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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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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9. 08:55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첫 주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계절적 차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내원마을에 서다

 

들판을 달려온 길은 산의 늑골 사이로 고단한 몸을 뉩니다. 여름과 가을을 양손에 쥐고 있는 산은 여전히 푸르고 헌헌(軒軒)합니다. 천천히 걷다보니 조금 불편했던 마음은 다림질을 한 듯 활짝 펴집니다. 대전사(大典寺)에는 눈길 한번 흘끗 주고 내처 지나온 참입니다. 이 절집 역시 새 건물을 세우느라 진흙구덩이에 구른 강아지 꼴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 땅의 절들은 언제부터 새집 짓기 경연대회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좀 있다는 산마다 망치소리로 몸살을 앓습니다. 저를 정녕 불편하게 하는 것은, 대개 부처를 위한 집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모퉁이를 하나 도니 속세는 저만치 아득하고 길은 흔연하게 펼쳐집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래킹이나 산책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편안한 걸음입니다. 이런 길은 중턱까지 이어집니다.

 

급수대

당신은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 저는 청송 주왕산(周王山)을 오르는 중입니다. 주왕산은 단풍이 무척 고운 산이지요. 아직은 일러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게 서 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대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취해버린 미당(未堂), 그 경지를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저는 터벅터벅 걸음을 뗄 뿐입니다. 사실은 일부러 조금 빠른 계절을 택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단풍철에는 말 그대로 나무 반(), 사람 반이기입니다. 단풍이 없다고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내려 보는 이가 있으면 그야말로 헛눈을 가졌음을 한탄해야 합니다. 맨 먼저 시선을 잡는 건 급수대라고 이름 붙인 거대한 바위입니다. 721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왕산은 어느 산 못 않게 자랑거리가 많은 산입니다. 특히 전설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마다 동굴마다 얽혀있는 전설이 얼마나 자주 발걸음을 잡는지요. 물론 급수대에도 전설은 있습니다. 신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린 김주원(金周元)이란 왕족이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해서 대궐을 세운 게 바로 저 거대한 바위 위였던 모양입니다. 게서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썼다고 해서 급수대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입니다. 바위 위의 성이라. 그림은 그럴 듯한데 현실감은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전설이겠지요.

 

자하성. 내 눈엔 그냥 너덜겅이다.

길가의 꽃에도 마음을 얹어보고 주방천 맑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도 놀다 보니 걸음은 자꾸 더뎌집니다. 주왕이 쌓았다는 자하성(紫霞城)이 또 옷깃을 당깁니다. 자하성. 이름이 제법 멋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올려보고 둘러봐도 제 눈에는 한때 30 리나 됐다는 성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깨진 바위가 흘러내리는 돌내(石川), 즉 너덜겅에 성이라는 이름만 붙인 것만 같습니다. 제가 또 이렇습니다. 전설은 그저 전설이라고 해놓고 따지려 드는 건 뭔지. 주왕이 대체 누구길래 이 명산의 주인이 됐는지 궁금할 법도 합니다.

 

시루봉. 내 눈엔 심술 궂은 할매바위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일패도지(一敗塗地), 요동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그가 바로 주왕(周王)입니다. 쫓기던 주왕은 멀리 신라 땅 석병산(石屛山, 지금의 주왕산)으로 피신합니다. 중국에 모래알처럼 많은 게 산인데 예까지 온 게 신기합니다. 그는 협곡에 자하성이란 성을 쌓고 재기를 노립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신라에 그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나당연합에서 을()의 입장에 있던 신라는 마일성 장군이 이끄는 진압군을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킵니다.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게 되지요. 한 때 중원대륙의 주인을 꿈꿨던 그의 최후는 좀 허무합니다. 굴 입구로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다음 해 붉은 꽃을 피웠다는 데 바로 주왕산에만 핀다는 수달래입니다.

 

 

 

제1폭포 아래의 소.

