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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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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6.04 [길따라 바람따라 3] 죽령옛길16
2012. 6. 4. 08:41 길따라 바람따라

희망천 굴다리에서 바라본 '오월'

5월 초순의 새벽길. 세상은 오월이라는 단어가 간직한 이미지만큼 푸르게 채색돼 있다. 죽령옛길을 걷기 위해 소백산으로 가는 중이다. 워낙 일찍 나선 터라 고속도로는 한산한 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 그리고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내 낡은 차는 콧노래라도 나올 듯 신이 났다. 단양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와 2차선으로 접어든다. 충북 단양에서 경북 영주, 정확하게 풍기로 넘어가는 길 주변은 금방 머리를 감고 나온 새댁만큼이나 싱그럽다. 소백산 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달리는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해놨다. 죽령 고개를 넘고 희방사 올라가는 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가 소백산역 쪽으로 우회전한다. 과수원 길을 끼고 조금 더 들어가니 바로 소백산역. 그 옆으로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가 반긴다. 차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세워두고(이 녀석 오늘 호강이다) 행장을 둘러멘다.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은 무척 안온해 보인다. 산촌이 흔히 갖기 쉬운 궁색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다.

 

죽령옛길 표지석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도 들었단다.

소백산역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소백산역은 내려오다 둘러보기로 하고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 쪽으로 내려가 걷기 시작한다. 마을과 소백산역 사이에 난 길이다. 조금 지나니 굴다리가 나온다. 길은 다리 아래로 이어져 있다. 한쪽으로는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르고 한쪽에는 사람 다니는 길을 냈다. 물과 사람이 함께 흐르는 셈이다. 내 이름이 희망천이란다. 다리 안쪽, 어둑한 곳에서 바라본 신록의 세상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다리를 빠져 나가니 조그만 공원이 나오고 세워놓은 돌에는 무쇠다리 옛터라고 새겨져 있다. ? 코스 안내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게 웬 떡이냐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길을 기록하는 자에겐 어디든 사연이 담긴 곳은 반가운 법이다. 높다란 느티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한쪽에는 작은 다리형상을 만들어놓았다. 이 정도면 무언가 이야기가 묻혀 있다는 뜻이다. 무쇠다리라, 무쇠다리. 마징가Z의 다리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하여튼  낯선 이름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에 익히 들어온 전설이 적혀있다.

 

신라 선덕왕 12년 서라벌의 호장 유석이 호랑이에게 잃은 딸을 구해준 희방골 스님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자 희방사를 창건하고 나서 절로 통하는 앞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은 사실이 희방사지에 전해지고 있다. 무쇠다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듯 근래까지 뚝다리로 있어오다가 중앙선 철도가 나면서 그나마 없어져 버렸다.(이하 줄임)’

 

무쇠다리 모형

나와 놀던 사과꽃. 잘 보면 벌도 있다.

무쇠다리 안내석

아하, 그 전설이 태어난 땅이 이곳이로구나. 희방골에 은거하던 두운조사란 분이 어느 날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만났는데 잘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걸렸더라지. 사람을 삼켰으니 고연 놈이긴 하지만 그 또한 생명이니 어쩌겠나. 비녀를 빼줬더니 은혜를 갚는다고 양가집 규수를 산채로 덥석 물고 왔더라네. 그래봐야 도 닦는 스님에게는 그림의 떡인 걸, 이 머리 나쁜 짐승이 알 턱이 있나. 아무튼 그 규수가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 독녀였고 고이 집에 데려다 주었더니 호장이란 양반이 보답으로 절을 지어줬다는. 나는 지금 그 전설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무쇠다리 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출발하려니 좀 막막하다. 어느 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없다. 저만치 간이다리가 하나 있고 과수원길이 보이길래 무조건 그쪽으로 길을 잡는다. 사과 꽃이 한창이다. 사과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골길에 만난 여인처럼 검박(儉朴)한 맛이 있다. ,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호박벌을 사진 찍어준다는 핑계로 불러내 한참 놀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드디어 큰 길이? 아니, 길은 거기서 끝났다. 애당초 잘 못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소백산역을 지나쳐 곧장 올라가던 게 생각난다. 그게 바로 죽령옛길로 향하는 길었구나. 왜 나는 그런 깨달음이 늦게 와서 늘 헤매고 다니는 걸까. 길 걷는 게 평생의 업이라는 자가 이렇게 둔해서야. 호를 도맹(道盲)’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자주 든다.

 

아름다운 곤충과도 놀았다. 이름을 아시는 분?

소백산역. 원래 이름은 희방사역이었다.

