도 멜론을 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동양에서 온 거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하긴 여행 내내 수염 한번 깎은 적 없고, 걸친 옷이라 봐야 추레하기 그지없으니, 그렇게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인사 하나는 제대로 차려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요? 멜론을 우물거리며 과일채소전을 벗어난다.

전통과자 5상자를 사면 1상자는 거저 준단다.

빗자루. 참 곱게도 엮어놨다.

빵장수 아저씨.

세제설탕휴지치약칫솔생활필수품 가게를 거쳐, 젤리에 가까운 터키 전통과자를 파는 곳을 지난다. 다섯 상자를 사면 한 상자는 공짜로 준단다. 그래도 전 안사요. 어느 집 앞에는 곱게 짠 빗자루들을 세워놓았다. 옛날 우리네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겼다. 솜씨도 좋지. 너무 고와서 방을 쓸기에는 아까울 것 같다. 좀약이나 바퀴벌레 약을 파는, 70년대가 생각나게 하는 난전도 있다. 그럼 그렇지, 왜 없겠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빵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움이 울컥 솟는다. 어릴 적 풀빵이나 호떡을 팔던 아저씨를 만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산품공예품 가게들이다. 가방 가게에는 물건도 다양하게 많고 다른 곳보다 손님도 많다. 터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죽공예가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신발가게도 샌들부터 운동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갖춰놓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쳐 공예품가계로 들어가 본다. 부채나 보석함 등 온갖 공예품들이 그걸 만들었을 사람의 정교한 솜씨를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품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각종 등()이나 터키 특산물인 물담배 파이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내가 들어서자 종업원 청년의 눈은 카메라에 가서 꽂혀버린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눈치다.

각종 유리공예품들.

공예품 가게의 사장님.

공예품 가게의 사장과 종업원


자꾸 와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찍어볼래?” 하며 손에 쥐어줬더니 입이 쭈욱 찢어지면서 카메라를 들고 온갖 폼을 잡는다. 찍힐 놈이 폼을 잡아야지 왜 네가 폼을 잡니? 또 다른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제 동료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걸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한 방 찍어보자 이거지? 그래, 카메라 든 친구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나도 덥석 어깨동무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야. 잠시 뒤 들려오는 셔터소리. 뒤에 조명이 너무 강해서 분명 시커멓게 나왔을 거다. 아무렴 어떠랴. 그런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자니, 카메라를 내게 넘겨준 청년이 곁에 와서 들여다본다.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정말 못 말린다. “, 이 글자 알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제 팔을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인다. 일본어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친구 생각으로는 같은 동양인이고 글자가 낯설긴 마찬가지니 같은 나라 말인 줄 알았나보다. “그건 일본 글씨야. 난 한국 사람이거든. 코리아라고 들어는 봤나?” 영어와 한글로 코리아라고 써주니 뭘 좀 알아들었는지 수첩에다 자기들 말로 코리아라고 써준다. 에구, 귀여운 것. 앞으로는 한국을 많이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문신은 지우고 한국 만세!’ 이런 걸로 새로 새겨봐.

내 카메라에 '눈독'을 들였던 청년. 잘 생겼다.

공예품 가게 사장의 이름은 야곱이이라는 장돌뱅이다. 가게 규모가 하도 커서 말뚝 박고 장사하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매일 매일 장 따라 옮겨 다닌단다. 그는 다큐팀이 자기네 가게를 들러준 걸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코리언이라니까 곧바로 “Brother”가 터져 나오면서 특유의 잃어버린 형제를 상봉한표정을 짓는다. 이런 식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러 번 겪어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야곱은 한국인에 대한 우의로 스텝들이 산 기념품 값을 끝내 받지 않는다. 가게를 나오는데 사진을 찍었던 청년이 따라 나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Nice Korea”를 연발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어 문신은 지워. 터키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국인들을 환대할까. 진심일까? 장담하건대 진심이다. 어딜 가나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시라고 부르는 터키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두 나라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인연의 뿌리를 찾자면 제법 아득한 과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리 땅이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 돌궐족은 튀르크제국을 세워 몽골 땅을 호령했다. 그때 튀르크 제국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수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튀르크의 무한 카간이 사망했을 때는 고구려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신발 가게.