전설을 머금은 풍경은 계속 이어집니다. 백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구경을 하였다는 망월대, 멀리 동해가 보인다는 왕거암. 떡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란 이름을 얻은 바위는 아무리 봐도 심술궂은 할멈처럼 생겼습니다. 거대한 바위들은 전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장군도 되고 임금도 되어 천하를 호령합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그들의 얼굴과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지금은 위안의 시간, 산속 세상은 부모 죽인 원수라도 끌어않을 듯 평화롭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제가 가진 언어의 한계에 절망합니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수사 따위는 눈에 차지 않는 듯, 형용이 닿지 않는 저만치에 서 있습니다. 아픈 아이 죽 떠먹이듯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주왕산에서는 그렇게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웃어주고 새가 말을 걷고 흐르는 물이 노래를 하는 것을 듣볼 수 있습니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청량한 기운이 가슴 가득 찰랑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3폭포 아래의 소.

주왕산 구경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폭포입니다. 세 개의 폭포는 저마다 개성을 자랑합니다. 어느 것은 우르르 쾅쾅, 바위의 견고함을 실험하고 어느 것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립니다. 사람들은 그 황홀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걸음을 빼앗깁니다. 3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느닷없이 한가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저만의 길입니다. 주 등산로가 아닌 덕분에 고적한 길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이 깨질까봐 모르는 체 하고 걷습니다. 원래는 마차까지 다니던 길이었다는데 사람이 떠나고 산짐승들이나 가끔 오가다보니 길의 영역은 갈수록 좁아집니다. 노래도 부르고 주저앉아 땀도 들이면서 30분쯤 걷고 나면 눈에 익숙한 느티나무가 나타납니다. 느티나무. 어쩐지 깊은 산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 어귀에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서서 한 여름 너른 그늘을 드리워주는 게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돌무더기가 제법 봉긋하게 쌓여있습니다. 오가며 돌을 던졌거나 일부러 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 정도면 당산나무의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당신을 더 이상 궁금하게 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아니 사람이 살던 마을의 들머리이고, 오늘 제 산행의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숲길을 지나.내원마을. 10~20년 전만 해도 전기 없는 마을로 곧잘 잡지 같은 곳에 오르내리던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줄 이 없는, 그저 흔한 산자락에 불과합니다. 좁은 길을 지나 모롱이 하나 꺾어들면 어? 이런 곳이? 할 만큼 꽤 넓은 개활지가 펼쳐집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호리병 속에 들어앉은 듯 안온한 기운이 전신을 감쌉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다른 주인이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마을 입구의 서낭당 자리.

내원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입니다. 몇몇 가족이 임진왜란 때 피난삼아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고 하지요. 많을 때는 70가구 500여명까지 모여 살았습니다. 마을에 양조장과 학교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벼농사·담배농사·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를 팔 수 없게 됐고,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결국 2006년에 6가구 20여 명이 마을을 떠났고 2007년에는 마지막 3가구가 떠났습니다. 마을이 철거된 결정적 이유는 수질보호입니다. , ‘국립공원 한가운데서 관광객을 상대로 무허가 음식점과 민박업을 하는 바람에 주방천의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들어낸 것입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음식점들이 아직도 성업 중인 게 신기합니다.

 

마을은 간데없고 목책만.

200711월 처음 내원마을을 찾아갔을 때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원마을은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었을 곳이 자꾸 지워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집터나 논밭이었던 곳에는 늦가을 억새들만 어깨를 비비며 서걱서걱 울고 있었다. 골짜기이긴 하지만, 포근하게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은 인간이 깃들여 살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민, 내원산방의 이상해씨(44)는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뒤를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 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차나 음식도 못 팔게 하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단풍철이 지나면 이 집도 철거한답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은 막막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황금빛으로 농익은 햇살이 내원분교의 교실 안팎을 덧칠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한 칸짜리 교실로 들어가니 풍금 두 대와 낡은 난로, 손바닥만 한 책걸상 몇 개와 칠판 같은 것들이, 아이들 대신 지난 세월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폭포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276P

 

2007 내원마을 모습. 내원분교와 내원산방이 보인다.

2012년. 마을은 숲이 되었다.