지도를 못 구해서 대신 사진으로

 

길을 되짚어 가다보니 그제야 소백산자락길-2자락이라는 자그마한 안내판이 보인다. 아무튼 중요한 건 늦게 찾는 게 내 특기다. 초등학교 때도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면 가장 못 찾는 아이가 나였다. 문제는 보물찾기 시간이 끝나고 도시락을 먹으러 갈 때면 쪽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더 행복했던 적도 많았다. 이번에도 길눈 어두운 덕분에 전설의 현장을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죽령옛길을 걷고 싶은 이들이여!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출발 전에 무쇠다리를 꼭 다녀오시길. 아 참, 말이 나왔으니 소백산자락길 이야기를 하고 가자. 죽령옛길은 18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독립된 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조성된 소백산 자락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자락길은 소백산둘레에 있는 3개 도 4개 시군(영주시, 단양군, 영월군, 봉화군) 170km를 잇는 길로 모두 12자락으로 돼 있다. 달밭길, 보부상길, 과수원길, 서낭당길정겨운 이름들이 많다. 이 자락길의 지도를 보면 마치 고깔모자에 둘러놓은 띠처럼 보인다. 물론 고깔모자는 소백산이다. 총 열두 자락 중 세 번 째 자락이 바로 오늘 걸어갈 죽령옛길이다.

 

 

이런 안내표지를 잘 봐야한다.

작은 폭포

길은 자꾸 산으로 꼬리를 감춘다.

누워 있는 장승, 근무 중에 뭐하는 겁니까?

원점으로 돌아와 소백산역에서 다시 출발한다. 역 앞마당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참동안 철도와 나란히 달린다. 그리고 머리 위를 지나는 거대한 고가도로. 저게 바로 중앙고속도로겠지. 다닐 땐 편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멘트 구조물은 괴물이라도 되는 듯 이질감이 든다. 길은 금세 숲속으로 몸을 누인다. 느린 걸음으로 올라가다보니 조그만 폭포도 보이고 장승들도 만난다. 장승 중 한 분은 피곤했던지 아예 누워서 이리 저리 뒹굴 거린다. 이왕 만들어놓은 길, 관리 좀 잘하시지. 그래도 산길에 들어서니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거기까지 차를 끌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람이 다닐 좁은 길을 차들이 달리니 피하는 것도 곤욕스럽다. 먼지는 또 어떻고. 조금 올라가니 세상이 느닷없이 환해진다. 갑자기 나타난 사과과수원 덕분이다. 우와! 이 산속에 이렇게 넓은 과수원이. 나무들은 하나같이 작고 하얀 등을 내어걸었다. 밤이라면 더욱 예뻤을 텐데. 흥에 겨워 과수원 길을 걷는다. 사과나무는 물론이고 길 옆에 싶어놓은 호두나무 자두나무 산수유나무. 꽃이 피었건 졌건 하나하나가 조화고 아름다움이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담가본다.

 

산속에서 느닷없이 만난 사과과수원

나무 아래는 민들레 영토다.

과수원에는 이런 연못도 있다.

사과나무 아래는 민들레의 영토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민들레보다 더 많은 민들레를 한꺼번에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건 노란 민들레와 하얀 민들레가 어울려 피어있다는 것이다. 노란 꽃의 민들레는 외래종, 하얀 꽃은 토종으로 함께 어울리지 않는 걸로 아는데. 산속에서 만나는 공존과 평화의 현장이다. 결국 또 그들과 어울려 한참 놀아버리고 말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더냐, 예가 바로. 가만, 복숭아꽃이 지천인 곳이 무릉도원이니 사과꽃이 지천인 여기는 무릉사()일까? 떼기 싫은 걸음을 옮겨 깊은 숲으로 꼬리를 감춘 길을 찾아 나선다. 신록의 계절은 황홀하다. 특히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면 온갖 생명의 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조금 올라가니 조그만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서 쌓은 것일 게다. 아니면 나그네가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하나 둘 던진 게 쌓였을지도.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호환(虎患)을 피하게 해달라고 도적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댈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게다.

 

자! 다시 걸어보자.

이게...으음, 으름나무 꽃이던가?

중간 중간 역사와 전설을 적어놓은 안내판들이 있다.

이왕 옛날얘기가 나온 김에 이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고 가보자. 지금은 소로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곳곳에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 길이었다.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이 길이 열린 건 신라 때였다. 죽령 일대는 신라고구려백제가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벌이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 마디로 죄 없는 3국의 병사들이 피를 섞은 역사적 장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158)에 춘사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때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왜 대나무()가 하나도 없는데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대나무와는 무관하게 죽죽이라는 이가 길을 열었다고 해서 죽령이 된 것이다. 큰일을 한 사람이니 죽죽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가자.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신라의 죽죽이 왕명을 받아 죽령 길을 만들고 기력이 다해 숨졌으며,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력이 다해 죽을 때까지 혼신을 다한 1854년 전의 한 인물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그를 위해 세웠다는 사당은 지금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길 옆의 돌무더기가 품은 뜻은?

나뭇잎과도 놀았다.

이 길을 지날 땐 황홀했다.