한국인을 형제로 부르는 이유

고려 때에는 튀르크계의 일족인 위구르족이 개경에서 살기도 했다. 그때 지어진 야한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과 터키가 진짜 피를 나눈건 물론 6.25전쟁 때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1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는 유엔군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돌궐의 후예들은 백병전에 특히 능해서 일당백의 위용을 보였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터키군 1여단은 예상을 깨고 전멸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착검을 한 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을 맞아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터키군은 한국전을 통해 750여명이 전사했고 3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키인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코레 가지라고 부른다. 코레 가지들은 한국을 조국이라는 뜻의 바탄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뜻의 코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악기점 주인 아저씨.

타국에서 희생한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데, 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고마워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자신이 없다. 터키는 멀리 있는 그렇고 그런 나라일 뿐이고,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행 내내 환대를 해주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2002년에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더욱 감격한 건 한국과 치른 3, 4위전이었다. 한국인 응원단이 펼친 터키국기, 그리고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박수에 그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들이 바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형제의 나라는 다시 한 번 뼛속 깊이 다시 각인됐다. 우연이었든, 의도한 일이었든 경기에 지면서도 박수를 쳐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변하지 않는 우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니.

아으, 셔!!! 석류 주스를 짜고 있다.

즉석에서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원탁 위에 진열된 것들이 바로 새총이다.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공예품 가게를 나와 옷 시장 입구에서 전통악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Happy birthday”를 연주하며 유혹한다. 에이, 아저씨 사람 보실 줄 모르네. 살 사람을 꼬여야지요. 악기 이름은 듀라’. 박수까지 치며 함께 놀다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뜬다. 천변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우리가 장터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듯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다. 석류주스를 갈아 파는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신 음식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저만치 도망가는 나지만 예쁜 색깔이 자꾸 유혹한다. 혹시 달콤하지 않을까? 그래, 도전!!! 내 인생에서 혹시역시로 바뀌지 않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울면서 석류주스를 마셨다. 무려 3리라나 투자하고서. 장터 날머리에서 트럭을 세워두고 나무로 공예품을 깎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수저머리빗홍두깨참 솜씨도 좋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새총. 어릴 적엔 겨울마다 저걸 들고 들이고 산이고 얼마나 쏘아 다녔던지. 터키 아이들도 저걸 갖고 노는구나. 동질성은 곳곳에 숨어있다. 이제 장구경도 끝났고 페티예를 떠날 시간이다. 안녕! 페티예. 3일 동안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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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마우솔레움 입구. 표를 끊어서 전철 개찰구 같은 저곳으로 들어간다.

초스피드로 성장하는 벨라솜라. 29년 자랐다는데 300년쯤 된 나무 같다.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

 터키, 그 중 보드롬에서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됐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길을 나선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바투 잡으니 언제 잠을 설쳤느냐는 듯 힘이 솟는다. 역시 나는 길바닥 체질.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곡예운전의 스릴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래도 명색이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 이 모양인지. 그나마 카페들은 그 좁은 길을 살짝 점유한 채, 탁자까지 내놓고 장사를 한다. 거기서 차를 마시는 분들은 배짱도 좋으시지. 마우솔레움 입구 역시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있다. 안내간판도 눈에 띄지 않아서 가이드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 주차장? 물론 없다. 결국 우리 일행이 내리기 위해서는 차를 그 좁은 골목에 세울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뒤로 자동차가 10대 이상 밀리고, 그들이 제각기 빵빵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섞여 골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된다. , 성질 급한 터키사람들. 그래도 우리의 운전사 하산’(멋지다라는 뜻을 가진 아랍 이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서 수행하다 하산’(下山)했기에 저리 도가 높은지. , 느긋한 터키 사람

마우솔레움 터. 지금은 빈 자리에 돌들만 굴러다닌다.


