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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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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광대'에 해당되는 글 1

  1. 2007.06.06 [사라져가는 것들 11] 줄타기
2007. 6. 6. 17:19 사라져가는 것들

줄 위의 재담에 웃고 울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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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텅 비었기 때문에 더욱 가득 차 보인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높다랗게 물러선 하늘은 돌이라도 던지면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다. 추수가 끝나면서 한숨 돌리나 싶었던 장부자네 너른 마당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새통이다. 장부자가 손녀딸 순심이보다 더 아끼고 좋아한다는 놀이마당이 벌어지는 날이다. 그 중에서도 줄타기는 행사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줄타기는 준비하는 과정부터 지켜볼 만 하다. 우선 나무 네 개를 두개씩 X자로 묶는다. 이를 작수목이라 한다. 작수목의 머리를 안으로 향하게 다리를 벌려 뉘어놓고 마당 양쪽에 박아놓은 말뚝에 줄을 맨다. 그런 다음 작수목을 세워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한다. 줄은 질긴 삼(麻)을 삶아 말려 세 가닥으로 꼰 굵은 동아줄이 쓰인다.

아침부터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앉은 아이들은 꼼짝 않고 준비하는 과정을 구경한다. 고추잠자리가 손에 잡힐 듯 마당 위를 유영하건만 어느 녀석 하나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작업이 다 끝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거린다. 이제부터 신나는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놀이패를 불러 흥겹게 한마당을 노는 것이 장부자의 연례행사다.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드나들 수 없을 만큼 큰 지주인 장부자가 소작인들이나 동네사람을 위해 베푸는 선심이었다.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장부자가 부른 단골 놀이패가 마을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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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는 시골에서는 보기 쉽지않은 구경거리라, 자리보전하고 있는 노인들까지 지팡이를 들고나선다. 어찌 동네사람 뿐이랴. 장부자네 줄타기는 소문이 제법 나서 근동 몇 개 동리의 사람들까지 몰려든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은 몰려든 사람들로 저잣거리처럼 북적거린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로 준비가 끝나면 고사를 지낸다. 다음으로 장구·해금·피리 등을 부는 악사(삼현육각잡이)들이 줄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연주를 하고 줄광대가 음악에 맞춰 줄에 오른다. 한 손에 쥘부채를 쥔 줄광대는 작수목에 오르자마자 쉬이~ 하는 소리로 연주를 중단시키고 관중을 둘러본 뒤 재담을 시작한다. 줄 아래에 있는 어릿광대가 추임새를 넣고 재담을 받으면서 마당에는 서서히 열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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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장생  :  휴~ 저기서 보기엔 얼마 안 되는 거 같아 마음 푹 놓고 왔다 죽을 똥 쌀 뻔했네.
내 이번엔 네년이 남의 집 서방하고 붙어먹다 들켜 허겁지겁 도망가는 걸음을 뵈줄테니 한번 볼테냐?
하고는 아낙네들 치맛자락을 잡듯 도포자락을 잡고 잰걸음으로 쪼르르 달려 맞은편 끝에 가 선다.
공길 :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똑 떨어져 뒤질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장생 : 내 이제 신나게 한판 놀아 볼 것인데, 이 모습을 보면 처녀 할미 할 것 없이 정신이 팔려 사내가 아랫도리를 훔쳐도 모르니 네년도 아랫도리 단속 단단히 하고 보거라.
공길 얼른 아래춤을 손으로 가린다.
구경꾼들 웃는다.
장생 성큼성큼 줄 위를 걸어 가운데로 와 허궁제비(줄을 튕겨 다리사이로 앉았다 오르기)를 한다.
공길 : 아이고 이놈아, 니 다리사이 두 동네가 한 동네 되것다. 
장생 : (멈추더니) 아이고, 이년아. 두 동네고 한 동네고 간에 똥꼬가 저릿저릿한 것이 오줌이 마려워 못 놀것다. 내 오줌이나 한번 싸고 계속 놀련다.(바지춤을 풀고 내릴 시늉한다) (후략)
[영화 '왕의 남자' 도입부 대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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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광대가 줄 위에서 하는 동작은 다양하다. 걷는 것은 기본이며 뒤로 걸어가기, 한 발로 뛰기, 걸터앉고 드러눕기…. 때로는 재주를 넘고 떨어지는 척 해서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또 중타령, 새타령, 왈자타령 등 갖가지 노래를 곁들이거나 파계승이나 타락한 양반을 풍자한 이야기를 풀어내어 관객을 웃긴다. 또 바보짓이나 화장하는 모습들을 흉내내기도 한다. 놀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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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구경꾼들은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한다. 오줌보가 탱탱해져도 발을 동동 굴러가면서 자리를 지킨다. 줄광대의 재담에 배꼽을 잡기도 하고, 떨어지는 흉내라도 내면 가슴을 쓸어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줄타기 마당은 자지러지는 웃음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이 어우러지며 고비를 넘는다.

줄타기는 원래 서역(西域 중국의 서쪽, 현재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수·당 시대에 성행하였고, 한반도에는 신라 때 전래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당이라는 떠돌이 예능인이 혼인·생일·환갑잔치 등에 불려가 줄타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특별한 행사 때 공연되거나 보존단체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긴 지금은 줄타기가 어울리는 시대는 아닐 것이다. 볼거리가 넘쳐나니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 힘든 수련과정을 견딜만한 지원자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이긴 했지만, 2005년 말에 개봉된 영화 '왕의 남자'가 히트한 것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세월을 따라 줄타기가 무대 뒷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줄 위에서 흘렸던 광대들의 땀과 눈물이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으랴.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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