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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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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10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5] 곰소염전10
2012. 12. 10. 08:5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소금 꽃이 필 때까지

 

염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큰길 옆 휴게소 마당에 눈처럼 소금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염전에서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보다는, 소금도 팔고 대처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니까요. 하지만 제 말은 괜한 억지입니다. 염부에게 소금을 만드는 일은 내림굿과 같아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태양도 바람도 염부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이곳은 전남 부안읍 진서면 진서리. 보통은 그냥 곰소라고 부릅니다. 부안읍에서 서남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입니다. 원래 곰소염전으로 이름을 좀 날렸지만 최근에는 지척에 있는 곰소젓갈단지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젓갈을 사러 올 정도니까요. 저는 곰소염전의 석양에 반해서 이곳을 가끔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풀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곰소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설마 산에 사는 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옛 이름이 곰나루(熊津), 곰재니 웅산(熊山)이니 이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으니 한번 넘겨짚어 보는 것입니다. 헌데, 확인을 해보니 그 설마가 맞는답니다. 지금은 육지인 곰소가 옛날에는 세 개의 섬이었다고 하네요. 그중 한 곳에 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섬에 곰이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청구부터 앞세울 일은 아닙니다. 전설은 현실보다 더 너른 품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섬이 육지가 됐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전설이 아닌 역사의 영역입니다. 이곳 역시 일제의 수탈기지였다고 합니다. 농산물을 반출하는 항구로 쓰기 위해 진서면 연동마을과 곰소, 작도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도로를 만들었답니다. 그 와중에 곰은 어디론가 떠났겠지요.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입니다. 날씨조차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제 준비성 탓이지요. 우선 하늘이 저를 반기지 않습니다. 구름이 저렇게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수밖에요.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고 철도 어긋나 있습니다. 염전이라고 사시사철 소금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보통 4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말까지 바닷물을 졸이는데 지금은 이미 10월입니다. 하지만 곰소염전은 아직 소금걷이를 끝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 햇볕도 잘만 거둬 쓰면 소금가마나 만들어내니까요. 그 증거로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보입니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기다려볼 심산입니다. 원래 염전은 기다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길길이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오겠지요.

 

바닷물을 가둬두면 소금이 생기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복잡한 절차와 숱한 땀이 필요합니다.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두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저장지의 바닷물은 곧 증발지로 갑니다.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졸여진 소금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집니다. 갈수록 수분이 증발하면서 염도가 높아지지요.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합니다. 볕이 좋은 날 새벽에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하루 종일 졸이고 졸여져 저녁 무렵이 되면 하얗게 엉기기 시작합니다. 이걸 일러 소금 꽃이 핀다고 하지요.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닙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입니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입니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그래서 6각형의 작은 결정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탄을 아낄 수 없습니다. 소금은 계절, 햇볕, 바람은 물론 만들어지는 시간에 따라 굵기와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북서풍이 부는 날 엉긴 소금은 입자가 단단하고 굵으며 동풍이 부는 날 거둔 소금은 밀가루처럼 곱습니다. 조건에 따라 맛이 쓴 소금도 있고 짜기만한 소금이 있는가 하면 짜면서 향기로운 소금도 나옵니다. 좋은 소금을 만들려는 염부의 일상은 고단합니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땀은 소금만치나 짭니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탑니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해도 바닷물을 열 말 가두면 한 되의 소금밖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한여름 햇볕이 좋을 때는 사나흘 만에 거두기도 하지만 봄가을은 보통 열흘에서 스무 날까지 걸립니다.

 

엉기기 시작한 소금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발췌)

 

강화도에 삶터를 튼 시인 함민복은 소금 한 되를 300원짜리 싸구려 인세에 비했지만, 시도 소금도 눈물 겹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소금 속에 담겨 있는 열 말의 바닷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했으면 하얀() ()이라고 불렀을까요. 고대 중국이나 로마에서는 국가 전매품으로 아무나 거래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소금 전쟁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지요. 제 할머니 역시 소금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렵게 소금 한 포대를 들여놓으면 토방 기둥에 기대놓고 간수를 받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쓴맛 나는 간수를 빼야 소금이 제 맛을 내거든요. 물론 그렇게 받아놓은 간수도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긴요하게 쓰였습니다. 요즘은 무기약품의 중요한 자원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오가는 길에 소금포대를 한 번씩 쓰다듬었습니다. 사랑만 주면 소금포대가 쑥쑥 자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많던 염전도 보기 어려워진지 오랩니다. 소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곰소염전도 새우양식장으로 둔갑하고 80ha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싼값으로 무장한 중국산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양길의 염전들, 오래 묵은 존재 특유의 진득함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요.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해본 적 없는 그 진득한 존재들이 생명을 보듬어왔다는 사실은, 자주 망각의 늪 빠져 존재를 지웁니다. 그게 안타까워 저는 저무는 염전에 오랫동안 시선을 담가두고 있습니다.

 

 

염부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달콤하고도 쌉쌀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염전에 비친 구름과 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 전부입니다. 누군가 제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요?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저로서야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반가운 일이지요.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합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밉니다. 고대하던 곰소염전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수돗물을 그냥 틀어놓은 듯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분주해집니다. 얼마나 별렀던 풍경인데요. 부리나케 둑으로 올라가 셔터를 누릅니다. 산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키를 부풀립니다. 먼 산들은 자꾸 흔적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어느 순간 주변 공기가 팽팽해지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빈 하늘에 대고 마지막 셔터를 누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습니다.

 

작고 허름한 식당을 골라 들어갑니다. 오래 떠돈 자들은 호화로운 음식점을 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집에서 의외로 입에 맞는 음식을 만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 동네는 젓갈백반이 유명합니다. 1인분이라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야 없지요. 손님은 저 하나뿐입니다. 젊은 여자와 허리 굽은 안노인이 단 하나의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고부간일까, 모녀간일까? 심심한 저는 괜한 걸 점쳐봅니다. 저만치 서서 밥 먹는 걸 지켜보던 노인이 다가오더니 젓갈을 고루고루 더 얹어놓습니다. 젊은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노인의 마음이 음식의 맛을 더합니다. 이런 경우도 악순환이라고 하나요? 즐거운 악순환이겠지요. 먹으면 또 채우고, 준 사람 실망할까봐 또 열심히 먹고. 입안이 짜고 매운 기운으로 얼얼할 지경입니다. 노인과 나그네의 은밀한 거래는 젊은 여자의 등장으로 끝나고 맙니다. 주방에서 나오던 여자의 눈동자가 고등어 뱃바닥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노인은 생선전의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칩니다. 아마 초범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혼자 오는 손님만 보면 저러신다니까.” 젊은 여자가 입속에서 웅얼거립니다.

 

그녀 역시 야박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혼자 먹는 밥상에 짜디짠 젓갈을 자꾸 얹으면 결국 남지 않겠느냐는 걱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인들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자식 같은 사람은 자식이나 진배없고, 그 입에 밥이 들어가면 흐뭇한 것이지요. 옛날 제 할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괜히 무람해진 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혼자 서 있던 가로등이 씨익 웃습니다. 밤은 까만색으로 자꾸 무게를 더합니다. 숙소로 가는 길, 바람은 차갑지만 마음은 포근합니다. 새 울음소리가 제법 깊어졌습니다. 숙소의 창문을 조금 열어놓습니다. 희미하게 비껴드는 달빛을 당겨 덮고 모처럼 꽃잠에 빠져듭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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