 

박물관에 전시된 마우솔레움 모형. 맨 위에 보이는 저 마차는 대영박물관으로 가고 나머지는 산산히 흩어졌다.

사실, 내게는 길이나 주차장이 문제는 아니다. 나는 지금 고대 7대 불가사의 앞에 서 있다.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간다. , 잠깐 짚고 넘어가야할 것 한 가지. 터키에서 유적지나 관광지에 들어갈 때 입장료는 꽤 비싸다. 예를 들어 이스탄불에서 고궁이나 유적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우리 돈으로 십만 원 이상 깨지는 건 금방이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안 먹고 안 타고 아낀 돈을 입장료로 쏟아 부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게까지 가서 그냥 올 수는 없지 않은가. 터키는 2차 산업이 발달돼 있지 않고 농업이나 관광수입이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갑이 얇아질 때마다 ! 남의 유적 가지고 사람 골을 빼는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스-로마의 유물과 튀르크인들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돌덩이 몇 개밖에 없는 마우솔레움도 한 사람에 8리라씩 받는다.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그래서인지 표를 끊지 않고 입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다녀간 증거만 있으면 된다 이거지?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돌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가야 하는 것이다. 돌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다음에야 그곳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껍데기만 볼 거라면 집에서 사진을 보면 되지. 

박물관 복도에 전시돼 있는 마우솔레움의 잔해들.

돌마다 저런 조각들이 있다.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미뤄뒀던 마우솔레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시간이다
. 마우솔레움은 마우솔로스(Mausolos BC 376~353)의 영묘다. 묘를 뜻하는 영어 ‘Mausoleum’의 어원이기도 하다. 유익한 여행기를 읽다보니 졸지에 영어단어 하나 외우지 않았는가.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카리아 지방 총독을 지냈으며 수도를 밀라스에서 지금의 보드롬인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기고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사후에는 그의 부인이자 누이동생인 아르테미시아가 공사를 계속했다대부분의 고대사회처럼, 그곳도 누이와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 같다. 그의 동생인 이드레이우스도 또 다른 누이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큰 누이는 아내, 작은 누이는 제수. , 족보 꼬인다. 시집 장가 잘 보내려면 애들도 남녀 골고루 많이 낳아야 했겠다. 아무튼 영묘 건설은 아내인 아르테미시아가 죽는 3년 뒤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가 동생 이드레이우스가 이어 받아 완성했다. 이왕 나온 김에 그 집안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이드레이우스가 죽은 뒤 그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아다가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아 여왕이 된다. 그러나 4년 뒤에는 역시 동생인 피크소도로스가 왕좌를 빼앗아 아다를 유배 보낸다. 콩가루 집안의 종결자들이다.

마무솔레움이 있던 자리.

기둥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들.


절대자의 흩어진 꿈은 허허롭고

족보 얘기는 이쯤하고 마우솔레움으로 들어가 보자. 마우솔레움은 높이가 46m, 가로 36m, 세로 37m의 정방형 기단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 무덤을 짓기 위해 3t짜리 돌 16만개가 사용됐다. 3t이면 자동차만 했을 텐데 그게 16만개라. 기단 위에 모두 3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서 있었다. 지붕은 24개 계단으로 이뤄진 피라미드 형태였는데 꼭대기에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이륜전차가 놓여 있었다. 그 전차는 지금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전차라고 해도 혼자 바다를 건넜을 리는 없고 그게 왜 영국에 가 있을까. 보존을 위해 잘된 일인지, 약탈의 전형을 보는 것인지. 또 마우솔레움에는 총 300여 개의 조각(彫刻)들이 6층으로 배치돼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진으로 무너진 뒤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석재는 대부분 보드롬성을 짓는데 들어갔고, 조각들은 깨진 채 어디론가 굴러가거나 대영박물관으로 입양되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남들의 시선은 무덤자리로 가는데 내 눈길은 나무에 머문다. 무슨 인연이 있어 날 이리 잡아당기는 건가. 나무의 이름을 물으니 벨라솜라라는데 심은 지 29년밖에 안됐단다. 29? 290년이 아니고?