제가 다녀온 다음 달인 200712월 내원분교와 내원산방도 헐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811월에 찾아갔을 때 내원마을은 완전히 낯선 곳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선이 제대로 가 닿기도 전에 신음부터 터진다. 이럴 수가……! 아무 것도 없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찻집 내원산방이 있던 자리, 흰 개가 해바라기를 하던 곳에는 억새들이 무성하게 키를 재고 있다. 새로 둘러친 목책만이 이곳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걸 강변하고 있다. ‘환경저해시설 철거 안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때 수백 명이 깃들어 살던 동네라는 게 상상조차 안 될 것 같다.

                                      <월간 에세이 20101월호(통권 273)> 66~67P

 

억새 사이로 오솔길은 남고.

지금은 201210. 4년 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젠 뭐라고 쓸지 제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사실은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라지고 숲이 돌아온 것이 아득한 날의 전설처럼 멀어 보입니다. 마을도 집도 살던 이들도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듭니다.

 

이제 어둠이 밀려온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그리고 내원산방과 흰 개가 있던 자리, 아니 있었다고 짐작 되는 자리에 서서 망연한 눈길을 던집니다. 목책마저 없었다면 여느 산자락과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에게 내줬던 고토(古土)를 초목이 완벽하게 회수한 것입니다. 걸음을 천천히 옮겨 억새의 땅으로 가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나무들이 저렇게 빨리 영토를 넓히는 데도, 한 때 사람의 밭이었던 억새의 영역엔 잡목 하나 얼씬하지 못합니다. 먼저 차지한 게 임자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억새들은 시간을 베고 게으르게 잠들어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은데 나그네의 안달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바람이 돌아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산중에는 흔전만전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나눠쓰던 시간은 나무와 풀과 새와 냇물의 소유가 돼버렸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오고 가는 것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내려오는 길은 컴컴했다.

억새들의 긴 잠에 지쳐 냇물 한가운데 너럭바위에 철퍼덕 몸을 맡깁니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새 주인인 초목의 영토가 마주 보이는 곳입니다. 이젠, 이곳의 절대자가 망각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을 줍고 물고기를 잡던 78(내원분교 졸업생 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든, 마지막 주민들이 몇 푼 쥐어진 보상금을 까먹고 도시의 잉여인간으로 떠돌든 누구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자의 뜻에 기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가을이 깊을수록 햇빛은 떡가루처럼 곱게 부서지고 냇물은 묵()빛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물고기들은 살을 찌우고 계절을 포식한 새들의 울음은 윤택해질 것입니다. 나무들은 잎을 떠나보내고 긴 잠을 청할 것입니다. 순환과 순리 앞에 덧없는 미련과 인연을 내려놓습니다. 초가을이 깊숙이 들어앉은 풍경화 속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저도 어느덧 그 그림 속으로 녹아듭니다. 풍경인 제가 풍경이 된 저를 바라봅니다. 살풀이굿이라도 치른 듯, ‘가 없는 풍경 속에서 가없는 자유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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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2.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가리왕산의 장전계곡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영월에서 열리는 2011 동강국제사진제에 갔던 차에 이끼계곡을 들러볼 참이었지요.
이끼는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꽤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사진을 처음 배우게 되면 산으로 강으로 들로 쏘아 다니거나, 꽃 또는 주변 사람들을 마구 찍다가 조금씩 특정한 곳들을 찾게 되지요.
일출, 일몰, 물안개 그리고 새벽 운해, 황금들판 등이 단골 목표가 됩니다.
파란 이끼가 융단처럼 펼쳐진 산 속 계곡 역시 이 대열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전, 상동, 무건리 등의 이끼계곡과 지리산 실비단폭포 등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해로 이끼가 망가지기도 하고 출입금지 구역도 있기 때문에 마음먹는다고 무조건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저처럼 사라져가는 것같은 특정소재를 찍는 사람들은 그런 곳을 찾아다닐 기회가 흔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있어도,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런 사진을 잘 찍을만한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그날 장전계곡에 도착하기 전에 차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진 찍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발길에 망가진 이끼를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제 발자국 하나를 더 찍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끼계곡을 검색하다보면 아름다운 사진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후기 중에 꼭 빠지지 않는 게 이끼를 망가트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깊은 산속
, 시린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이끼를 찍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선 시간이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지고 난 뒤, 광량(光量)이 적을 때 찍어야 저속 셔터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셔터스피드가 느려야 물의 흐름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햇빛이 드는 낮에는 촬영을 피하는 게 좋지만, 굳이 찍을 수밖에 없다면 ND 혹은 CPL 필터로 광량을 줄여야 합니다.
흔들림을 막기 위한 삼각대와 릴리즈(선으로 연결된 외장 셔터)는 필수장비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조건들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끼를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한 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는 물이 차고, 또 미끄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장화를 신는 게 좋지만 대개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등산화 차림으로 갑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등산화를 신은 채 혹은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는 게 꺼려지니까, 이끼가 깔린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끼는 밟히고 뭉개지고 다음 사람이 또 그 위에 서고.
이끼는 한번 망가지면 복원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흐릅니다.
그 정도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자신이 찍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도록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뭉개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끼계곡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 이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카메라를 들고 떠돌기 시작한 뒤로는 그 믿음이 가끔 흔들리곤 합니다.
노래방이 전 국민을 가수로 만들고 인터넷이 글쟁이를 양산했다면, 디지털카메라는 사진작가’들을 쏟아내놨습니다.
문제는 사진 찍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사진 찍는 예의는 배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는 게 아니라 욕심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가을꽃 중에 꽃무릇이라는 게 있습니다.
석산이라고도 하는데, 9~10월쯤 절 근처의 산기슭이나 평지에 무리지어 자라는 붉디붉은 꽃입니다.
그 계절에 고창 선운사에 가면 도솔천 주변으로 마치 붉은 융단처럼 깔린 꽃무릇의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전국에서 사진가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에겐 들어가지 말라고 쳐 둔 선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꽃이 꺾이든 밟히든 비명을 지르든 아랑곳 안합니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꽃을 꺾어 고목나무에 꽂아놓고, 마치 그곳에서 꽃이 피어난 듯 찍어서 사진 사이트에 올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사기부터 배운 사람이지요.