이 길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그 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물론 온갖 장사꾼들이 넘나들었다. 재미있는 건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해서 과거를 보러가는 이들은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문경 새재(조령)를 넘었겠지. 아무튼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길손들을 위한 주막과 마방이 들어서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얼마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산적까지 횡행해서, 그들을 소탕하는데 일조했다는 다자구할머니 전설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떠나던 마의태자가 걷던 길이고 풍기 군수 주세붕이 낙향하던 선배 이현보와 회포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길도 계속 각광만 받은 건 아니었다. 무엇이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더니 1960년대에는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국내 최장터널인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숲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까맣게 지워졌다. 그러다가 근래 들어 시작된 걷기 열풍으로 다시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낙엽송길

바람과 머리 풀어헤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중간중간에 있는 쉼터

공부는 이쯤 하고, 다시 길을 잡아보자. 길 주변에는 다래넝쿨이나 온갖 잡목이 얽히고설켜 마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안내판을 세워 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들을 자세히 적어 놨다. 왕건도 나오고 다자구할머니도 나오고 주세붕도 나온다. 또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놓았다. 길을 걷는 재미중 하나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만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길을 꾸민 이들은 꽤 사려가 깊어 보인다. 새로운 길을 여는 단체나 자치단체들이 참고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쉼터를 마련해놓아서 아이들과 힘께 걷기에도 좋도록 해놓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느닷없이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활엽수 숲을 걷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침엽수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아마 인공조림으로 생긴 숲일 것이다. 길은 걷기에 숨차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옹달샘

생명

길옆에서 조그만 옹달샘을 발견한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서 물을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에 쌓아놓은 돌들은 무너지지 않고 샘을 지키고 있다. 잘만 손질하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감로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에는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을까. 샘을 지나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청춘남녀가 내 앞을 지나다가 그 중 남자가 주뼛거리며 다가온다.

저기, 물을 좀 얻을 수 없을까요? 제 친구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럼요. 그런데마시던 건데 괜찮아요?”

, 괜찮습니다.”

남자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여자는 내가 건네준 물을 달게 마신다. 자신의 여자를 위해 낯선 사내에게 물을 얻으러 온, 용기 있는 젊은이에게 한마디 한다.

이런 산속에서는 흘러가는 냇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문제없어요. 그리고 저쪽에 가면 옹달샘도 있고

청년이 조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는다. 물이 아깝다거나 냇물을 꼭 마시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 어릴 적엔 밤을 따러 갔다가 땔감을 모으다가 아무 물이나 마셔도 별 탈 없었다. 하긴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만 생명을 지켜준다고 믿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흐르는 물이나 옹달샘 물을 마시라면 독을 마시라는 말로 알아듣겠지. 남녀는 목례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숲이 된다.

 

드디어 죽령루가 보이고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

죽령주막

낙엽송들이 뜸해질 무렵부터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죽령마루에 거의 다다랐다는 신호다. 숨이 턱에 찰 무렵 저만치 우뚝 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도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죽령루(竹嶺樓). 보수공사를 시작하려는 것인지 파이프로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헐떡거리며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거친 숨을 가라앉힌 뒤 시간을 본다. 안내에는 총 2.5km40분 혹은 50분이 걸린다고 돼 있었지만 이것저것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하긴 길을 걷는데 시간이 무슨 문제가 되랴. 둘러보니 아까 차를 타고 지나간 길이다. 저만치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영주와 단양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이 매달려 있다. 내친 김에 여기서 단양 쪽으로 내려가서 보국사지, 죽령분교, 용부사를 거쳐 죽령터널 입구까지 걷는 사람들도 많다. 하긴, 그 정도 걸어야 트레킹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아쉽지만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한다. 죽령루에 올라가 풍기 쪽을 굽어보기도 하고 죽령주막의 장독대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젠 다시 내려가야 한다. 출발지까지 가면 5km 남짓 걷는 셈이다.

 

소백산 산신령님이 감춰둔 비밀의 화원

주막터. 무너져가는 담장만 쓸쓸하다.

담장 위로 자꾸 기어오르는 손들.

내려가는 길에 올라 올 때 보지 못했던 주막 터를 발견한다. 고백하건대 남몰래 소변을 보려고 올라갔다가 우연히 안내판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노상방뇨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고개 정상에서 본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이곳은 좀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담장이 남아있고 구들장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구멍도 있다. 하지만 , 여기 탁배기 한 잔 하고 국밥 한 그릇 말아 달라니까.” “, 조금만 기다려요. 애를 배기도 전에 내 놓으래.” 떠들썩하던 광경은 아련한 옛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고요 속에 잠겼다. 넝쿨들이 담장으로 자꾸 손을 뻗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까지 오를 수 없음을 그들은 알까. 비껴드는 햇살이 쓸쓸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내려오는 내내 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가득 찬 느낌이다. 나는 1800년의 시간 속을 다녀온 것이다.

내려오다 만난 집. 이번엔 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꼬리) 소백산을 끼고 있는 경상북도 영주는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를 지닌 곳입니다. 죽령옛길 가까운 곳에 희방사가 있고 또 천년고찰 부석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등은 꼭 가봐야 할 문화유산입니다. 소수서원 옆의 선비촌은 다양한 전통생활공간을 재현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가볼만 합니다. ‘잊혀진 고장순흥은 한 때 영주 풍기를 아우르던 큰 고을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 복위운동으로 고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수면 쪽으로 가면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모래강, 내성천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류에 댐을 쌓는 바람에 지금은 망가진 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영주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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