돌, 돌, 또 돌이다.

성장속도도 놀랍지만, 머금고 있는 수분이 워낙 많기 때문에 불이 나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23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은 저리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는데 29년밖에 안 된 나무는 저리 하늘을 찌르는구나.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박물관부터 보기로 한다. 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전시물 중에는 완전한 모습의 돌덩이 하나 보기 어렵고 깨져서 구르던 것들을 모아 놓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부상병 같은 돌들이 신음을 깨문 채, 박물관 밖이나 안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다. 그 옛날의 영화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대는 그냥 돌아서면 안 된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돌마다 새겨진 조각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에서는 유물 외에도 마우솔레움에 대한 자료 등이 전시돼 있고 비디오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천천히 한 바퀴 돈 뒤 특별한 감흥을 담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다. 이제 건물이 있던 자리를 볼 차례다. 계단을 내려가니 무덤 자리는 폐허와 다름없는데, 그래도 그 곳에서 2000년을 넘게 버텨온 돌들이 세로 가로로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돌은 대부분 하얀 대리석이다. 하얀 대리석은 그냥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돌 틈으로 저런 굴이 길게 나 있다. 전실로 가는 길이었던 듯.

고대에는 근처에 대리석 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도시를 세우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밖에 바다와 지하수, 적을 막을 수 있는 산맥도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만큼 석재건축물이나 조각의 재료로서 대리석이 중시됐던 것이다. 터키는 지금도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리석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 돌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둥글게 깎은 것도 있고 네모난 것들도 있고. 저들이 한 때는 높이 46m짜리 거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와 비극을 함께 지켜봤을 것이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1500년을 제 모습으로 서 있었다는 이 거대 건축물. 깨어져 구르는 돌들이 세상사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살아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도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부질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죽음 이후까지 영화를 누려보겠다는 욕심이야말로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한 절대자의 흩어진 꿈이 발길마다 허허롭다. 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그럴 땐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게 상책이다.

아타튀르크 공원의 나무들. 저 그늘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공원 옆의 택시기사들. 손에 차이잔을 들고 있다.

아타튀르크공원의 택시기사

다큐팀의 다음 목적지는 바자르. 어제 본 빵집 근처에서 보충 취재할 게 있단다. 거기에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나는 해변 옆의 아타튀르크공원에 홀로 남는다. 여행은 무조건 부지런히 다닌다고 많이 보고 많이 얻는 건 아니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관조할 때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한번쯤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야자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있자니 바람이 장난스럽게 주위를 배회한다. 녀석이 온 몸을 간질이니 솔솔 잠이 온다. 카메라를 갈무리해 넣은 배낭을 베고 그 자리에 눕는다. 벤치에서 잠 좀 잔다고 누가 잡아가기야 하겠는가. 떠돌이 여행자의 권리라는 게 이런 거지. 조용한 방에서도 잠 드는데 애쓰는 내가, 사람들이 오가고 자동차 경적소리까지 덤으로 요란한 거리의 공원에서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든다. 역시 진정한 평화는 저잣거리에 숨어 있는 법.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세상은 그림처럼 같은 모습으로 걸려있다. 배낭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만치 택시기사들이 둘러서서 차이를 마시고 있다. 아까도 마시더니. 터키사람들은 저렇게 몇 시간에 한번 씩 차이를 마신다. 다방에 커피처럼 주문하면 배달해준다.

깊 옆에 설치해 둔 전화를 받고 운행을 다녀온 택시는 기둥에 매달아 둔 일지에 기록하게 된다.