이런 일들은 이끼계곡이나 도솔천 주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사진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가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입니다.
조선 숙종 때 쌓기 시작해 경종 때 완성한 꽤 오래된 저수지이지요.
영화 ,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또 물속에서 자생하고 있는 왕버들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새벽이면, 붉은 단풍과 물안개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합니다.
여기에도 제멋대로 사진가들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보호 목책을 쳐놓고, 사진 찍는 장소도 별도로 만들어놨지만 몇몇 사람들은 기어이 목책을 넘어가고야 맙니다.
남들이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요.
저수지가 메워지든 왕버들이 죽어가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느 유학자의 장례식에 취재 차 갔을 때는, 운구하다 잠시 멈춘 상여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여성 사진가도 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형성된 포토라인 따위는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찍든 말든, 시야를 가리고 서서 욕심 채우기에 바쁩니다.
제가 사진가들이 몰려다니지 않을 곳만 찾아다니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까요?
한강변에서 열리는 서울불꽃축제를 딱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가자마자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작 몇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은 이미 삼각대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몇 명 없는데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한 두 사람이 수십 개의 삼각대를 세워놓고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더군요.
소위 자리를 맡아놓은 것인데, 사진서클이나 동호회마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다보니 혼자 가거나 구경삼아 간 사람들은 아예 뒷전으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억울하면 하루 전에 오면 되지라고 말하겠지만, 제 눈에는 자신들만 아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조금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사람의 가장 큰 미덕이야말로 염치를 알고 예의를 지킨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바로인간이요하고 내세울 수 있는 이름표가 그것입니다.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끼를 일부러 밟아 뭉그러트리고, 꽃무릇을 꺾어 고목에 꽂고, 남의 장례식에 상여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행위야말로 짐승과 구별하기 어려운 짓입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거실에 떡 하니 걸어놓으면 자식들 앞에 두고두고 자랑스러울까요.
어찌 사진가들뿐이겠습니까만.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심약한 제가 지레 겁먹고 장전계곡행을 포기하는 순간 든 생각들입니다.

 

 

사진들은 이끼계곡이 아닌, 깊은 산속의 평범한 계곡입니다.
이끼계곡만큼은 아니겠지만, 제게는 훼손되지 않은 이 곳이 지상 최고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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