택시 정류장에서 만난 부녀. 도시락을 먹으며 뭔가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앉아있는 공원 앞쪽이 택시와 기사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곳 택시는 일종의 조합콜택시로 운영되는 것 같다. 길가 전봇대 같은 곳에 전화기가 걸려 있고 그곳으로 콜이 오면, 순서대로 운행을 다녀와서 몇 시에 어디를 운행했다고 기록한다. 대기 중에는 차이를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기사들 틈에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띈다. 아이가 택시 운전을 할리는 없고 심심한 딸이 기사인 아버지를 찾아왔나보다. 딸에게 점심을 사준다고 나오라고 했을지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인다. 아주 예쁘게 생겼다. 다른 기사들과도 스스럼이 없다. 아버지가 도시락을 주문한다. 그런데 도시락이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버지의 운행 콜이 온다. 딸은 도시락을 앞에 놓고 기다린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부녀는 도시락을 펼치고 다정스럽게 함께 먹는다. 부럽다. 저런 게 진정 행복 아닐까. 터키사람들은 국민소득이 높지 않은 편인데도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 물질적인 부보다는 정신적 행복에 가치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여유로움이 내게 전염된 것일까. 뭔가 모를 포만감이 가슴에 가득 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 자유여. 지중해의 부드러운 바람이여!!

보드롬에서 폐티에로 넘어가다 만난 해수욕장.

해수욕장 건너편의 빌라(?)촌.

나는 페티예로 간다

다큐팀과 합류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보드롬을 떠난다. 이젠 패러글라이딩의 명소 페티예(Fethiye)로 간다. 버스는 해변과 산길을 교대로 지난다. 자리 잡은 나무는 달라도 산세는 우리나라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정겹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진다. 바다 쪽을 바라보는 집집마다 빨간 꽃들이 담장을 덮었다. 덩굴장미는 아닌데,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작쿰(Zakkum)이라는 꽃이란다. 이 나라, 아니 지중해 쪽에서만 자라는 꽃인 것 같다. 달리던 버스가 어느 한적한 동네에 선다. 다큐팀이 터키 전통가옥을 찍고 갈 계획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던 한적한 마을에 웬 거대한 휴양지가? 산길에서 느닷없이 큰 짐승을 만난 듯 놀랍기까지 하다. 보드롬과는 바로 이웃인데도 풍경이 많이 다르다. 비치엔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치라봐야 모래사장은 거의 없고 나무로 덱(deck)을 만들어 파라솔 등을 세워 놓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모래사장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그런데도 바늘 꽂을 틈 하나 없다.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노인들이다. 굉장히 많다. 아마 한 여름에는 젊은이들이 즐기고 휴가철이 끝나면 노인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9월말인데도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해수욕장에는 노인들이 많았다.

해수욕장 옆 '작쿰'이 환하게 핀 집

뭔가 보드롬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었구나. 비틀거리는 유럽 경제가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지만 아직은 먹고 살만 한 모양이구나. 그러니 노인들까지 이렇게 해변으로 올 여유가 있겠지. 우리나라의 노인들이 생각난다. 평생 뼈가 휘도록 일하고도 경제력이 상실되는 순간 뒷방늙은이로 전락하는 그들. 더구나 ‘58개띠로 상징되는 베이비부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은 그런 현실을 더욱 비극으로 색칠한다. 지중해의 이름 모를 해변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유럽 노인들을 보노라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진다. 언제쯤이나 우리나라의 해변에서도 허리 구부정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여유와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는 희망은 있는 걸까. 괜히 우울한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걸음이 늦어진다. 다큐팀은 전통가옥을 찾지 못했다고 바로 출발한단다. 이제 정말 보드롬과 안녕이다. 지금 시간 오후 430. 페티예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린다. 오밤중에나 도착하겠군. 한숨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잠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해변길이 너무 아름답다. 마치 꿈속을 달리는 듯.


추천과 댓글, 잊지는 않으셨지요?^^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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